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공간 -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의 사건적 사유
이진경 지음 / 휴머니스트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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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도시에서 파업을 하거나 대투쟁이 벌어질 때면 노동자들이 제일 먼저 달려가서 부수는 것이 작업시작을 알리는 종이었는데, 그래서 이 종을 부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각 도시마다 있었다고 한다. 시계적 시간에 노동자들을 동조하게 하기 위한 부르주아들의 집요한 노력은 공장이라는 장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지만 이것이 본격화된 것은 산업혁명기였다. 산업혁명은 새로운 정류의 기계를 통해 노동의 흐름을 장악하려고 한 시도였고, 이로써 노동의 리듬을 부르주아가 장악하려는 계급투쟁이었다. 이는 더욱 집요하고 강박적인 방식으로 진행된다. 노동자의 미시적인 동작 하나하나까지 자본가가 장악하고자 했던 테일러주의가 그것이다. 농촌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을 공장의 시계적이고 기계적인 시간에 맞추어내고자 했던 다양한 종류의 시간 규율, 학생들의 일상을 시계와 시간표에 맞추어내려는 시도는 신체적 리듬을 장악하려는 부르주아적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 -53쪽

소수자의 역사에서 좀 더 근본적인 난점은 다수자의 악덕에 대한 고발이 소수자의 미덕의 증명이 될 순 없으며, 피해와 억압의 부정적 역사가 소수자의 긍정적 잠재력을 보증해줄 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레비나스의 생각처럼 고통 받는 타자의 고발이 그 고통 받는 얼굴을 직시하는 양심의 호응을 야기할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머문다면 일종의 '고통과 양심의 공모관계'로 귀착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즉 그것은 의도와 무관하게 고통 받는 자는 계속 고통받는 자로서 지속되게 만들 것이고 역으로 양심적인 자로서는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양심 이상으로 밀고 나가기 어렵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서루가 적절하게 필요로 하는 지점에서 관계가 안주하게 되지 않을까?-88쪽

맑스주의에서 진보라는 말만큼 실재적 힘을 갖는 개념이 또 있을까? 맑스주의자들은 자신의 입장을 막론하고 자신이 진보적임을 믿으며, 그래서 '진보'라는 말 아래 쉽게 하나의 자리에 선다고 믿는다. 무엇이 옳은가 그른가를 가르고 어떤 행동이 적절한가 아닌가, 어떤 생각이 타당한가 아닌가를 가를 때, 진보라는 개념은 과학 이상으로 빈번하게 잣대로 등장한다. 진보적인가 반종적인가? 진보인가 퇴보인가? 혹은 진보할 것인가 정체되고 말 것인가? 등등. 이러한 진보의 개념이 사회나 역사라는 개념과 결합하여 사회나 역사 전체의 발전을 정의하게 되는 총체적 개념이 되었음은 따로 지적하지 않아도 잘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보의 개념이 단지 맑스주의자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해선 곤란하다. 굳이 로스토같은, 이미 거의 잊힌 근대화론자의 낡은 이름은 그만둔다고 해도, 그런 진보의 개념을 사회.역사적 개념으로까지 확장하여 적극 사용한 사람들이 19세기의 부르주아 사상가들이었음은 지적해두는 게 좋을 듯하다. 헤겔이나 콩트, 스펜서 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그들은 혁명이 아닌 '질서'를 위해 진보의 개념을 사용하고자 했고, 그런 진보의 개념으로 -107쪽

역사를 총체화하려고 했다. 진화의 개념이 다윈 이전에 이미 그런 관념을 통해 산출된 것이며, 사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진화'개념을 생각한 다윈조차 그런 통념과의 타협을 피하지 못했으며 그것이 이른바 '사회진화론'을 과학적으로 지지하는 것으로 귀착된 바 있음을 상기해두는것도 좋을 것이다. -107쪽

가령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죽으면 죽었지 노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은, 그리고 토지에 대한 소유관념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은 결국 사라져 마땅한 무지와 몰이해로 간주된다. 그러나 전사적 문화 속에서 살았던 유목민족이 경작을 거부하는 것이 당연하고 토지 소유의 관념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노동'이란 대가(임금)을 얻기 위해 타인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인데, 그들로서는 타인을 위해 일을 한다면서 대가를 바라는 것은 더없이 부도덕하고 치욕적인 것이었던 것이다. 이런 '인디언'들의 무지를 깨주기 위해 미국이나 캐나다 정부 관리는 '노동'의 신성함과 시간의 소중함을 가르치기 위한 강연을 반복했다. 그런데 흔히 '에스키모'라 불리는 이누이트족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강사가 "시간은 금이다"라고 말하자 통역자는 당황에서 멈칫하다가 이렇게 통역했다. "시계는 비싸다" 이유는 그런 종류의 추상적인 시간을 표현하는 단어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119쪽

1991년 암스덴(A.Amsden)이라는 스웨덴의 학자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인 경제학자(american-trained korean economists)라는 말을 줄여 atke라고 지칭하면서, 이런 집단이 한국에서 급속히 늘어나는 현상이 한국의 경제 모델에 잠재적 위협을 초래할 수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예언대로 일까? 몇 년 뒤 한국은 이른바 IMF사태라고 불리는 경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미국의 <경제문헌저널>에 따르면 1987년-1995년 사이 미국 내 경제학과 박사학위 취득자 가운데 9.7%이상이 즉 8040명 가운데 776명이 한국인이었다고 한다. 미국 경제학 박사의 10퍼센트가 한국 학자라는 것이다. 경제 학자만이 아니다. 2002년에 이어 2003년에도 미국 내에서 박사학위 쥐득자를 가장 많이 낸 대학은 버클리 대학이었고 2위는 서울대학교였다고 한다. 또 1997~2006년 미국 박사학위 취득자 누계에서는 여전히 서울대 출신이 3,420명으로 미국 이외 대학 가운데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 대학 출신자를 합한 전체 집계에서도 서울대는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의 4298명에 이어 전체 2위를 차지했다. 이렇게 미국서 학위를 취득한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에 들어와 관료가-503쪽

되거나 교수가 되거나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 틀림없다. 배운 것은 물론이고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이 미국적인 사람들, 미국의 상류사회를 꿈꾸며 공부하고 미국적 가치 척도가 몸에 밴 사람들, 이들이 지금 한국의 영향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고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한국 정부의 통상관료들 대부분은 통상장관 김현종처럼 미국에서 변호사를 하거나 하던 사람들이다. 정부 관료들, 특히 경제 관계 계통의 관료들은 모두 ATKE라고 불리는 미국식 경제학자들이다. 행정고시로 관료가 된 사람들 역시 한결같이 정부가 돈을 들여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 미국식 기술관료로 교육시킨다. 이런 기술관료들이 미국적 가치관과 미국적 사고방식, 미국적 이론으로 무장한 관료가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자신이 한국을 위해서 일한다고 굳게 믿고 일할 때조차 미국적 가치에 따라 미국이란 방향을 목표로 삼아 미국식으로 일할 것이라고 믿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철저하게 미국적인 사고와 태도가 몸에 밴 아메리카주의자들인 것이다. 그들이 그러한 이념을 내세우든 말든 간에 말이다. -504쪽

이명박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에겐 어떤 이념도 없고, 오직 능력과 성과만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만이 있다고 믿으며, 바로 그것이 노무현 정부와 반대로 성공의 기반을 제공할 것라고 믿는 것 같다. 정말 그럴까? 가령 조성환 교수는 실용주의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서 문제를 착안하고 그 바른 해결책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어떤 이념적인 목적 없이 주어진 문제에 대해 결과만 좋으면 좋다는 식으로 해결책을 찾는 것. 그러나 목적없는 실용주의, 아니 이념 없는 실용주의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예컨데 흔히 이용되는 덩사오핑의 고양이 얘기에서도, 목적없는 실용주의란 있을 수 없다. 덩샤오핑의 고양이는 쥐를 잡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덩샤오핑의 실용적 선택은 근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근대화는 덩샤오핑 이후 중국 정부의 모든 정책을 끌고 나간 이념이었다. 사회주의 이념을 대체해가고 있는 하나의 이념인 것이다. 평등, 자유, 공정성 등은 이념이 될 수 있지만 시장.경제발전.근대화,돈벌이, 투기 등은 이념이 될 수 없다는 말일까? 그거라면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결국은 돈벌이로 귀착되는 그런 단어들이 '이념'이라는 -523쪽

말에서 느껴지는 품위나 고상함과는 정반대로 너무 천박하고 처절한 욕망을 지칭한다는 점에서 '이념'이라고 부르기엔 부적절하다는 뜻이라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고상한 이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놓고 남들 앞에 내세우기엔 너무 남세스러운 그런 욕망이 이념의 자리를 차지하여 사람들의 삶이나 정부의 정책을 끌고 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그 말은 틀렸다. 그걸 이념이라고 감히 명명하진 못하지만, 실질적으로 실용적 '하결책'이나 정책, 조치들의 목적이 되고 있다면 실제로는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목적 없는 실용성만큼이나 이념 없는 실용주의는 있을 수 없다. 다만 이념을 감춘 실용주의나, 내놓고 말하기 부끄러워 이념 없다고 잡아떼는 실용주의가 있을 뿐이다. -5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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