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듣는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114
정은 지음 / 사계절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에 청소년소설 한 권을 읽었다. 제목이 감각적이면서 많은 의미가 담겼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그랬다.

표지에 있는 두 사람. 헤드폰을 쓴 소녀는 청각장애를 갖고 있고 기타를 메고 안내견과 걷고 있는 소년은 시각장애가 있다. 둘은 둘도없는 친구가 됐고 그중 소녀가 이 책의 화자다. 이야기에 장애가 빠질 수는 없지만 그건 일부일 뿐이다. 둘 다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결핍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고유한 특성, 나아가 특별한 능력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작가의 시선에 동의한다.

청각장애인 수지는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탐색하며 이해할 방법을 찾아왔다. 수지만의 고요함은 소중한 세계였다. 하지만 인공와우 수술을 하게 됐고, 소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그 순간을 그렇게 다행이거나 감사한 순간으로 그려놓진 않았다. 세상을 느끼는 방법은 누구나 다를 수 있으며 그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만의 좁은 틀로 세상을 보는 나에게는 경종과도 같은 주제라 하겠다.

수지와 한민 두 청소년 주인공은 참 매력적이었다. 분명 친구 이상의 감정인데,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잘 세우며 서로가 잘 세워질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과잉감정으로 서로를 파먹지 않고 건강한 것을 궁리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이런 관계를 나는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선호일 뿐이니 그렇지 않다 해서 탓할 일은 아닌 거겠지.

이 책에는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았다. 이 책을 높이 사는 이유다. 작가의 사유가 깊다는 뜻도 되겠다. 근데 한편으론 그렇게 완벽한 말들을 등장인물들이 한다는 점이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긴, 인물들도 내게는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특히 수지의 가족들. 그렇게 고고하고 이기적이며 사랑에 모든 가치를 두는 할머니도 이상했고(그 사랑에 가족애, 인류애 등등은 포함 안되고 그냥 연애감정 뿐인 듯했음), 입다물고 희생적으로 살다 일거에 떠나버린 엄마도 참 싫었고, 혼자 남은 수지를 공항으로 불러내 거기서 떠나버리는 고모의 쌀쌀맞음도 맘에 안들었다. 그렇지만 이 책이 말하는 게 뭔가! 다 자기만의 삶이 있다는거. 내가 왜 남의 인생에 맘에 드니 안드니 판단을 한단 말이냐. 주옥같은 문장 몇 개 적어두고 마치겠다. 오늘은 길게 쓸 기운이 없기도 하고.ㅎㅎ

"거리엔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 많은 화는 대체 어디서부터 생겨난 걸까? 세상에 화가 이렇게 많은 것은, 화가 두 배로 늘어나는 성질이 있어서인 것 같다. 자신이 가진 화를 나에게 쏟아붓고 본인은 화가 없는 상태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화는 복사가 되어 두 배로 늘어날 뿐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 이렇게나 화가 많아진 것이다......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들을 생각해 주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나를 한번이라도 더 생각해 준다면,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만이라도 상상해 준다면, 내가 절망할 일도 줄어들 텐데." (화자인 수지)

“수지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행동하는 방식대로 너 자신에게 행동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너 자신과 친구가 되고 나면 너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거야. 불필요한 위로를 하지 않게 되지. 누구에게나 삶은 단 한 번뿐이지. 후회하지 않을 선택만 해야 해. 너의 삶이니까. 선택은 언제나 너 자신을 위해서 네가 하는 거야.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잊지 말아야할 것은, 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거야. 그 힘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의무가 있어. 그것만 잊지 말아 주렴.” (할머니)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충고는 이거야.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많을수록 잘 살고 있다는 증거야. 그런 순간이 네 인생을 바꾸는 거야. 지나고나서 돌아보면 그런 순간들이 인생을 덜 후회하게 만들었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을 많이 만들어" (고모)

"나는 세상을 낯설게 보게 하고 싶어. 사람들 내면에 이미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낯선 감각을 깨우쳐 주고 싶어. 감각을 확장시키고 재분배해서 사람의 몸이 바뀌게 하고 싶어. 몸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니까. 근본적으로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사람과 세상을 바꾸고 싶어. 그걸 언어로 하면 시인이겠지? 우리는 그걸 산책을 통해서 하고 있는 거야." (한민)

둘이 만들어낸 노래, <미스 블랙홀>을 혹시나 하고 멜론에 검색해봤더니, 있네! 작사는 당연히 이 책의 작가고.
"우주가 태어나는 소릴 들을 거예요.
눈을 감고 귀를 닫아요.
그래야 들을 수 있어요."

신체능력 중에서 쓸만한 건 걷기 밖에 없는데, 나도 제대로 된 산책을 해봐야 될거 같다. '산책을 듣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재미있다! 어린이 연극 1~4 세트 - 전4권 재미있다! 어린이 연극
진형민 외 지음, 이주희 외 그림 / 창비 / 2020년 2월
평점 :
절판


현장의 수요에 따른 출판사의 기획성 도서라는 의도가 물씬 풍기는 책이다. 그렇지만 한 권 한 권의 내용은 아주 귀했다. 순수(?)하기도 하고.^^;;; 수요에 맞추느라 급조한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필진들의 역량과 경험과 내공이 탄탄해서일 것이다.

1권 <우리 같이 연극할래?>는 총론이자 안내서 같은 책이다. 산딸기 초등학교의 연극반 아이들이 연극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펼쳐지며 연극의 요소들과 연극에 필요한 것들, 준비와 연습, 공연에 이르는 과정들을 알려준다. 오진주를 비롯한 연극 동아리 아이들이 자신들의 빛깔에 맞는 역할을 맡아 기여하며, 한마음으로 연극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롭고 도전의식을 준다. 마지막 장에는 색다른 연극(인형극, 그림자극, 낭독연극)에 대한 간단하지만 알찬 정보도 들어 있다.

2권부터 4권까지는 세 명의 작가가 쓴 희곡집이다. 그동안 아이들과 해볼만한 대본을 구하기 어렵다는 말씀들을 많이 하셨는데, 이 대본들로 상당히 해소가 될 것 같다. 문학동네에서 나온 어린이 희곡 시리즈도 좋은데 이 책들도 좋다. 특히 교실연극임을 감안하여 난이도를 낮추고 길이도 짧게하여 손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신경쓴 점이 돋보인다.

2권 <옛날옛날 어느 마을에>는 1권을 쓰신 진형민 작가의 희곡집이다. 창작희곡은 아니고 옛이야기 각색이다. 초등학교 연극에서 옛이야기는 가장 접근하기 무난한 장르다. 그런데 옛이이기를 연극으로 만들겠다고 아이들이 각색을 하면 옛이야기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해설이 80%가 되는 대본을 만들어내곤 한다.ㅎㅎ 이 책은 극 내용을 대사로 이끌어 가려면 어떻게 하는지 잘 보여주어, 대본 자체로서의 활용도 뿐 아니라 각색을 어떻게 하는지 참고하기에도 아주 좋다. 예를들면 이 책에선 주인공들 대사의 공백을 재주꾼1,2가 채워주며 극의 흐름을 돕는다.

3권 <이상한 게임>은 창작 희곡이다. 작가인 오세혁 님은 희곡작가이자 연출가라고 한다.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 명성을 듣지는 못했지만 저명하신 분이 어린이책 작업을 하신 것에 대해 고맙게 생각한다. 가장 능력있는 이들이 가장 어린 사람들을 위한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실린 희곡들은 정말 맘에 들었다. 연극으로 구현될 것까지 생각하기 전에, 그냥 문학으로도 충분히 좋을 만큼. 세 편이 담겼는데 모두 '이상한'으로 시작한다. 이상한 게임, 이상한 올림픽, 이상한 고백. 아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제목일 뿐 아니라, 내용에서도 아이들의 마음을 잘 담았다. 아주 건전하나, 아주 유쾌하고 신선하게.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 모습도 꼭 보고 싶다.

4권 <노랑이와 백곰>은 김중미 작가가 썼다. 작가의 동화 <모여라, 유령인형극단>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작가가 공부방 아이들을 데리고 공연을 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동화라고 했다. 그러고보면 이 시리즈 중 한 권을 김중미 작가가 맡은 것은 아주 당연해 보인다. 특히 본인의 오랜 경험을 살려 인형극 극본으로 쓴 것이라 더 특별하다. 두 편이 담겨있다. 첫편 제목이 '노랑이와 백곰'. 노랑이도 백곰도 어디선가 들어본듯 한데.... 작가의 <꽃섬 고양이>라는 단편집에서 노랑이는 '꽃섬고양이'에, 백곰은 '안녕, 백곰'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두 작품이 섞여 새롭게 탄생된 희곡이라 하겠다. 두번째편 '차복이 이야기'는 저승차사의 실수가 만들어낸 흐뭇한 에피소드다. 이 작품도 옛이야기를 각색한 것으로, '남의 복을 빌린 사내'라는 이야기를 모티프로 했다.

이 시리즈가 나온 걸 보고 1권 먼저 사보고 결정할까...? 하다 에라 모르겠다 4권을 모두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잘한 결정이었다. 일단은 학급문고에 넣고 희곡 자체를 즐기게 해본 후, 관심이 생기면 슬슬 연극으로 유도.... 될까?ㅎㅎ 어쨌든 요즘 어린이책 출판사와 학교는 어떤 의미에서 약간 공생하는 느낌이다. 좋은 콘텐츠를 생산해 주시는 분들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며, 나도 그만큼 고민하고 노력해야겠구나 다짐을 해본다. (넘 심하진 않게ㅋ) 이렇게 오늘도 즐거운 교실을 궁리하며!! 이 불안한 시기를 견뎌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꽝 없는 뽑기 기계 - 2020 비룡소 문학상 대상 수상작 난 책읽기가 좋아
곽유진 지음, 차상미 그림 / 비룡소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학년 분량의 짧은 동화인데 그 안에서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한다. 화자인 희수의 상황을 처음에는 알기 어렵다. 하지만 이야기가 흘러가면 알게 된다. 이야기가 짧으니 물론 금방 알게 된다. 그 상황은 아이가 겪을 수 있는 상황 중 가장 슬픈 것이라 보면 된다. 하지만 봄날의 햇살처럼 따사롭게 전개되며 마침내는 희망을 보여준다. 살아있고 살아가야 하니 어찌하든 희망을 붙잡아야 한다. 그 희망은 내면에서도 나오고, 주변에서 보내주는 마음으로 함께 완성된다.

 

희수가 아빠 바지를 헌 옷 수거함에 넣는 장면이 첫 장면이다. 평범한 일상일 수 있는 이 행위가 희수에게는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었던 것이다. “난 이상한 마음이 들었어. 바지가 내 배 속에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거든.”(5)

 

분명히 확인했던 주머니에서 이상하게도 500원짜리가 떨어지고, 희수는 고개를 갸웃하지만 그걸 가지고 문구점 앞으로 간다. 거기에는 뽑기 기계가 있었다. 이 책의 제목인 꽝 없는 뽑기 기계는 아니다. 그건.... 판타지의 공간에서 나온다. 희수 앞에 나타난 남자아이는 희수 손을 잡고 문구점 앞으로 데려간다. 그 앞에 있었다. 꽝 없는 뽑기 기계!

 

희수는 1등을 뽑았고, 상품은 문구점 안 상자에 담겨 있었다. 상자 안에서 나온 것은 다이노폴리스 로봇 같은 값나가는 물건이 아니었다. 아주 후줄근한 헌 물건.... 희수는 그걸 가져와 서랍에 넣는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순간... 희수의 상황이 파악되고 독자는 소름이 돋게 되지.....ㅠㅠ

 

두 번째 꽝 없는 뽑기 기계로 간 날에는 처음의 남자아이는 없고 여자아이가 있었다. 여자아이는 유쾌했고, 크게 웃어 주었고 용기를 주었다. , 그때 알아버렸다. 판타지 공간에서 만난 두 아이는 누구인지. 가슴이 먹먹하다.

 

선택적 함구증에 걸린 희수에게 전처럼 따뜻하게 다가와 말을 걸어주는 이웃집 영준이와 영준이 엄마. 교대로 희수 자매와 함께 지내 주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그리고 함께 아픔을 겪은 언니. 이들과 함께 시간이 흐르며 희수는 조금씩 조금씩 나아간다. 그리고 드디어 등교하게 된 날, 열어젖힌 교실 문 안쪽에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친구들의 모습이 눈부시다.

와아~ 희수 학교 왔다!

영준이와 아이들이 내게로 몰려왔어.” (66)

 

66쪽짜리 짧은 저학년 동화에 어쩜 이렇게 무거운 인생의 아픔을 담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픔과 슬픔이 어른들의 전유물이던가? 그렇지 않다.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다. 과제는 치유다. 그건 본인의 몫이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의 몫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 사람들에게 참 소중한 책이 될 것 같다.

 

아주 흔한 활동이지만, 우리반 아이들에게 편지를 써 보라고 하고 싶다. 발신자와 수신자는 마음이 가는대로 정해서. 독자가 희수에게, 희수가 판타지 속 남자아이에게, 판타지 속 여자아이가 희수에게 등 여러 방향으로 쓸 수 있겠다. 문학작품을 읽는 가장 큰 목적이 공감과 이해라면, 그것으로 우리 사는 세상이 조금 더 행복해지길 바라는 거라면, 이 책은 그 몫을 훌륭히 한다. 엄혹한 추위가 아닌 따뜻한 봄날의 슬픔. 안 슬플 수는 없지만 함께 해서 견딜 만하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2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브이를 찾습니다- 제9회 권정생문학상 수상작
김성민 지음, 안경미 그림 / 창비 / 2017년 6월
10,800원 → 9,720원(10%할인) / 마일리지 54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20년 04월 22일에 저장

우리 함께 웃으며- 평화
강정규 외 지음, 원종찬 외 엮음, 교은 그림 / 창비 / 2019년 2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20년 04월 22일에 저장

우리 여기에 있어!- 동물
김옥 외 지음, 원종찬 외 엮음, 안경미 그림 / 창비 / 2019년 2월
10,800원 → 9,720원(10%할인) / 마일리지 54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2월 27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20년 04월 22일에 저장

까만 밤
정유경 지음, 정호선 그림 / 창비 / 2013년 6월
12,000원 → 10,800원(10%할인) / 마일리지 600원(5% 적립)
양탄자배송
내일 아침 7시 출근전 배송
2020년 04월 22일에 저장



129개의 상품이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담임 선생님은 AI / 이경화 / 창비>



<와일드 로봇>에 이어 로봇이 주인공인 책을 또 읽었다. 아주 쉽게 생긴 이 책이 내게는 어려웠다고 할까.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감정이 바로바로 따라가지 못했다고 해야 하나. 느끼기보다는 이해해야 했다. 그래서 계속 반박자씩 늦었다.

안드로이드 로봇이 초등교실에 담임선생님으로 등장했으니 시대적 배경은 미래라고 해야겠으나 로봇 교사 외의 배경에서는 별로 미래의 느낌이 없다.

미래초 5학년 1반은 지원받은 아이들로 꾸려졌다. 지원 조건은 AI 선생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대목에 복선이 있었다. 작년 한민아 샘 반 아이들이 대부분 신청했다는 것. 그 샘은 어떤 교사였길래? 아이들이 주고 받는 말 중에서 추측하자면 젊고, 자유롭고, 사랑이 많고 아이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붓는 교사였던 것 같은데....

'김영희'라는 전혀 로봇답지 않은 이름의 선생님을 아이들은 '인지쌤'이라 부른다.(인공지능을 줄인것) 이들의 첫 대면과 수업은 웃음을 자아낸다. 인지쌤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ㅎㅎ 호기심과 짖궂음으로 AI 담임을 대하던 아이들도 점차 이 로봇을 '선생님'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 받아들이고 싶어하게 된다....? 딥 러닝 기능을 갖추고 미세파동 생체 에너지까지 갖춘 인지쌤과 더 교감하고 싶었던 아이들은 직접 쓴 '코노피오'라는 동화를 인지쌤에게 읽게 한다. 그 결과는......

결국, 인간은 감정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인가? 그래서 로봇에게도 감정이입을 하고, 더 나아가 감정을 가진 로봇이라는 설정을 한 문학도 계속 나오는 것일까? 진짜로 감정을 가진 로봇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건 좋은 것일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감정은 불안정하고, 때론 아름답지만 때로는 추하다. 그런 감정을 로봇이 가진다면 그건 몹시 위험할 것이다. 안정적인 감정만 갖게 한다면? 그건 감정이 아닐 것이다. 뭐 '유사감정' 정도 되겠지. 우리에겐 그런 거라도 절실한 것일까?

그리하여, 오류로 멈춘 인지쌤을 구하려는 아이들, 로봇 교사를 반대하는 아이들로 맞서는 양상까지 교실에는 나타난다. 여기에서 작가는 여러가지 이슈들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있다.

먼저 교장선생님.
"인간과 로봇의 차이점이 뭔지 아니? 자기 성찰 능력이란다. 잊지 마라. 자기 성찰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최고의, 그리고 거의 유일한 능력이란 걸." (101쪽)

그리고 한민아 선생님 사건을 잘 알고 있지만 뭔가 참고 계신 듯한 옆반 선생님.
"어디를 가나 로봇이 없는곳이 없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는 법을 배우는 학교에까지 로봇이 있다는 건 재앙과 같아. 이제 사람들은 작은 실수도 할 수 없어. 실수를 하면 해고를 당하고 로봇이 그 자리를 차지하지. 실수할 기회가 없으니 성장할 기회도 없다. 협업은 거짓말이야. 사람을 로봇과 경쟁시키는 거지. 누가 이길지 뻔하지 않니? 사람들은 점점 로봇에게 밀려나고 마침내 로봇처럼 폐기 처분될 거다. 이건 단순히 한민아 선생님을 복귀시키는 것보다 더 큰 문제야. 인간의 미래가 달린 문제지." (108쪽)

과거에 아이들이 한민아 선생님을 잃게 된 사연은 스치듯 지나간다. 선생님은 쫒겨났던 것이다. 그토록 아이들에게 정성을 쏟았던 선생님이 학부모들의 불같은 민원을 받고.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사적인 공간이니 법적인 잘못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선생님은 개인 비밀 블로그에 아이들과 학부모에 대한 욕을 진탕 써 놓았고, 반의 똑똑한 아이 하나가 그걸 해킹해서 만천하에 공개됐다. 그렇게 잘해주던 선생님이 뒤에서 쓴 자기 욕을 읽었을 때 그 뒤통수를 맞은 기분은? 짐작 가능하다. 또한 그런 욕을 개인 공간에 써갈긴 선생님 심정 또한 이해하고도 남는다. 물론 동종업계 사람이어서 그렇겠지.ㅠ

다시 초기화된 인지쌤이 교단에 서며 이야기는 끝나는데, 마지막 문장이 또 미묘하다. 이 책엔 여러 생각들이 엉켜 있다. 그 중에 아이들이 어떤 가닥을 붙잡을지 궁금하다. 내가 붙잡은 건? 두 가지다. 첫째는 4차 산업사회 운운이 시끄러울 때, "앞으로 인간이 갖춰야 할 것들은 더더욱 인간적인 것들이다. 기계가 할 수 없는." 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한 동의다.
둘째는, 엉뚱할지 모르겠지만 다시 일어설 기회다. 리질리언스(회복탄력성)의 중요성이라고도 하겠다. 좋은 모습만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학생, 학부모에 대한 부정적 감정을 비밀 공간에 퍼부어 놓은 한민아 선생님. 좋아했던 선생님에 대한 배신감, 원망, 그리움이 혼재된 아이들. 그리고 해킹하고 앞장섰던 그 아이.... 모두가 성찰할 기회가 필요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에게 필요한 건 회복의 기회다.

이경화 작가님의 책은 두번째 읽는다. 찾아보니 13년 전에 <장건우에게 미안합니다>를 읽고 썼던 서평이 남아있다. 두 편 다 교사의 처신을 고민하게 만든다. 작가는 어떤 계기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하다. 아래에 그 서평을 이어 붙이고 마치겠다.

-----------------------------------------------------











<장건우에게 미안합니다 / 이경화 / 바람의아이들>


이 책의 장점을 꼽으라면 단연 현실성이다. 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교무실로 부르는 것과 선생님이 교무실에 있다가 종례를 한다는 점만 빼고...(그건 중,고등학교에서나 있는 일이다) 이걸 보니 작가분이 현직에 계셨던 분은 아닌 것 같은데 초등학교 6학년 교실의 풍경과 아이들의 심리를 이토록 현실적으로 묘사할 수가 있나? 때론 몰래 카메라에 찍힌 나와 우리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쪽팔려 게임’ 그것 참 징하면서도 안 없어지는 골칫거리 게임 중의 하나다. 이 이야기의 발단은 거기에서 시작된다. 반듯한 모범생 반장 건우가 문제아 여자애들 무리가 했던 쪽팔려 게임 벌칙의 희생양이 되어 난데없는 뺨따귀 세례를 받은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의 반응이 정말로 의외다. 피해자인 건우에게 보내는 따뜻하지 않은 시선, 교무실에 불려온 가해자 여자아이들은 있었던 일을 종이에 썼을 뿐, 한마디 훈계도 듣지 않고 돌려보내진다. 오히려 남아야 하는 사람은 건우다. 남겨진 건우에게 선생님은 여자아이들의 가정형편을 상기시키며 이해할 것을 은근히 강요(?)하신다. 모범생 콤플렉스의 장건우. 치밀어 오르는 말들을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예, 선생님.”하고 돌아선다.

이 선생님은 현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생님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하시는지는 십분 이해하고도 남겠다. 선생님은 소외된 아이들, 부족함이 많은 아이들을 감싸고 채워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짐작컨대 사명감은 투철하되 경력은 다소 부족한 선생님일 것이다.

이 선생님을 통해 작가는 사명감이 투철한 교사가 빠지기 쉬운 역차별의 함정을 지적한다. 다른 아이들처럼 따뜻한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을 받지도 못하고 학교에서도 인정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이 여자아이들은 선생님이 베풀어주시는 전폭적인 사랑과 인정에 고무된다. 자신감도 생기고 당당해지고 웃음도 많아진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그늘이 드리워졌으니 바로 건우 같은 아이다. 선생님은 넌 부족한 것이 없으니 많이 가진 사람이 나눠야 한다며 건우에게 주실 사랑마저도 떼어다 그 아이들에게 부어주실 테세이지만, 인간은 자기 몫의 사랑까지 남에게 양보할 수는 없는 존재인가보다. 건우가 이토록 상처받는 것을 보면 말이다.

흔히들 선생님들은 공부 잘하는 아이들, 엄마들이 관심 있게 챙겨주는 아이들을 편애한다는 비난을 받곤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역차별은 그것에 대한 반작용일까? 나를 돌아보니 이 책의 김진숙 선생님 같은 쪽은 아니다. 가정형편과는 상관없이, 난 게으르고 양심 없고 남을 괴롭히고 말을 함부로 하는 아이들을 예뻐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부모님의 보살핌을 못받고 자라는 아이들이 이리될 개연성이 매우 높으니 나도 편애를 한다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겠다. 김진숙 선생님처럼 하는 것, 사실 쉬운 일은 아니다. 쪽팔려 게임이나 하며 만만한 남자아이 불러세워 빰따귀나 때리고 낄낄거리는 여자애들을 감싸고 예뻐하라고? 그거 보통 인내심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다음은 이 부족한 교사가 나보다는 조금 덜 부족한 김진숙 선생님께 드리는 글이다. “선생님, 마지막에 선생님이 아이들과 화해하는 장면을 보면서 선생님은 조금 서투르긴 했지만 그래도 훌륭한 선생님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불리지 않는 이름부터 불러주려고 했던 선생님의 마음 잘 알겠습니다. 중간에, 건우엄마가 와서 따졌을 때 아이들 다 있는데서 건우에게 약간의 감정을 드러내신 것은 조금 미숙하셨습니다. (하지만 이 때 저의 모습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신념은 타성에 젖은 저보다는 훌륭하십니다. 그런데요, 아이들 중에 선생님 관심 밖에 두어도 되는 아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감싸는 것만이 사랑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제몫을 할 수 있는 바른 아이로 키우는 것도 우리들이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우리로 인하여 마음 다치는 아이들이 이젠 없도록, 모두가 웃을 수 교실을 만들도록 함께 노력해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