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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따먹기 법칙 - 제8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4학년 1학년 국어교과서 국어 4-1(가) 수록도서 ㅣ 작은도서관 33
유순희 지음, 최정인 그림 / 푸른책들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반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을 때 문학도서의 경우 몇 명의 작가들을 기본적으로 정해 두고 골고루 읽히려 노력하는 편이다. 권정생, 송언, 황선미, 유은실, 문선이 님 등 몇 분을 빼놓지 않고 있다. 거기에 추가하고 싶은 작가가 한 분 더 생겼다. 바로 이 책의 작가인 유순희 님이다.
아직 다작을 하신 작가는 아니지만 작품의 수준이 한결같이 나를 감탄시킨다. 내가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싸이클은 대체로 이렇다.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을 읽었다-그 작품에 꽂혔다-작가 이름으로 검색을 한다-다른 작품을 찾아서 읽어본다-다른 작품도 마음에 든다-그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사실 이 분의 비교적 최근작을 먼저 읽었다. <우주호텔>이라는 책이다. 분량이나 글씨 크기로 봤을 때는 저학년용이다. 하지만 그 주제는 내 마음에 커다란 무게로 내려앉았다. 서평을 쓰기도 힘들 만큼. 이후로 이분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 오늘 이 책을 손에 잡았다. 우주호텔보다 느낌은 가볍지만 여전히 알차다. 짧은 동화 속에 이렇게 꽉 찬 내용이 들어 있다니.
책의 서문에 작가가 떡하니 이렇게 써놓았다. "여러분도 지우개 따먹기 놀이를 해보세요."
안돼~~ 그건 일종의 사행성 게임이란 말이야. 그리고 뒤이어 벌어질 교실의 풍경은 안봐도 비디오란 말이야.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내 마음은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쉬는시간에만 하도록 하지 뭐. 그리고 딴 지우개는 그 날이 끝나기 전에 돌려주는 걸로.
내가 이런 걸 규제해야 하는 어른이며, 또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욕을 먹는 교사라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이럴 때는 원망스럽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지우개 따먹기 대장인 상보와 그 짝꿍인 홍미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상보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와 살고 있으며(아빠는 넉넉하지 않지만 성실히 노력하는 좋은 사람) 공부도 그닥 잘하지 못한다. 유일하게 반에서 일등하는 게 있는데 바로 지우개 따먹기.
늘 좋은 냄새가 나는 깔끔한 홍미는 엄마가 조향사다. 지저분한 상보보다도 지우개 따먹기로 상보와 늘 맞서는 깔끔한 준혁이를 더 좋아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할애한 내용은 상보와 준혁이의 엎치락 뒤치락 지우개따먹기 실황 중계다. 여느 스포츠 경기 못지 않게 꽤나 흥미진진하다. 그러면서, 상보가 아빠와 지우개따먹기를 하면서 하나하나 세워나간 지우개 따먹기의 법칙들이 소개된다. 총 10가지나 된다.
이건 어쩌면 인생의 법칙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들 부자의 인생철학? 그렇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철학은 있다.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라든가, 딴 지우개는 절대 돌려주지 않는다 등의 법칙을 세웠다면 그 사람의 수준은 딱 그정도인 것이다. 그럼 이들 부자의 법칙은 어떤 것인지 볼까?
공부를 잘하는 준혁이는 지는 걸 참을 수 없어 늘 상보와 대결을 벌이곤 한다. 그날은 준혁이가 모처럼 이겼다. 준혁인 그것 보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후, 딴 지우개를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 상보는 법칙 4번을 들어 따진다. "지우개 따먹기 할 때는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킨다. 즉,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행동을 일부러 하지 않는다."
시합이니만큼 되도록 이길 수 있기 위해서 법칙 5번 "납작한 지우개는 피한다.", 법칙 8번 "집중하기"와 같은 것들도 있지만
법칙 1번 "꼭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릴 것"
법칙 10번 "지우개 따먹기 놀이를 할 때 상대는 나의 친구이다."
와 같이 함께 하는 매너에 관한 것들도 있다. 이정도의 인생철학이라면 그들이 비록 평범하게 살고 있더라도 얼마나 멋진가!
마지막 훈훈한 마무리까지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되겠기에 여기까지만.
한군데, 아이들은 그냥 지나칠만한 곳에서 난 울컥했는데 홍미가 상보 생일에 직접 만든 향수를 선물하는 장면이다. 거기에서 돌아가신 엄마 냄새가 났다.
"아빠, 내 몸에서 엄마 냄새가 나. 신기하지?"
아빠는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울컥했다. 아빠는 향수를 부엌 창문가에 놓았다.
두번째 주인공인 홍미 엄마를 조향사로 설정할 만큼 작가는 '냄새'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은 것 같다. 아이들은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난 이것이 이 동화를 더욱 살아나게 했다고 생각한다. '냄새'가 갖는 의미.... 난 그게 뭔지 조금은 안다. 이처럼 작가는 짧은 동화에 이중 삼중의 의미를 겹쳐 넣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서 가장 자유로울수 없는 법이라 교사인 나는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놀이란.... 삶이다. 그것을 통해서 삶을 배운다. 바로 상보가 인생의 법칙을 수립했듯이 말이다. 또한 아이들은 스스로 배운다. 단, 거기까지 시간은 좀 걸린다. 잠시 눈에 거슬린다고 차단하지 말고 참고 지켜봐 주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방향제시와 조언은 가끔 필요할 때도 있다. 그것도 직접적인 말 보다는 이런 책을 함께 읽는 것이 훨씬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