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노는 법 - 동화를 쓰려는 분들께
위기철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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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사서 읽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뭐에 홀린 듯하다. 다른 책을 검색하다가 이 책이 걸려들었는데 보자마자 구매하기 버튼을 눌렀고 다음날 책이 내게로 왔다.

 

제목은 <이야기가 노는 법>, 부제는 <동화를 쓰려는 분들께>인 이 책을 왜 나는 홀린 듯이 장바구니에 담았을까? 나는 동화를 쓰려는 분들이 아니다. 문학성이 담긴 작품을 창작해 본 적도, 시도해 본 적도 없다. , 사실 학교 다닐 때 월요애국조회 시간을 은근히 기다린 재수없는 애이긴 했었다. 독후감대회나 백일장을 하고 나서 단상위에 올라가 상 받는 그 기분이 짜릿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졸업한 후에는 글과도 멀어지고 가끔 실용적인 글은 쓰지만 문학작품을 창작해본 적은 없었다. 해야 될 필요도 없었고.

 

그런데 나의 무의식 속에는 사십이 넘은 이 나이에도 애국조회의 단상에 서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던 것인가? 이 책을 보는 순간, 혹시 이걸 읽고 나도 한 편 써볼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던 것일까? 내 마음 나도 모르지만 그렇다 치고.

 

이 책을 읽기를 잘했다. ‘넌 할 수 있어!’도 좋은 말이지만 넌 안돼!’도 때로는 인생에 도움이 된다. 저자는 작가란 어떻게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작가로 살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화란 하루아침에 쓰여지는 일이 절대 없다고, 엄청난 습작을 통하여만 탄생할 수 있다고 한다. , 들인 시간에 비례한다는 것이다.(물론 재능 없는 이가 시간만 들인다고 되지는 않을 테지만)

 

나는 저자가 말하는 세월 말아먹는 삽질과 노가다를 시도해 볼 의향이 전혀 없다. 현재 내가 하는 업종에서 버텨내기도 힘든데 무슨 그런 엄청난 곁눈질을 하겠는가.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순간만큼은 어쩌다 보석을 줍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내가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저자 덕분에 이제는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명쾌하게 날려 버렸다.

 

순간 들었던 착각을 날려버린 것만으로 만족하기에는 책값이 비싸지 않나? 다행히 한 가지가 더 있다. 동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는 것.

 

별로 밝히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몸담은 업종에서 동화는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그렇게 여기지 않는 분들도 있긴 한데 나는 심지어 내 장사밑천이라고까지 여기는 사람이어서 늘 옆에 두고 읽는 편이다. 서평을 쓰기도 하고 동료들에게 추천을 해주기도 했는데 이 책을 읽으며 그동안 내가 동화를 보았던 시각을 다시 짚어볼 수 있어서 그게 꽤나 쏠쏠한 재미를 주었다.

 

첫째로 동화는 다른 장르에 비해서 독자중심 글쓰기를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동화가 담는 일보다는 꺼내는 일에 우위를 두어야 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곧 독자와의 소통에 주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같은 맥락으로 저자는 동화작가가 아이들을 대변하는 사람인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인가를 묻고 있다. 전자도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화로서의 의미는 아무래도 후자에 있다는 것이 저자의 입장인 것 같다.

 

그렇다면 좋은 동화를 고르는 일을 어른이 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모순일 수도 있겠다. 뒤돌아본다. 내가 읽고 무릎을 쳤던 책들이,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어 안달이 났던 책들이 과연 아이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였는지. 내가 아이들 눈높이에서 읽었는지. 동화라는 이름을 달고 있지만 실상은 어른들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었기에 내가 감동했던 것은 아닌지. 동화를 통해서 나 스스로 감동받는 것에 족한다면 상관이 없지만, 아이들에게 권해주고 아이들과 함께 하려 한다면 아이들의 시각에서 좋은 동화는 어떤 것인가 좀 더 고려해 볼 필요가 있겠다.

 

다음으로 동화를 쓸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공간, 플롯, 패턴, 짜임, 내용, 리듬 등에 대한 강의가 이어지는데 이 부분은 가장 공부(?)스러운 부분이면서도 가장 재미있었다.(이렇게 재미있는 강의를 하는 교수님이 있다면 이 늦은 나이에 공부를 더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결론을 굳이 정리하자면 이 모든 것들이 중요하되 여기에 얽매여 쓰면 안된다는 것.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공식이 없다는 것! ‘이야기가 이야기를 쓴다.’ ‘이야기는 일종의 유기체이다.’ 라는 말들이 이 사실을 잘 표현해 준다.

 

이어서 좀더 세부적이면서도 전문적인 글쓰기의 원칙이나 기법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이 강의들 또한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들어봤던 말들이면서도 착착 감기게 재미있다. 한번 읽은 지금 당장은 못하겠지만 이 책을 한두 번 더 읽고 나서는 좀 더 세부적인 눈을 가지고 동화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괜히 입맛 까다로운 독자가 하나 더 느는 것에 불과할 수도)

 

이 책은 서두부터 동화작가 아무나 하는거 아니다. 폐인 될 각오하고 덤벼라.”라고 시작을 했고 읽으면 읽을수록 우와.... 단순한게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데, 각고의 노력을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라는? 모든 예술들이 다 그러한데, 피나는 연습으로 어느 정도까지는 되지만 그 이상을 넘어서는 것은 타고나야 되더라는 거다. (이건 저자가 한 말은 아니다. 살면서 내가 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 동화도 마찬가지인 듯.... ‘열심히 노력하셨구나이분은 타고났구나가 어느 정도는 눈에 보인다. 그런 걸 보면 세상은 참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다. 타고난 분들의 붓놀림에는 나도 모르게 끌려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마지막으로 타고나셨거나, 노력하고 계시거나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살아가고 계신 이땅의 동화작가님들(저자 포함)께 한 말씀 드린다.

어쩌다 영감을 얻으면 죽기 전에 한 편은 쓸 수도 있는 줄 알고 이 책을 샀습니다. 하지만 거저 얻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독자로, 참견꾼으로(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철수엄마로), 아이들과 함께 열심히 읽으며 누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많이 부탁드립니다. 저자의 말씀대로 힘 빼시고 편안하게 쓰세요. 건강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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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랑각시 방귀 소동 길벗어린이 옛이야기 9
김순이 글, 윤정주 그림 / 길벗어린이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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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면서도 좀 색다른 방귀쟁이 며느리 이야기이다.

 

옛이야기를 재화할 때는 중요한 화소를 생략하거나 맘대로 바꿔버리면 안된다고들 한다. 이건 좀 심하지 않나? 교육적이지 못해, 이렇게 바꾸면 해피엔딩이 되니까 느낌이 더 좋을거야, 이런 등등의 생각으로 이야기를 바꿔버리는 것은 자칫 옛이야기가 가진 힘을 무력화시켜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한다. 옛이야기에는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인간의 내면을 다루는 상징이 숨어 있고, 그 상징은 아이들의 무의식에 작용하여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크게 놀랐다. 옛이야기는 그저 옛이야기이고 재미있게 재화할수록 더 좋은거 아냐? 하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 옛이야기 그림책들이 달리 보였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도끼눈을 뜨고 살펴보게 되는 것이 아닌가? 어디보자, 원형에 충실하게 재화한 이야기인가....?

 

아서라,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데, 내가 옛이야기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원형에 충실했는지 어떤지 정확히 파악이나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재미있게 읽어보자. 판단은 비평가들이 해주실 테고, 나중에 그것을 참고는 할 수 있겠지. 그냥 읽어라, 너의 느낌대로!!

 

그렇게 읽었다. ~ 재미있었다.^^*

 

원래 아이들은 방귀 소리만 나와도 좋아 죽는다. 뭐 달리 개그가 필요없다. 이 책은 그 탁월한 개그소재인 방귀를 선택했으니 일단 절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다. 그런데다가 작가가 배치한 자잘한 소재들도 깨알같은 재미를 선사한다. 시집간 갑순이가 혼자 있는 데서 방귀 좀 뀌려고 뒤란에 가면 시동생이, 부엌에 가면 시어머니가 따라 들어와 진땀이 팍팍 솟아나는 장면을 보면 쿡쿡 웃음이 삐져나온다. 돼지밥이나 닭모이를 주다가 저도 모르게 조금 새어나온 방귀에 기절해버리는 돼지와 닭들. 뱅뱅 돌아간 그 눈들. 아이들이 배꼽을 잡을 듯하다.

 

그렇게 방귀를 참다 갑순이는 얼굴이 노래져버렸다. 이른바 노랑각시가 된 것이다. 걱정하던 가족들은 이유를 알게 되고, 맘대로 방귀를 뀌라고 말해준다. 갑순이는 식구들에게 단단히 준비를 하라고 이른다. 이제 기존 옛이야기에서 많이 본 장면이 나온다. 시어머니는 솥뚜껑을 잡고, 시아버지와 신랑은 문고리를 잡고, 시동생들은 기둥에 몸을 꽁꽁 묶고.... 여기에서는 그림작가의 재치가 돋보인다. 동작 뿐 아니라 표정들도 얼마나 웃긴지, 거기다가 우리의 갑순이는 헛둘헛둘 준비운동까지 하고 있네?

 

드디어 방귀를 뀌려는 순간이다. 그런데 다른 책에서는 못보던 사람이 구석에 보인다. 옆집 영감님이다. 웃음코드를 위해 투입한 조연.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고 계신다.

드디어 방귀는 터졌고 우리가 아는 대로 모든 것들이 그 바람에 날려갔다. 가족들은 대비를 해서 괜찮았지만 돼지와 닭, 웬만큼 가벼운 세간살이들, 그리고 영감님 또한 당연히 날려갔다. 그런데 영감님이 날려가 떨어진 곳을 보고 푸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여기는 한양인가 보다. 그리고 때는 개화기. 화면 중간에 전차가 보인다. 휘둥그래진 영감님의 눈을 보라! 구경 제대로 하시겠구나!

 

다른 방귀쟁이 며느리 책에서는 큰 방귀를 뀌고서 며느리가 쫒겨나는데, 이 책에서는 그런 내용이 없다. 시동생들은 낑낑거리며 먼 동네까지 가서 돼지들을 다 몰고 오고, 시부모님들은 농기구와 세간들을 손보고, 신랑은 지붕을 고치고, 며느리는 장독대에서 깨진 장독들을 손보고 있다. 그리고 나서 갑순이는 뀌고 싶을 때 방귀를 뀌며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아 참! 영감님! 영감님은 거지꼴이 돼서 보름 후에 나타났는데 만면에 웃음이 가득하다. 구경 한 번 잘했다며. 그래서 갑순이가 언제 또 방귀를 뀌나 기웃거리신다는데, 이제는 날려갈 일은 없겠지?

 

쓰고 보니 옛이야기의 원형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개작함으로 인해서 옛이야기의 가치를 일부라도 상실하게 된 것인지, 나로서는 파악을 못하겠다. 하지만 나는 무릇 이야기라면 재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면으로 본다면 이 그림책은 자기 할 몫을 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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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편지 왔어요 작은걸음 큰걸음 5
조 외슬랑 지음, 정미애 옮김, 클레르 프라네크 그림 / 함께자람(교학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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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녀와 할머니(그냥 할머니도 아닌 증조할머니)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손녀인 아나벨은 12살, 할머니는 80이 넘으셨으니 나이 차이는 무려 70년! 공감대가 있을까? 

 

주고 받은 편지가 책 한권이 되었으니 공감대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난 젊었을 때 나이 40이면 다 살은 건 줄 알았다. 감정도 젊은 사람의 감정이 따로 있는 건 줄 알았다. 이를테면 설레임이나 기대, 감동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 난 40대를 살아가고 있고 그 모든 감정들이 내 안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시큰둥함이나 무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떤 감정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 60이 되면 달라질까? 80이 되면?

 

늙는다는 것이 감정의 소멸을 의미한다면 이들의 소통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소통을 했고, 나이를 넘어선 공감을 이뤘다. 

 

아나벨이 어른스럽고 조숙했거나, 할머니가 나이값을 못하는 사람이어서 통했던 게 아니다. 오히려 아나벨은 사춘기 여자아이의 모습 그자체이고 할머니는 할머니다웠다. 그래서 통했다고 난 생각한다. 역할로 치자면 할머니의 역할이 더 컸다고.

 

왜 그런 생각을 했냐 하면 아나벨의 초기 편지를 보고는 답장할 마음이 눈꼽만치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할머니라면 말이다. 컴퓨터 자판 연습으로 할 수 없이 편지를 쓴다는 뉘앙스나, 아파서 부은 할머니의 발을 보고 리본만 두르면 선물처럼 보일거라는 둥 날씨가 거지 같다는 둥 무례한 표현들이 있어서인지 정이 가질 않았다. (내 손녀가 아니라서 그러나?)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소한 표현에 집착하면 큰 것을 놓친다. 편지가 거듭되며 이들의 소통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간다. 

 

타이타닉 영화를 보러간다는 손녀에게 "화창한 날씨에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틀어박혀 끔찍한 여객선 침몰 사고를 다룬 영화를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는 할머니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너무 지루하고 어딘가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던걸요." 하는 손녀의 귀여운 논쟁도 볼 수 있고 친구와 절교하게 된 이야기, 전쟁에 희생된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 등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털어놓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거침없이 편지를 쓰는 아나벨에 비해서 늙은 할머니가 꼬박꼬박 편지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노쇠했고, 아픈 발은 그 증세가 심해져 결국 절단수술을 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편지를 썼다. 소녀시절 친구를 잃게 되어 후회하는 이야기, '네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이야기....

 

마지막 편지는 할머니의 편지다. 아주 편안하고 따뜻하고 침착하고 잔잔한 유서와도 같았다. 바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린 삶이 죽음의 반대라고 알고 있지.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구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질 때면 내 몸이 거북해지면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 같단다. 삶 자체가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그저 몸이 무거워지는 거야...." 

 

두 사람 중에서 내 위치는 아무래도 할머니에 더 가까운가 보다. 어느새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읽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나벨이 고마웠다. 딱히 내켜서 쓴 게 아니었다 해도, 시작은 아나벨이 했으니까. 그리고 나와의 소통 속에서 조금씩 커가고 있는게 보이니까.... 내 말을 들어주었으니까, 나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늙고 병들고 한쪽 발마저 없는 내가 외롭지 않게 이세상과 작별할 수 있게 해주고 있으니까....

 

모든 소통의 문의 닫혀버린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분들이 과연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까? 행복하게 이 세상과 작별할 수 있을까? 휴대폰과 SNS의 과잉소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은 또 어떤가? 이들에게 질적인 소통이란게 있을까? 이들은 과연 누구와 깊이있는 마음의 나눔을 할 수 있을까? 

 

120쪽 정도의 분량에 문장도 어렵지 않기는 하지만 고학년이 읽으면 좋겠다 싶다. 하지만 이해의 층위는 다르더라도 3학년 정도면 읽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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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사과를 딴 소녀 옛이야기 읽으며 치유 1
김지예.차인우 지음, 성은혜지 그림 / 해솔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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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좋아하고, 아이들과 함께 책읽기를 좋아한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아이들에게 고루 권해주는 편인데 그동안 옛이야기책은 구색을 맞추기 위해서 끼워넣었을 뿐 그 자체에 흥미를 갖지는 않았었다. 옛이야기의 특징인 인물의 전형성과 극단적인 스토리 등을 개인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 지난 겨울, 옛이야기의 상징성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알고보니 옛이야기가 그랬던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상징으로의 의미가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옛이야기를 재화할 때는 원형을 손상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어린이들에게 적당하지 않다거나 교훈적이지 못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내용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면 옛이야기의 상징성에 큰 손상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상징은 무의식에 작용하는 것이고, 그래서 모르는 사이에 옛이야기는 아이들의 무의식에서 치유의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 두 분은 이에 대해 깊이 연구한 학자이고 치료사이다. 이 책에 신뢰와 기대를 갖게 되는 이유이다.  

 

이 책은 '옛이야기 읽으며 치유'라는 시리즈의 첫 권이다. 옛이야기의 치유 기능을 표방한 책들이라니, 솔직히 솔깃하기도 하면서 좀 뜨악하기도 했다. 아이들한테 "자, 치료하자. 이건 약이야."하고 책을 들이밀면 과연 읽고 싶을까, 그리고 그렇게 다 알고 읽은 책이 과연 치유기능을 할까 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어른들이 굳이 강조하지만 않는다면 아이들은 그런 것에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이야기 중심으로 읽어나갈 것 같다. 처음 가졌던 기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싶다. 옛이야기의 상징과 치유에 대해 깊이 연구한 저자들이니 지금까지 출간된 옛이야기 책들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오류들을 발견하지 않아도 될 것이니까.  

 

이 책은 옛이야기들 중에서 자매 이야기만 골라 묶었다. 자매 이야기의 대표격인 콩쥐팥쥐를 비롯 4편의 자매 이야기가 실려 있다.

 

첫번째 이야기 <황금사과를 딴 소녀>에서 구박하는 새어머니와 이복자매들 모티브는 콩쥐팥쥐와 동일하다. 돌아가신 친어머니를 연상시키는 조력자 모티브도  비슷하다. 여기서는 염소인데, 새어머니가 죽인 염소들을 묻은 자리에서 황금사과나무가 자라난다. 왕자의 잔치와 신발 모티브는 없는데, 대신에 황금사과를 따는 사람이 왕자님의 배필이 된다. 당연히 이야기의 주인공인 두눈이만이 황금사과를 딸 수 있었다. 결말에서 두눈이는 새어머니와 이복자매들을 용서하고 함께 살게 된다.

 

두번째 이야기 <콩쥐팥쥐>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아는 이야기다. 그런데 콩쥐가 사또와 결혼한 이후의 이야기가 우리가 보통 아는 이야기보다 좀 더 길다. 팥쥐가 콩쥐를 연못에 빠뜨려 죽이고 대신 콩쥐 행세를 한다. 콩쥐는 불에 탄 연꽃에서 구슬이 되어 남았고, 나중에 사또 앞에서 다시 콩쥐로 나타난다. 결말은 위의 이야기와는 달리 팥쥐가 죽음을 맞고, 그 시신을 본 새어머니도 미쳐버리는 비참한 결말이다.(내가 듣기로 어떤 판본에서는 팥쥐의 시신으로 젓갈을 담그는 이야기도 나온다는데 여기에선 그런 이야기까지는 안나온다 - 아 근데, 삽화에 보면 장독대가 나오고 그 중 한 항아리의 뚜껑이 열려 있다...ㅠㅠ) 저자의 해설을 읽어보니 "팥쥐는 콩쥐를 괴롭힌 것에 그치지 않고 연못 속에 빠뜨려 죽였기 때문이지요. 또한 팥쥐는 콩쥐 속에 있는 또 다른 마음인 분노, 타나토스입니다. 팥쥐가 죽었다는 것은 이런 마음들과 분리되었다는 것이지요."  

 

옛이야기에선 잔인하게 죽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상징을 이야기하는 분들이 이것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해석하시는 것을 많이 보게 된다. 즉, 자신의 또다른 면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분리, 극복으로 해석된다. 정말 그런가? 교대 다닐 때 국문학 수업이 있었는데 자기가 맡은 작품(옛이야기는 아니었고 소설)의 상징에 대해 분석하는 과제가 있었다. 그때 눈에 띄는 대로 마구잡이로 신나게(?) 해석을 하면서 "뭐, 쉽네. 귀에걸면 귀걸이네." 이러면서 과제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내가 했던 사이비 해석과는 물론 차원이 다르겠지? 많은 학자들이 공통적으로 해석해내는 상징이라면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이겠지? 나도 어릴적에 이 작품들을 읽었는데,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나의 무의식에서는 이런 과정들이 있었겠지? 라고 생각을 해본다. 학문이 짧아서 어느정도까지 될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살펴보고 싶은 분야이다.   

 

세번째 이야기는 <베 짜는 큰딸, 베 메기는 작은 딸>, 네번째 이야기는 <지혜로운 처녀> 이야기다. 세번째 이야기는 해석이 아주 흥미로웠고, 지혜로운 처녀 이야기는 자녀에게 안심(?)하고 읽히고 싶을만큼 매우 교훈적이다.^^

 

이 시대는 아이들을 몰아가며 억누르는 시대이고, 당연한 귀결로 마음이 아픈 아이들이 옛날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럴수록 옛이야기는 더 큰 가치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 같다. 저자들이 이런 기획을 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나도 더 많이 알아보고 싶다. 단, 아이들에게 먹일 때는 맛있는 밥으로 먹이고 싶다. 약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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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개 따먹기 법칙 - 제8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4학년 1학년 국어교과서 국어 4-1(가) 수록도서 작은도서관 33
유순희 지음, 최정인 그림 / 푸른책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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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반 아이들과 함께 책을 읽을 때 문학도서의 경우 몇 명의 작가들을 기본적으로 정해 두고 골고루 읽히려 노력하는 편이다. 권정생, 송언, 황선미, 유은실, 문선이 님 등 몇 분을 빼놓지 않고 있다. 거기에 추가하고 싶은 작가가 한 분 더 생겼다. 바로 이 책의 작가인 유순희 님이다.

 

아직 다작을 하신 작가는 아니지만 작품의 수준이 한결같이 나를 감탄시킨다. 내가 어떤 작가를 좋아하게 되는 싸이클은 대체로 이렇다. 잘 모르는 작가의 책을 읽었다-그 작품에 꽂혔다-작가 이름으로 검색을 한다-다른 작품을 찾아서 읽어본다-다른 작품도 마음에 든다-그 작가의 다음 작품을 기다린다.

 

사실 이 분의 비교적 최근작을 먼저 읽었다. <우주호텔>이라는 책이다. 분량이나 글씨 크기로 봤을 때는 저학년용이다. 하지만 그 주제는 내 마음에 커다란 무게로 내려앉았다. 서평을 쓰기도 힘들 만큼. 이후로 이분의 작품을 찾아 읽다가 오늘 이 책을 손에 잡았다. 우주호텔보다 느낌은 가볍지만 여전히 알차다. 짧은 동화 속에 이렇게 꽉 찬 내용이 들어 있다니.

 

책의 서문에 작가가 떡하니 이렇게 써놓았다. "여러분도 지우개 따먹기 놀이를 해보세요."

안돼~~ 그건 일종의 사행성 게임이란 말이야. 그리고 뒤이어 벌어질 교실의 풍경은 안봐도 비디오란 말이야.

하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내 마음은 한 걸음 뒷걸음질을 쳤다. 쉬는시간에만 하도록 하지 뭐. 그리고 딴 지우개는 그 날이 끝나기 전에 돌려주는 걸로.

내가 이런 걸 규제해야 하는 어른이며, 또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으면 욕을 먹는 교사라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 이럴 때는 원망스럽다.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지우개 따먹기 대장인 상보와 그 짝꿍인 홍미가 번갈아 화자로 등장한다.

상보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빠와 살고 있으며(아빠는 넉넉하지 않지만 성실히 노력하는 좋은 사람) 공부도 그닥 잘하지 못한다. 유일하게 반에서 일등하는 게 있는데 바로 지우개 따먹기.

늘 좋은 냄새가 나는 깔끔한 홍미는 엄마가 조향사다. 지저분한 상보보다도 지우개 따먹기로 상보와 늘 맞서는 깔끔한 준혁이를 더 좋아한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할애한 내용은 상보와 준혁이의 엎치락 뒤치락 지우개따먹기 실황 중계다. 여느 스포츠 경기 못지 않게 꽤나 흥미진진하다. 그러면서, 상보가 아빠와 지우개따먹기를 하면서 하나하나 세워나간 지우개 따먹기의 법칙들이 소개된다. 10가지나 된다.

 

이건 어쩌면 인생의 법칙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그들 부자의 인생철학? 그렇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철학은 있다. 그것을 보면 그 사람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 라든가, 딴 지우개는 절대 돌려주지 않는다 등의 법칙을 세웠다면 그 사람의 수준은 딱 그정도인 것이다. 그럼 이들 부자의 법칙은 어떤 것인지 볼까?

 

공부를 잘하는 준혁이는 지는 걸 참을 수 없어 늘 상보와 대결을 벌이곤 한다. 그날은 준혁이가 모처럼 이겼다. 준혁인 그것 보라는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은 후, 딴 지우개를 창밖으로 던져 버린다. 상보는 법칙 4번을 들어 따진다. "지우개 따먹기 할 때는 상대방에게 예의를 지킨다. , 상대방이 기분 나빠할 행동을 일부러 하지 않는다."

시합이니만큼 되도록 이길 수 있기 위해서 법칙 5"납작한 지우개는 피한다.", 법칙 8"집중하기"와 같은 것들도 있지만

법칙 1"꼭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릴 것"

법칙 10"지우개 따먹기 놀이를 할 때 상대는 나의 친구이다."

와 같이 함께 하는 매너에 관한 것들도 있다. 이정도의 인생철학이라면 그들이 비록 평범하게 살고 있더라도 얼마나 멋진가!

 

마지막 훈훈한 마무리까지 언급하면 스포일러가 되겠기에 여기까지만.

한군데, 아이들은 그냥 지나칠만한 곳에서 난 울컥했는데 홍미가 상보 생일에 직접 만든 향수를 선물하는 장면이다. 거기에서 돌아가신 엄마 냄새가 났다.

"아빠, 내 몸에서 엄마 냄새가 나. 신기하지?"

아빠는 내 몸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울컥했다. 아빠는 향수를 부엌 창문가에 놓았다.

 

두번째 주인공인 홍미 엄마를 조향사로 설정할 만큼 작가는 '냄새'를 중요한 모티브로 삼은 것 같다. 아이들은 이해할지 모르겠는데 난 이것이 이 동화를 더욱 살아나게 했다고 생각한다. '냄새'가 갖는 의미.... 난 그게 뭔지 조금은 안다. 이처럼 작가는 짧은 동화에 이중 삼중의 의미를 겹쳐 넣었다.

 

마지막으로, 사람은 자신의 직업에서 가장 자유로울수 없는 법이라 교사인 나는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아이들에게 있어서 놀이란.... 삶이다. 그것을 통해서 삶을 배운다. 바로 상보가 인생의 법칙을 수립했듯이 말이다. 또한 아이들은 스스로 배운다. , 거기까지 시간은 좀 걸린다. 잠시 눈에 거슬린다고 차단하지 말고 참고 지켜봐 주어야 할 이유가 거기에 있다. 방향제시와 조언은 가끔 필요할 때도 있다. 그것도 직접적인 말 보다는 이런 책을 함께 읽는 것이 훨씬 더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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