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민음사 오늘의 작가 총서 27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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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늘 내게 진정한 통속의 의미를 깨달으면 누구도 그걸 함부로 비웃을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문제는 상상력의 솔직함이야. 산다는 건 알고보면 굉장히 간단하거든. 남녀가 만났다. 사랑했다.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헤어졌다. 말하자면 그런 거지. ...방송 작가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머리로 꼭 한 번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대신 써주면 돼.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는 없어. 통속은 아름다운 거란다. 중요한 건, 얼마나 진탕 울고 웃었냐는 거지."-12쪽

그는 말한다. 역사의식에 선행하는 것이 직업의식이라고. 군인이 철저한 군인으로서의 직업의식만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쿠데타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20쪽

늦가을의 바람이 제법 찼고, 해뜨기 전의 구름들은 파란 잉크가 번진 솜뭉치 같았다. 비가 한차례 내리면 곧이어 지상엔 영하의 날씨들이 닥칠 거였다. 겨울, 만물이 어둠 속의 흐느낌처럼 가냘퍼지는 겨울.-24쪽

"의사가 뭐라든? 안 좋대니?"
"축하해. 약간이긴 하지만 암 수치가 떨어졌대요. 항암 주사를 한 번 더 맞재. 택솔이라고 좋은 약이 있대요. 머리도 빠지지 않고. 백혈구도 안 줄어드나 봐. 그 약 하나 만들려면 백 년 묵은 주목나무 백 그루가 필요하다고 그러던데."
"그럼 내 몸속으로 주목나무 백 그루가 들어앉는 셈이네? 어서 맞고 싶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37쪽

후회되는 일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난 누군가 날 다시 젊어지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리로 돌아가진 않을 거야. 젊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 일이거든.-41쪽

네 밖과 안 어디에도 가고픈 나라를 세우지 마라. 알았니? 그럼 사는 게 너무 고달파지고, 나중엔 나처럼 이렇게 병들고 마는 거야. 너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며 살았으면 해. 자신을 상할 정도로 괴롭히는 건, 문학이나 혁명, 혹은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그 무엇이건 간에 옳지 않은 거야. 엄마는 젊어서 그걸 몰랐어. 내 고집만을 실컷 부리며 살았지.상이 넌 아직 시간이 많으니, 지금부터라도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있는 구원을 기대하며 살라구. 그건 네가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원래부터 있었고, 완벽하게 존재하지. 또 항상 너를 기다리고 있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절대자가 너에게 주는 값없는 선물인 거야.

나더러 교회에 다니라는 거야?

아니야.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널 받아줄, 네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영토가 어딘가에 있다는 걸 믿으며 살란 말이야. 믿으라는 거지. 믿어. -51쪽

시는 소설과 조금 달라. 시는 첫사랑 같은거지. 한번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않아. 그런데 내게서 떠났거든.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땐 이미 첫사랑이 아니겠지. 달라졌을 테니까. 나는 지난 5년 동안 주변의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치며 살아가고 있는 걸 보아왔어. 분명 자기 자신도 느끼거든. 시가 떠나버렸다는 걸. 그런데도 한번 시인이었으니 평생을 시인으로 우기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그러긴 싫어. -109쪽

보통의 경우 인간들은 젊어선 무엇이 되고 싶어 잠을 못 이루다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나선 아무것도 되지 못한 스스로를 불안해하며 숱한 밤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곤 한다.-221쪽

인이 박인다는 것처럼 가슴 저며오는 표현이 어디에 따로 있을 것인가. 뭐든 제대로 해내려면 그래야 할 거였다. 끊을 수 없어 차라리 마취된 고통. 내 소설도 한때 내게 그러했다.-327쪽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가.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그리하여 마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설혹 덜 되었다 하더라도 늘 다 그린 그림처럼 세워두어야만 하는 유화의 작법은, 인생이 지닌 속성과 너무나 흡사해 자못 섬찟하기까지 하다.-406쪽

나는 그녀가 제 이마를 짚으며 단성사의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비로소, 지금 저 여자를 마음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은 단지 망가진 스케줄 정도가 아니라 뭔가 은밀한 곳으로부터 연유한 상심이라는 걸 눈치 챘다.-416쪽

별나라로 가려는 사람, 아흔아홉 마리 양떼를 모두 죽이고도 나머지 한 마리마저 찾아 옮아가려는 돌림병보다 모진 마음, 나도 귀화식물의 시앗으로 저이의 옷깃에 묻어 황폐한 땅을 밟아봤으면. 나 외엔 아무것도 자랄 수 없고, 나 사라진 뒤엔 사막만 남게 되는 그런 세계로.-431쪽

어느 날 불현듯 스스로가 연약한 초식동물로 느껴진다면. 일단 씹으면 모두 제 것이라며 가책없이 삼켜버리는 육식동물이 아니라, 금방 목구멍으로 넘어간 한 줌의 기억조차도 믿지 못해 자꾸자꾸 되새김질하는 소심한 초식동물로 여겨진다면. 또 소라든가 양, 염소 같은 초식동물들만 번제의 제물로 쓰여지는 것이 억울하다면. 왜 유순한 초식동물의 각을 뜨고 피를 뿌려, 교활하고 무정한 육식동물들의 죄를 씻어야 하는지 신에게 따져 묻고 싶다면. -481쪽

서너 시간쯤 뒤, 아시아나 항공 oz 602편은 김포공항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층을 지나는 그 1,2분 동안, 창 밖은 하얗게 바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발이 땅에 닿으려면, 여러겹의 모호한 시절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이다. 너무 순결하고 밝아 시야를 가리는 것도, 결국에는, 어둠처럼 어둠이다.-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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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13-05-19 18: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저는 이응준을 읽겠다 읽겠다 하고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뽑아주신 밑줄들 읽어보니 한번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옮겨봐야겠습니다.


LAYLA 2013-05-20 13:45   좋아요 0 | URL
괜찮습니다. 스토리로 읽는 작가가 아니라 읽고 나서 무얼 읽었는지 몽롱하긴 하지만 미문들의 매력으로 충분하다 싶어요.
 
두근두근 우타코 씨
다나베 세이코 지음, 권남희.이학선 옮김 / 여성신문사 / 2007년 11월
품절


어찌됐건, 스스로 역경을 헤쳐나왔다고 자부하는 나는 잘난 글줄이나 훈시 따위만 늘어놓을 뿐 정작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들한테는 도무지 공감할 수 없다.
'모양'도 때로는 중요하겠지만 형식적이고 사대주의적인 '모양 차리기'에는 반발을 느끼게 된다. '모양'만 밝히는 동안 실체는 점점 변해간다는 게 내 생각이다. -18쪽

일류 회사니 뭐니 하며 목에 힘줘 봤자 넓은 세상 긴 인생에서는 아주 작은 웅덩이일 뿐, 그 안에서 잘난 척해 봤자 내가 보기엔 제 잘난 맛에 헤엄치는 올챙이로구만. 이 아이도 마흔여덟인가 아홉인가, 낼모레면 쉰을 바라보는 나이이건만 그 정도의 성찰도 못하고 있으니 한숨이 절로 난다. -38쪽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도 인생에서는 필요한 법이다. 왜냐하면 그러다 나중에 정말로 괴로운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다 자신이 뿌린 씨려니 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길 테니까.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 하지 않았다고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손가락질 받을 만한 짓 아닐까. -183쪽

여자는 고생을 한다. 남자와 사회, 양쪽으로 고생한다. 하지만 남자는 사회에서 겪는 고생밖에 모르기 때문에 나이를 먹으면 수양을 쌓지 못한 그 심성이 그대로 표출된다. 정년이 지나 아내한테 버림받는 남자 중에 그런 수양을 쌓지 못한 유형들이 많다.

남자는 여자 고생을 해야만 한다. 여자 고생을 한다고 해서 꽃뱀같은 여자들한테 뜯겨 보라는 얘기가 아니다. 자신의 아내와 고생스럽게 어울려 주라는 뜻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아내란 자동적으로 자신에게 맞춰주는 존재라는 사고방식 때문에 인격이 진보하지 않는다.-210쪽

"결혼식 장례식이 있는 것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라던데요. 지난번에 tv에서 무슨 선생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동물은 하지 않지만, 인간은 어떤 미개지에서도 결혼식과 장례식은 꼭 한다고요. 인간이 위대한 점이 바로 그거래요."

은근히 나를 가르치는 말투다. 일흔일곱 먹은 나한테 고작 쉰 정도의 여자가 가르치려드는 것은 또 무슨 버르장머리인지.

"허, 그러면 인간이 결혼식, 장례식을 그만두면 되겠구먼. 동물이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자연이기 때문이야. 인간이 자연을 거스르고 있는 게다. 인간도 동물을 본받아서 결혼식 장례식을 그만둬야 해."-333쪽

"색정광은 또 뭐냐? 이건 로맨틱하다고 하는 거야. 나이 칠팔십 되어 아직 낭만이 살아 있으니 얼마나 훌륭하냐. 뭐가 아쉬워 손자, 증손자나 보고 있으라는 거냐? 사랑이니 연애니 찾고 있을 새가 없는 것은 너희들 같이 한참 일할 나이들이야. 너희들은 열심히 일이나 하면 돼. 그래서 늙은이들한테 노령연금이나 열심히 벌어주면 되는거야. 칠팔십 되어서 연애를 못하면 대체 언제 하란 거냐?"-356쪽

사실 여자아이라 해도 서른이 가까워지면 아이디어 풍부하고, 행동력 있고, 의욕과 근성이 있어 옆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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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31
나쓰메 소세키 지음, 오유리 옮김 / 문예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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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색이 희고 멋쟁이 머리 모양을 한 키가 큰 젊은 여자와 마흔 중반쯤 되어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란히 매표소 앞에 서 있다. 나는 미인이 어떻게 생겼네 하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서 뭐라 할 수 없었으나 정말 미인이었다. 뭐냐, 수정 구슬을 향수로 데워서 손에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198쪽

그 후 어떤 사람의 소개로 철도회사의 기수로 취직했다. 월급은 25엔이고 다달이 내는 방값은 6엔이었다. 기요는 으리으리한 대궐 같은 집은 아니지만 나와 같이 지내면서 항상 "좋아요, 기뻐요" 하다가 올 2월 폐렴으로 죽었다.

죽기 전날, 나를 불러서 "도련님 부탁이 있는데요, 내가 죽으면 도련님 다니시는 절에다 묻어주세요. 무덤 속에서 도련님 오시길 기다리면 좋겠어요" 했다. 그래서 기요의 묘는 고비나타에 있는 요겐지에 있다.-334쪽

왼편으로 돌아 혈탑 문으로 들어간다. 옛날 장미전쟁 때 많은 사람들을 잡아 가둔 곳이 바로 이곳이다. 풀을 베듯 사람의 목을 치고, 닭처럼 사람을 쪼아대고, 명태 말리듯 시체를 쌓아두었던 곳이 바로 이곳이다. 혈탑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도 무리는 아니다.-429쪽

자신의 눈앞에 자신이 죽는 순간을 떠올릴 수 있는 자는 행복하다. 매일 낮, 매일 밤 죽음을 기원하라.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을 받게 될 내가 무엇을 두려워 하리.

...아침이 되면 밤이 오기 전에 죽는다 생각하고, 밤이 되면 내일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라. 마주 보지 못하는 죽음보다 더한 치욕은 없으리니...-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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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나쓰메 소세키 지음, 이지선 옮김 / 책만드는집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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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무릎을 끓은 기억이 있으면 훗날 상대의 머리 위에 다리를 올려놓으려 들기 마련이야. 난 그런 수모를 겪느니 차라리 지금 받는 존경을 사양하고 싶네. 지금보다 더 비참한 미래를 감내하느니 차라리 외로운 현재를 견디는 게 나아. 우리가 태어난 시대는 자유와 자립 그리고 자아를 마음껏 향유할 수 있지만 그 대가로 쓰디쓴 외로움을 견뎌야 하지.-82쪽

논쟁이라면 질색이에요. 남자들은 걸핏하면 논쟁이지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다는 듯이. 내 눈에는 빈 술잔을 지치지도 않고 주고받는 사람들처럼 공허하게 보인답니다.-92쪽

누구라도 대학에 첫발을 내디딜 때는 위대한 포부를 가슴에 안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만 한 해 두 해 시간이 지나고 졸업이 가까워지면 자신의 자취를 뒤돌아보고 실망하곤 하지.-395쪽

신체든 정신이든 인간의 모든 능력은 외부의 자극으로 인해 발달하기도 하고 파괴도기도 하지. 하지만 불필요하게 자극의 강도를 높이다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치달을 수 있는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도 이를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인간의 위장만큼 약삭빠른 것도 없다고 하네. 부드러운 음식만 먹으면 그 이상 딱딱한 음식을 소화하지 못한다고 하거든. 따라서 무엇이든 가리지 말고 먹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것이네. 그러나 이는 그저 익숙해진다는 이야기가 아니야. 자극의 강도를 높임으로써 저항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을 의미하지. 만약 강한 자극 때문에 위장 자체의 기능이 약해진다면 그 자극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K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이런 부분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네. 단지 고통에 익숙해지면 그만이라고 단정해버린 것이지. 아픔을 반복해서 견디다 보면 그 공덕으로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온다고 굳게 믿었다네. -403쪽

나는 K 몰래 부인과 딸에게 K에게 자주 말을 걸어달라고 부탁했네. K를 지배해온 침묵이 그를 병들게 했다고 생각했지. 철을 쓰지 않고 방치하면 녹슬듯이 그의 마음에도 잔뜩 녹이 슨 것 같았네. -405쪽

...K가 들어온 후로는 딸이 k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지. 만일 딸의 마음이 K에게 기울었다면 내 사랑은 입에 올릴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네.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게 싫어서라든가 그런 이야기가 아닐세. 나 혼자 아무리 좋아해도 상대의 마음이 온통 다른 사람에게 향해 있다면 나는 그런 여자와 맺어지고 싶지 않았네. 세상에는 상대의 생각이야 어찌 됐든 자기 마음대로 여자를 맞아들이고 만족해하는 남자도 있다지만, 그런 사람은 나보다 더 세상 이치에 어둡거나 그게 아니면 어지간히 사랑의 심리를 모르는 둔감한 경우라고 치부했네. 일단 결혼만 하면 그럭저럭 살아가기 마련이라는 사람드르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내 가슴은 뜨거웠다네. 다시 말해 나는 지극히 고매한 사랑의 이론가였던 것이지. 동시에 가장 빈곤한 사랑의 실천가였네. -4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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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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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케의 신경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빈틈없는 사고력과 예민한 감수성에 대해 지불해야 할 세금이다. 고상한 교육을 받은 대상으로서의 고통이다. 그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탓에 받아야 하는 불문의 형벌이다. 그러한 희생을 감수핶기에 자신은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어떤 때는 그러한 희생 그 자체에 인생의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27쪽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밤 벚꽃놀이는 정말 좋더군."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다. 히라오카는 잠자코 술잔을 비우더니 약간 비웃는 듯이 입가를 실룩거리며,
"좋겠지, 나는 아직 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동안은 그래도 팔자 좋은 거지. 사회에 나가 보면 좀처럼 그럴 엄두도 못 내니까."
라고 넌지시 상대방이 사회 경험이 없는 것을 훤히 안다는 듯이 말했다. 다이스케로서는 그의 말투보다도 그 내용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는 실생활을 통한 세상살이 경험보다도 부활절밤의 경험이 인생에 있어서 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소위 사회생활의 경험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네. 고통스러울 뿐이지 않나?"
히라오카는 취기 오른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생각이 꽤 바뀐 것 같군. 하지만 그 고통이 나중에는 약이 된다는 것이 예전의 자네 지론이지 않았던가?"
"그건 식견이 모자라는 청년이 세속적인 논리에 흠뻑 빠져 적당히 얘기하던 때의 지론이었지. 그런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네."

-45쪽

"그런 식으로 허세 부려봤자 곧 항복하고 말걸."
"물론 생활이 곤란해지면 언제라도 항복하게 되겠지. 하지만 당장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 뭐하러 애써 그런 무의미한 경험을 해야 하겠나. 인도 사람이 외투를 입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인걸. ... 빵과 관련된 경험은 절실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저열한 거지. 빵을 떠나고, 물을 떠난 고상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야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지. 자네는 나를 아직도 철부지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살고 있는 고상한 세계에서는 자네보다 내가 훨씬 연장자라고 생각하네"
"그래, 언제까지라도 그런 세계에서 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 말에는 부에 대한 일종의 저주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이 들렸다.-47쪽

형 정도 되면 집에 있으나 손님으로 초대를 받아서 오나 똑같은 기분인 것 같군. 저렇게 너무 세상살이에 익숙해져도 낙이 없어져 사는 게 시시할 거야-144쪽

다이스케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속으로 서로를 모욕하지 않고서는 감히 서루에게 접촉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양상을 20세기의 타락이라 부르고 있었다. -267쪽

다이스케는 모든 도덕의 출발점은 사회적 사실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처음부터 머릿속에 고정된 도덕관념을 가지고, 거기서 거꾸로 사회적 사실을 발전시키려 하는 것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학교에서와 같은 설교식 윤리 교육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옛날식의 도덕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 유럽인들에게나 맞는 도덕을 주입시키고 있다. 격렬한 생활욕에 사로잡힌 불행한 국민의 입장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공론에 불과하다. 그런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을 받은 사람은 훗날 사회를 직접 보았을 때 예전에 받았던 교육을 되새기며 웃어버릴 것이다. 혹은 무시당한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269쪽

세이타로는 올봄부터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이제 한 두 해가 지나면 목소리도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어떤 경로를 거쳐서 성장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운명에 봉착할 것이 틀림없다. 그때 그는 조용히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거지처럼 뭔가를 찾으면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서성일 것이다. -330쪽

그는 인간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반대로 인간은 태어나서야 비로소 어떤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어떤 목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그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태어날 때 이미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 자기의 존재 목적은 자기 존재의 과정을 통해 이미 천하에 발표한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335쪽

그는 지금 그 책들 한가운데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토록 잠들어 버린 자신의 의식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들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런 보잘것없는 생활로부터 자신을 구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미치요를 만나야겠구나."-338쪽

...요즘은 그런 경험이 정신력의 저하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내용이 충실치 못한 행위를 억지로 해가며 생활할 때 하나의 징후로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다이스케는 그 점이 불쾌했다. -355쪽

그는 육체와 정신에 있어서의 미의 유형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미에 접할 기회를 얻는 것을 도시인의 특권으로 여겼다. 모든 종류의 미에 접해서 그때마다 갑에서 을로 마음이 바뀌고, 을에서 병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감수성이 부족해서 감상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믿었다. 그 진리로부터 출발해 도시에서 생활하는 모든 남녀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있어서 전부 어떤 계기로 인해 예측하기 힘든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연하자면, 이미 결혼한 한 싸으이 부부는 양쪽다 세간에서 부정이라 일컫는 관념에 사로잡혀서 결혼이라는 과거로 인해 빚어진 불행과 항상 마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380쪽

다이스케는 감수성이 가장 발달했고, 가장 자유롭게 접축할 수 있는 도시인의 대표자로서 게이샤를 선택했다. 그들 중에는 평생 정부를 몇 명 바꾸는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도시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게이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이스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변함없는 사랑을 입에 담는 사람을 제일가는 위선자로 간주했다. -380쪽

그는 우선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을 가슴 언저리에서 열어 안에 있는 지폐를 세어보지도 않은 채 집은 다음, 이걸 줄 테니까 스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미치요 앞에 내밀었다. 미치요는 하녀를 의식한 듯 낮은 목소리로,

"그래서는 안 돼요."

하며 오히려 양손을 몸에 바싹 붙였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의 손을 거둬들일 수는 없었다.

"반지를 받았으면 이것을 받아도 마찬가지지요. 종이 반지라고 여기고 받으세요."-396쪽

평소 다이스케는 만일 감자를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히 여기게 된다면 인간은 끝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433쪽

미치요가 히라오카에게 시집가기 전에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어느 정도 깊은 사이였는지 하는 점은 잠시 젖혀두고라도, 그는 현재의 미치요에 대해서 결코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병든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그는 아이를 잃은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그는 남편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그는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449쪽

사오 일 동안 그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주사위만 쳐다보며 지냈다. 오늘도 아직 손에 쥐고 있었다. 빨리 운명이 밖에서 찾아와서 그 손을 가볍게 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리쁘기도 했다. -487쪽

다이스케는 묵묵히 미치요의 모습을 살폈다. 미치요는 처음부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다이스케에게는 그 긴 속눈썹이 떨리고 있는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꼭 필요해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 겁니다."
다이스케의 말에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용하는 달콤한 수식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어조는 그 말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고 소박했다. 오히려 엄숙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 정도의 말을 하기 위해서 급한 일이라며 일부러 미치요를 부른 것은 유치한 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미치요는 원래 세숙적인 의미와는 동떨어진 종류의 급한 용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통속적인 소설에 나오는 젊은 남녀 간의 달콤한 수식어에는 그다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이스케의 말이 미치요의 감관에 어떤 강렬한 자극도 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미치요가 그걸 갈망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다이스케의 말은 감관을 초월해서 바로 미치요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나와 뺨 위로 흘러내렸다.
-540쪽

"내 바람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소, 부디 들어주시오."
미치요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다이스케에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로 가져갔다. 짙은 눈썹 일부와 이마, 그리고 앞머리만이 보였다. 다이스케는 의자를 미치요 쪽으로 바싹 가져갔다.
"들어주시겠지요?"-540쪽

비는 저녁 무렵에 그쳤고 밤이 되자 구름이 연이어 흐르고 있었다. 씻은 듯이 맑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스케는 달빛에 빛나는 뜰의 젖은 잎을 오랫동안 툇마루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게다를 신고 뜰로 내려섰다. 원래 넓지도 않은 뜰인 데다가 나무가 상당히 많아서 다이스케가 걸을 만한 공간은 별로 없었다. 다이스케는 그 한가운데에 서서 드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객실에서 낮에 사왔던 백합을 가지고 와서 자기 주위에 뿌렸다. 흐트러진 하얀 꽃잎이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였다. 어떤 것은 나무 밑의 어둠 속에서 희멀겋게 보였다. 다이스케는 별 생각 없이 그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552쪽

다이스케는 어제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었다고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두려웠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운명을 이끌어냈으면서도 그 운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서 높은 절벽의 끝까지 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586쪽

"도대체 어쩔 셈으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단 말이냐?"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다이스케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떤 여자하고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가 있지 않느냐?"라고 형이 또 말했다. 다이스케는 그래도 역시 잠자코 있었다. 세 번째로 형이 이렇게 말했다.

"너라고 전혀 방탕을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닐 거다. 이런 감당도 못할 짓을 할 바에야 이제까지 돈 쓴 보람이 없지 않느냐?"

다이스케는 지금 와서 형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용기도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자신 역시 형과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6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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