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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소년 ㅣ 마스터피스 시리즈 (사파리) 14
엘로이 모레노 지음, 성초림 옮김 / 사파리 / 2023년 10월
평점 :
복잡한 인물 구조는 아닌데도 초반에 상황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시점이 혼재되어 있는데다가 인물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팔찌를 많이 찬 소녀’ ‘눈썹에 흉터가 있는 소년’ ‘손가락이 아홉 개 반인 소년’ 등의 설명으로 인물들을 칭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누구의 이야기인지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주인공은 1인칭 시점으로 이 책의 화자이지만 다른 챕터에서 3인칭 시점인 ‘그 소년’으로 나오기도 하기 때문에 더욱 헷갈린다. 짧은 챕터들이 교차되어 나오면서 서로 다른 시점에서 단서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초반부 읽기는 다소 난이도가 있다. 하지만 초반이 넘어가면서 퍼즐들이 제자리를 잡고부터는 아하, 하고 가닥이 잡히는데 그때부터는 읽기에 엄청 속도가 붙는다. 끝까지 읽을 수밖에 없다.
‘아하’라고 표현했지만 즐거운 알아차림은 아니다. 아픔과 충격, 심지어 죄책감을 동반하는 깨달음이다. 둔중하기도 하고 날카롭기도 한 깨달음.
소년은 어떤 사고 후 병원에 입원해 있고, 그동안 사느라 바빠 돌아보지 못했던 부모가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소년을 돌보고 있다. 소년은 괴물, 슈퍼파워, 투명인간 등의 표현을 해서 부모 뿐만 아니라 정신과 의사선생님까지 혼란에 빠뜨리는데.... 어떤 시점 이후로 자신이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굳게 믿는다. 여기에서 제목이 나왔겠다. 보이지 않는 소년(invisible)
제목만 보아도 이 책이 학교폭력을 다루었구나 하는 짐작을 할 수 있다. ‘투명인간 취급한다’는 표현을 우리는 쉽게 쓰고, 그런 형태의 폭력이 더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내 눈물샘을 자극한 것은 투명인간 취급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소년의 확신이었다. 자신의 슈퍼파워로 드디어, 투명인간 능력을 갖게 되었다고 믿는 확신 말이다. 투명인간이길 간절히 바랄 만큼 지독하고 집요했던 괴롭힘, 그리고 투명인간이어야만 말이 되는 주변인들의 외면. 이런 것들이 그 소년에게 그런 확신을 갖게 만들었다.
『“그래, 그거였네!”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이제 모든 게 이해되었다. 사람들이 결코 날 도와주지 않고, 아무도 날 보지 못하고, 날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건.... 바로 내가 투명인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나는 침대에 누워 모처럼 행복했다. 너무나 행복했다.』 (252~253쪽)
‘눈썹에 흉터가 있는 소년’은 그 소년과 등교를 같이 하는 절친이다. 하지만 소년이 괴롭힘을 당할 때 항변하거나 막아주거나 어른들에게 알려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요청하지 못한다. 언제나 머뭇거리기만 한다.
‘팔찌를 많이 찬 소녀’는 소년과 마음속으로 서로 좋아하는 사이다. 위의 눈썹 소년보다는 도우려는 마음이 크긴 하지만 별 도움이 안된다는 면에서는 다를 게 없다. 오히려 무력하고 처참하게 당하는 모습을 좋아하는 여자아이한테까지 보였다는 자괴감만 더 커진다.
이상 두 아이는 방관자이다. 이 외에도 방관자는 많다. 대충 알아챘을 것 같은데도 굳이 알아보려 하지 않는 선생님들, 특히 보고를 받고도 문제 만들기 싫어서 그냥 넘기는 교장선생님, 학급의 모든 아이들, 동네 사람들까지 소년 주변의 대다수가 방관자다.
‘손가락이 아홉 개 반인 소년’이 이른바 가해자다. MM이라 불리는 이 소년은 낙제를 해서 학급에서 나이가 두 살이나 많고 덩치나 힘도 강하다. 이 아이의 심리묘사도 매우 잘 되어있다. 그를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저 아 이런 아이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하는 이해가 가능하다. 타고난 성품일 수도 있지만 이 아이도 상처가 있다. 어릴 적 큰 사고를 당했고(손가락 반 개가 없어질 정도의) 그 원인을 제공한 부모는 소년에게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지만 눈길을 외면한다. 죄책감이 크면 오히려 그런 형태로 관계가 형성되기도 한다. 소년은 치유되지 않는 아픔을 늘 품고 살았다. 그리고 그 서러움은 약한 대상 앞에서 분노로 표출된다.
이러한 구도일 때, 방관자들이 자신의 위치를 방어자로 옮겨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우리는 알고 있다. 방어자가 많을수록 가해자는 힘을 쓰지 못한다. 하지만 이 책에서 방어자는 오직 한 명이었다. 문학선생님. 등에 끔찍한 화상 흉터를 드래곤 문신으로 덮는 장면에서 이분의 과거 상처를 짐작한다. 자신의 상처를 품은 드래곤의 힘은 꽤 강해서, MM을 떨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부족이었다. 방관자들의 철벽은 그렇게도 강하다.
이 숨막히는 서사 가운데서 학폭의 성질을 알려주는 문장들이 눈에 띈다.
『어떤 특별한 짓을 저질러야만 괴물이 되는 게 아니라, 때로는 아무 일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괴물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걸, 그때 깨달았다.』 (101쪽)
『상대의 두려움. 그건 MM 같은 아이들에게는 휘발유나 다름없었다. 악한 마음이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143쪽)
『악당들도 때로는 따뜻한 위로가 필요하니까.』 (302쪽)
문학선생님은 수업 중 MM과 대다수의 방관자 앞에서 여러 가지 키워드로 그들의 각성을 촉구했다. ‘겁쟁이’로 가해자의 괴롭힘이 얼마나 찌질한 짓인지 알려주었고 ‘쥐덫’으로 ‘나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그건 내 문제가 아니야.’ 라고 생각하는 방관자들이 가져오는 결과를 심각하게 알려주었다. 이 책은 가해자와 방관자들의 극적인 변화, 즉 회개를 보여주진 않는 작품이다. 그건 독자의 다음 상상에 맡긴다. 다만 피해자가 어떤 막다른 길까지 몰리는지, 그 숨막히는 백척간두의 지점까지 갔다가 가파르게 끝난다. 피해자의 고통과 아픔을 이보다 잘 표현하기는 힘들 것 같다. 그에게는 천만다행이게도 루나가 있었고, 드래곤이 있었다. 루나는 사랑, 드래곤은 관심과 정의를 대표한다. 하지만 방어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었다면 그렇게 깊은 고통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각성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라고 생각된다.
학폭은 요즘 학교에서 가장 민감한 문제라 이 책의 학교처럼 듣고도 모른 척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관찰을 게을리해서는 안될 것이다. 관찰의 지점, 개입의 지점, 도움의 지점을 섬세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보다 더 좋은 것, 가장 좋은 방법은 방어자들이 가득한 교실을 만드는 것이다. 두려움이 곰팡이처럼 자라나지 못하는 곳. 그런 토양을 만드는 데 이 책이 큰 동기부여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쉬운 책은 아니라서 중학생 쯤에게 알맞다고 생각되지만 초등 고학년에게도 읽히고 싶은 욕심이 드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