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12쪽
그의 눈빛에 순간 아련한 바람 같은 게 지나갔다. 그것은, 새 길을 찾아나섰으나 안개 자욱한 산굽이에 막 들어선 방랑자의 눈빛이었다. 서지우는 그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31쪽
참 좋은 가을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동반해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55쪽
'군도'를 쓴 독일 작가 실러는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면서, "미래는 주저하며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라고 썼다. 나는 네 옆에서 그 모든 걸 일목요연하게 보았다. 내가 훈장처럼 여겼던 나의 '과거'가 무의미하게 '정지'된 것과, 나의 '현재'가 샤샥샤샥, '화살'처럼 귀밑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주저'하며 다가오는 나의 '미래'는 더구나 남아있는 여분이 얼마없었다. 주저할 틈이 어디 있는가. 시간이 샤샥샤샥, 바람보다 빨리 흘러가는 소리가 환히 들렸다. 폭풍 같은 슬픔이 나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그 슬픔 속에서, 어찌 내가 너를 만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물고 빨고 싶지 않았겠는가.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내가 너를, 어찌 죽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순간, 너를 죽이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은 것처럼.-96쪽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굶주림과 오욕으로 가득 찬 나의 열일곱 기억들을 네게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너는 이승만과 신익희와 진보당을 알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2천 년대, 신세기의 열일곱 살을 살면 되지. 자본주의의 안락이 주는 꿀과 같은 달콤한 시간과 유혹들, 때로 조금 쓸쓸할 때도 있겠지만 오오, 푸르고 '섹쉬'한 밤을 수초처럼 유영하면서, 해바라기 아니면 오렌지, 남국의 과실처럼 익어가는 네 청춘을 나는 상상해본다. -108쪽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사을 현실로 만든다.-120쪽
아내와 연애할 때에도 알고 보면 미적지근한 관계였다. 만나면 따뜻하고 안 보면 조금 쓸쓸한,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사랑은 본래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라고 말한 건 선생님인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에 데거나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꿈꾸는 사랑은 오래 앉아본 듯한, 편안한 의자 같은 것이다. -185쪽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200쪽
두 사람만의 상점에서 서로 만나서 두 사람만의 술을 우리들은 마신다 너는 조금 나는 많이 늘 마시는 술을 마시면서 낮에 있었던 이야기며 일의 이야기
남의 소문이며 내일의 스케줄을 그리고 갑자기 어둠 속에서의 입맞춤
- 이와다 히로시 '미혼'에서-205쪽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234쪽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251쪽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썼다. 10세는 과자, 20세는 연인, 30세는 쾌락, 40세는 야심에 미친다고. 나의 마흔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쳐야 할 어떤 영지도 갖고 있지 않은 불모의 대지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진실로 청춘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내 정체성에 따른 뜻을 세운 적도 없었다. 그냥 허랑하게 시간을 따라 흘러왔을 뿐이다. -259쪽
늙은 사람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르없다. 더구나 나의 피부는 두꺼워 홍조도 감출 수 있고, 나의 주름은 깊으니 독심 품는다면 오욕칠정인들 안으로 숨기는 게 뭐 어렵겠는가. -271쪽
젊다는 것은 그 값이 하늘에 닿으려니와, 동시에 준비되지 않은 여린 영혼으로 불온한 앞날과 자기 모반의 유혹을 상시적으로 받을진대, 울고 싶은 일이 왜 없겠는가. 바람만 불어도 웃을 때인것처럼 바람만 불어도 울 때이다.-303쪽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은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세상을 보고 짖는 것은 무섭기 때문인데
그대는 오늘도 개보다 많이 짖는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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