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이야기
신경숙 지음 / 마음산책 / 2002년 8월
품절


슬픈 영화는 날 울려요

10분 후면 그 남자가 찻집 문을 열고 들어올 것이다. 그 남자는 지난 8년 동안 약속시간을 1분도 늦어본 적이 없었다. 마치 조금 일찍 도착해 기다리고 있다가 약속시간이 되면 찻집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매번 정확했다.
J는 30분 전에 이 찻집에 왔다. 그 남자와 알고 지내면서 단 한번도 없던 일이대. 대부분 그 남자보다 조금 늦게, 아니면 조금 이르게 였으나, 조금 이르게라고 해도 10분 이상 빨리 온 적은 없었다.
J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약속시간 3분 전이다. 그 남자는 오늘도 다른 때오 ㅏ다름없는 마음인가 보았다. 8년의 세월이 마침표를 찍는 날인데도 말이다.-74쪽

그 남자는 정확한 시간에 역시 정확하게 찻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남자는 J를 향해 빙긋이 웃었으나 J는 외면해버렸다.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지?
J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한 그 남자의 태도가 자꾸만 마음에 거슬렸다. 그래서 그 남자가 차 주문을 하러 온 찻집 종업원에게, 홍차 둘! 했을 때 J는 아니오, 저는 주스 주세요 파인애플 주스로!했다. 그 남자의 동공이 복잡하게 흔들렸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8년 동안 찻집에서 그 둘의 차 주문은 언제나 홍차 둘이었고, J는 단 한번도 그 홍차 둘에 다른 의견을 말해본 적이 없었다.
따끈한 홍차 한 잔과 차가운 파인애플 주스가 그들 앞에 놓여졌다. J는 주스를 끌어당겨 한 모금 마셨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은 빈속으로 주스는 살려울처럼 파고들었다.
"그래 물건들은 다 챙겨왔어?"
"그래"
그 남자는 찻잔을 한 쪽으로 밀어놓고서 가방을 탁자에 올려놓았다.
"너도 다 갖고 왔지?"
"그럼"
J도 옆 의자 위에 얹어두었던 가방을 그 남자가 올려 놓은 가방 옆에 올려놓았다. J가 들고 온 것이 훨씬 더 컸다.-74쪽

"빠진 것 없지?"
"내가 알고 있는 한은 없다. 너야말로 뭐 빠뜨린 거 없냐?"
"소모품들 받은 건 다 써버려서 다시 되돌려주고 싶어도 없어졌으니 할 수 없는 거 아니니?" 설마 전에 제주도에 있을 때 귤 한 상자 보내준 거며, 생일날 보내준 과자 이런 것까지 다시 받아가려는 건 아니겠지?"
"받을 수 있으면 다 받았으면 좋겠지만 먹고 쓰고 그래서 없어진걸 낸들 어떡하겠냐?"
"고맙네"
J는 괜히 서러워졌다. 저 남자가 8년 동안 내 옆에 있었던 그 남자가 맞는가?
캠퍼스 커플로 만나서 커피 한잔을 같이 나눠마시고, 방학 때마다 매일 하루 한 통씩 편지를 써 보내던 그 남자,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자기 아내가 될 줄으 알고 있었다던 그 남자, 긴 머리의 여자만 보면 모두 나 같고,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한들 나와 함께 볼 수 없으면 무의미하다던 그 남자, 무덤 속에 들어갈 때까지 그 마음 변치 않겠다고 말하던 그 남자가 맞는가? 결혼도 안했는데 학교 졸업 후 직장을 갖자마자 첫 월급부터 지금까지 월급봉투를 꼬박꼬박 J에게 갖다주며 용돈을 타가던 그 남자가 맞는가? 그 돈으로 선물까지 하던 그 남자. 2주일 전까지 그들은 연인이었다. J가 혼자서 연극을 보러가기 전까지만 해도.-76쪽

<슬픈 영화>라는 노래가 있다.
한 여인이 약속이 있다는 애인의 말에 혼자 영화를 보러 갔는데 그 영화관에서 다른 여인과 함께 영화를 보러 온 애인을 만나 울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노래.
J가 본 것은 슬픈 영화는 아니고 슬픈 연극이었다.
J가 연극표 두 장이 생겨서 그 남자와 함께 갈까 하고 전화를 했는데 연극 얘기도 꺼내기 전에 약속이 있다는 것이었다. J는 말도 못 꺼내보고 다른 친구와 함께 소극장엘 갔다. 그러고선 슬픈 연극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연극이 시작될 무렵 친구가 옆구릴 툭툭 쳐서 보니까 그 남자가 웬 여자와 함께 저만큼 앞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둘은 아주 다정하게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J는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남자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 남자가 돌아다봤을 때 J는 뛰쳐나와 버렸다. 세상에 그 남자가 저럴 수가. -77쪽

그리고 오늘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변명했다. 제주도로 발령이 나 근무를 했을 때 옆자리에 앉았던 동료인데 모처럼 휴가를 얻어 서울에 온 참에 연극을 꼭 한 편 보고 돌아갔으면 해서 같이 구경하러 간 것일 뿐이라는 거였다. <슬픈 영화>라는 노래에서는 울며 돌아온 여인에게 어머니가 왜 우느냐고 물으니까 슬픈 영화는 늘 날 울려요, 라고 대답하지만 J의 대답은 너 같은 위선자하고는 다시는 얼굴을 마주대하고 싶지 않아, 였다.
"뭐 위선자?"
어떻게 해서든J의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던 그 남자는 위선자라는 말에는 참을 수가 없어 마음대로 하라고 소리쳤다. 그 마음대로의 결과가 지금 이 자릴 만든 것이었다. 그만 만나자, 이젠 서로 모르는 사람이 되자, 그래도 정리해야 될 것은 정리해야 되니까 그동안 서로 선물 줬던 것이며, 같이 찍었던 사진이며, 각자 가지고 있는 상대의 독사진들을 가지고 한 번 만나자, 이것이었다.
분한 마음에 상황을 이렇게 진전시키기는 했지만 J는 그 남자가 정말 위선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정도가 위선자라면 자기는 더한 셈이었다. 그가 제주도로 내려가 있던 그 해의 생일날, 사무실 책상위에는 그가 제주도에서 보내온 축전과 과자가 놓여 있고, 지하 다방에서는 다른 남자가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77쪽

J는 새삼 그 남자의 존재가 자신의 생활 어디에나 속속 들어와 있다는 것을, 그 남자가 준 것들을 정리하면서 깨달았다. J 의 방에 있는 책과 스카프와 스탠드....그 남자가 자신에게 준 것들 투서잉 속에서 살고 있었음을. 더구나 그 남자가 J에게 꼬박꼬박 받아다 준 월급 저축앤은 상당액이었다. 결혼하게 되면 그 돈으로 방을 얻든 집을 얻든 할 것이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나? 어젯밤 내내 J는 그 통장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생각했다.
내것도 아닌데 돌려줘야지.
J의 마지막 결심은 돌려주자, 였다. 결국은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마치 그남자의 아내나 되는 듯이 기뻐하며 저축을 했던 자신을 생각하니 어이엇ㅂ기도 했다.
"나랑 헤어지게 되어 너희 부모님이 제일 좋아하시겠다!"
"갑자기 부모님은 왜 끄집어내?"
"갑자기는 무슨 갑자기야! 나 못마땅해 하셨잖아. 순 서울놈이라 말 붙이기가 힘들다고 하셨대며?"
"연극 함께 보러 갔던 그 여잔 제주도 토박이야?"
",,,,"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해"
그 남자는 J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혼자 종알거리던J도 머쓱해져, 남자가 가져온 가방을 무릎으로 끌어내리고, 자신이 들고 온 가방을 그 남자 앞으로 가까이 밀었다. 그남자도 가방을 탁자에서 끌어내려 옆의자에 내려놓았다. -78쪽

"그리고 나한테 갖다 준 월급은,,,"
갑자기 그 남자가J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건 너 가져..그게 좋겠어"
J는 멍하니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나 가지라고?
J는 콧잔등이 찡해왔다. 그걸 도로 내놓으라고 할 남자는 아닌 줄 알았짐나 막상 그의 입으로 직접 듣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J는 마음과는 달리 깍쟁이 같은 목소리로 팩 소릴 쳤다.
"그럼 당연하지. 그런데 이걸론 모자랄 것 같애. 생각해봐. 지난 세월 동안 당신한테 들인 시간과 공정이 얼만데 이 정도가지고 되겠어? 더 내놓아야 되겠어. 이것 갖고는 안되겠어!"
",,,,,,?"
"왜? 내가 부당한 요구를 하는 것 같애?"
",,,,,,?'
"왜 그렇게 빤히 봐?"
"나 돈 없어. 너도 알다시피 내 월급은 그동안 너 다 갖다줬잖아. 그게 다야....더 줄 돈이 어딧어!"
"그럼 못 헤어지겠네 뭐"
얼마 후, 두 사람은 다른 찻집으로 자릴 옮겼다.
종업원이 차 주문을 받으려 왔을 때 그 남자는 홍차 둘, 이라고 말했고 J는 그저 그 남자의 와이셔츠에 묻어 있는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떼내어 주었다. J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 남자 부자였다면 큰일날뻔했네.-80쪽

복사꽃 같은 시절이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아편 같은 것이지. 그 아름다운 순간들을 차분히 녹여내지 못하고, 언제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과 저울질하는 시절이지. 내 꽃 같던 시절에 그 남자는 어쩐지 마음에 반도 안 찼었지. 따로 다른 이를 만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다만 그와 만나고 있는 순간들은 지나가야 할 찰나적인 것만 같았었어.
그와 함께 팔짱을 끼고 걸으면서도 다른 사람을 눈여겨보고, 그 남자와 여기 앉아 있으면서도 언제나 저기를 생각했었지. 이 사람 아닌 다른 사람, 이곳 아닌 다른 곳, 이것말고 저것. 그 시절에 나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것에 취해 있었어. 견디다 못해 그가 다른 이와 결혼을 한다고 했을 적에도 아무렴 어떠랴 했지. 그래, 그는 어떤 시골마을이고 난 기차를 타고 거길 떠나야 한다고 말이야. 죽을 때까지 내 편이라고 그가 말할수록 나는 저편의 그 무엇에 끌려서 그 남자의 순정을 모른 척했어. 아니야. 모른 척한 게 아니고 나는 정말로 몰랐어. 그러다가 어떤 허깨비 같은 이가 내게 잠시 손을 내밀었을 때 나는 그의 곁을 완전히 떠나버렸지. 하지만 너무 잠시였어. 그 허깨비와 헤어져 돌아와보니 그는 이미 결혼을 해버렸더군. 그가 이제 내 손안에 있지 ㅇ낳다는 사실. 그가 이제 이곳 사람이 아니고 저곳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사실. 언제나 이것말고 저것을 눈여겨보는 것이 내 마음이었는데, 바로 그가 이제 저쪽에 있고 보니 그제야 내 눈에 그가 들어오는 거야.-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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