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초등학교에서 작은거인 37
오카다 준 지음, 양선하 옮김 / 국민서관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카다 준의 판타지는 참 매력적이다. 가장 큰 매력은 따뜻함이고 두 번째는 자연스러움이다.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다르게 표현하면 천연덕스럽게?) 연결되는 판타지, 언제든지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도 되는, 잠깐 꾸었던 꿈이라 말해도 될 듯한 소소한 판타지. 악인도 구원자도 없는 작고 따뜻한 존재들이 만들어가는 판타지.

    

그는 외로움을 잘 아는 사람일 것 같고, 그 외로움을 건강하게, 아름답게 견디는 법을 아는 사람일 것 같다. 이 세상의 존재 중 외롭지 않은 것이 있을까? 그러나 외로운 존재들이 서로를 위해 살짝만 웃어주어도, 혼자인 밤이 외롭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깨닫는다. 그것이 이 책의 주제는 아닐지 몰라도.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학교의 밤에 대한 상상은, 일반적으로 공동묘지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그 기원은 모르겠으나... 여고괴담 류의 영화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젊었을 때의 기억인데, 스카우트 뒤뜰야영을 하면서 조별로 극기훈련 코스를 돌게 했을 때(그런 걸 왜 했을까-_-) 다른 어떤 곳보다도 학교 안이 무섭다고 꺅꺅 비명을 질렀던 아이들이 기억난다. 과학실 해골로 대표되는 밤의 학교의 기괴함.

    

그러나 이 책에선 다르다. 나도 여고괴담 류에 길들여져서인지 제목을 보고는 소름끼치는 기괴함을 연상했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쪽 복도 끝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또각, 또각, 또각.... 그런 건 전혀 나오지 않는다. 같은 밤이라도... 여긴 너무 따뜻하다. 그리고 포근하다.

    

주인공은 이 일 저 일을 하다가 잠시 초등학교의 야간 경비원을 임시직으로 맡게 되었다. 밤의 학교... 아무도 없는 그곳을 순찰하고 임무가 끝나면 숙직실에 혼자 있으면 된다. 무섭고 외롭고, 때로는 단조로워 지루할 것도 같은 그의 일상(밤의 일상)에 가끔씩 새로운 존재들이 나타난다. 첫날은 거인이었다. 앉은키가 학교건물만 한, 운동장에 가만히 앉아 달을 쳐다보던 거인.

    

커다란 녹나무를 중심으로 주변에 몇 그루의 나무와 꽃밭과 작은 사육장이 있는 가운데뜰은 밤이면 숲처럼 변한다. 바로 판타지의 주 무대다. 어떤 날은 학생 두 명이 플룻과 클라리넷을 가지고 나와 아름다운 중주를 하고, 어떤 날은 엄마토끼가 나타나 맛있는 스프를 끓여주고 숲으로 사라진다. 요술볼펜을 찾으러 온 할머니는 분실물보관소에서 임무를 다 마친 볼펜을 찾아가지고 돌아가고, 조난당한 사람 놀이를 하는 시덥잖은 청개구리도 만난다.

    

어느 날 밤에 과학선생님이라는 분이 나타나 과학실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뭔가 미심쩍고 수상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이 순진한 경비원, 두말없이 문을 열어주려 한다, 이제 뭔가 사고 한번 치는 건가? 싶어 약간 긴장하며 읽고 있는데... 끝도 없이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를 연발하는 자칭 과학선생님. 그가 한 일이라곤 과학실에 방치된 곤충채집통을 열어 풀벌레 몇 마리를 놓아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라진다. 숙직실로 돌아온 경비원의 눈앞에 방아찧듯 허리를 굽신굽신하는 방아깨비 한 마리가 보인다.

    

그랬구나....^^

    

그 이후 몇 번의 판타지와 함께 봄은 지나고 여름방학이 되고, 방학이 끝나고, 가을이 온다. 이제 그의 임시직 기간이 끝날 날이 가까워졌다. 밤의 초등학교 마지막 무대는 도서실이었다. 도서실 벽은 무수한 계단과 문으로 되어 있었다.(도서실을 그렇게 상상한 작가는 처음 보았다. 나도 그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상상만 해도 설레는 장면. 어린 시절에 얼핏 꾸었을 것 같은 꿈) 문에는 책의 제목이 쓰여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 이 느낌을 뭐라 말해야 할까... 오래된, 잃어버린 기억의 사진첩을 다시 찾아 열어보는 느낌? 거기에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중년이 된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본다.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다. 그 아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그 아이도 소중하고 지금의 나도 소중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빌빌하긴 마찬가지지만....  

 

주인공은 글을 쓰고 싶어한다. 어쩌면 아직 입문도 하지 못한 작가인 주인공은 바로 거장인 작가의 초기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학교를 바라보았더니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밤의 초등학교>에서 흘러나왔다.

    

3,4월 내내 바쁘고 일이 서툰 나는 별을 보며 퇴근을 했다. 구석교실에서 중앙현관까지 걸어나오는 길은 길고 깜깜하다. 휴대전화를 켜서 앞을 비추며 나는 내 발소리에 쫓기듯이 발걸음을 재촉했을 뿐이었다. 이젠 그렇게 늦게까지 남아서 일하진 않을 작정이지만, 퇴근하려 창문을 닫고, 화분을 살펴보고, 교실을 정리하며 좀 즐거운 상상을 해 볼 생각이다. 아이들이 정성으로 키우는 우리반 화분들은, 나비가 되면 아이들과 함께 날려줄 배추흰나비 애벌레들은, 우리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이야기들을 나눌까? 낮동안 우리 아이들의 일상을 지켜본 우리 교실은 아이들 하나하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밤의 교실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소리를 상상해도 이젠 무섭지 않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험 괴물은 정말 싫어! 작은도서관 31
문선이 글.그림 / 푸른책들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올해는 3학년 아이들과 알콩달콩 살고 있다. 알콩달콩...(?)이라 말하기엔 좀 양심이 찔리는 면이 없지 않다. 말이 많고 떠들어서 그렇지 순하고 착한 아이들인데도 소소한 사건들이 날마다 일어나는데다, 늘어난 교과목과 6교시라는 일과에 아이들이 아직도 적응을 못하고 있어서다.

 

작년에 2학년을 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왔다. 작년에도 난 늘 숙직기사님의 눈치를 보며 늦게 퇴근하는 1인이어서 한가했다고 볼 수는 없는데, 작년에 몸무게가 많이 늘었다. 그건 맘이 편했다는 얘기다. 내가 편한 만큼 아이들도 편했다. 애들이나 나나, 편한 마음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학교에 왔다. 공부하다 힘들면 놀았다. 개정된 통합교과서는 공식적으로(?) 놀아도 되는 여지를 많이 마련해 주었다. 작년 이맘때, <> 교과서를 배우며 아이들과 동네 근린공원에 가서 산책도 하고 꽃도 보고, 달리기도 하고, 고무줄놀이도 하고, 놀이터에서도 놀고, 쑥도 뜯고, 쑥버무리도 해 먹고.... 교실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온갖 교구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느라고 꼭 수업시간에 화장실을 가는 아이들한테 잔소리하는 게 일과 중의 하나였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올라와 시간마다 박혀 있는 각기 다른 이름의 교과목을 6교시까지 공부하려니 허걱! 할 밖에.... 아이들이 이상하다?’ 라는 눈으로 나를 본다. ‘뭐야...? 왜 이렇게 공부가 재미없는 거야...?’

 

그건 사실, 올해 내가 전혀 걸맞지 않는 부장이라는 직책을 맡아서 제대로 된 교재연구를 못하고 수업을 하니 발생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이제 저학년 단계를 벗어난 아이들에게 공부란 슬슬 부담이 되는 괴물로 다가오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엄마들도 그렇다. 그동안 잘 보내던 태권도나 피아노 이런 걸 끊고 뭔가 공부스러운 학원에 보내야 되는게 아닌지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상담 때 그런 얘길 하는 엄마들도 있다. 뭐라 말해주기 난감한 순간^^;;) 고민을 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노는 게 공부라지만 소위 말하는 학력신장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게 아닐까, 놀땐 놀더라도 수업에는 밀도를 좀 높여야 되는 게 아닐까... 밀도 높은 수업이라는 건 또 뭘까.......

 

마침, 내가 3학년 권장도서목록에 넣은 책 한권이 요즘 수업의 트렌드와 지향점을 반영하고 있었다. 문선이 님의  바로 이 책. 2010년도에 나온 책인데, 작가분이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면 ~ 이분이 요즘 협동학습에 빠지셨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책이다. 문선이 님은 교사는 아니다. 그런데 이렇게 동화 안에서 학습방법을 논하다니, 역시 작가분들은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준석이는 공부에는 크게 소질이 없는 3학년. 준석이 엄마는 귀가 얇은 이 시대의 평범한 엄마. 주변 엄마들의 말에 불안해져서 준석이를 들볶기 시작한다. 바로 이런 말들이다.

요즘엔 이 정도 공부시키는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실 지금도 준석이는 이미 많이 늦은 거라니까요. 그렇게 다 봐주다간 저만치 앞서간 아이들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게 돼요. 그때 땅치고 후회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니까요.”

 

거기에 전국단위의 학력평가까지 본다고 하니 엄마들의 극성은 날개를 달게 된다. 선생님도 어쩔 수가 없이 경쟁체제의 한 축을 떠받든다. 개인간의 경쟁, 학급간의 경쟁, 학교간의 경쟁... 선생님도 이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을 슬프게 확인한다. 이 책에서의 선생님은 나머지공부까지 시키며 아이들의 성적을 올리려 애쓴다. 나름 성실한 교사라고는 하겠다.

 

시달림에 지쳐버린 준석이가 어느 날 미래에서 온 시간경찰관의 시간투시기를 주웠다. 그것으로 시간을 미래로 돌리면 시험지를 미리 볼 수 있다. 나머지 공부(일명 꼴통클럽 사총사) 아이들은 그 시험지의 답을 알아내느라 서로 역할을 분담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서로에게 가르쳐준다. 소위 <협동학습>의 시작이다. 시작은 이렇게 매우 불미스러웠으나 아이들은 점점 즐겁게 공부하는 방법을 체득하게 된다. 친구를 이기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라 친구의 성취가 곧 나의 성취가 되며 내가 알아낸 것을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협동학습의 기본 원리인 긍정적인 상호의존, 개인적인 책임, 동등한 참여, 동시다발적 상호작용을 이 안에서 다 발견할 수가 있다.

 

현실성과 판타지가 공존하는 이 책의 마지막은 이렇다. 준석이네 반 아이들 모두가 미래로 돌아가는 시간경찰관에게 자신들도 미래로 데려가 달라고 조른다. 회의하던 선생님이 교실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친구들의 웃음소리만 교실 안을 맴돌고 있었다.

 

나로선 의외의 결말이었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맘에 드는 결말이다. 이후에 아이들이, 또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각자 상상에 맡기는 것이 가장 재미있지 않을까? 그래서 이 책을 읽은 아이들에게 뒷이야기를 꾸며 써 보게 했다.

 

아이들은 미래 감옥에 들어가고 시간경찰관은 다시 경찰관이 되었다. 그 시각 집에 있는 가족들과 선생님은 아이들이 없어져서 소란을 피웠다. 준석이네 엄마와 아빠, 서현이네 엄마 아빠가 선생님께 가서 물었다. 교장선생님도 깜짝 놀라셨다. 아이들을 찾으며 불렀지만 아이들은 그림자도 안 보였다. 아이들은 그때까지 감옥에 갇히고 지금까지의 일을 다 반성해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을 너무 힘들게 한 것이 미안해서 엉엉 울었다. 그렇지만 돌아온 사총사는 전보다 더 열심히 공부를 했다. 이번에는 서현이까지 함께 했다.

 

미래감옥에 가서 시간경찰관은 아이들에게 모두 한 권씩 책을 주며 이걸 다 같이 공부하며 서로 알려주고 예습, 복습을 하면 너희들 세계로 보내준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같이 공부하며 추억을 쌓아가고 다 푼 아이들은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온다. 선생님과 부모님들은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었다. 아이들은 평범한 생활로 다시 돌아갔다. 환하게 웃으며 학교를 다닌다. 활기차게.

 

평범하고 무난한 우리반 애기들, 이렇게 모범적인 뒷이야기를 짓다니....^^;; 아이들과 함께 이 책을 읽는 내내, 공부로 아이들을 짓누르는 어른들 중의 한명인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드는 생각은 아이들은 공부를 무조건 싫어하는 존재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얼마만큼 공부해야 하며 왜 공부해야 하는지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아이들은 공부해야 되는 이유를 자기 안에서 찾아낸다.(교사의 적절한 안내와 조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거기에 교사의 존재의미가 있다.)

 

동화는 내게 때로 무거운 책임감을 안긴다. 특히 이 책이 주는 책임감은 원망스러울 정도다. 아이들에게 시험으로 위협하는 교사가 되어서는 안되겠다, 그러나 아이들이 배움의 기쁨을 찾는 것은 적극 도와주어야 한다.

 

그럼 이제 책 타령은 그만하고 교재연구를 해야겠네? 먼지가 쌓인 협동학습 책도 다시 훑어보면서 아이들이 참여하며 서로 돕는 수업을 구상해봐야겠다. 수업이 자유자재로 되지 않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오지만, 하루에 한 장면이라도 아이들이 즐겁게 공부하는 순간을 본다면 나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공문과 각종 전달사항에 파묻혀 고개를 들지 못하는 나, 이제는 뭐가 옳고 그른지 따질 기운도 없는 나. 힘을 내라! 아이들이 기다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커다란 일을 하고 싶어요 모퉁이책방 (곰곰어린이) 25
실비 니만 글, 잉그리드 고돈 그림, 이주영 옮김 / 책속물고기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세상에 '크다' '작다' 라는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꼬맹이 알리는 하필이면 '커다란'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꼬맹이라 그럴 수가 없어서 자꾸만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들은 아빠가 그 '커다란'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지만 아들을 더욱 실망시킬 뿐이다. 그러다 앙리의 답변에서 한가닥 실마리를 발견한다.

 

"바닷가에 있는 등대같이 커다란 일이요."

"등대는 배들이 길을 잃을까 봐 밤바다를 환하게 비춰 주잖아요."

이제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꼬맹이 안에 있는 '커다란 일'의 개념을. 본인도 설명할 수 없이 다른 것들과 혼재되어 있는 그 개념을.

 

아빠는 이런 고민을 하는 아들이 사랑스럽다. 나도 어릴적에 그랬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는 아들에게 바닷가 산책을 제안한다.

 

이 산책에서 서로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해 하던 '커다란 일'에 대한 생각을 공유할 만한 자그마한 일이 벌어진다. 바위틈 작은 공간에 갇힌 물고기 한 마리를 건져서 바다에 놓아 준 일이다. 아빠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물고기를 바다로 돌려보내 준 것은 작지만 커다란 일이란다."

아빠는 아들에게 목마를 태우고, 아들을 그런 아빠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일'에 대한 공감이 생긴 흐뭇한 장면이다.

 

이 사회는 큰 일, 높은 자리를 추구한다. 여기에서의 크다, 높다의 개념은 액면 그대로의 개념과는 달라야 옳다. 굳이 표현하자면 '가치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부자의 대화처럼. 그런데 이 사회는 어떤가? 이 사회가 추구하는 경향대로라면 이들이 물고기를 살려 준 일은 '작지만 커다란' 일이 아니라 정말 '작아서 작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들 부자가 정말 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때로 작은 내 모습에 좌절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정말 좌절할 만한 일은 내가 그걸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아도 '커다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그림책 한 권이 나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질구레 신문 높은 학년 동화 28
김현수 지음, 홍선주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물과 유머, 둘 중의 하나를 고르라면 유머를 고르겠다. 웃을 일이 그다지 없기 때문에? 하지만 너무 가벼운 유머는 공허하다. 웃고 난 후의 허전함은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니다. 이 책을 덮으며 이 두 단어가 떠올랐다. 입은 웃는데 울컥하며 눈이 뜨거웠다. 작가의 유머는 수준급이지만 문제의식이 가볍지 않은 관계로 휘발성의 유머가 아닌 눈물을 동반한 유머였다.

 

사실 난 작가를 보고 작품을 고르는 경향이 강해서 이 작품은 그냥 지나칠 뻔했다. 처음 보는 작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 작가소개를 읽고, 괜한 친근감이 들었다. ... 나랑 동갑이었고(이유 치고는 참 유치하기도 하다) 교육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있고, 놀이와 옛이야기 공부를 하면서 아이들과 신나게 놀고 있다는 소개에 마음이 끌렸다. 꽤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처음이라는 것도 친근감의 이유였는데 그 밑에는 뭔가 좀 서툴겠지...? 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 같다.

 

! 서투름 속에 뭔가 신선함을 기대하며 책을 집어든 나는 첫 편에서부터 납작 엎드리게 되었다. 신선함은 맞는데 전혀 서툴지 않다! 내 머리 속에 있는 작가 폴더에 하나가 더 추가된다. 폴더를 열면 파일은 아직 하나지만 이제 눈에 띄면 무조건 파일을 추가하는 폴더가 될 것 같다.

 

진짜로 울다가 웃었던 장면이 있는데, 쭝끄빤썸의 한 장면이었다. 중국반점이라는 중국집을 그리 부른다. 여기에 아마도 작가의 성정을 닮았을 듯한 개성파 배달원 종철이가 나온다. ‘시화산 중국집 배달인 연합을 뜻하는 시배련의 회장을 자칭하는 그는 시배련 회원들과 술을 마시고 자기네 짬뽕국물로 해장을 하다 사장에게 뒤통수를 얻어맞기도 하지만 고객이 주문하면 어디든 달려가는 직업정신 투철한 배달원이다. 아찔하게 높은 공사장, 학교 쉬는시간에 주문질하는 괘씸한 중딩녀석한테까지도 배달을 해주었지만.... 이쁜이 미용실 사장님이 아들 때문에 애원하며 주문하는 그곳에만은 갈 수가 없었다. 시화산 중턱의 시위현장이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의 종철씨는 그곳까지 철가방을 들고 가긴 갔는데.... 그의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로막는 경찰과 실랑이하게 되었고, 실랑이 끝에 들은 말인즉, 우리 귀에 익숙한

이 자식, 완전히 빨갱이네!”

였던 것이다.

 

그렇게 결론 내린 경찰들은 철가방 안에 든 게 짜장면이 아닐거라 확신하고 철가방을 빼앗으려 종철씨와 몸싸움을 벌인다.

내놔 봐. , 거기 인화물질 들었지!”

우리는 천연 조미료 넣는당게요. 인화 거시기는 안 넣었는디요!”

이런 장면에서 풋! 하고 웃다가 엉망이 된 음식을 본 종철씨의 처절한 반응에 눈물이 나온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 와우, 이 장면을 보니 단편 영화 한 편 찍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장님한테 코웃음을 사던 그 시배련회원들의 배달 오토바이 부대가 대오정렬하고 기세등등하게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이후에 나오는 장면은 유머를 넘어 개그에 가깝다) 그리고 산 위와 산 아래에서 짜장면을 올려보내라! 올려보내라!” 라는 함성이 시화산을 쩌렁쩌렁 울리며 이 작품은 끝을 맺는다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단편 중 위에 소개한 작품이 네 번째이고 앞의 자질구레 신문, 불사신, 통노래세 편도 우리 동네사람들의 울고 웃는 이야기다. 구석구석을 살피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과, 어려움 속에서 더 빛을 발하는 유머가 역시 돋보인다.

 

마지막 작품곱딩이 특색 있게도 옛이야기 형식을 빌렸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곱딩이와 그의 가족이 최부자에게 당하는 내용은 처절하기 그지없다. 가족 사이의 애틋함을 표현하는 작가의 문장이 곱고 애절하다.

 

헛간에 갇힌 곱딩이는 눈물을 삼켰어.

다 나 때문이야. 내가 밥 훔치다 걸려서……. 나만 아니면, 나만 아니면…….”

누이는 곱딩이를 안아주지 못해 마음이 아렸어.

무슨 소리야. 너 때문에 우리가 사는데.”

집에 오지 말고, 아버지랑 멀리 도망가라. ? 누이야.”

누이가 헛간 문틈으로 곱딩이를 봤어. 새벽 어스름에 어둑한 헛간 속에는 곱딩이 눈만 빛나고 잇었어. 누이는 눈으로 안타까이 곱딩이를 쓰다듬었어.

 

옛이야기의 특징대로 이 작품에는 동물 조력자가 등장한다. 눈도 안보이고 냄새도 못 맡는 두더지인데, 마지막까지 곱딩이 먹기에도 부족한 밥을 꿀떡꿀떡 받아먹기만 하더니 그래도 마지막에 큰 도움을 준다. 그 도움이 곱딩이도 구원하고 자기도 구원한다. 옛이야기가 아이들의 무의식에 줄 수 있는 건강함을 잘 갖추며 아름답고 재미있게 써내려간 작품인 것 같다. 옛이야기를 공부했다는 작가의 이력이 헛되지 않았나보다.

 

동화를 많이 살펴보는 편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예전에 읽었던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기도 하고 이 작품과 저 작품이 엉켜서 형체가 흐트러지기도 한다. 그러던 와중에 오랜만에 기억에서 꼿꼿이 살아남을 작품을 만난 것 같다. 눈물과 유머를 함께 다룰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의 다음 책을 기대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사를 미워해도 되나요? 높은 학년 동화 24
최나미 지음, 홍정선 그림 / 한겨레아이들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난 동화를 즐겨 읽는 어른이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직종에서 일한다...... 아니 뭐, 이렇게 애매하게 말하지 말자. 난 초등학교 교사다. 10여년 전 겨울방학을 하면서 내년부턴 독서교육 좀 제대로 해보자결심하고 아무 연수도 신청하지 않았다. (엥?) 대신에 그 당시 돈으로는 꽤 컸던 30만원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50권 정도의 동화책을 샀다. 산 책을 다 읽고는 도서관으로 갔다. 그리고 방학 내내 동화만 읽었다. 뒤돌아보면 내 교직생활 중 가장 보람된 방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겨울방학, 내가 폭 빠졌던 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이었다. 활동적이지 못했던 나는 신 나는 놀이나 모험의 추억이 별로 없다. 대신에 닳도록 읽었던(책이 몇 권 없었기 때문에) 책과 라디오의 어린이 방송, 그것들을 통해 펼치던 상상 등이 추억으로 남아있다. 긴 세월을 보내고 다시 찾아 든 책에서 그때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을 때의 신기한 느낌이라니! 그렇게 나는 동화와 친구가 되었다.

 

그러면서 좋아하는 작가와 작품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동화는 수준이 낮아서 동화가 아니었다. 그 안에도 세상사는 이야기와 깊은 주제의식을 담을 수가 있었다. 때로 나는 동화를 덮고 나서의 여운에 휘청거릴 때도 있었다. 또는, 감동까진 아니어도 저절로 입맛이 다셔지게 재미나는 책들이 있었다. 모처럼 쉬는 날에 그런 책을 손에 잡으면 모든 시름이 없어지고 그저 행복해졌다. 그리고는 안달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아이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써내는 작가들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또는 입맛을 짭짭 다시며 읽는 동화의 즐거움은 조금씩 사그러드는 듯하다. 대신에 평가질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가 있다. ... 이 책은 소재가 신선해, 에이 이 책은 신파조라 공감이 안 돼, 이건 시종일관 왜 이렇게 어둡고 무거워, 이걸 애들 보라고 쓴 거야? 등등....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증상은 내가 순수 독자이던 때를 지나 책 선별자가 되면서부터 생긴 것 같다. 아이들은 이 책을 재밌게 읽을까? 이러한 주제가 아이들에게 먹힐까? 아이들의 내적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일까?

 

이제 와서 내리는 결론은, 그걸 내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정말 정말 아닌책을 제외하고는, 내게 좋았던 책이 아이들에게도 좋을지, 나를 울린 책이 아이들도 울릴지, 내가 웃었던 대목에서 아이들도 웃을지, 내가 실망했던 책은 과연 아이들에게 도움이 안되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걸 깨닫고 나니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겠다고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의욕이 없어져버렸다. 나는 나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읽는 거다. 그 과정에서 소통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그 이상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최나미 님의 이 책은 나의 이런 고민에 더 불을 붙이는 작품이다. 일단 나는 재미있게는 읽었다. 근데 그 재미는 입맛을 짭짭 다시는 재미는 아니었고 뭔가 좀 씁쓸한 미소를 짓게 했다. 아이들은 어떨까? 이 책에는 다양한 성향을 가진 아이들이 나온다. 아이들의 사회도 어른과 같이 복잡한 관계와 미묘한 감정들이 얽혀 있다. 이 안에서 다양한 상처들을 주고받는다. 이 안에 있는 누군가가 나일 수도 있고 가까운 친구일수도 있다. 이럴 경우 이 책의 가장 큰 강점은 공감이 될 것이다. 그것도 아주 격한 공감.

 

여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착한 아이>가 아니다. 어쩌면 나일 수도, 어쩌면 나한테 상처를 주었던 어떤 아이일 수도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대로 펼쳐진다. 어쩌라고? 그냥 그렇다고. 이런 아이도 있고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다고. 아빠가 주는 스트레스에 못이겨 아빠의 차에 범죄행위를 할 수도 있고, 착하고 배려 많은 친구가 왠지 싫고 짜증날 수도 있고, 사명감으로 살아가는 부모의 삶이 자신에게는 괴로움일 수도 있고, 공정한 경쟁이 불가능한 사회에 아예 삐딱해져버릴 수도 있다고.

 

아이들의 관계와 그 안의 다양한 양상을 어른이 이해하기는 참 힘들다. 거기에 관여하는 것은.... 무모한 짓일 때가 많다.(적절한 관여가 필요할 때도 있는데 그것을 구분하기는 참 쉽지 않다) 그럼 적당히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네? 그것 또한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남의 인생에 관여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데 그런 내가 교사이다 보니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때로 심적 부담과 고통이 따라온다. ‘아이들은 알아서 큰다, 그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능력이 있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데, 그게 신뢰인지 책임회피인지 모르겠어서 늘 헷갈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으려고 한다. 아이들과 공감대를 갖기 어려운 아줌마 교사인 나에게 아이들의 관계와 심리가 잘 포착된 이 책은 좋은 다리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이들에게 권장할 만한 책인가? 내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책인가? 이런 대답은 내가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으니 관두고, 적어도 이 책은 어떤 아이들의 내면을 매우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그려냈고, 그렇기 때문에 공감하기와 생각 나누기가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은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과정에서 어떤 이는 치유를 경험할 지도 모르지 않는가. 때로는 공감이 즉 치유일 때도 있더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