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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멧 : 계절이 지나간 자리 - 2021 볼로냐 라가치 미들그레이드 코믹 부문 대상작 ㅣ 스토리잉크 2
이사벨라 치엘리 지음, 노에미 마르실리 그림, 이세진 옮김, 배정애 손글씨 / 웅진주니어 / 2023년 3월
평점 :
문장을 읽는 것보다 그림을 읽는 일이 나에게는 훨씬 어렵다. 그래서 그림없는 그림책들을 보면 한 번에 해석이 되지 않는다. 아마도 선생인 내가 아이들보다 못하는 일 중에 하나가 아닌가 한다. 이 책은 심지어 100쪽이 넘는 만화이니 오죽하랴. 글자가 하나도 없진 않고 가끔 말주머니도 나오는데, 대부분의 장면을 그림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그건 나한테는 너무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한번 읽고 잘 모르겠어서 인터넷서점의 책 소개를 읽어보고 다시 읽으니 이제야 좀 알겠다.ㅎㅎ 해석에 급급하지 않고 읽어야 이 책에 스민 감정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러니 이 책은 여러번 읽어야 하는 책이다. 책모임에서 함께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단순한 펜선에 색연필 채색의 그림이 내용과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취향에 따라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는 이런 그림체도 좋다. 이 책은 볼로냐 라가치상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도서관에서 빌려왔는데 제목보다도 아마 수상작 마크를 보고 집어들었던 것 같다. 처음에 뭔 소린지 모를 때 바로 내려놓지 않은 건 ‘좋은 작품이라니까 끝까지 읽어보자’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렇게 남들의 안목에 기대는 마음이 나한테도 있다. 수상작 프리미엄이 그런 거겠지.^^;;;
내용이 이해되니 느껴지는 감정들이 있다. 기억 저편에 묻어두었던 감정들. 외로움이기도 하고, 쓸쓸함이기도 하고, 설렘, 기대, 즐거움, 안타까움, 슬픔이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움이기도 한 그 감정들. 그때는 이름조차 붙이지 못하고 감정인지 뭔지도 몰랐던 감정들. 나에게는 어느정도 과거형인 감정들. 아이들에게는 현재형일 수도 있겠지. 아이들이 그 섬세한 감정의 진동을 느끼면서 자랐으면 좋겠다. 조금 아프고 눈물겹더라도. 너무 많이 말하지 말고 조용히 느끼는 시간도 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럴 때 이 책이 함께해도 참 좋을 것 같다.
어느 널따란 캠핑장에 루시라는 소녀가 엄마(아마도?)와 함께 머무른다. 게임장에서 인형뽑기로 강아지를 뽑고 싶어하지만 번번이 실패하는 루시. 주변에 물놀이하는 소녀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물에 떠다니는 페트병 하나를 주워 끈을 매달아 자신의 강아지라고 한다. ‘메멧’이라는 이름까지 붙여주고서.
로망은 거칠고 장난이 심한 아이로 보인다. 친구 한 명이 비디오카메라를 가져오자 그걸로 중세시대 영화를 찍자고 제안한다. 그러려면 마녀 역할을 할 여자애가 필요하다. 그때 딱 눈에 들어온 아이가 루시! 내가 봐도 그럴 것 같긴 하다. 긴 머리에 혼자 겉도는 좀 이상한 아이. 로망은 루시에게 다가가지만 서툴게 실랑이하다 루시의 긴 머리를 잡아당기게 된다. 놀랍게도 그 금발은 가발이었고, 루시의 짧은 맨머리는 정확한 설명은 없지만 뭔가 사정이 많은 아이임을 짐작하게 한다.
그렇게 마음과는 달리 못되게 굴던 로망은 루시가 인형뽑기에 실패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모아두었던 동전을 꺼내고 밤을 기다리는 로망. 다음날 아침 루시의 텐트 앞에 동전이 놓여있고 루시는 드디어 바라던 강아지 인형을 뽑아 즐거워한다. 그런데 돌아와보니 엄마가 텐트를 접고 있는게 아닌가.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루시는 방금 뽑은 강아지 인형을 안고 달린다. 로망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강아지 인형을 옆에 두고 돌아선다. 로망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하며 강아지 인형을 발로 밀쳐버리지만, 세면대에서 손을 씻으며 들썩이는 아이의 어깨에서 너무 큰 아쉬움과 슬픔이 느껴진다. 로망은 무엇을 느꼈던 걸까?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풀숲에 집어던졌던 고양이 사체를 굳이 다시 찾아내어, 곱게 묻어준다. 그리고 돌아서 걸어가는 로망의 품에는 그 강아지 인형이.....
뒷표지에는 왔던 때처럼 오토바이에 텐트와 간단한 짐을 싣고 떠나는 루시네의 뒷모습이 비쳐진다. 이들은 이제 또 어디로 가는 걸까? 다시 만날 일은 아마도 없겠지? 그들의 모습은 서로에게 흔적으로만 남겠지. ‘계절이 지나간 자리’에..... 배경이 캠핑장인 것도 우리 인생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잠시 머무는 곳, 떠나야 하는 곳, 만남과 이별이 있는 곳.
아이들의 ‘계절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이 이처럼 슬픔과 아쉬움일지언정, 상처와 악몽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때로는 두렵다. 하지만 아이들은 이렇게 외로움 속에서도 서로 마음을 나누며 성장한다고 이 책은 말해 주는 것 같다. 끌고 다니던 ‘메멧’을 손에서 놓는 날. 그날을 아이가 훌쩍 성장하는 날이라고 해석해도 될까. 물에 떠내려가던 메멧은 어떤 의미일까. 다른 분들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