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크다' '작다' 라는 형용사로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될까?
꼬맹이 알리는 하필이면 '커다란' 일을 하고 싶다고 한다. 그런데 꼬맹이라 그럴 수가 없어서 자꾸만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 말은 들은 아빠가 그 '커다란'의 의미를 파악하려고 이런저런 질문을 해보지만 아들을 더욱 실망시킬 뿐이다. 그러다 앙리의 답변에서 한가닥 실마리를 발견한다.
"바닷가에 있는 등대같이 커다란 일이요."
"등대는 배들이 길을 잃을까 봐 밤바다를 환하게 비춰 주잖아요."
이제 어렴풋이는 알 것 같다. 꼬맹이 안에 있는 '커다란 일'의 개념을. 본인도 설명할 수 없이 다른 것들과 혼재되어 있는 그 개념을.
아빠는 이런 고민을 하는 아들이 사랑스럽다. 나도 어릴적에 그랬었나?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빠는 아들에게 바닷가 산책을 제안한다.
이 산책에서 서로 설명할 수 없어 답답해 하던 '커다란 일'에 대한 생각을 공유할 만한 자그마한 일이 벌어진다. 바위틈 작은 공간에 갇힌 물고기 한 마리를 건져서 바다에 놓아 준 일이다. 아빠는 그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물고기를 바다로 돌려보내 준 것은 작지만 커다란 일이란다."
아빠는 아들에게 목마를 태우고, 아들을 그런 아빠의 머리를 꼭 끌어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두 사람 사이에 '커다란 일'에 대한 공감이 생긴 흐뭇한 장면이다.
이 사회는 큰 일, 높은 자리를 추구한다. 여기에서의 크다, 높다의 개념은 액면 그대로의 개념과는 달라야 옳다. 굳이 표현하자면 '가치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이 책에 나오는 부자의 대화처럼. 그런데 이 사회는 어떤가? 이 사회가 추구하는 경향대로라면 이들이 물고기를 살려 준 일은 '작지만 커다란' 일이 아니라 정말 '작아서 작은'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이들 부자가 정말 귀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때로 작은 내 모습에 좌절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정말 좌절할 만한 일은 내가 그걸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아도 '커다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작은 그림책 한 권이 나에게 그것을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