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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편지 왔어요 ㅣ 작은걸음 큰걸음 5
조 외슬랑 지음, 정미애 옮김, 클레르 프라네크 그림 / 함께자람(교학사) / 2007년 8월
평점 :
손녀와 할머니(그냥 할머니도 아닌 증조할머니)가 주고받은 편지를 엮은 책이다. 손녀인 아나벨은 12살, 할머니는 80이 넘으셨으니 나이 차이는 무려 70년! 공감대가 있을까?
주고 받은 편지가 책 한권이 되었으니 공감대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난 젊었을 때 나이 40이면 다 살은 건 줄 알았다. 감정도 젊은 사람의 감정이 따로 있는 건 줄 알았다. 이를테면 설레임이나 기대, 감동 같은 것들 말이다. 지금 난 40대를 살아가고 있고 그 모든 감정들이 내 안에 고스란히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솔직히 시큰둥함이나 무관심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어떤 감정도 아직 죽지는 않았다. 60이 되면 달라질까? 80이 되면?
늙는다는 것이 감정의 소멸을 의미한다면 이들의 소통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이들은 소통을 했고, 나이를 넘어선 공감을 이뤘다.
아나벨이 어른스럽고 조숙했거나, 할머니가 나이값을 못하는 사람이어서 통했던 게 아니다. 오히려 아나벨은 사춘기 여자아이의 모습 그자체이고 할머니는 할머니다웠다. 그래서 통했다고 난 생각한다. 역할로 치자면 할머니의 역할이 더 컸다고.
왜 그런 생각을 했냐 하면 아나벨의 초기 편지를 보고는 답장할 마음이 눈꼽만치도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할머니라면 말이다. 컴퓨터 자판 연습으로 할 수 없이 편지를 쓴다는 뉘앙스나, 아파서 부은 할머니의 발을 보고 리본만 두르면 선물처럼 보일거라는 둥 날씨가 거지 같다는 둥 무례한 표현들이 있어서인지 정이 가질 않았다. (내 손녀가 아니라서 그러나?)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사소한 표현에 집착하면 큰 것을 놓친다. 편지가 거듭되며 이들의 소통은 점점 더 깊이를 더해간다.
타이타닉 영화를 보러간다는 손녀에게 "화창한 날씨에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틀어박혀 끔찍한 여객선 침몰 사고를 다룬 영화를 봐야 할 필요가 있을까?"는 할머니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너무 지루하고 어딘가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던걸요." 하는 손녀의 귀여운 논쟁도 볼 수 있고 친구와 절교하게 된 이야기, 전쟁에 희생된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 등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털어놓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거침없이 편지를 쓰는 아나벨에 비해서 늙은 할머니가 꼬박꼬박 편지를 쓰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할머니는 노쇠했고, 아픈 발은 그 증세가 심해져 결국 절단수술을 받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머니는 최선을 다해 편지를 썼다. 소녀시절 친구를 잃게 되어 후회하는 이야기, '네가 너이기 때문에' 사랑한다는 이야기....
마지막 편지는 할머니의 편지다. 아주 편안하고 따뜻하고 침착하고 잔잔한 유서와도 같았다. 바로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우린 삶이 죽음의 반대라고 알고 있지. 그런데 꼭 그렇지만도 않더구나.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느껴질 때면 내 몸이 거북해지면서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 것 같단다. 삶 자체가 무거워지는 게 아니라 그저 몸이 무거워지는 거야...."
두 사람 중에서 내 위치는 아무래도 할머니에 더 가까운가 보다. 어느새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읽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아나벨이 고마웠다. 딱히 내켜서 쓴 게 아니었다 해도, 시작은 아나벨이 했으니까. 그리고 나와의 소통 속에서 조금씩 커가고 있는게 보이니까.... 내 말을 들어주었으니까, 나에게 자기 이야기를 해 주었으니까, 그리고 늙고 병들고 한쪽 발마저 없는 내가 외롭지 않게 이세상과 작별할 수 있게 해주고 있으니까....
모든 소통의 문의 닫혀버린 노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분들이 과연 살아있다고 볼 수 있을까? 행복하게 이 세상과 작별할 수 있을까? 휴대폰과 SNS의 과잉소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은 또 어떤가? 이들에게 질적인 소통이란게 있을까? 이들은 과연 누구와 깊이있는 마음의 나눔을 할 수 있을까?
120쪽 정도의 분량에 문장도 어렵지 않기는 하지만 고학년이 읽으면 좋겠다 싶다. 하지만 이해의 층위는 다르더라도 3학년 정도면 읽기에 무리는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