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이야기
신경숙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8월
품절


슬픈 영화는 날 울려요

10분 후면 그 남자가 찻집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그 남자는 지난 8년 동안 약속시간을 1분도 늦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가 약속시간이 되면 찻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번 정확했다.
J는 30분 전에 이 찻집에 왔다. 그 남자와 알고 지내면서 단 한번도 없던 일이대. 대부분 그 남자보다 조금 늦게, 아니면 조금 이르게 였으나, 조금 이르게라고 해도 10분 이상 빨리 온 적은 없었다.
J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약속시간 3분 전이다. 그 남자는 오늘도 다른 때오 ㅏ다름없는 마음인가 보았다. 8년의 세월이 마침표를 찍는 날인데도 말이다.-74쪽

그 남자는 정확한 시간에 역시 정확하게 찻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남자는 J를 향해 빙긋이 웃었으나 J는 외면해버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J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한 그 남자의 태도가 자꾸만 마음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 남자가 차 주문을 하러 온 찻집 종업원에게, 홍차 둘! 했을 때 J는 아니오, 저는 주스 주세요 파인애플 주스로!했다. 그 남자의 동공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8년 동안 찻집에서 그 둘의 차 주문은 언제나 홍차 둘이었고, J는 단 한번도 그 홍차 둘에 다른 의견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따끈한 홍차 한 잔과 차가운 파인애플 주스가 그들 앞에 놓여졌다. J는 주스를 끌어당겨 한 모금 마셨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으로 주스는 살려울처럼 파고들었다.
"그래 물건들은 다 챙겨왔어?"
"그래"
그 남자는 찻잔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서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너도 다 갖고 왔지?"
"그럼"
J도 옆 의자 위에 얹어두었던 가방을 그 남자가 올려 놓은 가방 옆에 올려놓았다. J가 들고 온 것이 훨씬 더 컸다.-74쪽

"빠진 것 없지?"
"내가 알고 있는 한은 없다. 너야말로 뭐 빠뜨린 거 없냐?"
"소모품들 받은 건 다 써버려서 다시 되돌려주고 싶어도 없어졌으니 할 수 없는 거 아니니?" 설마 전에 제주도에 있을 때 귤 한 상자 보내준 거며, 생일날 보내준 과자 이런 것까지 다시 받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받을 수 있으면 다 받았으면 좋겠지만 먹고 쓰고 그래서 없어진걸 낸들 어떡하겠냐?"
"고맙네"
J는 괜히 서러워졌다. 저 남자가 8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그 남자가 맞는가?
캠퍼스 커플로 만나서 커피 한잔을 같이 나눠마시고, 방학 때마다 매일 하루 한 통씩 편지를 써 보내던 그 남자,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자기 아내가 될 줄으 알고 있었다던 그 남자, 긴 머리의 여자만 보면 모두 나 같고,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한들 나와 함께 볼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던 그 남자,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그 마음 변치 않겠다고 말하던 그 남자가 맞는가? 결혼도 안했는데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갖자마자 첫 월급부터 지금까지 월급봉투를 꼬박꼬박 J에게 갖다주며 용돈을 타가던 그 남자가 맞는가? 그 돈으로 선물까지 하던 그 남자. 2주일 전까지 그들은 연인이었다. J가 혼자서 연극을 보러가기 전까지만 해도.-76쪽

<슬픈 영화>라는 노래가 있다.
한 여인이 약속이 있다는 애인의 말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 영화관에서 다른 여인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애인을 만나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노래.
J가 본 것은 슬픈 영화는 아니고 슬픈 연극이었다.
J가 연극표 두 장이 생겨서 그 남자와 함께 갈까 하고 전화를 했는데 연극 얘기도 꺼내기 전에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J는 말도 못 꺼내보고 다른 친구와 함께 소극장엘 갔다. 그러고선 슬픈 연극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연극이 시작될 무렵 친구가 옆구릴 툭툭 쳐서 보니까 그 남자가 웬 여자와 함께 저만큼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둘은 아주 다정하게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J는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남자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남자가 돌아다봤을 때 J는 뛰쳐나와 버렸다. 세상에 그 남자가 저럴 수가. -77쪽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변명했다. 제주도로 발령이 나 근무를 했을 때 옆자리에 앉았던 동료인데 모처럼 휴가를 얻어 서울에 온 참에 연극을 꼭 한 편 보고 돌아갔으면 해서 같이 구경하러 간 것일 뿐이라는 거였다. <슬픈 영화>라는 노래에서는 울며 돌아온 여인에게 어머니가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슬픈 영화는 늘 날 울려요, 라고 대답하지만 J의 대답은 너 같은 위선자하고는 다시는 얼굴을 마주대하고 싶지 않아, 였다.
"뭐 위선자?"
어떻게 해서든J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그 남자는 위선자라는 말에는 참을 수가 없어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쳤다. 그 마음대로의 결과가 지금 이 자릴 만든 것이었다. 그만 만나자, 이젠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자, 그래도 정리해야 될 것은 정리해야 되니까 그동안 서로 선물 줬던 것이며, 같이 찍었던 사진이며, 각자 가지고 있는 상대의 독사진들을 가지고 한 번 만나자, 이것이었다.
분한 마음에 상황을 이렇게 진전시키기는 했지만 J는 그 남자가 정말 위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가 위선자라면 자기는 더한 셈이었다. 그가 제주도로 내려가 있던 그 해의 생일날, 사무실 책상위에는 그가 제주도에서 보내온 축전과 과자가 놓여 있고, 지하 다방에서는 다른 남자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77쪽

J는 새삼 그 남자의 존재가 자신의 생활 어디에나 속속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 남자가 준 것들을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J 의 방에 있는 책과 스카프와 스탠드....그 남자가 자신에게 준 것들 투서잉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더구나 그 남자가 J에게 꼬박꼬박 받아다 준 월급 저축앤은 상당액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그 돈으로 방을 얻든 집을 얻든 할 것이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젯밤 내내 J는 그 통장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했다.
내것도 아닌데 돌려줘야지.
J의 마지막 결심은 돌려주자, 였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마치 그남자의 아내나 되는 듯이 기뻐하며 저축을 했던 자신을 생각하니 어이엇ㅂ기도 했다.
"나랑 헤어지게 되어 너희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시겠다!"
"갑자기 부모님은 왜 끄집어내?"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야! 나 못마땅해 하셨잖아. 순 서울놈이라 말 붙이기가 힘들다고 하셨대며?"
"연극 함께 보러 갔던 그 여잔 제주도 토박이야?"
",,,,"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해"
그 남자는 J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혼자 종알거리던J도 머쓱해져, 남자가 가져온 가방을 무릎으로 끌어내리고,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그 남자 앞으로 가까이 밀었다. 그남자도 가방을 탁자에서 끌어내려 옆의자에 내려놓았다. -78쪽

"그리고 나한테 갖다 준 월급은,,,"
갑자기 그 남자가J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너 가져..그게 좋겠어"
J는 멍하니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 가지라고?
J는 콧잔등이 찡해왔다. 그걸 도로 내놓으라고 할 남자는 아닌 줄 알았짐나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J는 마음과는 달리 깍쟁이 같은 목소리로 팩 소릴 쳤다.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이걸론 모자랄 것 같애. 생각해봐. 지난 세월 동안 당신한테 들인 시간과 공정이 얼만데 이 정도가지고 되겠어? 더 내놓아야 되겠어. 이것 갖고는 안되겠어!"
",,,,,,?"
"왜? 내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 같애?"
",,,,,,?'
"왜 그렇게 빤히 봐?"
"나 돈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내 월급은 그동안 너 다 갖다줬잖아. 그게 다야....더 줄 돈이 어딧어!"
"그럼 못 헤어지겠네 뭐"
얼마 후, 두 사람은 다른 찻집으로 자릴 옮겼다.
종업원이 차 주문을 받으려 왔을 때 그 남자는 홍차 둘, 이라고 말했고 J는 그저 그 남자의 와이셔츠에 묻어 있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떼내어 주었다. J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남자 부자였다면 큰일날뻔했네.-80쪽

복사꽃 같은 시절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아편 같은 것이지. 그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녹여내지 못하고, 언제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과 저울질하는 시절이지. 내 꽃 같던 시절에 그 남자는 어쩐지 마음에 반도 안 찼었지. 따로 다른 이를 만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다만 그와 만나고 있는 순간들은 지나가야 할 찰나적인 것만 같았었어.
그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눈여겨보고, 그 남자와 여기 앉아 있으면서도 언제나 저기를 생각했었지. 이 사람 아닌 다른 사람, 이곳 아닌 다른 곳, 이것말고 저것. 그 시절에 나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것에 취해 있었어. 견디다 못해 그가 다른 이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적에도 아무렴 어떠랴 했지. 그래, 그는 어떤 시골마을이고 난 기차를 타고 거길 떠나야 한다고 말이야. 죽을 때까지 내 편이라고 그가 말할수록 나는 저편의 그 무엇에 끌려서 그 남자의 순정을 모른 척했어. 아니야. 모른 척한 게 아니고 나는 정말로 몰랐어. 그러다가 어떤 허깨비 같은 이가 내게 잠시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나버렸지. 하지만 너무 잠시였어. 그 허깨비와 헤어져 돌아와보니 그는 이미 결혼을 해버렸더군. 그가 이제 내 손안에 있지 ㅇ낳다는 사실. 그가 이제 이곳 사람이 아니고 저곳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언제나 이것말고 저것을 눈여겨보는 것이 내 마음이었는데, 바로 그가 이제 저쪽에 있고 보니 그제야 내 눈에 그가 들어오는 거야.-22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품절


"왜 우리나라엔 왕이 없는 거지?"
탈북자가 운영한다는 냉면집에서였다. "왕? 무슨 왕?" 국숫발을 채 끊지 못한 우리는 심드렁하게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말을 꺼낸 그는 진지했다. "왕이 있으면 좋잖아.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정치적 실권은 없는 왕이라도, 있으면 폼 나잖아?" -27쪽

"일단 왕이 있으면 말야. 왕이 있는 나라들하고 급이 맞잖아. 엘리자베스 여왕 오면 데리고 안동 하회마을도 가고, 일본 천황하고 술도 한잔 하고....그동안은 그걸 대통령이 하느라 피곤했는데 그런 의전적 잡무는 왕한테 맡기는 거야. 그럼 대통령도 편하지. 그렇지만 무었보다." 여기서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왕이 있으면 공주도 있잖아!""공주가 있으면 뭐?"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자 그는" 공주가 있다는 건 왕비도 있다는 거고 또한 왕자도 있다는 거야. 혹시 알아? 공주가 주최하는 창경궁 파티에라도 한번 불려가게 될지. 우리 인생엔 그런 일이 없어서 이렇게 따분한 거야. 가끔 공주가 평민하고 사랑에 빠져 달아나기도 하고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냐? 그런 게 없으니까 심은하가 공주 노릇 하는 거잖아 우이씨"-28쪽

"경복궁에 진짜 왕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근사하냐고. 그럼 궁중음악이니 전통 제례니 복식이니 하는 걸 일부러 돈들여 보존할 필요가 없어. 왕이 진짜로 있는데 뭘. 한 나라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은 왕을 두는 거야. 왕실에서 다 알아서 하게. 왕세자가 장가를 간다거나 국왕이 붕어하면 그 제례들 다 올릴 거고, 그럼 옷도 입어야 되고, 음악도 연주해야 되잖아. 그리고 일단 경복궁 어딘가에 왕과 왕비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구경할 때 도 긴장감 있잖아? 관광객들은 진짜 왕이 사는 궁에 가고 싶지 왕이 백 년 전에 앉았다는 의자나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안 그래?"-28쪽

"우리 고모가 상궁인데 어제 입궐했다가 주상을 뵈어다지 뭐야. 이런 말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물론 삼촌이 별감인 놈도 있겠지. 통역 상궁, 웹 디자이너 별감 같은 직업도 생길 테고 말야. 게다가 관광 유발 효과도 만점일 거야. 허수아비 왕이라도 옷입고 어디 행차하고 그러면 폼 나잖아. 교황도 수요일에 손 한번 흔들어주면 성 바오로 광장에 모인 관광객들이 좋아라 하잖아. "-29쪽

'소유냐 존재냐'같은 거창한 얘기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도 젊은 청춘들의 욕망은 크게 저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 같다. 갖고 싶다 혹은 되고 싶다. -81쪽

탄광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던 고흐, 종교적 열정에 붙들려 있던 시절의 고흐,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케이에게 얘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이 손을 불꽃 속에 넣고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간 동안만"이라고 말하며 촛불 속에 자신의 손을 밀어넣었던 고흐. 그는 물론 '진짜'다. 모두가 그를 경원했으므로 그는 외톨이였고 따라서 일생은 처절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자해 공갈단 수준의 미련퉁이 스토커였으며 구제할 길 없는 정신병자였고 가족들의 골칫덩이였으며 종교적으로는 광신자였다. 어쩌면 우리는 가짜들밖에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인지도 모른다. 진짜들은 그 존재만으로 모든 가짜들을 백일하에 폭로하므로 모든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일치단결하여 그 진짜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95쪽

이성에게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하는 두 가지 방법. 하나는 변태를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다. -108쪽

가장 남성적인 직업 셋을 굳이 꼽으라면 해군제독과 영화감독,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말한 이가 있었다. 볼링장의 해군제독과 수영장의 영화감독, 도서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야 별볼일 없는 존재지만 자기 관에 들어오면 그들은 거의 신과 격이 된다. 그들은 홀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모든 구성원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향한다. 제독님 포를 쏠까요 말까요? 감독님 이 대사 그대로 갑니까? 지휘자님 이부분은 좀 약하게 연주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모두가 그들을 바라보며 결정을 기다린다. 이 위대한 독재자들은 교정되거나 설득되지 않고 대체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추방된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이 길로 뛰어든다. 그들의 등 뒤에서 불타오르는 찬란하면서 불길한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무한 권력, 무한 책임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사내들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22쪽

...우리 성가대의 지휘자 역시 최선을 다했다. 우리 모두는 그가 최선을 다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카리스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게 아니라 이미 최선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 씁쓸한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지도자로 살아간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122쪽

성가대 같은 모임에는 으레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선물받은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음악에 둔재였던 나는 그런 이들에게 쉽게 매혹되었다. 한 여대의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친구였는데 소프라노 솔로 부분을 도맡아 부르곤 했었다. 노래하는 여자와는 사랑에 빠지기 쉽다. 그녀는 노래하고 나는 듣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는 눈을 뜬다.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는 그녀에게 집중한다. 그녀는 노래를 사랑하고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모르고 나는 안다. 무엇을? 내 사랑을.-126쪽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알아야 무슨 일이 있겠는가. 아무 일도 없지.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낭비이며 사치이며 한가한 감정놀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나 자기는 전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잔인한 자들은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다. "그냥..."으로 시작하는 ˆ국牡?기어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를 한심하게 만드는 놀음을, 그들은 즐긴다.
"눈이 많이 와서....."-129쪽

...환각의 자유라든지, 게으를 권리를 특집으로 잡아서 했는데 그 특집 중 하나가 '나에게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나중에 내 소설 제목이 되었는데 그특집은 이른바 환각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기획이었다. 이를테면 환각을 보는 것 자체는 죄가아니라는 내용이다. 대원사에서 나온 <환각제와 마약>이라는 책에서는 왜 똑같은 마약 성분이 인디언들에게는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고 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는데 현대의 미국인에게는 총질을 충동하는 물질이 되는가. 다시 말하면 약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라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집에서 광선총을 쏘는 것은 나라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차량을 탈취하거나 하는 경우엔 형법으로 다스리면 될 일을 단순히 환각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14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7월
구판절판


신혼 여행 첫날밤에 호텔 방에서 와인을 마셨지요. 그때 제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아마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저 남자 처음 아니에요"
남편은 그런 저를 아무 감정도 없는 눈길로 쳐다보더니.
"술이나 마시지" 하는 거예요.
"정말 괜찮아요?" 하고 제가 되묻자 남편은,
"왜 내가 시간을 거슬러가면서까지 당신을 심판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마음쓰지 마" 하면서 웃더군요. -5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절판


"네안데르탈인?"
"형도 학교에서 배웠잖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어릴 적 학교에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서 크로마뇽인이 되었다고 배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학교에서 배우는 건, '뭐든 간단히 믿지 말라'는 것이니까."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완전히 달라. 어느 시기에 세력이 바뀐 거야. 지금은 그런 설이 유력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말았어. 그래서 지금의 인간들은 크로마뇽인, 즉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놈들의 후예야."
하루는 때로 나도 모르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네안데르탈이노가 크로마뇽인의 차이가 뭔지 알아? 둘 다 수렵을 하고 도구를 사용했어. 물론 크로마뇽인 가운데는 농사를 지은 부류도 있었지만. 다만, 몇 만 년 동안은 둘 다 이 지구상에 있었어. 다른 동물이었지만, 공존했던 거야. 그렇지만 ㅎ나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어."
"그게 뭔데?"
하루는 손바닥을 내 쪽으로 보이고 가슴을 내밀면서 말했다.
"크로마뇽인은 예술을 사랑했던 거야, 형."
-43쪽

"이 연주가가 눈이 멀다는 거, 알 거 같아.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밝음을 자아낼 수 있는 거야."
"그런 사람?"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놈은 절대로 이런 음악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아버지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 경쾌함은 뭔가 남의 눈에 드러내고 싶은 욕구나 패션 감각과는 다른,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변명이나 해명, 논리나 체념, 그런 것들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 무엇이다.
"이 연주가는 아마도 재즈를 진심으로 좋아할 거야"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심각한 것은 밝게 전해야 하는 거야"
하루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무거운 짐을 졌지만 탭댄스를 추듯이"
시처럼 들렸다
"삐에로가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오를 때는 중력을 잊어버리는 거야"
이어지는 하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108쪽

유인원 디스커션
예전에, 난 하루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넌 미남이라기 보다는 미견이야"
동생을 보고 있으면 사냥개 같은 날카로움과 순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비글견인지도 몰라. 그럼 좋을 텐데. 개는 정말 좋아"
하루는 그런 농담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 동물이 인간보다 훨씬 절도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던 하루였다.
언젠가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작가가 나와 "인간이란 하반신은 동물이 되는 편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루는 그 말을 듣고 "나보다 더 심한 말을 하네"하고 어이없어했다.
"동물이란 놈은 암컷이 발정을 안 하면 늘 조용하게 지내. 날이면 날마다 섹스를 생각하는 인간이란 정말 품위가 없어."
-166쪽

"왜 인간에게는 발정기가 없을까?"
나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발정기가 있으면, 암컷은 그때만 수컷을 유혹하게 돼. 인간 암컷은 생활을 하는 데 수컷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늘 수컷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발정기를 그만둔 거야."
"정말이야 그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어"
하루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말해. 동물과는 달리 언제 자식이 태어나도 식량이 확보되어 있고, 임신기간을 조절할 필요가 없으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식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자식을 죽여?"
"고릴라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행동이야. 고릴라는 아주 가정적이라서 수컷 한 마리가 암컷 몇 마리를 거느리고 안정된 집단생활을 한대. 그런데도 새끼를 자주 죽여. 예를 들어 수컷이 죽으면, 다른 수컷이 들어와서 예전의 수컷이 낳은 새끼를 모두 죽여버린대"
"왜?"
"간단히 말해, 암컷이 발정하게 만들려고. 새끼를 키우는 중에는 발정을 안 하거든. 그래서 힘을 과시하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새끼를 죽이는 거야"
"무서운 이야기네"
"발정기가 있으면 이런 무서운 일이 일어나니까, 인간은 발정기를 없애버린거야. 그렇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어"
-166쪽

"인간이 우수해서 그런가"
나는 웃음을 참았다.
하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너무 우수해서 성욕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발정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수치심도 없이."
"네가 싫어하는 의견인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놀라고 말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인간이 어떻게 성욕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거야? 하루가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포유류 가운데서 일상적으로 강간을 하는 동물은 인간과 오랑우탄과 바다코끼리뿐이라고 해"
하루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웃기지? 인간은 동물 가운데서도 아주 예외적인 강간범이야. 다른 포유류는 법률이 없어도 강간 따위는 하지 않아"
"인간이 특수하다는 거니?"
"왜냐하면, 우수하니까"
"그런 인간을 너무 나무라지 마"
"그리고 이건 내 의견인데, 오랑우탄이나 바다코끼리의 강간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아직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거야. 아마도, 인간만이 강간을 위해서 강간을 해"
-166쪽

사바나에서 벌어지는 사자의 교미, 위대한 의식을 거행하듯이 배를 맞대는 고래의 교미, 개들의 시끌벅적한 교미, 영상이나 사진으로 그런 장면을 보았을 때, 하루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섹스할 때 변명을 하거나, 착각을 하지 않아. 그래서 좋아. 인간은 멍청이라서 섹스를 하는 중에도 자기기마노가 착각에 빠져"
"착각?"
"상대를 지배한다든지, 모욕을 준다든지, 도덕적이라든지, 비도덕적이라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대는 거야. 얼마나 멍청해. 그걸 종교나 신과 연관짓는 놈들도 있어. 문학적이라니 정말 웃겨. 에로티시즘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인간도 있어. 정말 바보 같아. 착각도 유분수지. 섹스를 했다고 해서 무슨 초월이 일어나는 것도 아냐. 그걸로는 아무도 지배할 수 없어. 인간의 성은 동물보다 몇 단계나 더 바보야."
"터무니 없는 말이지?"
"그래서 괜히 폼을 잡는 거야"
나는 하루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유인원으로 말하자면, 오랑우탄은 강간은 하지만 새끼는 안 죽여. 고릴라는 그 반대로 암컷에게는 상냥하지만 새끼는 죽여. 침팬지는 암컷을 학대하고 때로 새끼도 죽여"
"침팬지가 가장 질이 안 좋군"
"거기서 한 수 ㄹ더 뜨는 게 바로 인간이야. 강간도 하고 학대도 하고 자식도 죽이고, 뭐든 다 해. 게다가 인간의 경우는 발정기가 없으니까 일 년 내내 품위가 없어. 최악이야."
"너의 설명을 듣노라면 분명 인간은 최악이야"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들어 보인다.
-166쪽

"침팬지와 비슷한 종으로 보노보라는 놈이 있어"
"들은 적이 있어"
"거의 침팬지와 똑같아. 그렇지만 보노보의 사회는 침팬지와 완전히 달라. 사람과도 다르고"
"더 최악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지?"
"그 반대야. 평화로워. 보노보의 사회에는 강간도 새끼 살해도 없어. 게다가 계급투쟁같은 것도 없어. 덧붙여서, 인간과 비숫해서 암컷이 언제 배란기인지 수컷도 잘 몰라"
"거리에 무슨 의미가 있어?"
"그들은 틈만 나면 교미를 해. 하루에 몇 십 번이나 하는 경우도 있대. 그들에게 섹스는 인사와 같아. 실제로 친구도 만들고, 싸웠다 화해도 하는데, 그것도 모두 섹스로 처리해. 섹스가 아닌 경우도 있는데 암컷끼리 성기를 비비기도 한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보노보 쪽이 인간보다는 산뜻해. 거기에는 지배도 우열도 변명도 없어. 인간은 생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섹스와 생식을 구별한다고 아주 대견한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보노보도 그러니까. 게다가 그들 쪽이 더 평화롭게 살아. 성적인 포유류의 길을 같이 걸어가면서도 보노보는 성공했고, 인간은 실패작이야"
-166쪽

"이만팔천 년 전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
"네안데르탈인이 멸망했지"
" 어 알고있네?"
"내가 누구야. 형님이잖아. 처음으로 동굴벽화를 그린 호모사피엔스의 후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렇잖아. 우린 모두 크로마뇽인의 휴손이야"
하루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래.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완전히 다른 동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에 같이 존재하고 있었어"
"공존하고 있었지"
"응, 몇 만 년 동안이나 공존했어. 계속 발전하고 번영하는 크로마뇽인을 네안데르탈인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 그게 마음에 걸려"
나는 하나도 마음에 안 걸린다
"멸종이 가까워진 시기에 이르면, 네안데르탈인이 크로마뇽인을 흉내 내어 석기를 만든 흔적이 남아 있어. 살아남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한 거지. 갸륵하다는 생각 안 들어? 상상만 해도 나는 슬퍼져"
"성공한 기업을 흉내 내는 건 비즈니스의 기본이지"-181쪽

성냥, 이란 말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유명한 소설이 떠올랐다.
"인생은 한 통의 성냥과 비슷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209쪽

"저 여자는 관계없어. 집에 돌아와서 도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불렀으니까. 화가 나면 여자를 안고 싶잖아? 마구 짓밟아주고 싶어지지."
갑자기 힘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요즘 욕구불만 해소용 도구가 팔리고 있다면서? 여자란 그거와 똑같은 거야"
가츠라기의 얼굴에선 짜증과 졸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정력이 넘쳐흐르는 번들번들한 눈빛으 띠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렇게 마를 줄 모르는 천박한 생명력이 그의 손에 아파트를 쥐어주었고, 돈을 주었고, 인생에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217쪽

사람이란 외관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외관이 반듯한 몸은 건강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얼굴이나 육체가 좌우대칭이면 튼튼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남자가 미이느이 뒤를 따르는 것은 이치에 맞다. 보다 건강하고 잘 정돈된 유전자를 자신의 유전자와 합치고 싶어하는 본능은 유전자라는 놈이 가져 마땅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외관은 패션 브랜드와 같다"
하루는 그런 말을 했다
"좋은 브랜드는 비싸지만 그만큼 품질이 좋아. 그렇지만 그 반대도 있어. 별것도 아닌 물건에 브랜드 이름을 붙여서 손님을 속이거든. 사람들은 브랜드 이름만을 볼 때가 많아. 사람의 외관도 그와 똑같아서,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간단히 속고 말아.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기본을 잊어버리고 마는 거야"-260쪽

무슨 영문인제, 내 머릿속에서는 어떤 영화의 대새가 떠올랐다. 가스퍼 노에라는 감독의 몹시 도발적인 영화였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페니스가 맛보는 고작 구 초간의 쾌락이 한 사람에게 육십 년의 고통을 강요한다."-271쪽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있어서 부탁했지"
"노숙자겠지"
나는 그 말에 경멸감이 배어들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면서 말했다.
"노숙자들이야"
하루가 내 말을 복수로 고쳐 되풀이했다.
"이상하게도 사람이란 고정관념을 가지기 쉬운 모양이야. 까마귀는 검다, 개는 온순하다, 고양이는 변덕스럽다, 동정은 악이며 장수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 그렇게 단정하면 기분이 좋은 모양이야. 그래서 노숙자를 모두 실패한 인간이고, 야만적이며 불결하다고 단정해버려. 또는 노숙자는 모두 불행한 인간이며, 바탕이 선한 사람이라고 단정해. 장애인이나 노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노숙자 가운데는 이상한 놈도 있고 싹싹한 놈도 있어. 사랑스런 노인이 있는가 하면 때려주고 싶은 사람도 있어. 부탁만 하면 탐정 업무도 멋지게 해내는 노숙자도 있는 거야"
하루는 마치 랩을 하듯 리드미컬하게 말했다. 중요한 대목에서는 리듬의 고개를 넘으며, 말에 여울이 지기도 한다.
-309쪽

"에셔라는 사람 알아?"
"화가잖아. 착시효과를 이용한 그림을 자주 그린 사람"
"맞아. 판화가 에셔. 그는 라스코의 벽화를 보고 재미있는 걸 깨달았어"
"판화가가 깨달았단 말이지"
"조형예술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진화하지 않아?"
"인류는 다양한 분야에서 진화와 발전을 해왔어. 과학이나 기계들을 봐. 선인의 가르침이나 성과를 배우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왔어. 하지만 예술은 달라. 에셔는 그걸 발견한 거야."
"예술은 왜 다른데?"
"어떤 시대에도, 상상력이란 선인에게서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예술가가 필사적으로 짜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예술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십 년 전에 비해 컴퓨터나 전화는 더 편리해졌어. 진화했다고 해도 좋아. 그렇지만 백 년 전의 예술에 비해 지금의 예술이 더 휼륭하다고는 할 수 는 없는거야. 과학처럼 업적을 쌓아올리는 것과 달라서 예술은 그때마다 전력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346쪽

"눈에는 눈, 그런 말 들어봤어?"
하루가 물었다
"무슨 법전이더라 그거?"
"대부분은 그 말뜻을 '당하면 그대로 되갚는다'라고 잘못 해석하는데, 그건 '눈을 잃었으면 상대의 눈을 없애기만 하면 된다', '이가 빠졌으면 상대의 이만 빼라'는 뜻이야. 과잉 보복은 안 된다는 말이야"
"그런가?"
나는 학교에서 배운 걸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형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가해자가 한 것과 똑같이 하면 돼. 상대에게 정상참작할 만한 점이 있다 해도, 드러난 결과는 움직일 수 없으니까, 똑같이 해줘도 불평하지 못할 거야. 팔이 부러지면, 상대의 팔을 부러뜨리면 돼"
"운전 실수로 어린애를 친 사람은"
"운전 실수로 그 사람을 치면 돼"-404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과양 2007-04-07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메모 해놓을 구절이 많죠? 고등학생때 이과반이라 생물2를 배워 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나름 아직 녹슬지 않은 생물학지식에 흐뭇했답니다. 미술사학적, 역사학적인 내용은 공부하면서 봤어요. ^^

LAYLA 2007-04-07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생물 2로 수능 치지는 않아서 그냥 내신수준으로만 배워뒀었어요. 그래서 대충 이해는 되더라구요 미술 역사 내용은 그냥 끄덕이면서 넘어갔는데 역시 모과양님은 성실하시군요!!>.<
 
오래된 정원 - 전2권 세트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요즘 나는 영어땜에 골머리를 썩고 있다. 어느수준 이상으론 잘 늘지 않는 실력도 문제이지만 시험신청하기가 어려워 밤을새기도 일쑤라 나는 진심으로 영어에게 온갖 기운을 뺐긴듯 했다.. 원래도 간간히 영어에 질리면 명랑하고 짤랑거리는 한글 문장을 읽곤 했었다.  나는 그 짤랑거림이 참 좋았었는데 이번 고비엔 은근하고 조용하고 나지막하고 그러면서도 그 속에 어떤 힘을 품고 있는 황석영의 글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이럴 땐 내가 한국사람이란게 참 좋아지는 것이다. 아아. 난 이 문장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는 자부심. 오래된 정원에 빠져들면서 영어에 대한 증오(?), 시험등록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도서관엘 가면 이 노란빛과 연둣빛의 중간쯤 되는 한국판 '오래된 정원' 옆에 불어판이 나란히 놓여있는데 도대체 이런 말은 어떻게, 요런 말은 어떻게 번역했을까 엄청 궁금했다. '그네'라는 말은 그냥 '그'로 번역했을까? 그건 그 느낌이 아니잖아. 그 페이퍼 백의 하나도 모르는 불어를 ?어보며 왠지 내 맘이 안타까웠다.

그 시절엔 어떠했을까, 나는 그 시절이 궁금했다. 데모하던 시절, 최루탄이 날아다니던 시절, 운동이 당연하던 시절. 엉뚱하게도 책속에서 내 가슴속에 콕 박힌 표현은 '김밥을 신문지로 말았더니 잉크 냄새가 드문드문 배였다'라는 부분이었다. 내가 10살 좀 지났을 적엔가 신문사에서 콩기름 잉크로 바꾼다던가 광고를 대대적으로 했던 기억이 있으니 그 시대, 80년대의 신문내음은 지금과 다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참 신기했다. 몇십년 전 '그때'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은 이렇게 조금씩 작은 변화를 거듭하여 이젠  당시를 상상하기 조차 힘들어지고 말았다. 나는 86년생인데 초등학교 시절 매 학기 새 교과서를 받으면 첫 페이지에 이런 말이 씌여있었다. '.....여러분은 21세기를 이끌어 나갈....' 21세기를 이끌어 나가는 지는 모르겠다만 하여튼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 세대로선 그 어떤 상상력을 동원한다 해도 80년대의 치열함을 느낄 수 없다. 노력으로도 그 시대를 짐작하기 어려운 세대가 대학생이 되고, 고시를 치고, 취업을 하는 요즘이다.

요즘 대학생들은 운동권에 대해 막연히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대게의 대학생들은 운동권에 대해 무관심하다. 아마 운동권이었단 과거를 가진 사람중 지금은 그리 아름답지 못한 사람이 많아서 일까. 책을 읽고 든 생각은, 우리는 운동권에 대한 호불호를 여유롭게 흘려가듯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운동권이 되느냐 마느냐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 나이에 가장 어려운건 자신을 속이는 일, 비굴하게 사는 일이 아닐까, 알면 알 수록 더 괴로운 것이 아닐까 그런 것들...참을 수 없는 것들. 그러한데 어떻게 운동권이 되고 말고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운동권이라는 것도 인간의 정의, 인간의 선긋기 일 뿐인데, 그들은 그저 생각하는 대로, 믿는 대로 행동한 것이 아닐까.

신념대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적당한 롤 모델을 직접 눈으로 보기 어려운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오래된 정원은 신념대로 살았던, 빛나는 누군가의 삶을 보여주었다. 세월과 시대에 부딪혀 상처투성이 일지라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 시대의 은근한 말씨가 참 좋았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미달 2007-03-29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짤랑거림이라..... 신선한데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