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 전혜린 에세이 2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2년 1월
품절


신은 하나의 훌륭한 유혹이다. 결국 인간이 거기에 굴복하고야마는...-33쪽

무지개나 눈뿐 아니라, 도대체 자연이란 늘 같으면서도 틀리고 싫증이 나지 않는다. 특히 괴롭거나 고독에 의해서 모든 것을 좀더 깊이 보게 된 사람, 자기를 응시하게 된 사람, 그리고 죽음을 멀리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자연이란 별다른 감동과 정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36쪽

권태란 우리를 소모시키고 파괴시키는 격렬한 열정이다. -44쪽

돌아갈 수 있는 곳을 가진다는 건 좋은 일이다. 따뜻한 아궁이로, 가족에게로, 엄마의 젖가슴으로...어느 곳이든, 세상의 어느 곳이든 그를 위한 사랑과 기도가 있는 곳이면...

그것은 인간에게 내면의 평안과 외면의 자신을 준다.

사랑 없이 자라고 돌아갈 아무 곳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람은 괴팍스레 고독해진다. 그러면 아주 쉽사리 당황하게 되고, 기분이 극에서 극으로 달리기만 하여 결코 침착과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된다.-62쪽

자연은 정말 언제나 아름답고 조화에 가득 차 있다. 인간은 언제나 근심과 불안과 공포에 가득 차 있고...-69쪽

인생에는 단 한 번 부활절이 있다.
운명의 속죄, 사랑!-81쪽

사랑에 관해서는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고 해도 안 돼. 사랑이란 뛰어 들어갈 수 있는 따뜻한 목욕물처럼 쉬운 게 아냐. 그릇된 짓을 하지 않고선 불가능하지. 배짱도 있어야 되고, 거기다 체력도 필요하거든. 네가 사치스럽고 깨끗한 영혼을 혹시 더럽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참을 수 없다면 즉시 산다는 걸 단념하고 성자라도 되는 게 좋지.-92쪽

생의 의지와 죽음에 대한 불안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생의 거대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은 자라도 죽음에 대한 불안을 가질 수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 미지의 것. 어두운 것에 대한 불안을... 바로 그것을 여자는 출산 앞에서 감지한다. 무엇을 이 세상에 가져오는지 그는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알지 못하고 이해 못하고 있는 그 무엇 앞에서 여자는 불안하고 두려워 한다.-121쪽

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야기시키는 본질적 기분(우울.권태.공허.자포 자기)등과 싸워야만 한다. 나는 무엇보다도 생을, 이 생을 긍정할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이 일회적인 생을 열망해야만 한다. 나는 이 내적 기분을 극복해야만 한다. 아니면 내 자신을 상실하는 것이기 때문에.-127쪽

인생이란 어린이 놀이터가 아닌 것이며, 우리는 웃고 뛰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짧은 시간내에서, 단 한 번인 이 삶에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의 맨 긑을, 맨 속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아는 데까지 알아보고 그 과정에서 죽는 것-애써서 노력하다 쓰러지는 것, 이것이 삶의 참 모습이다. 그 이외의 지식이나 생활이란 다 부차적인 것에 불과핟. -142쪽

우리의 일회성을 명심하고 일순간을 아끼자. 미친 듯이 살자.

이성이 선이라는 것은 더욱더 믿어야 한다. 알고 있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일치하고야 마는 것이다. -145쪽

우리는 아직도 동물적 성실성을 가지고 잇다. 무언지 애쓰고 일하고 당연히 고생하고도 가난하게 사는 운명을 수략하는 체념의 전통과 약간의 물질, 경멸 내지 초연주의가 남아잇다.
재즈와 춤과 스피드와 섹스의 엔조이만이 전 심신을 채울 수 있는 세대가 앞으로는 있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직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모럴이 높아서가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얕아서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 편을 축복해야 좋을지 모른다. -147쪽

사람은 결국 '고독한 존재'인 것을 생이 나날이 나에게 가르쳐 준다. 따라서 우리는 대인관계에 있어서 욕심쟁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득을 초극시켜 준 것같이 느낀 일순간을 우리는 언제나 감사해야 한다. 그 뒤에 온 공허나 허무감은 인간의 던져져 있는 상태에서 온 본연의 감정이지, 누구의 과오나 악의는 아닌 것이니까. 이해, 공감, 감사, 이것만이 우리와 타자 존재 사이의 감정이어야 한다. 깊은 애증이나 분개는 결국은 극단적인 것이고 불합리 한 것이니까. -150쪽

땀을 흘리고 입수한 빵은 반드시 더 달지는 않다. 미각상으로 보아...그러나 그것은 확신(내면적인)과 안전을 준다. 세계에서의 나의 위치를 의식하게 해준다. -167쪽

온갖 우정이나 애저으이 토대는 존경(그의 야심, 의욕, 능력에 대한)과 신뢰(도덕적인, 인간으로서 기본적인)다. 이 두개만 있다면 육체적 매력이나 소위 성적 매력 같은 것은 문제도 안되는 것이다.-174쪽

니체도 외로웠던 것이다. 한 여자와 부엌, 식탁, 아이...이런 시민적인 영상이 그의 뇌리를 아마 잠시도 안 떠났을 것이다. 그것을 안했으니까 니체가 있는 것이지만 그가 그만큼 무서운 고독의 대가를 지불했던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무엇에도, 무엇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한 쌍의 남녀가 만나서 자족하고 행복을 느끼는 생활 분위기를 구성하면서 일생을 보내도록 되어 있는 동물인 것 같다. 그것이 정상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 즉 어딘지 병적일 때, 그 인간과 세계와의 대립은 극단화되고 그 대립의 고뇌에서 예술이나 철학이 창조되는 것이고, 그것을 창조하고 있는 사람의 나날은 몸서리치는 고독감에 뒤뎦여 있을 것이다.-176쪽

모든 것은 전달 불가능에도 불고하고 인간과 인간은 서로 만나도록 운명지워져 있는 것일까? 만남의 짧은 매혹 끝에는 기나긴 상처의 실밖에 남겨져 있지 않음에도 왜 인간은 만남에 황홀해 하는 것일까? 인간은 거의 만남에 의해서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속 불가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다.
언제나 가능한 것은 독백뿐이다. 대화의 메아리는 언제나 독백으로 공허하게 울린다. 언제나 '너'를 찾으려던 우리의 시도는 '나'를 다시 찾은 것으로 끝나고 만다. 그리고 우리의 고독은 깊어지고 넓어지고 무섭게 어두워진다.-178쪽

조금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물건들을 자기 주변에 놓고 살기 위해서는 돈의 존재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돈을 버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결국 그런 사치는 아무런 소용도 안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여기에 내 게으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183쪽

나를 공포케 하는 것이 죽음이라면
나를 불안케 하는 것은 사랑인 것 같다.-193쪽

"나하고 결혼해서 애를 많이 갖고 가난하게 살자."
"나는 당신을 가두어 둘 거예요. 하루 종일, 그리고 감시하겠어. 질투를 가지고..."

이것이 결국 리얼리티에 있어서의 남녀의 사랑의 대화가 아닐까?-221쪽

남자에게는 모든 여자가 아내로 생각될 수 있는데 왜 여자에게는 보통 한 남자밖에 남편으로 생각되지 않는 것일까?-232쪽

과제 그 자체보다는 과제를 초극 못할까 하는 공포가 우리 심신을 누른다는 말은 정말인 것 같다.-246쪽

불모의 고독이라도 그걸 지키고 싶다. 그것만이 자기 고독에서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있는 방법이다.-282쪽

왜 보들레르는 일생 동안 잔느 듀발을 사랑한 것일까? 백인도 아니고 아름답지도 않고 오욕의 생활을 직업으로 하는 여자를? 마음까지 극악했다는...
또 릴케는 왜 자기보다 열네 살이나 위인 남편 있는, 남성적인 루를 사랑했던가?
니체가 '수세기에 한 번 구라파에 나타나는 두뇌를 가진 여자'라고 평한 루의 총명 때문에? 릴케의 모성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에?
결국 두 살람을 연결하는 것은 저으이할 수 없는, 정의보다는 보다 높은 법 밑에 놓여 있어, 운명이니, 만남이라는 말로 그 편린을 알 수 있는 것 외에는 전모를 언어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결국 이 마술적인 것이 없는 모든 관계는 모래 위의 성인 것 같다.

아무리 그 관계가 지속됐다 해도 그것은 하루 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는 비본질적인 무엇인 것이다.-290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