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구판절판


공항의 입국 통로가 열리고,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나서야 경민이 걸어 나왔다. 거리가 크게 멀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을 한아는 기억한다. 하지만 실루엣 만으로도 오래된 남자친구를 알아볼 수 있었고, 달려가서 안길 정도의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 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21쪽

"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33쪽

한아는 오랫동안 봐온 그 등에서 익숙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저 등은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한아를 아프게 하려고 빚어놓은 실루엣 같았다. 툭 튀어나온 양 어깨뼈 사이, 깊고 우묵한 곳에 이마를 대고 울고 싶어졌더랬다. 하지만 언제나 점점 멀어져 잰걸음으로 쫓느라 한아는 울 시간도 없었다. 그때마다 얻은 자잘한 상처 위에 상처가 겹쳐 단단한 살이 될 때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는데, 왜 이제 와서 다시 아파지려는 걸까?-85쪽

"....자유 여행권이란 게 대체 뭐야? 아까 뭐라 했잖아."
한아 머릿속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놀이공원 자유 이용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경민이 모닥불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음 아주 희귀한 여행 허가서 같은 거야. 3천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별의 시민들에게만 주어져. 우주에 나쁜 게 전염되지 않도록."
"여기라면 턱도 없겠다. 굉장히 평화로운 별에서 왔구나..."
한아는 갑자기 스스로가 열등하게 느껴졌다. 선진구...은 아니고 선진별이잖아?
"평화로운 셈이지. 우린 자가 분열로 번식을 하는 데다가 인간보다 강한 집단 무의식으로 꿈이 이어져 있거든. 개체이면서 모두야. 선량하기보다는 지루한 생명체라서 전쟁이 없어. 무엇보다 망원경 기술이 굉장히 발전해서, 다른 별을 구경하느라 싸울 시간도 없고"
"망원경이 특산품?"
"응, 아까 본 몸의 일부를 제련해서 만드는데 거의 실시간으로 우주를 볼 수 있어. 종족 비밀이라 말해줄 수는 없지만, 물리학 법칙을 구부리는 원리의 망원경이야."
"너도 가지고 있었니? 그걸로 날 본 거야?"
-102쪽

"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 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왜? 다른 별들도 많잖아? 다른 사람들도 많잖아?"
...
"망원경은 몸의 일부로 만든 것이라서, 주인이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스스로 움직여. 대개는 어떤 일관성 없이 그저 산발적으로 우주의 곳곳을 비추고 있지. 그런데 내 망원경은 달랐어. 깨어나서 내가 잠든 동안 어디를 비췄는지 체크해보면 꼭 비슷한 지점을 스쳐 갔더라고.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잠들지 않고 계속 그 근처를 살폈지. 곧 망원경이 뭘 보고 있는지 알았어. 그러니까, 웃기지? 나보다 내 망원경이 더 먼저 널 사랑한 거야."-103쪽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106쪽

"아저씨, 아저씨가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어떤 특별한 사람은 별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나한텐 아폴로 오빠가 그래. 은하계건 어디건 난 따라갈 거야.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어요."-119쪽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140쪽

"한때 저 별에는 괴로울 때 온몸에 눈물 대신 석영이 맺히는 종족들이 살았어. 그 사람들은 석영으로 화폐를 대신했었어,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더 큰 대가를 주기 위해서. 꽤 인도주의적이였지."-164쪽

한아 커플이 스스럼없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데는 무려 3주가 걸렸다. 경민의 입장에서는 먼저 말을 꺼내는 게 강요하는 꼴이 될까 봐 망설여졌고, 한아의 입장에서는 결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지구적인게 아닐까 문득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지구인이니 지구적일 수밖에 없지만, 촌스러워 보이기는 싫었다. 우주 변방에 사는 촌년이 사라져가는 풍습을 외계인 남편에게 강요하는 꼴은 사양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누구나 한다고 해서, 너까지 그래 줄 필요는 없는 거 같아. 심지어 지구에서도 이제 유행이 자나간 것 같은데...너희 별엔 결혼 같은 거 없잖아. 그치? 철 지나간 환상 같은 거 아닐까."-181쪽

"우리 별에는 없지만 결혼이 환상이라면, 의외로 우주에 굉장히 보편적인 환상인 거야.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정말로. 일생일대 유일한 대상을, 얼마나 많은 종류의 지적 생명체들이 헤매며 찾고 있는데, 찾았으니, 자랑하고 싶은 건 얼마나 당연해. 아주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욕망인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바보 같지도 않아?"
"지구의 결혼이란 거, 어딘가 변질된 냄새가 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둘의 결혼은 그거랑은 다를 걸 알잖아. 그게 어디가 바보 같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결혼을 하자."-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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