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듣는 시간 사계절 1318 문고 114
정은 지음 / 사계절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말에 청소년소설 한 권을 읽었다. 제목이 감각적이면서 많은 의미가 담겼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실제로 그랬다.

표지에 있는 두 사람. 헤드폰을 쓴 소녀는 청각장애를 갖고 있고 기타를 메고 안내견과 걷고 있는 소년은 시각장애가 있다. 둘은 둘도없는 친구가 됐고 그중 소녀가 이 책의 화자다. 이야기에 장애가 빠질 수는 없지만 그건 일부일 뿐이다. 둘 다 장애를 극복해야 하는 결핍으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고유한 특성, 나아가 특별한 능력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작가의 시선에 동의한다.

청각장애인 수지는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탐색하며 이해할 방법을 찾아왔다. 수지만의 고요함은 소중한 세계였다. 하지만 인공와우 수술을 하게 됐고, 소리의 세계로 발을 들여놓게 된 그 순간을 그렇게 다행이거나 감사한 순간으로 그려놓진 않았다. 세상을 느끼는 방법은 누구나 다를 수 있으며 그걸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나만의 좁은 틀로 세상을 보는 나에게는 경종과도 같은 주제라 하겠다.

수지와 한민 두 청소년 주인공은 참 매력적이었다. 분명 친구 이상의 감정인데, 서로를 이해하고 자신을 잘 세우며 서로가 잘 세워질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과잉감정으로 서로를 파먹지 않고 건강한 것을 궁리하고 공유할 수 있는 이런 관계를 나는 좋아한다. 그러나 이것도 나의 선호일 뿐이니 그렇지 않다 해서 탓할 일은 아닌 거겠지.

이 책에는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았다. 이 책을 높이 사는 이유다. 작가의 사유가 깊다는 뜻도 되겠다. 근데 한편으론 그렇게 완벽한 말들을 등장인물들이 한다는 점이 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하긴, 인물들도 내게는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았다. 특히 수지의 가족들. 그렇게 고고하고 이기적이며 사랑에 모든 가치를 두는 할머니도 이상했고(그 사랑에 가족애, 인류애 등등은 포함 안되고 그냥 연애감정 뿐인 듯했음), 입다물고 희생적으로 살다 일거에 떠나버린 엄마도 참 싫었고, 혼자 남은 수지를 공항으로 불러내 거기서 떠나버리는 고모의 쌀쌀맞음도 맘에 안들었다. 그렇지만 이 책이 말하는 게 뭔가! 다 자기만의 삶이 있다는거. 내가 왜 남의 인생에 맘에 드니 안드니 판단을 한단 말이냐. 주옥같은 문장 몇 개 적어두고 마치겠다. 오늘은 길게 쓸 기운이 없기도 하고.ㅎㅎ

"거리엔 화가 나 있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그 많은 화는 대체 어디서부터 생겨난 걸까? 세상에 화가 이렇게 많은 것은, 화가 두 배로 늘어나는 성질이 있어서인 것 같다. 자신이 가진 화를 나에게 쏟아붓고 본인은 화가 없는 상태가 된다면 다행이지만, 화는 복사가 되어 두 배로 늘어날 뿐 줄어들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에 이렇게나 화가 많아진 것이다......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그들을 생각해 주는 것처럼 그 사람들도 나를 한번이라도 더 생각해 준다면,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을 단 한 번만이라도 상상해 준다면, 내가 절망할 일도 줄어들 텐데." (화자인 수지)

“수지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네가 좋아하는 친구들한테 행동하는 방식대로 너 자신에게 행동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 너 자신과 친구가 되고 나면 너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할 수 있는 거야. 불필요한 위로를 하지 않게 되지. 누구에게나 삶은 단 한 번뿐이지. 후회하지 않을 선택만 해야 해. 너의 삶이니까. 선택은 언제나 너 자신을 위해서 네가 하는 거야. 네가 무엇을 선택하든 잊지 말아야할 것은, 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법을 알고 있다는 거야. 그 힘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의무가 있어. 그것만 잊지 말아 주렴.” (할머니)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충고는 이거야.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이 많을수록 잘 살고 있다는 증거야. 그런 순간이 네 인생을 바꾸는 거야. 지나고나서 돌아보면 그런 순간들이 인생을 덜 후회하게 만들었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말하게 되는 순간을 많이 만들어" (고모)

"나는 세상을 낯설게 보게 하고 싶어. 사람들 내면에 이미 있지만 자각하지 못하는 낯선 감각을 깨우쳐 주고 싶어. 감각을 확장시키고 재분배해서 사람의 몸이 바뀌게 하고 싶어. 몸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니까. 근본적으로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사람과 세상을 바꾸고 싶어. 그걸 언어로 하면 시인이겠지? 우리는 그걸 산책을 통해서 하고 있는 거야." (한민)

둘이 만들어낸 노래, <미스 블랙홀>을 혹시나 하고 멜론에 검색해봤더니, 있네! 작사는 당연히 이 책의 작가고.
"우주가 태어나는 소릴 들을 거예요.
눈을 감고 귀를 닫아요.
그래야 들을 수 있어요."

신체능력 중에서 쓸만한 건 걷기 밖에 없는데, 나도 제대로 된 산책을 해봐야 될거 같다. '산책을 듣는 시간'이 필요한 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