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 지음 / 마음의숲 / 2012년 7월
구판절판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슴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9쪽

죽기 전에 내가 이런 소설을 다시 쓸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은 내게 무척 중요하다. 서른다섯 살에 쓴 소설을 읽노라면 다시는 그런 소설을 쓰지 못할 것 같다. 그러므로 지금 쓰는 소설 역시 미래의 내가 다시 쓸 수 없는 소설이겠지. 그 사실을 알고 나면 소설을 쓰는 순간은 모두 최후의 순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다시 그런 소설을 쓸 수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써 볼 건 다 써봐야만 한다. 힘들다고 더 이상 못쓰겠다고 말하는 건, 타이페이를 갔더니 너무 더워서 호텔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똑같다. 내가 타이페이를 다시 방문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만 할까? 더위보다는 경험에 집중하게 되겠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니라 지금 소설을 쓰는 일이다. -23쪽

되돌아볼 때 청춘이 아름다운 건 무엇도 바꿔 놓지 않고, 그렇게 우리도 모르게 지나가기 때문인 것 같다.-37쪽

가장 건강한 마음이란 쉽게 상처받는 마음이다. 세상의 기쁨과 고통에 민감할 때, 우리는 가장 건강하다. -42쪽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정말 나는 잘 쉰 셈이다.-53쪽

소년 시절 슬픈 맛이 어떤 건지 몰라
높다란 누대에 오르길 좋아했지요.
높다란 누대에 오르고 올라
새 노래 지으려고 억지로 슬픔을 짜냈지요.
지금은 이제 슬픈 맛 다 알기에
말하려다 그만둔다.
말하려다 그만두고
아! 서늘해서 좋은 가을이어라 했지요.-58쪽

고독은 뭐랄까, 나는 영원히 살 수 없는데 이 우주는 영원히 반짝일 것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의 감정 같은 것이다.

도시에서는 이런 감정을 절대로 느끼지 못한다. 도시에는 스쳐 지나가는 것들로 가득하다. 5백 년이 지나도록 사람들이 다닌 골목도 한순간에 부숴 버린다. 도시에는 나보다 늦게 태어나서는 나보다 일찍 사라지는 것들로 가득하다. 도시에서 나는 연민을 느낀다. 이 연민은 사막에서 별들을 바라보며 내가 느낀 고독에 비하자면, 얼마나 저렴한 감정인지 모른다. -65쪽

진짜 인생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게 진짜 인생이다.-70쪽

어쩐지 2009년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죽은 느낌이다. 거의 매달 나는 문상을 다녔다. 이건 뭐 죽음의 시대인가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곧 나는 불과 10년 전만 해도 검은색 양복이 아니라 회색이나 푸른색 양복을 입고 결혼식에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갑자기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기보다는 내 나이가 마흔에 이르니 주위에서 죽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게 진실에 더 가깝겠다.-75쪽

그러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 수 없다고 해서 하기 싫은 일을 반드시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하고 싶은 일만 함녀서 살 수 없으니까 하기 싫은 일은 더구나 하지 말아야지.-83쪽

피그말리온 효과는 주위 사람들이 기대감을 가질 때 가장 크게 발휘되는 것이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을 때는 스스로 가져도 괜찮다. 그러므로 자신이 하는 일은 우주적 손실을 면하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리자.-102쪽

어쨌든 시간만 지나면 누구나 늘어나는 나이가 아니라 그가 한 행동들로 그 사람을 구별짓는 사회에서 살고 싶다. 남들보다 몇 년 더 살았다는 게 대단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건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126쪽

그때 나는 깨달았다. 추억을 만드는 데는 최소한 두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혼자서 하는 일은 절대로 추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160쪽

대개 어른들이 그런 건 나중에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 위주로 생활하면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늙을수록 시간은 점점 줄어들기 때문에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해야만 한다. -164쪽

내 생각에는 청춘의 시간이 꼭 그렇게 흘러간다. 열심히 뭔가에 빠진다. 그 다음에는 갑자기 다 부질없어 보인다. 왜 20대에는 제대로 산다는 느낌이 잘 들지 않고, 모든게 갑자기 부질없어 보이는 것일까? 그건 어쩌면 20대에는 결과만 없고 원인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202쪽

달리기를 하는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는 순간순간 조금 전의 자신을 배반하는 생각들이 오간다. 1시간 동안, 나는 수많은 '나'로 분리됏다가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221쪽

"얼음은 뉘 태에서 났느냐. 공중의 서리는 누가 낳았느냐. 물이 돌같이 굳어지고 해면이 어느니라."
-욥기-227쪽

운세라는 건 반경 0.5킬로미터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나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운세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갈 수 있느냐, 없느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다.-244쪽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

이미 쓰러진 자를 누가 쓰러뜨릴 수 있으리오?-266쪽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다. 몸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경험한다는 얘기다. 경험한다는 것은, 절대로 잊지 못하게 된다는 뜻이다.-272쪽

달리기를 시작한 뒤로 나는 어쨌든 시간은 흘러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위대한 일을 하든, 변변찮은 일을 하든 시간은 흘러간다. 지금보다 조금더 어렸을 때는 시간이 흐르고 흐르면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 될까 궁금했었다. 이 삶에 과연 인과관계가 있는 것인지, 만약에 있다면 지금 나는 무슨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에 나는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인과관계란, 노력의 결과를 그 자리에서 확인하는 즉석복권과 같은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 그러면 보답이 즉각적으로 내게 찾아온다. 서른 살이 넘으면서 나는 그런 경험을 어려번 해 봤다. 순간마다 최선을 다하면 먼 훗날 큰 보답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부록 같은 것이다. 진짜 최선을 다 하면 그 순간 자신이 얻는 즐거움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있을 것이다.-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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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 2012-07-2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김연수의 에세이다,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밑줄 긋기입니다...
어서 포장 뜯고 글을 눈에 새겨야 겠어요!! 흐

LAYLA 2012-07-23 00:42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에세이를 처음 읽었는데 영세출판스러운 표지와 책 만듦새를 충분히 커버하고 남더라구요. 즐독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