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삼촌 브루스 리 1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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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칫밥을 먹는다는 게 그런 거였을까? 먹어보지 않은 사람이면 절대 그 맛을 알 수 없는 그것은 누가 달리 눈치를 주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입장과 처지를 깨닫는 순간, 매일 먹던 밥이 갑자기 거칠게 느껴지고 매일 마시던 물이 쓰디쓰게 느껴져, 한솥밥을 먹어도 같은 맛이 아니었는지 형과 나는 한창 농사일이 바쁠 때 어쩌다 아버지가 들에 데려가려는 눈치가 보이면 미꾸라지처럼 재빨리 빠져나가 나중에 경을 치기 일쑤였는 데 비해 삼촌은 집안의 농사일이 마치 자신의 일이라는 듯 솔선해서 나서곤 했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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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를 으깨며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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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나베 세이코의 소설은 겉보기엔 다른 사소설들하고 딱히 다를것 없어 보이지만 읽어보면 아 이것은 언니의 글이로구나 느껴지는 그런 파워가 있다. 에쿠니 가오리 등 요즘 잘나가는 일본여성작가들의 글이 결국엔 젊은 여자가 쓴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기에, 어슷비슷한 친구들끼리 모여 서로의 허접한 인생에 대해 돌아가며 투정을 부리는 느낌이라면, 다나베 세이코의 글은 표면적으론 젊은 여자의 이야기이지만 이미 그 시절을 이미 지나쳐본 사람만이 그려낼 수 있는 어떤 확신같은 것이 담겨있다. 인생의 어려움 모두 지나갈 것이고 젊은 건 참 좋은 것이여. 이런 분위기랄까?


이 소설도 스토리만 보자면 황당하리만치 비현실적이고 3류 드라마 스럽지만 (재벌2세와 이혼한 여주인공이 소녀감성으로 작가생활하며 싱글 친구들과 행복하게 지내는데 재벌 2세를 비롯한 주변남자들은 그녀를 공주님처럼 아낀다) 심리묘사나 캐릭터에 대한 묘사에 작가의 연륜이 묻어 있어 읽는 재미가 있다. 개인적으론 여주인공의 전남편 '고'의 캐릭터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여주인공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되기 위해 현실감 없는 캐릭터로 설정되었다면 전남편은 재벌 2세라는 것 빼고는 실제로 이 세상에 존재할만한 캐릭터다. 천박하고 솔직하고 멍청하고 순진하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쎈척하지만 툴툴거리면서 해달라는 건 다해주는 남자. 


사랑스럽고 순진한 여자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남자는 달래어 준다는 상투적인 라인에 작가가 경험한 약간의 삶의 진실을 더해서 볼만한 이야기가 완성된다. 그리고 이 책을 보면 브리지트 바르도가 한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단 훨씬 괜찮은 여자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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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12-03-17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 제목이 멋지군요. 그런데 나 하나 동의 못함. "천박하고 솔직하고 멍청하고 순진하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쎈척하지만 툴툴거리면서 해달라는 건 다해주는 남자"가 어떻게 실제로 존재할 수가 있어요? -_- 엄청 어려운데!

LAYLA 2012-03-18 00:16   좋아요 0 | URL
아...네꼬님 말씀듣고 보니 급반성..싹싹싹 ㅠ,ㅠ 용서해 주쩨요 뿌잉뿌잉

신지 2012-03-18 15: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응? (저는 남자여서인지) 현실감 있는 남자 캐릭터인 것 같은데( ")그나저나 요즘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중이여서 밑줄과 리뷰가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딸기를 으깨며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12년 1월
절판


하지만 늙는다는 것과 '노인이 된다'는 것은 별개다. 세상 사람은 왠지 모르게 표정이 굳어지면서 순식간에 노인이 되어가지만, 메리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다. 한지를 살짝 구겨놓은 듯한 주름이 뺨과 입가에 있지만, 그것도 아름답게 보이기 위한 악센트 같은 것으로, 나는 지금의 메리를 좋아한다. -9쪽

왜 난 그런 생활을 했을까?
고를 사랑해서?

인간은 자고로 하자고 들면 생각지도 못한 일까지 할 수 있는 존재라고 감탄하고 만다. 지금이라면 월급 100만엔을 준다고 해도 그런 생활은 죽어도 싫다. -51쪽

...게다가 개인전을 하고 있는 X씨도 옛날과는 많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그와는 오래전부터 알아온 사이인데, 지금보니 완전히 관록이 붙어서 언행이 중후해졌고 가식적인 미소도 제법 잘 어울린다 싶어 생각하니, 그와도 오랫동안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옛날의 인상에서 일탈해 있는 그를 보니, 세상사란 모두 변하게 마련이지만. 사람이 제일 많이 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63쪽

"지금은 전만큼 즐겁지가 않아요. 자유를 얻기 위해 싫은 걸 너무 많이 봤나 봐....옛날에는 작은 여자애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산책만 나가도 좋아서 웃고, 춤을 추면서 웃고, 인생이 아름답고 모든 일이 단순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나에게도." -브리지트 바르도-68쪽

코즈에도 그때까지는 나를 인간 축에 끼어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행복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행복한 사람은 인간축에 낄 수 없다고 그녀는 생각했는지 모른다.-103쪽

돈벌이와 마찬가지로 남자도 허세도 무리도 하지 않고, 어쩌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생기면 좋겠지 하는 정도이다. 나는 서두르지 않는다.-113쪽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그것은 인생이다. 정말 인생이다. 그것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인생은 여러 가지 일에 도움이 된다. 특히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태어나 있다.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살아 있지 않을 것이고, 기계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 나의 하루하루는 나를 향해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다." -BB-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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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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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작에 쉬지 않고 불평을 늘어놓는 일이나, 평작에 갖은 미사여구 동원하여 '그럭저럭 읽을만은 하다'고 치켜세우는 일은 쉽지만 정작 좋다고 널리 알려야 할 수작에 대해선 어떤 말을 하기 어렵다. 작품의 감동을 말하기엔 내 말이 무척이나 부끄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 좋아하는 작품에 대해서는 리뷰나 기록을 남기지 않고 추상적인 감상만을 가슴속에 혼자 간직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에도 그렇게 조용히 넘어가야겠지만...이렇게 경박하게 "다른 소설이 그냥 소설이라면 이건 TOP야.."라며 까불이 리뷰를 쓰고 있다. 너무 좋아서 참을수가 없다.


작년말부터 막연히 소설을 읽어야 겠단 생각을 했다. 에세이나 인문서 사회과학 서적 다 좋지만 똑똑 끊어지는 명료한 책들 말고, 깊고 세차고 진득하고 답 따윈 없는 소설을 만나 폭 빠져들고 싶었다. (현실을 잊고 싶었단 소리구만) 하지만 그런 소설을 만나기는 쉽지 않았고 세상만사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불만한 마음으로 내가 어른이 되어서이거나, 소설가들이 쿨한척 시덥잖은 허세를 부리고 있어서라고 생각했는데 천명관의 고래를 보니 내가 다만 옳은 소설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었다. 


천명관의 글은 굳이 내가 뛰어 들려고 하지 않아도 나를 끌고 들어간다. 고마워. 굳이 감정줄을 쥐어짜고 문장을 느끼려 노력하지 않아도 내 손목을 채어가줘서. 무심한 한문장 한문장은 쇠사슬처럼 뚝뚝 떨어져나와 이야기 타래를 풀어내고,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그 덩어리 서사에 즐거운 비명을 지르느라 정신이 없다. 여기서 철썩 이 이야기가 ! 저기서 우르르 쾅쾅 저 이야기가 ! 쏟아지는 글은 풍족하되 느끼하지 않고 세차되 조급하지 않다. 책을 읽고 싶어서 자고 싶지 않고, 책을 읽고 싶어서 일하고 싶지 않은 며칠이 지속되었다. 어릴적 동화책을 읽으며 느꼈던 그 원초적 재미이다. 


다른 소설이 그냥 소설이라면...하는 소리는 그냥 우스개소리는 아니다.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딱히 소설에 대한 시각이 없던 나는 무언가 과잉된 듯하지만 실제로 속에 든건 별로 없는 소설들을 읽으며 그냥 내가 소설에 별로 안 맞는 독자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천명관을 읽고 나니 거꾸로 그 소설들이 별로 소설답지 않은 소설이었단 생각이 드는거다. 구라대신 감성을 내세우고 싶다면 시를 쓰시지요. 소설이란 장르의 원시적 야수성을-잠을 재우지 않는 재미-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아름다움. 이것이 바로 내가 찾던 소설이다. 구라 에스프레소 투샷의 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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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12-02-29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단락 너무나 공감.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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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우리가 하는 행동에 의해 우리가 된다.

이것은 인간의 부조리한 행동에 관한 귀납적인 설명이다. 즉, 한 인물의 성격이 미리 정해져 있어 그 성격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적어도 금복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금복은 늪지대에 벽돌공장을 지음으로써 무모하고 어리석은 여자가 되었다.-188쪽

문명을 깊은 산속까지 끌고 오는 데에는 마을 앞을 가로지른 철도에 뒤이어 금복의 공이 누구보다도 크다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차 한대로 운영하던 운수회사에 더 많은 돈을 투자해 운행하는 차를 모두 열 대로 늘렸다. 일자리가 늘어나면서 평대로 유입되는 인구도 급속도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하는 일이 없어도 괜히 마음이 바빠 허둥거렸고 아무리 밥을 많이 먹어도 이유 없이 속이 헛헛해 다방을 찾아가 독한 커피라도 한 잔 들이부어야 겨우 속이 차는 듯싶었다. 또한 다방에 앉아 하릴없이 이 말 저 말 옮기다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더욱 번잡스러워졌고 시비는 늘어났으며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하느라 술값이, 혹은 커피 값이 더 많이 들어가 소비가 더욱 촉진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 마음속에 어느덧 공허가 가득 들어찼고 금복은 이를 차곡차곡 돈으로 바꾸어나갔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법칙이었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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