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품절


"왜 우리나라엔 왕이 없는 거지?"
탈북자가 운영한다는 냉면집에서였다. "왕? 무슨 왕?" 국숫발을 채 끊지 못한 우리는 심드렁하게 그 말을 받았다. 그러나 말을 꺼낸 그는 진지했다. "왕이 있으면 좋잖아. 영국이나 네덜란드처럼 정치적 실권은 없는 왕이라도, 있으면 폼 나잖아?" -27쪽

"일단 왕이 있으면 말야. 왕이 있는 나라들하고 급이 맞잖아. 엘리자베스 여왕 오면 데리고 안동 하회마을도 가고, 일본 천황하고 술도 한잔 하고....그동안은 그걸 대통령이 하느라 피곤했는데 그런 의전적 잡무는 왕한테 맡기는 거야. 그럼 대통령도 편하지. 그렇지만 무었보다." 여기서 그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왕이 있으면 공주도 있잖아!""공주가 있으면 뭐?" 우리가 눈을 크게 뜨고 반문하자 그는" 공주가 있다는 건 왕비도 있다는 거고 또한 왕자도 있다는 거야. 혹시 알아? 공주가 주최하는 창경궁 파티에라도 한번 불려가게 될지. 우리 인생엔 그런 일이 없어서 이렇게 따분한 거야. 가끔 공주가 평민하고 사랑에 빠져 달아나기도 하고 뭐 그래야 되는 거 아냐? 그런 게 없으니까 심은하가 공주 노릇 하는 거잖아 우이씨"-28쪽

"경복궁에 진짜 왕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봐. 얼마나 근사하냐고. 그럼 궁중음악이니 전통 제례니 복식이니 하는 걸 일부러 돈들여 보존할 필요가 없어. 왕이 진짜로 있는데 뭘. 한 나라의 전통을 가장 잘 보존하는 방법은 왕을 두는 거야. 왕실에서 다 알아서 하게. 왕세자가 장가를 간다거나 국왕이 붕어하면 그 제례들 다 올릴 거고, 그럼 옷도 입어야 되고, 음악도 연주해야 되잖아. 그리고 일단 경복궁 어딘가에 왕과 왕비가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구경할 때 도 긴장감 있잖아? 관광객들은 진짜 왕이 사는 궁에 가고 싶지 왕이 백 년 전에 앉았다는 의자나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안 그래?"-28쪽

"우리 고모가 상궁인데 어제 입궐했다가 주상을 뵈어다지 뭐야. 이런 말도 할 수 있게 되는 거지. 물론 삼촌이 별감인 놈도 있겠지. 통역 상궁, 웹 디자이너 별감 같은 직업도 생길 테고 말야. 게다가 관광 유발 효과도 만점일 거야. 허수아비 왕이라도 옷입고 어디 행차하고 그러면 폼 나잖아. 교황도 수요일에 손 한번 흔들어주면 성 바오로 광장에 모인 관광객들이 좋아라 하잖아. "-29쪽

'소유냐 존재냐'같은 거창한 얘기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도 젊은 청춘들의 욕망은 크게 저 두 가지로 갈라지는 것 같다. 갖고 싶다 혹은 되고 싶다. -81쪽

탄광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하던 고흐, 종교적 열정에 붙들려 있던 시절의 고흐, 한 여자를 사랑했지만 "케이에게 얘기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이 손을 불꽃 속에 넣고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간 동안만"이라고 말하며 촛불 속에 자신의 손을 밀어넣었던 고흐. 그는 물론 '진짜'다. 모두가 그를 경원했으므로 그는 외톨이였고 따라서 일생은 처절했다. 그러나 한편 그는 자해 공갈단 수준의 미련퉁이 스토커였으며 구제할 길 없는 정신병자였고 가족들의 골칫덩이였으며 종교적으로는 광신자였다. 어쩌면 우리는 가짜들밖에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어진 존재인지도 모른다. 진짜들은 그 존재만으로 모든 가짜들을 백일하에 폭로하므로 모든 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일치단결하여 그 진짜들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다. -95쪽

이성에게 자신을 오래도록 기억하도록 하는 두 가지 방법. 하나는 변태를 가르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음악을 선물하는 것이다. -108쪽

가장 남성적인 직업 셋을 굳이 꼽으라면 해군제독과 영화감독,그리고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라고 말한 이가 있었다. 볼링장의 해군제독과 수영장의 영화감독, 도서관의 오케스트라 지휘자야 별볼일 없는 존재지만 자기 관에 들어오면 그들은 거의 신과 격이 된다. 그들은 홀로 판단하고 결정한다. 모든 구성원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향한다. 제독님 포를 쏠까요 말까요? 감독님 이 대사 그대로 갑니까? 지휘자님 이부분은 좀 약하게 연주하는게 좋지 않을까요? 모두가 그들을 바라보며 결정을 기다린다. 이 위대한 독재자들은 교정되거나 설득되지 않고 대체로 실패의 책임을 지고 추방된다. 그럼에도 수많은 사람들은 부나비처럼 이 길로 뛰어든다. 그들의 등 뒤에서 불타오르는 찬란하면서 불길한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무한 권력, 무한 책임에서 분비되는 아드레날린에 중독된 사내들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22쪽

...우리 성가대의 지휘자 역시 최선을 다했다. 우리 모두는 그가 최선을 다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자동적으로 그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았다. 카리스마는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게 아니라 이미 최선인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이 씁쓸한 진실을 알지 못하면서 지도자로 살아간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122쪽

성가대 같은 모임에는 으레 특출한 음악적 재능을 선물받은 이들이 있기 마련이다. 음악에 둔재였던 나는 그런 이들에게 쉽게 매혹되었다. 한 여대의 음악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던 친구였는데 소프라노 솔로 부분을 도맡아 부르곤 했었다. 노래하는 여자와는 사랑에 빠지기 쉽다. 그녀는 노래하고 나는 듣는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는 눈을 뜬다. 그녀는 자신에게 집중하고 나는 그녀에게 집중한다. 그녀는 노래를 사랑하고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모르고 나는 안다. 무엇을? 내 사랑을.-126쪽

"도대체 무슨 일인데?"
알아야 무슨 일이 있겠는가. 아무 일도 없지.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사랑의 비극이다. 사랑은 낭비이며 사치이며 한가한 감정놀음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러나 자기는 전혀 사랑할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잔인한 자들은 "무슨 일이냐"라고 묻는다. "그냥..."으로 시작하는 ˆ국牡?기어이 그의 입으로 말하게 함으로써 말하는 자를 한심하게 만드는 놀음을, 그들은 즐긴다.
"눈이 많이 와서....."-129쪽

...환각의 자유라든지, 게으를 권리를 특집으로 잡아서 했는데 그 특집 중 하나가 '나에게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였다. 나중에 내 소설 제목이 되었는데 그특집은 이른바 환각의 자유를 이야기하는 기획이었다. 이를테면 환각을 보는 것 자체는 죄가아니라는 내용이다. 대원사에서 나온 <환각제와 마약>이라는 책에서는 왜 똑같은 마약 성분이 인디언들에게는 집단의 통합을 강화하고 다른 세상을 보게 해주는데 현대의 미국인에게는 총질을 충동하는 물질이 되는가. 다시 말하면 약물이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라고 조심스럽게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상당히 재미있다.
집에서 광선총을 쏘는 것은 나라가 간섭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차량을 탈취하거나 하는 경우엔 형법으로 다스리면 될 일을 단순히 환각을 보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2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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