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쉿, 마음이 자라고 있어 ㅣ 큰곰자리 63
무라나카 리에 지음, 이시카와 에리코 그림, 윤수정 옮김 / 책읽는곰 / 2022년 4월
평점 :
처음 접하는 이 일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런 느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느낌이라는 게 찾는다고 어디에 딱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우연히 고른 이 책이 너무 반갑고 작은 행운을 받은 기분이었다. 작은 행운. 조금 다른 어감이지만 작은 행복도 좋겠다.
그 행복에 색을 칠하라면 초록색으로 칠하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지만, 실제 나의 삶은 회색에 머물러있다. 초록이 삶으로 들어오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지. 나는 몸을 잘 쓸 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이 초록이긴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뭔가 그립고도 흐뭇한 마음이 되곤 한다.
이 책의 매력 포인트는 또 있다. 두 친구의 편지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점이다. 편지가 구구절절 길거나 설명을 굳이 하지 않는데도 이 안에 서사가 충분히 있다. 시골 학교로 전학간 에리, 도시 학교에 남아있는 에미, 두 소녀가 주고받는 편지를 보며 요즘 아이들은 낯설겠지? 그냥 카톡이면 되는데 말이다. 종이에 쓴 우편 편지를 주고받던 때가 대체 언제였지.... 지금은 문자도 귀찮아하는 나지만 어릴 때는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이것 또한 아련한 추억을 소환.
시골로 이사간 에리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까다롭지 않고 일단 도전해보는 에리의 성격이 새로운 환경에 제격이었다. 나랑 비슷한 사람도 있었으니 에리의 엄마. 엄마는 무조건 안한다고 한다. 귀찮다고 하고. 벌레 끔찍하게 싫어하고. (나중에는 엄마도 그럭저럭 동참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에 있게 된 단짝 두 아이는 각자 갖고있는 새로움에다 함께 공유한 기억들이 더해져 할 말이 끊이지 않는다. 그 편지가 200쪽이 넘는 훌륭한 이야기책이 된다. 글씨가 크고 그림도 있어서 읽기 부담은 없다. 그림도 참 좋다. 컬러가 아니지만 다채롭고 풍성하다.
아마 작가님도 농사를 지어보신 분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식물과 아주 가깝게 지내시는 분은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각 생물들에 빗대어 표현하셨는데 그게 정말 심오하고 멋지다. 내가 이 작품에 감탄한 이유다.
『그런데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어. 사실 잡초 근성 같은 건 없대.
“잡초는 말이다. 한 번은 밟혀도 다시 일어나지만 또 한 번 밟히면, 한동안 가만히 상황을 본 단다. 그러다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 없겠다 싶으면 슬금슬금 뿌리를 뻗어 가서는 다른 데서 싹을 틔운단다.”
정말 대단하지 않니? 밟히거나 상처를 입으면, 굳이 그곳에서 잘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대. 한동안 상황을 살피다가 마땅치 않으면 다른 곳에 가서 지내도 괜찮대.』 (15~16쪽)
잡초 근성 같은 게 없다는 말은 나도 이 책에서 처음 들었다. 그런데 볼수록 맞는 말 아닌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말처럼, 뿌리내릴 자리를 잘 보고 내려야지. 안될 곳이라면 너무 힘 빼지 말고. 물론 지레 포기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이 말이 왜 나오나 봤더니 세 번째 주인공 겐지와 관계가 있었다. 두 친구의 편지에 계속 나오는 이름, 겐지. 소꿉친구인 이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학교 아이들에게 심한 놀림과 괴롭힘을 당해 은둔형 외토리가 되어 있었다. 두 친구는 그것에 마음에 빚이 있고, 안타까워한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위기를 이겨 낸 식물은 그 종이 과거에 지녔던 강한 생명력을 되찾기도 한대. 사람은 누군가에게 당하면 되갚아 주거나 풀이 꺾여 버리는데, 식물은 그 일을 계기로 진짜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거지.』 (50~51쪽)
이건 뜯겨나간 후 새로 올라온 소송채 줄기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것을 보고 쓴 편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진짜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말....
『거미 말이야, 날마다 여기저기에 부지런히 거미줄을 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 것 같은 날에는 거미줄이 엄청 엉성한 거야.
(중략) .... 그러니까 기껏 거미줄을 쳐도 태풍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날에는 힘을 아끼느라 대충 하는 거겠지?
‘모든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생각을 했더니 어쩐지 안심이 됐어.』 (78~79쪽)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에리가 쓴 편지. 여기에 대해 에미가 쓴 편지에도 통찰이 넘친다.
『이건 내 생각인데, 들어 봐.
태풍이 오는 날에 거미줄이 엉성한 건 힘을 아끼려는 게 아니라, 너희 할아버지 생각이랑 같은 거 아닐까?
무슨 말이냐 하면, 거미도 바람이 지나갈 길을 만든 거라고.
안 그러면 거미줄이 바람을 맞아서 원반처럼 빙글빙글 날아가 버릴 테니까.』 (85~86쪽)
두 생각 다 좋다. 그래. 모든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태풍이 오면 바람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인생의 지혜다. 이런 지혜를 자연에서 발견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도전을 준다. 책도 읽어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님은 이렇게 명백하다. 인간은 자연에서 몸을 쓰며 지혜를 얻어야 한다. 나도 모르고 내 다음 세대는 더더욱 모르는 진리. 그걸 알고 계신 작가의 글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외에도 자연에서 얻은 통찰들이 이 책에 가득 들어있다.
서사는 복잡하지 않다. 문제 해결은 겐지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스스로를 방에 가둬버린 겐지를 엄마가 밖에서 조용히 기다린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요즘에 부모들이 그럴 수가 있을까? 우리나라가 아니니 뭐라 판단을 못하겠다. 엄마는 겐지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찾아간 친구들을 극진히 맞아 주었다. 이사간 에리는 직접 가지 못했지만 에미는 겐지가 밀어내는데도 여러 번 찾아가고 그 이야기를 에리에게 전해주었다. 마침내 에리의 땀방울이 들어간 농작물들도 겐지에게 전달되는데.... 겐지는 문을 열고 나와 친구들과 마주할 수 있을까?
괴롭힘(말하자면 학교폭력)이라는 소재가 이렇게 자연과 어우러져 상큼하게 그려진 작품이 또 있었던가? 어떻게 보면 상큼함이라는 느낌 자체가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자연은 니가 생각하는만큼 그렇게 상큼한 게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우리가 지나쳐 온 것들, 너무 빠르게 지나와 버린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서툰 솜씨로 감자나 딸기를 키웠다. 그런데 자란 것은 감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볼까?
“쉿, 마음이 자라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