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 삐에로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10
이사카 고타로 지음, 양억관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5월
절판


"네안데르탈인?"
"형도 학교에서 배웠잖아.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 어릴 적 학교에선 네안데르탈인이 진화해서 크로마뇽인이 되었다고 배웠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아."
"학교에서 배우는 건, '뭐든 간단히 믿지 말라'는 것이니까."
"네안데르탈인과 크로마뇽인은 완전히 달라. 어느 시기에 세력이 바뀐 거야. 지금은 그런 설이 유력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안데르탈인은 멸종하고 말았어. 그래서 지금의 인간들은 크로마뇽인, 즉 호모 사피엔스라 불리는 놈들의 후예야."
하루는 때로 나도 모르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네안데르탈이노가 크로마뇽인의 차이가 뭔지 알아? 둘 다 수렵을 하고 도구를 사용했어. 물론 크로마뇽인 가운데는 농사를 지은 부류도 있었지만. 다만, 몇 만 년 동안은 둘 다 이 지구상에 있었어. 다른 동물이었지만, 공존했던 거야. 그렇지만 ㅎ나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어."
"그게 뭔데?"
하루는 손바닥을 내 쪽으로 보이고 가슴을 내밀면서 말했다.
"크로마뇽인은 예술을 사랑했던 거야, 형."
-43쪽

"이 연주가가 눈이 멀다는 거, 알 거 같아. 그런 사람이니까 이런 밝음을 자아낼 수 있는 거야."
"그런 사람?"
"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놈은 절대로 이런 음악을 만들어낼 수 없지"
아버지가 하려는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이 경쾌함은 뭔가 남의 눈에 드러내고 싶은 욕구나 패션 감각과는 다른, 내면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변명이나 해명, 논리나 체념, 그런 것들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그 무엇이다.
"이 연주가는 아마도 재즈를 진심으로 좋아할 거야"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심각한 것은 밝게 전해야 하는 거야"
하루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무거운 짐을 졌지만 탭댄스를 추듯이"
시처럼 들렸다
"삐에로가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오를 때는 중력을 잊어버리는 거야"
이어지는 하루의 말이 인상적이었다.-108쪽

유인원 디스커션
예전에, 난 하루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넌 미남이라기 보다는 미견이야"
동생을 보고 있으면 사냥개 같은 날카로움과 순진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비글견인지도 몰라. 그럼 좋을 텐데. 개는 정말 좋아"
하루는 그런 농담을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때로, 동물이 인간보다 훨씬 절도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던 하루였다.
언젠가 어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작가가 나와 "인간이란 하반신은 동물이 되는 편이 좋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하루는 그 말을 듣고 "나보다 더 심한 말을 하네"하고 어이없어했다.
"동물이란 놈은 암컷이 발정을 안 하면 늘 조용하게 지내. 날이면 날마다 섹스를 생각하는 인간이란 정말 품위가 없어."
-166쪽

"왜 인간에게는 발정기가 없을까?"
나는 그렇게 물어보았다.
"발정기가 있으면, 암컷은 그때만 수컷을 유혹하게 돼. 인간 암컷은 생활을 하는 데 수컷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니까, 늘 수컷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발정기를 그만둔 거야."
"정말이야 그거?"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어"
하루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제멋대로 말해. 동물과는 달리 언제 자식이 태어나도 식량이 확보되어 있고, 임신기간을 조절할 필요가 없으니까,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자식을 죽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
"자식을 죽여?"
"고릴라에게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행동이야. 고릴라는 아주 가정적이라서 수컷 한 마리가 암컷 몇 마리를 거느리고 안정된 집단생활을 한대. 그런데도 새끼를 자주 죽여. 예를 들어 수컷이 죽으면, 다른 수컷이 들어와서 예전의 수컷이 낳은 새끼를 모두 죽여버린대"
"왜?"
"간단히 말해, 암컷이 발정하게 만들려고. 새끼를 키우는 중에는 발정을 안 하거든. 그래서 힘을 과시하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려고 새끼를 죽이는 거야"
"무서운 이야기네"
"발정기가 있으면 이런 무서운 일이 일어나니까, 인간은 발정기를 없애버린거야. 그렇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어"
-166쪽

"인간이 우수해서 그런가"
나는 웃음을 참았다.
하루는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너무 우수해서 성욕을 조절할 수 있으니까 발정기를 잃어버리게 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수치심도 없이."
"네가 싫어하는 의견인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놀라고 말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인간이 어떻게 성욕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거야? 하루가 자신의 진짜 아버지를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포유류 가운데서 일상적으로 강간을 하는 동물은 인간과 오랑우탄과 바다코끼리뿐이라고 해"
하루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웃기지? 인간은 동물 가운데서도 아주 예외적인 강간범이야. 다른 포유류는 법률이 없어도 강간 따위는 하지 않아"
"인간이 특수하다는 거니?"
"왜냐하면, 우수하니까"
"그런 인간을 너무 나무라지 마"
"그리고 이건 내 의견인데, 오랑우탄이나 바다코끼리의 강간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아직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럴 거야. 아마도, 인간만이 강간을 위해서 강간을 해"
-166쪽

사바나에서 벌어지는 사자의 교미, 위대한 의식을 거행하듯이 배를 맞대는 고래의 교미, 개들의 시끌벅적한 교미, 영상이나 사진으로 그런 장면을 보았을 때, 하루는 정말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그들은 섹스할 때 변명을 하거나, 착각을 하지 않아. 그래서 좋아. 인간은 멍청이라서 섹스를 하는 중에도 자기기마노가 착각에 빠져"
"착각?"
"상대를 지배한다든지, 모욕을 준다든지, 도덕적이라든지, 비도덕적이라든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해대는 거야. 얼마나 멍청해. 그걸 종교나 신과 연관짓는 놈들도 있어. 문학적이라니 정말 웃겨. 에로티시즘이 어쩌구저쩌구 하는 인간도 있어. 정말 바보 같아. 착각도 유분수지. 섹스를 했다고 해서 무슨 초월이 일어나는 것도 아냐. 그걸로는 아무도 지배할 수 없어. 인간의 성은 동물보다 몇 단계나 더 바보야."
"터무니 없는 말이지?"
"그래서 괜히 폼을 잡는 거야"
나는 하루의 이야기를 듣는 걸 좋아한다
"유인원으로 말하자면, 오랑우탄은 강간은 하지만 새끼는 안 죽여. 고릴라는 그 반대로 암컷에게는 상냥하지만 새끼는 죽여. 침팬지는 암컷을 학대하고 때로 새끼도 죽여"
"침팬지가 가장 질이 안 좋군"
"거기서 한 수 ㄹ더 뜨는 게 바로 인간이야. 강간도 하고 학대도 하고 자식도 죽이고, 뭐든 다 해. 게다가 인간의 경우는 발정기가 없으니까 일 년 내내 품위가 없어. 최악이야."
"너의 설명을 듣노라면 분명 인간은 최악이야"
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들어 보인다.
-166쪽

"침팬지와 비슷한 종으로 보노보라는 놈이 있어"
"들은 적이 있어"
"거의 침팬지와 똑같아. 그렇지만 보노보의 사회는 침팬지와 완전히 달라. 사람과도 다르고"
"더 최악이라는 말을 하려는 거지?"
"그 반대야. 평화로워. 보노보의 사회에는 강간도 새끼 살해도 없어. 게다가 계급투쟁같은 것도 없어. 덧붙여서, 인간과 비숫해서 암컷이 언제 배란기인지 수컷도 잘 몰라"
"거리에 무슨 의미가 있어?"
"그들은 틈만 나면 교미를 해. 하루에 몇 십 번이나 하는 경우도 있대. 그들에게 섹스는 인사와 같아. 실제로 친구도 만들고, 싸웠다 화해도 하는데, 그것도 모두 섹스로 처리해. 섹스가 아닌 경우도 있는데 암컷끼리 성기를 비비기도 한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인간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데"
"보노보 쪽이 인간보다는 산뜻해. 거기에는 지배도 우열도 변명도 없어. 인간은 생물 가운데서 유일하게 섹스와 생식을 구별한다고 아주 대견한 듯이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거짓말이야. 보노보도 그러니까. 게다가 그들 쪽이 더 평화롭게 살아. 성적인 포유류의 길을 같이 걸어가면서도 보노보는 성공했고, 인간은 실패작이야"
-166쪽

"이만팔천 년 전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
"네안데르탈인이 멸망했지"
" 어 알고있네?"
"내가 누구야. 형님이잖아. 처음으로 동굴벽화를 그린 호모사피엔스의 후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그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그렇잖아. 우린 모두 크로마뇽인의 휴손이야"
하루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그래. 크로마뇽인과 네안데르탈인은 완전히 다른 동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상에 같이 존재하고 있었어"
"공존하고 있었지"
"응, 몇 만 년 동안이나 공존했어. 계속 발전하고 번영하는 크로마뇽인을 네안데르탈인은 어떤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을까. 나, 그게 마음에 걸려"
나는 하나도 마음에 안 걸린다
"멸종이 가까워진 시기에 이르면, 네안데르탈인이 크로마뇽인을 흉내 내어 석기를 만든 흔적이 남아 있어. 살아남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한 거지. 갸륵하다는 생각 안 들어? 상상만 해도 나는 슬퍼져"
"성공한 기업을 흉내 내는 건 비즈니스의 기본이지"-181쪽

성냥, 이란 말에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유명한 소설이 떠올랐다.
"인생은 한 통의 성냥과 비슷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웃기는 일이다. 그러나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209쪽

"저 여자는 관계없어. 집에 돌아와서 도둑이 들었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에 불렀으니까. 화가 나면 여자를 안고 싶잖아? 마구 짓밟아주고 싶어지지."
갑자기 힘을 되찾은 표정이었다
"요즘 욕구불만 해소용 도구가 팔리고 있다면서? 여자란 그거와 똑같은 거야"
가츠라기의 얼굴에선 짜증과 졸음이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정력이 넘쳐흐르는 번들번들한 눈빛으 띠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렇게 마를 줄 모르는 천박한 생명력이 그의 손에 아파트를 쥐어주었고, 돈을 주었고, 인생에 반성할 기회를 주지 않았을 것이다.-217쪽

사람이란 외관으로 결정되는 것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해본다. 외관이 반듯한 몸은 건강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얼굴이나 육체가 좌우대칭이면 튼튼하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남자가 미이느이 뒤를 따르는 것은 이치에 맞다. 보다 건강하고 잘 정돈된 유전자를 자신의 유전자와 합치고 싶어하는 본능은 유전자라는 놈이 가져 마땅한 미덕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외관은 패션 브랜드와 같다"
하루는 그런 말을 했다
"좋은 브랜드는 비싸지만 그만큼 품질이 좋아. 그렇지만 그 반대도 있어. 별것도 아닌 물건에 브랜드 이름을 붙여서 손님을 속이거든. 사람들은 브랜드 이름만을 볼 때가 많아. 사람의 외관도 그와 똑같아서, 눈에 보이는 겉모습에 간단히 속고 말아.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기본을 잊어버리고 마는 거야"-260쪽

무슨 영문인제, 내 머릿속에서는 어떤 영화의 대새가 떠올랐다. 가스퍼 노에라는 감독의 몹시 도발적인 영화였다.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페니스가 맛보는 고작 구 초간의 쾌락이 한 사람에게 육십 년의 고통을 강요한다."-271쪽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이 있어서 부탁했지"
"노숙자겠지"
나는 그 말에 경멸감이 배어들지 않게 하려고 조심하면서 말했다.
"노숙자들이야"
하루가 내 말을 복수로 고쳐 되풀이했다.
"이상하게도 사람이란 고정관념을 가지기 쉬운 모양이야. 까마귀는 검다, 개는 온순하다, 고양이는 변덕스럽다, 동정은 악이며 장수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 그렇게 단정하면 기분이 좋은 모양이야. 그래서 노숙자를 모두 실패한 인간이고, 야만적이며 불결하다고 단정해버려. 또는 노숙자는 모두 불행한 인간이며, 바탕이 선한 사람이라고 단정해. 장애인이나 노인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노숙자 가운데는 이상한 놈도 있고 싹싹한 놈도 있어. 사랑스런 노인이 있는가 하면 때려주고 싶은 사람도 있어. 부탁만 하면 탐정 업무도 멋지게 해내는 노숙자도 있는 거야"
하루는 마치 랩을 하듯 리드미컬하게 말했다. 중요한 대목에서는 리듬의 고개를 넘으며, 말에 여울이 지기도 한다.
-309쪽

"에셔라는 사람 알아?"
"화가잖아. 착시효과를 이용한 그림을 자주 그린 사람"
"맞아. 판화가 에셔. 그는 라스코의 벽화를 보고 재미있는 걸 깨달았어"
"판화가가 깨달았단 말이지"
"조형예술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거야"
"진화하지 않아?"
"인류는 다양한 분야에서 진화와 발전을 해왔어. 과학이나 기계들을 봐. 선인의 가르침이나 성과를 배우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왔어. 하지만 예술은 달라. 에셔는 그걸 발견한 거야."
"예술은 왜 다른데?"
"어떤 시대에도, 상상력이란 선인에게서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매순간마다 예술가가 필사적으로 짜내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예술은 진화하지 않는다는 거지"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십 년 전에 비해 컴퓨터나 전화는 더 편리해졌어. 진화했다고 해도 좋아. 그렇지만 백 년 전의 예술에 비해 지금의 예술이 더 휼륭하다고는 할 수 는 없는거야. 과학처럼 업적을 쌓아올리는 것과 달라서 예술은 그때마다 전력질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346쪽

"눈에는 눈, 그런 말 들어봤어?"
하루가 물었다
"무슨 법전이더라 그거?"
"대부분은 그 말뜻을 '당하면 그대로 되갚는다'라고 잘못 해석하는데, 그건 '눈을 잃었으면 상대의 눈을 없애기만 하면 된다', '이가 빠졌으면 상대의 이만 빼라'는 뜻이야. 과잉 보복은 안 된다는 말이야"
"그런가?"
나는 학교에서 배운 걸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형벌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가해자가 한 것과 똑같이 하면 돼. 상대에게 정상참작할 만한 점이 있다 해도, 드러난 결과는 움직일 수 없으니까, 똑같이 해줘도 불평하지 못할 거야. 팔이 부러지면, 상대의 팔을 부러뜨리면 돼"
"운전 실수로 어린애를 친 사람은"
"운전 실수로 그 사람을 치면 돼"-4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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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과양 2007-04-07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메모 해놓을 구절이 많죠? 고등학생때 이과반이라 생물2를 배워 둔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나름 아직 녹슬지 않은 생물학지식에 흐뭇했답니다. 미술사학적, 역사학적인 내용은 공부하면서 봤어요. ^^

LAYLA 2007-04-07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생물 2로 수능 치지는 않아서 그냥 내신수준으로만 배워뒀었어요. 그래서 대충 이해는 되더라구요 미술 역사 내용은 그냥 끄덕이면서 넘어갔는데 역시 모과양님은 성실하시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