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트리스의 예언 비룡소 걸작선 63
케이트 디카밀로 지음, 소피 블랙올 그림, 김경미 옮김 / 비룡소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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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윈딕시』가 내 가슴에 확 들어온 그해, 2004년, 그러니까 내가 케이트 디카밀로의 팬이 된 지 어느덧 20년이 흘렀네. 왕성하게 작품을 쏟아놓는 작가라면 수십 권도 나왔을 세월이지만 이 작가의 작품은 한참 기다려야 한 권씩 나온다. 아 그런데, 내가 뭐하느라 한 계절을 지나쳐 이 책을 발견했단 말인가? 지난 가을에 나온 작품을 겨울에야 발견하고 부리나케 읽어보았다.

이 책을 끝장까지 넘긴 동력은 기대감이었다. 케이트 디카밀로가 이번에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어떤 신비로운 서사를 펼쳤을까? 확신이 있는 기대감이었기에 끊김 없이 결말까지 읽게 되었다. 하지만 전작들에 비해 재미 자체는 약간 덜한 느낌이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이제 이야기에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진 나의 문제일 수도 있고.

이야기에 빠뜨리는 작가의 신비로운 문체는 여전했다. 번역도 꾸준히 같은 분이 하고 계서서 일관된 느낌을 더 받는 것일수도 있겠다. 『생쥐 기사 데스페로』를 5학년 아이들과 학급에서 읽은 적이 있었는데 그때 활동 중 하나로 ‘좋은 문장 찾아 적기’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작가의 문장은 아름답고 표현이 남다르다. 간결하면서도 감각적이라는 점에서 정말 배우고 싶은 문장이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문장은 배우는 게 아니고 타고나는 거겠지. 한 문장 예를 든다면 이런 것들.
“비어트리스는 대답할 수가 없었어. 갑자기 커다란 검은 허공이 아이 안에서 하품을 했어.”

어둡고 험하며 악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작은 존재들의 연약한 힘이 모여 어둠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언제나 벅차고 흐뭇한 감동을 준다. 이런 서사가 이미 많이 나왔음에도 계속 나오는 이유는, 그리고 또 읽어도 만족스러운 이유는 이것이 동화의 본질이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동화는, 어쩌면 편애한다. 그들을. 그것이 동화의 방향성이기 때문이 아닐까.

이 책에서 작가는 이야기의 의미, 더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때는 중세. 문자 권력이 일부에게만 주어졌던 시대에 비어트리스는 여자아이인데도 글을 배운다. 그 자체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임에도.
“언젠가 어린아이가 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할 것이다. 그 아이는 여자아이이다. 여자아이는 왕을 왕좌에서 내려오게 하고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비어트리스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의 주인공이 된다. 글을 알고 이야기를 만들 줄 알지만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비어트리스. 그 아이가 피투성이인 채로 안스웰리카라는 염소의 품에 안겨 ‘슬픔의 연대기 수도원’ 헛간에서 깨어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위험한 존재인 줄 알면서도 아이를 보호해 준 수도사 에딕, 부모를 칼에 잃고 혼자 힘으로 살아가는 소년 잭 도리, 수도원에서 악마로 통하지만 비어트리스의 절대 보호자인 염소 안스웰리카, 숲에서 만난 의문의 방랑자 카녹, 이들이 힘을 합쳐 어둠의 심장부를 향해 나아가며 이야기는 점점 긴박감을 더해간다.

케이트 디카밀로의 전작들이 그렇듯, 피의 복수가 없어도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 때문이라고 작가는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 사랑이라니? 그런 닳고 닳은 말이 하고 싶어?
음 그러나 그런 말에 반기를 들고 싶은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는다는 것이 이 작가의 힘이다.
중요한 건 예언이 아니라고 한다. 예언 때문에 독자들은 숨을 죽였는데도.
“사랑, 그리고 이야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어.”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외에도 서사 사이사이에 패스츄리처럼 켜켜이 넣어놓은 작가의 생각들이 많다는 말까지만 하고 몇 문장의 인용으로 내용소개는 마칠까 한다.
-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은 어떤 세상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해?”
- 잭 도리는 비어트리스의 손 밑에서 글자가 하나씩 나타나는 것을 지켜보았어. 그의 안에서 글자 하나하나가 열 수 있는 문이고, 안으로 들어가면 밝은 방이 나타나는 것처럼 느껴졌지.
“세상은, 글자로 다 쓸 수 있어.”


문자는 인간 세상의 가장 큰 선물이고, 그것으로 이야기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행복이 대단한 것 같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 이야기를 내가 무슨 수로 접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작가는 아니지만, 글의 소중함을 알고 기록을 남기는 건 누구에게나 귀하고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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