쉿, 마음이 자라고 있어 큰곰자리 63
무라나카 리에 지음, 이시카와 에리코 그림, 윤수정 옮김 / 책읽는곰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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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이 일본 작가의 모든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런 느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느낌이라는 게 찾는다고 어디에 딱 있는 게 아니잖아. 그래서 우연히 고른 이 책이 너무 반갑고 작은 행운을 받은 기분이었다. 작은 행운. 조금 다른 어감이지만 작은 행복도 좋겠다.

 

그 행복에 색을 칠하라면 초록색으로 칠하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지만, 실제 나의 삶은 회색에 머물러있다. 초록이 삶으로 들어오려면, 몸을 움직여야 한다. 부지런해야 한다는 뜻이지. 나는 몸을 잘 쓸 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내 삶이 초록이긴 어렵다. 그래서 나는 이런 책을 읽을 때 뭔가 그립고도 흐뭇한 마음이 되곤 한다.

 

이 책의 매력 포인트는 또 있다. 두 친구의 편지로 이야기를 끌어간다는 점이다. 편지가 구구절절 길거나 설명을 굳이 하지 않는데도 이 안에 서사가 충분히 있다. 시골 학교로 전학간 에리, 도시 학교에 남아있는 에미, 두 소녀가 주고받는 편지를 보며 요즘 아이들은 낯설겠지? 그냥 카톡이면 되는데 말이다. 종이에 쓴 우편 편지를 주고받던 때가 대체 언제였지.... 지금은 문자도 귀찮아하는 나지만 어릴 때는 편지쓰기를 좋아했다. 이것 또한 아련한 추억을 소환.

 

시골로 이사간 에리는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까다롭지 않고 일단 도전해보는 에리의 성격이 새로운 환경에 제격이었다. 나랑 비슷한 사람도 있었으니 에리의 엄마. 엄마는 무조건 안한다고 한다. 귀찮다고 하고. 벌레 끔찍하게 싫어하고. (나중에는 엄마도 그럭저럭 동참하게 된다.) 이렇게 서로 다른 환경에 있게 된 단짝 두 아이는 각자 갖고있는 새로움에다 함께 공유한 기억들이 더해져 할 말이 끊이지 않는다. 그 편지가 200쪽이 넘는 훌륭한 이야기책이 된다. 글씨가 크고 그림도 있어서 읽기 부담은 없다. 그림도 참 좋다. 컬러가 아니지만 다채롭고 풍성하다.

 

아마 작가님도 농사를 지어보신 분이 아닐까 싶다. 적어도 식물과 아주 가깝게 지내시는 분은 확실하다. 그게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표현들이 곳곳에 있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각 생물들에 빗대어 표현하셨는데 그게 정말 심오하고 멋지다. 내가 이 작품에 감탄한 이유다.

 

그런데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어. 사실 잡초 근성 같은 건 없대.

잡초는 말이다. 한 번은 밟혀도 다시 일어나지만 또 한 번 밟히면, 한동안 가만히 상황을 본 단다. 그러다 여기서는 도저히 살 수 없겠다 싶으면 슬금슬금 뿌리를 뻗어 가서는 다른 데서 싹을 틔운단다.”

정말 대단하지 않니? 밟히거나 상처를 입으면, 굳이 그곳에서 잘해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대. 한동안 상황을 살피다가 마땅치 않으면 다른 곳에 가서 지내도 괜찮대.(15~16)

 

잡초 근성 같은 게 없다는 말은 나도 이 책에서 처음 들었다. 그런데 볼수록 맞는 말 아닌가?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는다는 말처럼, 뿌리내릴 자리를 잘 보고 내려야지. 안될 곳이라면 너무 힘 빼지 말고. 물론 지레 포기하는 것은 좋지 않지만. 이 말이 왜 나오나 봤더니 세 번째 주인공 겐지와 관계가 있었다. 두 친구의 편지에 계속 나오는 이름, 겐지. 소꿉친구인 이 아이는 언제부터인가 학교 아이들에게 심한 놀림과 괴롭힘을 당해 은둔형 외토리가 되어 있었다. 두 친구는 그것에 마음에 빚이 있고, 안타까워한다.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위기를 이겨 낸 식물은 그 종이 과거에 지녔던 강한 생명력을 되찾기도 한대. 사람은 누군가에게 당하면 되갚아 주거나 풀이 꺾여 버리는데, 식물은 그 일을 계기로 진짜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거지.(50~51)

이건 뜯겨나간 후 새로 올라온 소송채 줄기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진 것을 보고 쓴 편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진짜 자신으로 돌아간다는 말....

 

거미 말이야, 날마다 여기저기에 부지런히 거미줄을 치는데, 바람이 세차게 불 것 같은 날에는 거미줄이 엄청 엉성한 거야.

(중략) .... 그러니까 기껏 거미줄을 쳐도 태풍에 날아가 버릴 것 같은 날에는 힘을 아끼느라 대충 하는 거겠지?

모든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괜찮아.’ 라는 생각을 했더니 어쩐지 안심이 됐어.(78~79)

태풍이 지나간 다음날 에리가 쓴 편지. 여기에 대해 에미가 쓴 편지에도 통찰이 넘친다.

 

이건 내 생각인데, 들어 봐.

태풍이 오는 날에 거미줄이 엉성한 건 힘을 아끼려는 게 아니라, 너희 할아버지 생각이랑 같은 거 아닐까?

무슨 말이냐 하면, 거미도 바람이 지나갈 길을 만든 거라고.

안 그러면 거미줄이 바람을 맞아서 원반처럼 빙글빙글 날아가 버릴 테니까.(85~86)

 

두 생각 다 좋다. 그래. 모든 일에 온 힘을 다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태풍이 오면 바람이 지나갈 길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중요한 인생의 지혜다. 이런 지혜를 자연에서 발견한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도전을 준다. 책도 읽어야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님은 이렇게 명백하다. 인간은 자연에서 몸을 쓰며 지혜를 얻어야 한다. 나도 모르고 내 다음 세대는 더더욱 모르는 진리. 그걸 알고 계신 작가의 글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이 외에도 자연에서 얻은 통찰들이 이 책에 가득 들어있다.

 

서사는 복잡하지 않다. 문제 해결은 겐지에게 초점이 맞춰진다. 스스로를 방에 가둬버린 겐지를 엄마가 밖에서 조용히 기다린다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요즘에 부모들이 그럴 수가 있을까? 우리나라가 아니니 뭐라 판단을 못하겠다. 엄마는 겐지가 스스로 마음을 열 때까지 기다리고, 찾아간 친구들을 극진히 맞아 주었다. 이사간 에리는 직접 가지 못했지만 에미는 겐지가 밀어내는데도 여러 번 찾아가고 그 이야기를 에리에게 전해주었다. 마침내 에리의 땀방울이 들어간 농작물들도 겐지에게 전달되는데.... 겐지는 문을 열고 나와 친구들과 마주할 수 있을까?

 

괴롭힘(말하자면 학교폭력)이라는 소재가 이렇게 자연과 어우러져 상큼하게 그려진 작품이 또 있었던가? 어떻게 보면 상큼함이라는 느낌 자체가 비현실적일 수도 있다. 자연은 니가 생각하는만큼 그렇게 상큼한 게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 이 책이 마음에 든다. 이 책은 우리가 지나쳐 온 것들, 너무 빠르게 지나와 버린 것들을 다시 돌아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서툰 솜씨로 감자나 딸기를 키웠다. 그런데 자란 것은 감자만이 아니었다. 이 책의 제목을 다시 볼까?

, 마음이 자라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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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트리스의 예언 비룡소 걸작선 63
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소피 블랙올 그림,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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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윈딕시』가 내 가슴에 확 들어온 그해, 2004년, 그러니까 내가 케이트 디카밀로의 팬이 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네.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놓는 작가라면 수십 권도 나왔을 세월이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한참 기다려야 한 권씩 나온다. 아 그런데, 내가 뭐하느라 한 계절을 지나쳐 이 책을 발견했단 말인가? 지난 가을에 나온 작품을 겨울에야 발견하고 부리나케 읽어보았다.

이 책을 끝장까지 넘긴 동력은 기대감이었다. 케이트 디카밀로가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어떤 신비로운 서사를 펼쳤을까? 확신이 있는 기대감이었기에 끊김 없이 결말까지 읽게 되었다. 하지만 전작들에 비해 재미 자체는 약간 덜한 느낌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제 이야기에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나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이야기에 빠뜨리는 작가의 신비로운 문체는 여전했다. 번역도 꾸준히 같은 분이 하고 계서서 일관된 느낌을 더 받는 것일수도 있겠다. 『생쥐 기사 데스페로』를 5학년 아이들과 학급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활동 중 하나로 ‘좋은 문장 찾아 적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작가의 문장은 아름답고 표현이 남다르다.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정말 배우고 싶은 문장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문장은 배우는 게 아니고 타고나는 거겠지. 한 문장 예를 든다면 이런 것들.
“비어트리스는 대답할 수가 없었어. 갑자기 커다란 검은 허공이 아이 안에서 하품을 했어.”

어둡고 험하며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은 존재들의 연약한 힘이 모여 어둠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언제나 벅차고 흐뭇한 감동을 준다. 이런 서사가 이미 많이 나왔음에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리고 또 읽어도 만족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동화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화는, 어쩌면 편애한다. 그들을. 그것이 동화의 방향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에서 작가는 이야기의 의미, 더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때는 중세. 문자 권력이 일부에게만 주어졌던 시대에 비어트리스는 여자아이인데도 글을 배운다. 그 자체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임에도.
“언젠가 어린아이가 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할 것이다. 그 아이는 여자아이이다. 여자아이는 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비어트리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의 주인공이 된다. 글을 알고 이야기를 만들 줄 알지만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비어트리스. 그 아이가 피투성이인 채로 안스웰리카라는 염소의 품에 안겨 ‘슬픔의 연대기 수도원’ 헛간에서 깨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험한 존재인 줄 알면서도 아이를 보호해 준 수도사 에딕, 부모를 칼에 잃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소년 잭 도리, 수도원에서 악마로 통하지만 비어트리스의 절대 보호자인 염소 안스웰리카, 숲에서 만난 의문의 방랑자 카녹, 이들이 힘을 합쳐 어둠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는 점점 긴박감을 더해간다.

케이트 디카밀로의 전작들이 그렇듯, 피의 복수가 없어도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 때문이라고 작가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 사랑이라니? 그런 닳고 닳은 말이 하고 싶어?
음 그러나 그런 말에 반기를 들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가의 힘이다.
중요한 건 예언이 아니라고 한다. 예언 때문에 독자들은 숨을 죽였는데도.
“사랑, 그리고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외에도 서사 사이사이에 패스츄리처럼 켜켜이 넣어놓은 작가의 생각들이 많다는 말까지만 하고 몇 문장의 인용으로 내용소개는 마칠까 한다.
-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떤 세상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해?”
- 잭 도리는 비어트리스의 손 밑에서 글자가 하나씩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어. 그의 안에서 글자 하나하나가 열 수 있는 문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밝은 방이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졌지.
“세상은, 글자로 다 쓸 수 있어.”


문자는 인간 세상의 가장 큰 선물이고, 그것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이 대단한 것 같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 이야기를 내가 무슨 수로 접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작가는 아니지만, 글의 소중함을 알고 기록을 남기는 건 누구에게나 귀하고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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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고양이 킹의 엉뚱한 마법 작은 스푼
김혜온 지음, 이윤우 그림 / 스푼북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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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동화계에서 트렌드가 되었다는 고양이의 등장. 하지만 아직 한참 더 나와도 상관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고양이는 그 고양이고 이 고양이는 다르다. 킹은 유일한 고양이다! 고양이들 중에서 샐쭉함과 도도함은 좀 덜한 고양이라는 느낌이 들긴 했다. 그건 아마도 작가님이 키우시는 고양이가 개냥이라서?ㅎㅎ 겉으로 도도하려고는 하지만 따뜻한 마음과 도움의 행위 때문에 도도함은 밀린다. 그냥 ‘킹 없으면 어쩔 뻔했어?’ 이런 생각만 든다.

특수교사인 작가님이 만드신 ‘달지’의 캐릭터는 생생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여러 가지 수행에 서툴러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다. 장애다 비장애다 이런 구분도 점점 무의미해진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구분짓자면 달지는 장애학생이다. 도움반에서 공부하는 친구. 그런데 이 책에서 도움반 상황은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달지는 도움반이 없는 학교에 다니나 보다. 장애가 중증이 아닌 경우에 그런 상황도 꽤 있다. 저학년용 짧은 동화에 도움반 상황까지 넣으면 복잡하니 그런 설정이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달지의 학급 내 상황이 더 잘 보였다. 그러면서 선생님의 역할에 마음을 졸였다. 나를 보여주면 어떡하지....ㅠ 나랑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선생님이 나왔다.

친구들 캐릭터의 설정도 가장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못되다 못해 악하다고 말해야 할 아이들은 없고, 그렇지만 달지를 속상하게 하고 때론 괴롭히는 아이들은 있고, 반면에 달지를 감싸주고 달지를 위해 최선을 다해주는 친구도 두 명쯤 있는.... 대한민국 평균치 교실이라고 하겠다. (내가 평균치를 너무 높게 잡았나... 어떻게 저럴수가 있지 싶은 아이도 사실은 있다. 좀 도와줬으면 하고 기대할 아이가 없을 때도 있고.ㅠ)

가장 현실 같았던 건 달지의 말투. 작가님이 수없이 들어봤을, 그래서 자연스럽게 나왔을 그 말투.
“모, 못해. 나 어, 어차피 못해.”
“내가 해떠!”
“꼬꼬 숨어라, 머리카나 보이라.”
삽화가 없어도 달지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그런데, 달지가 이책에서 가장 많이 한 말이 ‘어차피’ 였다. 실제로 그런 아이가 있을 것 같다. 어차피, 라는 말이 각인된 아이. 실패의 경험에 갇힌 아이.ㅠ

이렇게 현실을 담은 내용을 판타지로 만드는 마법의 주인공은 바로 학교 고양이 킹. ‘엉뚱한 마법’이라는 제목처럼 마법도 실수하는 엉뚱한 고양이 킹. 하지만 그 어설픈 마법사 때문에 달지에게 중요한 역할이 주어진다. 결국 가장 좋은 결말을 가져오는 그 엉뚱한 마법.^^

내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선생님의 학급운영 방식. 달지를 걱정하고 챙겨주시고 나름 최선을 다하시는 선생님인데, 보상체계가 달지를 힘들게 하고 소외시킬 거라는 생각을 못하시다니? 이제 많은 선생님들이 보상체계의 굴레에서 벗어났는데, 아직도 머물러있는 분들이 계시긴 할 것이다. 나도 이전 학교에서 학교차원의 보상이 있었을 때, 일부를 차용할 수밖에 없어 답답했던 기억이 있다. 달지 같은 친구가 교실에 있을 때는 더욱 주의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이보다 더 세심한 것까지.

달지와 친구들이 앞으로도 계속 웃으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킹의 이런 말이 시사점을 준다.
“인간들은 다 달라, 못해도 멋질 수 있어.”
“꼭 도움이 돼야 해?”
찔린다. ‘도움이 되는 것’은 그동안 내가 인간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는데. 시각을 좀 바꿔봐야겠다. 우린 모두 존재만으로 빛날 수 있으니까. 남한테 나쁜 마음만 먹지 않는다면 함께 어울려 사는데 결격사유가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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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크 - 한쪽 눈만 뜨고 학교에서 살아남기 미래주니어노블 12
롭 해럴 지음, 허진 옮김 / 밝은미래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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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접하는 미국 작가의 책이다. 작품은 많은데 우리나라에는 이 책만 번역되어 있다. , 아주 매우 상당히 좋았다. 다른 작품들도 번역되면 좋겠다. 분량이 400쪽이 넘어 준벽돌책(?) 쯤 되는 느낌이라 초기 접근성이 크지 않겠다. 하지만 분량에 구애받지 않는 고학년 독자들의 독서모임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궁금하고 기대되는 책이었다. 중학생 정도라면 반 전체가 함께 읽어도 무리 없겠다. 글자나 줄간격이 커서 실제 분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아름다운 아이(원더)>보다 적고 빨리 읽힌다.

 

분량을 비교하는 데 왜 원더를 떠올렸을까 생각해보니 무의식중에 공통점을 느낀 것 같다. 주인공 소년이 겪는 시련, 그것은 질병이면서 동시에 장애를 가져오게 되었고 많은 고통을 수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생활을 최대한 해나가려 하는데, 어떤 사회든 그렇듯이 모두 좋은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본의는 아니지만 상처를 주게되는 사람도 있고, 돕고는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고 그렇게까지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방관하게 되는 사람도 있고, 인간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싶은 정도로 악랄한 사람도 있다. 그 안에서 살아남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어기도 그렇고, 이 책의 로스도 그렇고, 아름답다.

 

그들이 건강한 의지를 가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버틸 수 없다. 실제로 어기도 로스도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격동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 옆에 있어주는 사람들. 그들의 존재가 중요하다. 그래서 두 책 다 조연들이 많은 편이다. 둘 다 인싸여서는 아니다.

 

로스는 별로 눈에 안띄는 평범한 7학년 학생. 어린 시절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아픔이 있고, 지금은 새엄마가 있다. 그의 일상에 다시 폭탄이 떨어졌는데, 눈에 암이 걸린 것이다. ‘눈물샘 점막표피양암이라는 희귀암이었다. 이 병은 작가가 30대에 걸린 병이라고 한다. 그래서 진행과정과 증상, 느낌이 아주 생생하게 전달되어 온다. 난 건강검진 받으러 가는 것도 아주 싫어한다. 이제 늙고 아프고 죽을 일밖에 안남은 중년 후반인데도 왜그리 긴장되고 두려운지 모르겠다. 하물며 로스처럼 어린 학생이, 그 까다롭고 치명적이며 최선의 치료를 해도 영구 장애가 남을 질병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까. 받아들이고 말고가 아니고 나한테 떨어졌으니까. 대부분 자신에게 떨어진 청천벽력 같은 일을 그렇게 견디면서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 책은 그렇게 버티면서 나아가는 로스와 함께 그 주변인들의 모습을 어둡지 않게 보여준다. 절친인 애비, 절친이었으나 그 무렵 멀어진 아이삭, 가장 혐오했지만 가장 가까워진 지미, 그리고 아빠와 새엄마. 모든 인물들의 캐릭터가 눈에 보이는 듯 선명했다. 그 때문인지 이거 영화로 안 만드나? 완전 잘될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도 그렇다. 방사선 치료사 프랭크는 가장 결정적인 인물이다. 직업적으로 만나 이렇게 사적인 관계로까지 가는 것은 미국에서도 흔한 일은 아니겠지? 그가 결정적 역할을 한 매개는 바로 음악이다. 이 책의 매력포인트도 바로 음악이다. 음악을 못하지만 로망을 갖고 있는 내가 이 책에 빠진 이유도 바로 음악이다. 로스가 친구들과 음악을 만들어내는 과정. 그게 빠졌다면 이 책은 밋밋했을 것이다.

 

치료실 복도에서 환자로 만난 할아버지. 그분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던 것도 눈물나게 좋았다. 곧 죽을 노인을 이렇게 대접(?)해준 작가의 시선이 고맙다. 공연 직전까지 못된 것들의 준동에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던 로스가 동전투입구, 힘내라!” 하는 뜻밖의 목소리에 극적으로 평안을 되찾고 만족한 모습으로 첫음을 내는 장면. 개인적으로는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고 싶다. (누구 맘대로 영화래.ㅋㅋ 아, 그리고 동전투입구는 할아버지가 지으신 로스의 별명. 암 치료와 관계 있음)

 

그리고 절친(편안한 여사친)인 애비와는 달리 설레고 조금 흠모하던 사라와의 반전... 아이고, 충격적이었다. 그럴수록 애비의 매력이 더욱 크게 보였다는.... 하지만 멀리 이사가는 애비와의 헤어짐이 이 책에서 가장 아쉬운 장면이다. 뭐 괜찮아! 요즘 세상에 물리적 거리쯤은. 나중에 얼마든지 다시 만날 수 있을 테니.

 

작가는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은 잃게 되었다고 한다. 음 한쪽 눈이 남았으니 최악은 아니고, 슬프지만 일면 다행스러운.... 그런 상황이라고 하겠다. 로스의 상황적 결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비슷할 것으로 생각해도 되겠지. 로스는 모든 독자들의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같은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아이들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가시밭길을 지켜보는 사람이나, 아니면 내용과 아무 연결고리가 없는 독자들이라도. 인생은 길지만 어찌보면 짧고, 시간은 많지만 어찌보면 급하고, 여유를 부려도 되지만 어찌보면 지금 안하면 영영 못할 일들도 있다. 이 책을 읽고 지금 해야 될 일을 떠올린다면, 나의 고난 중에 웃음 한줄기를 발견한다면, 쓸데없는 오지랖이 아닌 응원 한 마디를 건넬 수 있다면. 참 귀한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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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 - 2022 뉴베리 아너상 수상작
라자니 라로카 지음, 김난령 옮김 / 밝은미래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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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이다. 그것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이 문학의 매력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공감까지 할 수 있다는 점이. 화자인 레하는 인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하지만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이민자 2세로 살면서 느끼는 정체성의 고민이 이 책의 중요한 축을 이룬다.

 

이 책은 내가 거의 접해보지 못한 운문 소설이다. 운문과 산문 중에 더 편한 걸 고르라면 나는 산문이다. 시는 써본 적도 거의 없고 함축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의 문장을 더 선호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이 처음부터 썩 끌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몇 장 넘기다보니 어려움 없이 빠져들었다. 운문이라는 느낌도 크게 들지 않았다. 형식은 운문이지만 그 안에 서사는 충분히 들어있었다. 글자가 빨강이라는 점이 특이했다. 처음만 그런가 했는데 끝까지 빨강이었다. 제목의 의미를 살리려는 의도인 것 같다.

 

레하가 미국에서 적응해 사는 일이 아주 처절한 것은 아니었다. 이민자라고는 하지만 부모님은 학력도 능력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레하를 잘 키우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레하를 좋은 사립학교에 보냈고, 큰 기대를 걸고 관심 속에 아이를 키웠다. 인품도 훌륭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레하가 미국이라는 큰 사회에서 능력을 마음껏 펼치며 살기를 바랐다. 동시에 인도라는 그들의 뿌리를 잊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주중에는 미국인들의 학교에서 좋은 교육을 받게 하고, 주말에는 인도인들과 교류했다.

우린 이 소중한 기회를 낭비해서도

우리의 본성을 잃어버려서도 안 돼.”

 

레하 또한 열심히 공부하며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 하지만 두 세계 중 어디에서 완벽히 속하지 못한다고 느낀다. 가끔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즐기면서 살고 싶기도 하다. 또래 아이들이 즐겨 입는 옷을 입고 댄스파티에 가는 일 같은 것들.... 그럴 때 엄마에게서 벽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엄마를 미워할 수는 없다. 엄마는 너무 좋은 사람이고, 그리고....

 

엄마가 싫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결국 허락을 받아내 댄스파티에 참석한 레하. 거기서 느꼈던 해방감, 썸타는 피터와 손잡을 때의 그 짜릿했던 감각... 그 사소한 행복을 없던 것들로 되돌려버리고 싶은 일이 생겼다. 엄마가 아프다. 너무 큰 병에 걸렸다. 그때부터 마지막 장까지 레하의 시들은 아프고, 너무 큰 슬픔을 안고 있으면서도 결국 조용하고 차분하게 마무리된다. 마지막에 읽는 엄마의 편지는 감동적이다. 엄마의 편지는 책의 끝부분이지만, 그 편지가 책을 시작하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슴에 품는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길잡이가 되고 용기와 격려를 지속적으로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모이기에 가능한 것일까.

 

이 책은 일부분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인 것 같다. 그런데 작가가 나와 비슷한 또래인가? 내가 그 또래일 때 듣던 팝송들이 대거 등장한다. 신디 로퍼, 듀란듀란, 유리스믹스, 보니 테일러 등.... 반가웠다. 그리고 썸타는 사이에서 좋은 친구가 된 피터가 녹음해 선물한 믹스테이프. 그것 역시 내가 그 또래일 때 숱하게 만들던 것인데, 추억 돋네.^^ 노래의 가사와 책의 내용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점도 책의 매력 중 하나였다.

 

제목 또한 그렇다. 빨강, 하양 그리고 완전한 하나. 이것이 책에서 여러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당히 정교한 구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뉴베리상을 받은 작품이네. 다양한 상황, 다양한 연령층의 독자들이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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