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늘 내게 진정한 통속의 의미를 깨달으면 누구도 그걸 함부로 비웃을 수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문제는 상상력의 솔직함이야. 산다는 건 알고보면 굉장히 간단하거든. 남녀가 만났다. 사랑했다. 도중에 문제가 생겼다. 결국 헤어졌다. 말하자면 그런 거지. ...방송 작가란, 그저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한 머리로 꼭 한 번 쓰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대신 써주면 돼. 삶이 반드시 기발할 필요는 없어. 통속은 아름다운 거란다. 중요한 건, 얼마나 진탕 울고 웃었냐는 거지."-12쪽
그는 말한다. 역사의식에 선행하는 것이 직업의식이라고. 군인이 철저한 군인으로서의 직업의식만 가지고 있었다면 결코 쿠데타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20쪽
늦가을의 바람이 제법 찼고, 해뜨기 전의 구름들은 파란 잉크가 번진 솜뭉치 같았다. 비가 한차례 내리면 곧이어 지상엔 영하의 날씨들이 닥칠 거였다. 겨울, 만물이 어둠 속의 흐느낌처럼 가냘퍼지는 겨울.-24쪽
"의사가 뭐라든? 안 좋대니?" "축하해. 약간이긴 하지만 암 수치가 떨어졌대요. 항암 주사를 한 번 더 맞재. 택솔이라고 좋은 약이 있대요. 머리도 빠지지 않고. 백혈구도 안 줄어드나 봐. 그 약 하나 만들려면 백 년 묵은 주목나무 백 그루가 필요하다고 그러던데." "그럼 내 몸속으로 주목나무 백 그루가 들어앉는 셈이네? 어서 맞고 싶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37쪽
후회되는 일이 몇 가지 있긴 하지만, 난 누군가 날 다시 젊어지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다시 그리로 돌아가진 않을 거야. 젊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힘든 일이거든.-41쪽
네 밖과 안 어디에도 가고픈 나라를 세우지 마라. 알았니? 그럼 사는 게 너무 고달파지고, 나중엔 나처럼 이렇게 병들고 마는 거야. 너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며 살았으면 해. 자신을 상할 정도로 괴롭히는 건, 문학이나 혁명, 혹은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그 무엇이건 간에 옳지 않은 거야. 엄마는 젊어서 그걸 몰랐어. 내 고집만을 실컷 부리며 살았지.상이 넌 아직 시간이 많으니, 지금부터라도 보이지 않는 어떤 곳에 있는 구원을 기대하며 살라구. 그건 네가만든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원래부터 있었고, 완벽하게 존재하지. 또 항상 너를 기다리고 있어. 부담 가질 필요는 없어. 절대자가 너에게 주는 값없는 선물인 거야.
나더러 교회에 다니라는 거야?
아니야.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마. ..어떤 방법으로든, 어떤 형태로든 널 받아줄, 네 영혼과 육체를 온전히 맡길 수 있는 영토가 어딘가에 있다는 걸 믿으며 살란 말이야. 믿으라는 거지. 믿어. -51쪽
시는 소설과 조금 달라. 시는 첫사랑 같은거지. 한번 떠나면 다신 돌아오지 않아. 그런데 내게서 떠났거든.
돌아올 수도 있지 않을까?
그땐 이미 첫사랑이 아니겠지. 달라졌을 테니까. 나는 지난 5년 동안 주변의 많은 시인들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치며 살아가고 있는 걸 보아왔어. 분명 자기 자신도 느끼거든. 시가 떠나버렸다는 걸. 그런데도 한번 시인이었으니 평생을 시인으로 우기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난 그러긴 싫어. -109쪽
보통의 경우 인간들은 젊어선 무엇이 되고 싶어 잠을 못 이루다가, 조금 더 나이가 들고 나선 아무것도 되지 못한 스스로를 불안해하며 숱한 밤들을 뜬 눈으로 지새우곤 한다.-221쪽
인이 박인다는 것처럼 가슴 저며오는 표현이 어디에 따로 있을 것인가. 뭐든 제대로 해내려면 그래야 할 거였다. 끊을 수 없어 차라리 마취된 고통. 내 소설도 한때 내게 그러했다.-327쪽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가.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그리하여 마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설혹 덜 되었다 하더라도 늘 다 그린 그림처럼 세워두어야만 하는 유화의 작법은, 인생이 지닌 속성과 너무나 흡사해 자못 섬찟하기까지 하다.-406쪽
나는 그녀가 제 이마를 짚으며 단성사의 간판을 올려다보고 있을 때 비로소, 지금 저 여자를 마음 상하게 하고 있는 것은 단지 망가진 스케줄 정도가 아니라 뭔가 은밀한 곳으로부터 연유한 상심이라는 걸 눈치 챘다.-416쪽
별나라로 가려는 사람, 아흔아홉 마리 양떼를 모두 죽이고도 나머지 한 마리마저 찾아 옮아가려는 돌림병보다 모진 마음, 나도 귀화식물의 시앗으로 저이의 옷깃에 묻어 황폐한 땅을 밟아봤으면. 나 외엔 아무것도 자랄 수 없고, 나 사라진 뒤엔 사막만 남게 되는 그런 세계로.-431쪽
어느 날 불현듯 스스로가 연약한 초식동물로 느껴진다면. 일단 씹으면 모두 제 것이라며 가책없이 삼켜버리는 육식동물이 아니라, 금방 목구멍으로 넘어간 한 줌의 기억조차도 믿지 못해 자꾸자꾸 되새김질하는 소심한 초식동물로 여겨진다면. 또 소라든가 양, 염소 같은 초식동물들만 번제의 제물로 쓰여지는 것이 억울하다면. 왜 유순한 초식동물의 각을 뜨고 피를 뿌려, 교활하고 무정한 육식동물들의 죄를 씻어야 하는지 신에게 따져 묻고 싶다면. -481쪽
서너 시간쯤 뒤, 아시아나 항공 oz 602편은 김포공항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층을 지나는 그 1,2분 동안, 창 밖은 하얗게 바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했다. 발이 땅에 닿으려면, 여러겹의 모호한 시절들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이다. 너무 순결하고 밝아 시야를 가리는 것도, 결국에는, 어둠처럼 어둠이다.-5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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