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품절


신은 하나의 훌륭한 유혹이다. 결국 인간이 거기에 굴복하고야마는...-33쪽

무지개나 눈뿐 아니라, 도대체 자연이란 늘 같으면서도 틀리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괴롭거나 고독에 의해서 모든 것을 좀더 깊이 보게 된 사람, 자기를 응시하게 된 사람, 그리고 죽음을 멀리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연이란 별다른 감동과 정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36쪽

권태란 우리를 소모시키고 파괴시키는 격렬한 열정이다. -44쪽

돌아갈 수 있는 곳을 가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따뜻한 아궁이로, 가족에게로, 엄마의 젖가슴으로...어느 곳이든, 세상의 어느 곳이든 그를 위한 사랑과 기도가 있는 곳이면...

그것은 인간에게 내면의 평안과 외면의 자신을 준다.

사랑 없이 자라고 돌아갈 아무 곳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람은 괴팍스레 고독해진다. 그러면 아주 쉽사리 당황하게 되고, 기분이 극에서 극으로 달리기만 하여 결코 침착과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된다.-62쪽

자연은 정말 언제나 아름답고 조화에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언제나 근심과 불안과 공포에 가득 차 있고...-69쪽

인생에는 단 한 번 부활절이 있다.
운명의 속죄, 사랑!-81쪽

사랑에 관해서는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고 해도 안 돼. 사랑이란 뛰어 들어갈 수 있는 따뜻한 목욕물처럼 쉬운 게 아냐. 그릇된 짓을 하지 않고선 불가능하지. 배짱도 있어야 되고, 거기다 체력도 필요하거든. 네가 사치스럽고 깨끗한 영혼을 혹시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다면 즉시 산다는 걸 단념하고 성자라도 되는 게 좋지.-92쪽

생의 의지와 죽음에 대한 불안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생의 거대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라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질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미지의 것. 어두운 것에 대한 불안을... 바로 그것을 여자는 출산 앞에서 감지한다. 무엇을 이 세상에 가져오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알지 못하고 이해 못하고 있는 그 무엇 앞에서 여자는 불안하고 두려워 한다.-121쪽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야기시키는 본질적 기분(우울.권태.공허.자포 자기)등과 싸워야만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생을, 이 생을 긍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이 일회적인 생을 열망해야만 한다. 나는 이 내적 기분을 극복해야만 한다. 아니면 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127쪽

인생이란 어린이 놀이터가 아닌 것이며, 우리는 웃고 뛰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짧은 시간내에서, 단 한 번인 이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맨 긑을, 맨 속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는 데까지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죽는 것-애써서 노력하다 쓰러지는 것, 이것이 삶의 참 모습이다. 그 이외의 지식이나 생활이란 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핟. -142쪽

우리의 일회성을 명심하고 일순간을 아끼자. 미친 듯이 살자.

이성이 선이라는 것은 더욱더 믿어야 한다.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치하고야 마는 것이다. -145쪽

우리는 아직도 동물적 성실성을 가지고 잇다. 무언지 애쓰고 일하고 당연히 고생하고도 가난하게 사는 운명을 수략하는 체념의 전통과 약간의 물질, 경멸 내지 초연주의가 남아잇다.
재즈와 춤과 스피드와 섹스의 엔조이만이 전 심신을 채울 수 있는 세대가 앞으로는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모럴이 높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얕아서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편을 축복해야 좋을지 모른다. -147쪽

사람은 결국 '고독한 존재'인 것을 생이 나날이 나에게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욕심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득을 초극시켜 준 것같이 느낀 일순간을 우리는 언제나 감사해야 한다. 그 뒤에 온 공허나 허무감은 인간의 던져져 있는 상태에서 온 본연의 감정이지, 누구의 과오나 악의는 아닌 것이니까. 이해, 공감, 감사, 이것만이 우리와 타자 존재 사이의 감정이어야 한다. 깊은 애증이나 분개는 결국은 극단적인 것이고 불합리 한 것이니까. -150쪽

땀을 흘리고 입수한 빵은 반드시 더 달지는 않다. 미각상으로 보아...그러나 그것은 확신(내면적인)과 안전을 준다. 세계에서의 나의 위치를 의식하게 해준다. -167쪽

온갖 우정이나 애저으이 토대는 존경(그의 야심, 의욕, 능력에 대한)과 신뢰(도덕적인, 인간으로서 기본적인)다. 이 두개만 있다면 육체적 매력이나 소위 성적 매력 같은 것은 문제도 안되는 것이다.-174쪽

니체도 외로웠던 것이다. 한 여자와 부엌, 식탁, 아이...이런 시민적인 영상이 그의 뇌리를 아마 잠시도 안 떠났을 것이다. 그것을 안했으니까 니체가 있는 것이지만 그가 그만큼 무서운 고독의 대가를 지불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엇에도, 무엇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 쌍의 남녀가 만나서 자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생활 분위기를 구성하면서 일생을 보내도록 되어 있는 동물인 것 같다. 그것이 정상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즉 어딘지 병적일 때, 그 인간과 세계와의 대립은 극단화되고 그 대립의 고뇌에서 예술이나 철학이 창조되는 것이고,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사람의 나날은 몸서리치는 고독감에 뒤뎦여 있을 것이다.-176쪽

모든 것은 전달 불가능에도 불고하고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만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일까? 만남의 짧은 매혹 끝에는 기나긴 상처의 실밖에 남겨져 있지 않음에도 왜 인간은 만남에 황홀해 하는 것일까? 인간은 거의 만남에 의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 불가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언제나 가능한 것은 독백뿐이다. 대화의 메아리는 언제나 독백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언제나 '너'를 찾으려던 우리의 시도는 '나'를 다시 찾은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우리의 고독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무섭게 어두워진다.-178쪽

조금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물건들을 자기 주변에 놓고 살기 위해서는 돈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돈을 버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런 사치는 아무런 소용도 안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내 게으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183쪽

나를 공포케 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은 사랑인 것 같다.-193쪽

"나하고 결혼해서 애를 많이 갖고 가난하게 살자."
"나는 당신을 가두어 둘 거예요. 하루 종일, 그리고 감시하겠어. 질투를 가지고..."

이것이 결국 리얼리티에 있어서의 남녀의 사랑의 대화가 아닐까?-221쪽

남자에게는 모든 여자가 아내로 생각될 수 있는데 왜 여자에게는 보통 한 남자밖에 남편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일까?-232쪽

과제 그 자체보다는 과제를 초극 못할까 하는 공포가 우리 심신을 누른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다.-246쪽

불모의 고독이라도 그걸 지키고 싶다. 그것만이 자기 고독에서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방법이다.-282쪽

왜 보들레르는 일생 동안 잔느 듀발을 사랑한 것일까? 백인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고 오욕의 생활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마음까지 극악했다는...
또 릴케는 왜 자기보다 열네 살이나 위인 남편 있는, 남성적인 루를 사랑했던가?
니체가 '수세기에 한 번 구라파에 나타나는 두뇌를 가진 여자'라고 평한 루의 총명 때문에? 릴케의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결국 두 살람을 연결하는 것은 저으이할 수 없는, 정의보다는 보다 높은 법 밑에 놓여 있어, 운명이니, 만남이라는 말로 그 편린을 알 수 있는 것 외에는 전모를 언어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결국 이 마술적인 것이 없는 모든 관계는 모래 위의 성인 것 같다.

아무리 그 관계가 지속됐다 해도 그것은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비본질적인 무엇인 것이다.-2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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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구판절판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슴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9쪽

죽기 전에 내가 이런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서른다섯 살에 쓴 소설을 읽노라면 다시는 그런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 쓰는 소설 역시 미래의 내가 다시 쓸 수 없는 소설이겠지.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소설을 쓰는 순간은 모두 최후의 순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다시 그런 소설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써 볼 건 다 써봐야만 한다. 힘들다고 더 이상 못쓰겠다고 말하는 건, 타이페이를 갔더니 너무 더워서 호텔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내가 타이페이를 다시 방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만 할까? 더위보다는 경험에 집중하게 되겠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이다. -23쪽

되돌아볼 때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 놓지 않고,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37쪽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42쪽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53쪽

소년 시절 슬픈 맛이 어떤 건지 몰라
높다란 누대에 오르길 좋아했지요.
높다란 누대에 오르고 올라
새 노래 지으려고 억지로 슬픔을 짜냈지요.
지금은 이제 슬픈 맛 다 알기에
말하려다 그만둔다.
말하려다 그만두고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어라 했지요.-58쪽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도시에서는 이런 감정을 절대로 느끼지 못한다. 도시에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하다. 5백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이 다닌 골목도 한순간에 부숴 버린다. 도시에는 나보다 늦게 태어나서는 나보다 일찍 사라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도시에서 나는 연민을 느낀다. 이 연민은 사막에서 별들을 바라보며 내가 느낀 고독에 비하자면, 얼마나 저렴한 감정인지 모른다. -65쪽

진짜 인생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진짜 인생이다.-70쪽

어쩐지 2009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죽은 느낌이다. 거의 매달 나는 문상을 다녔다. 이건 뭐 죽음의 시대인가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곧 나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검은색 양복이 아니라 회색이나 푸른색 양복을 입고 결혼식에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갑자기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기보다는 내 나이가 마흔에 이르니 주위에서 죽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게 진실에 더 가깝겠다.-75쪽

그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고 해서 하기 싫은 일을 반드시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하고 싶은 일만 함녀서 살 수 없으니까 하기 싫은 일은 더구나 하지 말아야지.-83쪽

피그말리온 효과는 주위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질 때 가장 크게 발휘되는 것이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 가져도 괜찮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일은 우주적 손실을 면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자.-102쪽

어쨌든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늘어나는 나이가 아니라 그가 한 행동들로 그 사람을 구별짓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126쪽

그때 나는 깨달았다.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서 하는 일은 절대로 추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160쪽

대개 어른들이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 위주로 생활하면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늙을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해야만 한다. -164쪽

내 생각에는 청춘의 시간이 꼭 그렇게 흘러간다. 열심히 뭔가에 빠진다. 그 다음에는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인다.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만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202쪽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는 순간순간 조금 전의 자신을 배반하는 생각들이 오간다. 1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나'로 분리됏다가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221쪽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욥기-227쪽

운세라는 건 반경 0.5킬로미터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운세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갈 수 있느냐, 없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244쪽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이미 쓰러진 자를 누가 쓰러뜨릴 수 있으리오?-266쪽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272쪽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나는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위대한 일을 하든, 변변찮은 일을 하든 시간은 흘러간다. 지금보다 조금더 어렸을 때는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 궁금했었다. 이 삶에 과연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지, 만약에 있다면 지금 나는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에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나는 그런 경험을 어려번 해 봤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먼 훗날 큰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부록 같은 것이다. 진짜 최선을 다 하면 그 순간 자신이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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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2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김연수의 에세이다,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밑줄 긋기입니다...
어서 포장 뜯고 글을 눈에 새겨야 겠어요!! 흐

LAYLA 2012-07-23 00:42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는데 영세출판스러운 표지와 책 만듦새를 충분히 커버하고 남더라구요. 즐독하시길^^
 
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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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12쪽

그의 눈빛에 순간 아련한 바람 같은 게 지나갔다. 그것은, 새 길을 찾아나섰으나 안개 자욱한 산굽이에 막 들어선 방랑자의 눈빛이었다. 서지우는 그때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31쪽

참 좋은 가을이었다. 사랑하는 여자와 동반해 투신자살로 생을 마감한 일본 작가 다자이 오사무는 일찍이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55쪽

'군도'를 쓴 독일 작가 실러는 시간의 걸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면서, "미래는 주저하며 다가오고 현재는 화살처럼 날아가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되어 있다"라고 썼다. 나는 네 옆에서 그 모든 걸 일목요연하게 보았다. 내가 훈장처럼 여겼던 나의 '과거'가 무의미하게 '정지'된 것과, 나의 '현재'가 샤샥샤샥, '화살'처럼 귀밑을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주저'하며 다가오는 나의 '미래'는 더구나 남아있는 여분이 얼마없었다. 주저할 틈이 어디 있는가. 시간이 샤샥샤샥, 바람보다 빨리 흘러가는 소리가 환히 들렸다. 폭풍 같은 슬픔이 나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그 슬픔 속에서, 어찌 내가 너를 만지고 싶지 않았겠는가. 물고 빨고 싶지 않았겠는가.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내가 너를, 어찌 죽이고 싶지 않았겠는가. 돌이켜보면 나는 많은 순간, 너를 죽이고 싶었다.

나를 죽이고 싶은 것처럼.-96쪽

너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굶주림과 오욕으로 가득 찬 나의 열일곱 기억들을 네게 말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너는 이승만과 신익희와 진보당을 알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 2천 년대, 신세기의 열일곱 살을 살면 되지. 자본주의의 안락이 주는 꿀과 같은 달콤한 시간과 유혹들, 때로 조금 쓸쓸할 때도 있겠지만 오오, 푸르고 '섹쉬'한 밤을 수초처럼 유영하면서, 해바라기 아니면 오렌지, 남국의 과실처럼 익어가는 네 청춘을 나는 상상해본다. -108쪽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사을 현실로 만든다.-120쪽

아내와 연애할 때에도 알고 보면 미적지근한 관계였다. 만나면 따뜻하고 안 보면 조금 쓸쓸한, 그것이 나의 사랑이다. 사랑은 본래 미친 불꽃, 불가사의한 질주의 감정이라고 말한 건 선생님인데, 나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찌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불에 데거나 다리를 부러뜨릴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내가 꿈꾸는 사랑은 오래 앉아본 듯한, 편안한 의자 같은 것이다. -185쪽

추억이란 단순히 쌓여지는 것이 있고, 화인처럼 내 몸에 찍혀 영원히 간직되는 것이 있다.-200쪽

두 사람만의 상점에서 서로 만나서
두 사람만의 술을 우리들은 마신다
너는 조금 나는 많이
늘 마시는 술을 마시면서
낮에 있었던 이야기며 일의 이야기

남의 소문이며 내일의 스케줄을
그리고 갑자기 어둠 속에서의 입맞춤

- 이와다 히로시 '미혼'에서-205쪽

슬픔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눈물로 덜 수 있는 슬픔이고, 다른 하나는 눈물로도 덜 수 없는 슬픔이다.-234쪽

너희의 젊음이 너희의 노력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노인의 주름도 노인의 과오에 의해 얻은 것이 아니다.-251쪽

루소는 '에밀'에서 이렇게 썼다. 10세는 과자, 20세는 연인, 30세는 쾌락, 40세는 야심에 미친다고. 나의 마흔은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미쳐야 할 어떤 영지도 갖고 있지 않은 불모의 대지에 불과할 것이다. 나는 진실로 청춘이었던 적이 없었으며, 내 정체성에 따른 뜻을 세운 적도 없었다. 그냥 허랑하게 시간을 따라 흘러왔을 뿐이다. -259쪽

늙은 사람의 힘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늙으면 속눈이 더 밝아지니, 젊은 애들 마음을 읽어내는 건 여반장과 다르없다. 더구나 나의 피부는 두꺼워 홍조도 감출 수 있고, 나의 주름은 깊으니 독심 품는다면 오욕칠정인들 안으로 숨기는 게 뭐 어렵겠는가. -271쪽

젊다는 것은 그 값이 하늘에 닿으려니와, 동시에 준비되지 않은 여린 영혼으로 불온한 앞날과 자기 모반의 유혹을 상시적으로 받을진대, 울고 싶은 일이 왜 없겠는가. 바람만 불어도 웃을 때인것처럼 바람만 불어도 울 때이다.-303쪽

개가 달을 보고 짖는 것은 심심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세상을 보고 짖는 것은 무섭기 때문인데

그대는 오늘도 개보다 많이 짖는다.

-3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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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21 1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분명히 읽은 책인데 왜 하나도 눈에 익는 문장들이 없는걸까요 ㅎㅎㅎ

LAYLA 2012-07-21 23:16   좋아요 0 | URL
같은 책을 읽어도 소이진님 읽은 책과 제가 읽은 책은 같은 책이 아니죠.
남고생과 이십대 여자가 읽은 은교는 완전히 다른 작품일거라 생각해요 ^^
 
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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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비하면 앞자리 여자는 이야기를 상상해낼 만한 게 없다. 긴 스트레이트파마에 한창 유행하는 짧은 팬츠에 킬힐을 신고 속눈썹을 검게 칠한 공들인 화장을 했다. 예쁘긴 한데 전형적이다. 불특정 다수에게 잘 보이려고 기를 쓰고 치장했다는 느낌 때문에 어딘지 천박해 보인다. 아마 처음에 남자는 저 여자의 세련된 전형성에 더 끌렸을지도 모른다. 예쁘다는 실감에 앞서, 저런 모습이 예쁜 거라고 끊임없이 세뇌하는 유행이라는 상업 패턴에 속았을 것이다. -31쪽

지겨운 관계니까 지속되는 거야. 새롭고 재미있는 건 오래 못 가거든. 지겨우면 끝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요셉의 궤변에 말려든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이안은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게 상대에 대한 예의잖아요.

넌 예의상 연애하냐?

그리고, 지겹다고 박차고 일어나는 게 예의나, 아니면 지겨워도 참는 게 예의냐? 내가 참을성 많고 예의 바른 인간이 아니었다면 어떤 여자가 선물을 주겠냐.-46쪽

결정 내리기가 쉽지 않을 때는 최상의 결과를 얻는 건 포기해야 한다. 무난한 걸 택하는 게 그나마 최악으로 가지 않는 방법이다.-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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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 네오픽션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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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의 입국 통로가 열리고, 사람들이 다 흩어지고 나서야 경민이 걸어 나왔다. 거리가 크게 멀었던 것도 아닌데, 어째서인지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던 것을 한아는 기억한다. 하지만 실루엣 만으로도 오래된 남자친구를 알아볼 수 있었고, 달려가서 안길 정도의 애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경민을 사랑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한아는 그 순간에도 체념하듯 생각했다. 체념, 이라고 부르는 애정도 있는 것이다. -21쪽

"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33쪽

한아는 오랫동안 봐온 그 등에서 익숙함을 찾으려 노력했다. 저 등은 언제나 가슴을 아프게 했었다. 한아를 아프게 하려고 빚어놓은 실루엣 같았다. 툭 튀어나온 양 어깨뼈 사이, 깊고 우묵한 곳에 이마를 대고 울고 싶어졌더랬다. 하지만 언제나 점점 멀어져 잰걸음으로 쫓느라 한아는 울 시간도 없었다. 그때마다 얻은 자잘한 상처 위에 상처가 겹쳐 단단한 살이 될 때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는데, 왜 이제 와서 다시 아파지려는 걸까?-85쪽

"....자유 여행권이란 게 대체 뭐야? 아까 뭐라 했잖아."
한아 머릿속에는 아무리 생각해도 놀이공원 자유 이용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경민이 모닥불을 뒤적이며 대답했다.
"음 아주 희귀한 여행 허가서 같은 거야. 3천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별의 시민들에게만 주어져. 우주에 나쁜 게 전염되지 않도록."
"여기라면 턱도 없겠다. 굉장히 평화로운 별에서 왔구나..."
한아는 갑자기 스스로가 열등하게 느껴졌다. 선진구...은 아니고 선진별이잖아?
"평화로운 셈이지. 우린 자가 분열로 번식을 하는 데다가 인간보다 강한 집단 무의식으로 꿈이 이어져 있거든. 개체이면서 모두야. 선량하기보다는 지루한 생명체라서 전쟁이 없어. 무엇보다 망원경 기술이 굉장히 발전해서, 다른 별을 구경하느라 싸울 시간도 없고"
"망원경이 특산품?"
"응, 아까 본 몸의 일부를 제련해서 만드는데 거의 실시간으로 우주를 볼 수 있어. 종족 비밀이라 말해줄 수는 없지만, 물리학 법칙을 구부리는 원리의 망원경이야."
"너도 가지고 있었니? 그걸로 날 본 거야?"
-102쪽

"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 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왜? 다른 별들도 많잖아? 다른 사람들도 많잖아?"
...
"망원경은 몸의 일부로 만든 것이라서, 주인이 꿈을 꾸고 있을 때는 스스로 움직여. 대개는 어떤 일관성 없이 그저 산발적으로 우주의 곳곳을 비추고 있지. 그런데 내 망원경은 달랐어. 깨어나서 내가 잠든 동안 어디를 비췄는지 체크해보면 꼭 비슷한 지점을 스쳐 갔더라고.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잠들지 않고 계속 그 근처를 살폈지. 곧 망원경이 뭘 보고 있는지 알았어. 그러니까, 웃기지? 나보다 내 망원경이 더 먼저 널 사랑한 거야."-103쪽

"가까이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106쪽

"아저씨, 아저씨가 이해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지만, 어떤 특별한 사람은 별 하나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질 때가 있어요. 나한텐 아폴로 오빠가 그래. 은하계건 어디건 난 따라갈 거야. 이해하지 못해도 어쩔 수 없어요."-119쪽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140쪽

"한때 저 별에는 괴로울 때 온몸에 눈물 대신 석영이 맺히는 종족들이 살았어. 그 사람들은 석영으로 화폐를 대신했었어, 더 고통스러운 사람들에게 더 큰 대가를 주기 위해서. 꽤 인도주의적이였지."-164쪽

한아 커플이 스스럼없이 결혼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데는 무려 3주가 걸렸다. 경민의 입장에서는 먼저 말을 꺼내는 게 강요하는 꼴이 될까 봐 망설여졌고, 한아의 입장에서는 결혼이라는 개념 자체가 지나치게 지구적인게 아닐까 문득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지구인이니 지구적일 수밖에 없지만, 촌스러워 보이기는 싫었다. 우주 변방에 사는 촌년이 사라져가는 풍습을 외계인 남편에게 강요하는 꼴은 사양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누구나 한다고 해서, 너까지 그래 줄 필요는 없는 거 같아. 심지어 지구에서도 이제 유행이 자나간 것 같은데...너희 별엔 결혼 같은 거 없잖아. 그치? 철 지나간 환상 같은 거 아닐까."-181쪽

"우리 별에는 없지만 결혼이 환상이라면, 의외로 우주에 굉장히 보편적인 환상인 거야. 난 너랑 결혼하고 싶어. 정말로. 일생일대 유일한 대상을, 얼마나 많은 종류의 지적 생명체들이 헤매며 찾고 있는데, 찾았으니, 자랑하고 싶은 건 얼마나 당연해. 아주 오래되고 변하지 않는 욕망인걸."
"촌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아? 바보 같지도 않아?"
"지구의 결혼이란 거, 어딘가 변질된 냄새가 나는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둘의 결혼은 그거랑은 다를 걸 알잖아. 그게 어디가 바보 같아. 전혀 촌스럽지 않은 결혼을 하자."-1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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