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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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12쪽

그의 눈빛에 순간 아련한 바람 같은 게 지나갔다. 그것은, 새 길을 찾아나섰으나 안개 자욱한 산굽이에 막 들어선 방랑자의 눈빛이었다. 서지우는 그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31쪽

참 좋은 가을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동반해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55쪽

'군도'를 쓴 독일 작가 실러는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면서, "미래는 주저하며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라고 썼다. 나는 네 옆에서 그 모든 걸 일목요연하게 보았다. 내가 훈장처럼 여겼던 나의 '과거'가 무의미하게 '정지'된 것과, 나의 '현재'가 샤샥샤샥, '화살'처럼 귀밑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주저'하며 다가오는 나의 '미래'는 더구나 남아있는 여분이 얼마없었다. 주저할 틈이 어디 있는가. 시간이 샤샥샤샥, 바람보다 빨리 흘러가는 소리가 환히 들렸다. 폭풍 같은 슬픔이 나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그 슬픔 속에서, 어찌 내가 너를 만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물고 빨고 싶지 않았겠는가.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내가 너를, 어찌 죽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순간, 너를 죽이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은 것처럼.-96쪽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굶주림과 오욕으로 가득 찬 나의 열일곱 기억들을 네게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너는 이승만과 신익희와 진보당을 알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2천 년대, 신세기의 열일곱 살을 살면 되지. 자본주의의 안락이 주는 꿀과 같은 달콤한 시간과 유혹들, 때로 조금 쓸쓸할 때도 있겠지만 오오, 푸르고 '섹쉬'한 밤을 수초처럼 유영하면서, 해바라기 아니면 오렌지, 남국의 과실처럼 익어가는 네 청춘을 나는 상상해본다. -108쪽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사을 현실로 만든다.-120쪽

아내와 연애할 때에도 알고 보면 미적지근한 관계였다. 만나면 따뜻하고 안 보면 조금 쓸쓸한,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사랑은 본래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라고 말한 건 선생님인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에 데거나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꿈꾸는 사랑은 오래 앉아본 듯한, 편안한 의자 같은 것이다. -185쪽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200쪽

두 사람만의 상점에서 서로 만나서
두 사람만의 술을 우리들은 마신다
너는 조금 나는 많이
늘 마시는 술을 마시면서
낮에 있었던 이야기며 일의 이야기

남의 소문이며 내일의 스케줄을
그리고 갑자기 어둠 속에서의 입맞춤

- 이와다 히로시 '미혼'에서-205쪽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234쪽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251쪽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썼다. 10세는 과자, 20세는 연인, 30세는 쾌락, 40세는 야심에 미친다고. 나의 마흔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쳐야 할 어떤 영지도 갖고 있지 않은 불모의 대지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진실로 청춘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내 정체성에 따른 뜻을 세운 적도 없었다. 그냥 허랑하게 시간을 따라 흘러왔을 뿐이다. -259쪽

늙은 사람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르없다. 더구나 나의 피부는 두꺼워 홍조도 감출 수 있고, 나의 주름은 깊으니 독심 품는다면 오욕칠정인들 안으로 숨기는 게 뭐 어렵겠는가. -271쪽

젊다는 것은 그 값이 하늘에 닿으려니와, 동시에 준비되지 않은 여린 영혼으로 불온한 앞날과 자기 모반의 유혹을 상시적으로 받을진대, 울고 싶은 일이 왜 없겠는가. 바람만 불어도 웃을 때인것처럼 바람만 불어도 울 때이다.-303쪽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은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세상을 보고 짖는 것은 무섭기 때문인데

그대는 오늘도 개보다 많이 짖는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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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2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분명히 읽은 책인데 왜 하나도 눈에 익는 문장들이 없는걸까요 ㅎㅎㅎ

LAYLA 2012-07-21 23:16   좋아요 0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소이진님 읽은 책과 제가 읽은 책은 같은 책이 아니죠.
남고생과 이십대 여자가 읽은 은교는 완전히 다른 작품일거라 생각해요 ^^
 
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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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비하면 앞자리 여자는 이야기를 상상해낼 만한 게 없다. 긴 스트레이트파마에 한창 유행하는 짧은 팬츠에 킬힐을 신고 속눈썹을 검게 칠한 공들인 화장을 했다. 예쁘긴 한데 전형적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고 치장했다는 느낌 때문에 어딘지 천박해 보인다. 아마 처음에 남자는 저 여자의 세련된 전형성에 더 끌렸을지도 모른다. 예쁘다는 실감에 앞서, 저런 모습이 예쁜 거라고 끊임없이 세뇌하는 유행이라는 상업 패턴에 속았을 것이다. -31쪽

지겨운 관계니까 지속되는 거야. 새롭고 재미있는 건 오래 못 가거든. 지겨우면 끝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요셉의 궤변에 말려든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안은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잖아요.

넌 예의상 연애하냐?

그리고, 지겹다고 박차고 일어나는 게 예의나, 아니면 지겨워도 참는 게 예의냐? 내가 참을성 많고 예의 바른 인간이 아니었다면 어떤 여자가 선물을 주겠냐.-46쪽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을 때는 최상의 결과를 얻는 건 포기해야 한다. 무난한 걸 택하는 게 그나마 최악으로 가지 않는 방법이다.-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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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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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에는 단순히 '인간 수컷은 필요없어'가 아니라, '인간 수컷 따윈 필요없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멋진 외계인 남자가 등장한다.  외계인 남자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1. 외계인과의 만남에서는 굳이 우리의 만남이 운명임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사는 동네출신 학교출근할   호선을 타세요지리하게 읊어가며 너와 나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란  확인하고자 하는 인간세계의 풍습에 질린 녀성이라면 외계인을 만나보도록 하자그는 이미 2 광년을 달려 나를 보러  것이기에 진정성과 운명성은   말할  없이 순도 100%. 

 

2. 외계인은 연필심을 갈아서 삼킨 다음 다이아몬드로 만들어 토해 내고다시 그것을 반지로 만들어 프로포즈 한다인간 수컷 역시 노동을 하여 임금을 받고다시  돈을 상품 교환의 매개로 삼아 다이아몬드 반지를 획득하기에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몸을 던져 다이아몬드 반지를  세상에 존재케  것이라 우길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외계인이 직접 몸으로 만들어 내는 다이아몬드 반지가  멋진거 같다돈으로 장작을 사주는 남자보다는 직접 뒷마당에서 장작 패주는 남자가  멋있는 순간이 있는것처럼

 

3. 외계인은 누구에게도 빌리지 않은 자신의 언어로 사랑을 고백할  안다. 책에서 밑줄긋기 한 구절이나 드라마 명대사 같은 것에 빚지지 않고 기본적인 명사와 동사만을 이어 붙여 자신의 진심을 전하는데 그 고백이 무척 달다. 인간 암컷들에겐 컬쳐숔.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들을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너를 위한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시간이 들었어." 클리셰 몇 문장과 제한된 언어(ex) 좋아해-사귀자-사랑해-오빠믿지?)로 구애의 80-90%를 해치우는 인간 수컷들이 미개인처럼 보인다.

 

4. 내가 전혀 모르는 세상을 보여주고 알려준다. 결혼한 남자를 2가지로 나누자면 '아내의 눈을 가리는 남자' '아내와 함께  많은 것을 보려는 남자' 있다고 하는데 외계인은 기본적으로 후자의 자세를 취한다는 것. 밤하늘의 별을 보며 인간 수컷이 "이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오그리토그리 할 때 외계인은 우수젖은 눈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때  별에는 괴로울  온몸에 눈물 대신 석영이 맺히는 종족들이 살았어 사람들은 석영으로 화폐를 대신했었어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대가를 주기 위해서 인도주의적이였지. .. .." 당신이 보고 온 세상에 내가 왜 한숨이..

 


소설을 평가하는 일반적인 기준-문학성, 짜임새, 문장력 등-들을 생각해 보자면 별 다섯이란 평가가 지나치게 주관적이란 생각도 들지만 그녀의 글에는 독자를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다. 할리퀸 로맨스 남주 뺨치는 외계인 남친의 캐릭터가 강력하긴 하지만, 신사의 품격을 보고도 하품하는 다 큰 처녀들이 단지 그 캐릭터에 혹했다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독자들을 뒤흔드는 건  그녀의 갇히지 않은 상상력과 십대마냥 마르지 않은 감수성이라 생각한다. 탄탄하고 있어보이는 소설은 열심히 습작하고 훈련하다 보면 언젠가 쓸 수 있겠지만, 이런 '느낌'이 있는 살아있는 소설은 젊은 시절이 지나면 다시 쓸 수 없는 작품이기에 아낌없이 별 다섯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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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7-17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사의 품격은 보다가 울화통이 치밀죠. 저들은 대체 뭣들하는건가...하고요.

오, 이 책이 그러니까 이런 책입니까? 제목 때문에 어쩐지 묘하게 읽기 싫은 마음이 드는 책이었는데, 좋아요, 일단 사야겠어요!

LAYLA 2012-07-17 13:22   좋아요 0 | URL
신품을 보기에 너무 쿨싴해졌나봐요 ㅎㅎㅎ
책 마음에 드셨음 좋겠네요.키키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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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의 입국 통로가 열리고,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나서야 경민이 걸어 나왔다. 거리가 크게 멀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을 한아는 기억한다. 하지만 실루엣 만으로도 오래된 남자친구를 알아볼 수 있었고, 달려가서 안길 정도의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 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21쪽

"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33쪽

한아는 오랫동안 봐온 그 등에서 익숙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저 등은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한아를 아프게 하려고 빚어놓은 실루엣 같았다. 툭 튀어나온 양 어깨뼈 사이, 깊고 우묵한 곳에 이마를 대고 울고 싶어졌더랬다. 하지만 언제나 점점 멀어져 잰걸음으로 쫓느라 한아는 울 시간도 없었다. 그때마다 얻은 자잘한 상처 위에 상처가 겹쳐 단단한 살이 될 때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는데, 왜 이제 와서 다시 아파지려는 걸까?-85쪽

"....자유 여행권이란 게 대체 뭐야? 아까 뭐라 했잖아."
한아 머릿속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놀이공원 자유 이용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경민이 모닥불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음 아주 희귀한 여행 허가서 같은 거야. 3천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별의 시민들에게만 주어져. 우주에 나쁜 게 전염되지 않도록."
"여기라면 턱도 없겠다. 굉장히 평화로운 별에서 왔구나..."
한아는 갑자기 스스로가 열등하게 느껴졌다. 선진구...은 아니고 선진별이잖아?
"평화로운 셈이지. 우린 자가 분열로 번식을 하는 데다가 인간보다 강한 집단 무의식으로 꿈이 이어져 있거든. 개체이면서 모두야. 선량하기보다는 지루한 생명체라서 전쟁이 없어. 무엇보다 망원경 기술이 굉장히 발전해서, 다른 별을 구경하느라 싸울 시간도 없고"
"망원경이 특산품?"
"응, 아까 본 몸의 일부를 제련해서 만드는데 거의 실시간으로 우주를 볼 수 있어. 종족 비밀이라 말해줄 수는 없지만, 물리학 법칙을 구부리는 원리의 망원경이야."
"너도 가지고 있었니? 그걸로 날 본 거야?"
-102쪽

"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 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왜? 다른 별들도 많잖아? 다른 사람들도 많잖아?"
...
"망원경은 몸의 일부로 만든 것이라서, 주인이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스스로 움직여. 대개는 어떤 일관성 없이 그저 산발적으로 우주의 곳곳을 비추고 있지. 그런데 내 망원경은 달랐어. 깨어나서 내가 잠든 동안 어디를 비췄는지 체크해보면 꼭 비슷한 지점을 스쳐 갔더라고.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잠들지 않고 계속 그 근처를 살폈지. 곧 망원경이 뭘 보고 있는지 알았어. 그러니까, 웃기지? 나보다 내 망원경이 더 먼저 널 사랑한 거야."-103쪽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106쪽

"아저씨, 아저씨가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어떤 특별한 사람은 별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나한텐 아폴로 오빠가 그래. 은하계건 어디건 난 따라갈 거야.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어요."-119쪽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140쪽

"한때 저 별에는 괴로울 때 온몸에 눈물 대신 석영이 맺히는 종족들이 살았어. 그 사람들은 석영으로 화폐를 대신했었어,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더 큰 대가를 주기 위해서. 꽤 인도주의적이였지."-164쪽

한아 커플이 스스럼없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데는 무려 3주가 걸렸다. 경민의 입장에서는 먼저 말을 꺼내는 게 강요하는 꼴이 될까 봐 망설여졌고, 한아의 입장에서는 결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지구적인게 아닐까 문득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지구인이니 지구적일 수밖에 없지만, 촌스러워 보이기는 싫었다. 우주 변방에 사는 촌년이 사라져가는 풍습을 외계인 남편에게 강요하는 꼴은 사양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누구나 한다고 해서, 너까지 그래 줄 필요는 없는 거 같아. 심지어 지구에서도 이제 유행이 자나간 것 같은데...너희 별엔 결혼 같은 거 없잖아. 그치? 철 지나간 환상 같은 거 아닐까."-181쪽

"우리 별에는 없지만 결혼이 환상이라면, 의외로 우주에 굉장히 보편적인 환상인 거야.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정말로. 일생일대 유일한 대상을, 얼마나 많은 종류의 지적 생명체들이 헤매며 찾고 있는데, 찾았으니, 자랑하고 싶은 건 얼마나 당연해. 아주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욕망인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바보 같지도 않아?"
"지구의 결혼이란 거, 어딘가 변질된 냄새가 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둘의 결혼은 그거랑은 다를 걸 알잖아. 그게 어디가 바보 같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결혼을 하자."-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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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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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수동 차량을 운전하는 여성을 보면 여지없이 '멋진걸'하고 생각한다. 기민하고 똑똑해 보인다. 뚜렷한 목적과 명료한 시야를 갖고 인생을 독립적으로 사는 사람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든다.-1쪽

내가 가장 좋아하는 조깅코스는 교토의 가모가와 강변길이다. 교토에 갈 때마다 이른 아침 시간에 그곳을 달린다. 단골 숙소가 있는 미이케 근처에서 가미가모까지 달려갔다 온다. 그러면 대략 10킬로미터. 그사이 스쳐가는 다리의 이름도 모두 외워버렸다.-2쪽

결국은 제 몸에 맞는 옷밖에 입을 수 없으니까. 맞지 않는 것을 떠맡겨봐야 어느 순간 저절로 벗겨질 뿐이다. 그러니 맞지 않는 것을 떠맡기는 것도 하나의 훌륭한 교육이 될지 모른다. 그 때문에 비싼 수업료를 내야 한다면 너무나 억울하겠지만.-3쪽

문명이라는 것은 뭔가 신기하다. 한 가지 편리함을 주면서 새로운 부자유도 한 가지 만들어준다.-4쪽

'자유로워지다'라는 것은 설령 그것이 잠깐 동안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멋진 것이다.-5쪽

지금까지 인생에서 정말로 슬펐던 적이 몇 번 있다. 겪으면서 여기저기 몸의 구조가 변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상처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6쪽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고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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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2-07-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루 키 쨔 응!!

2012-07-03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4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