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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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스케의 신경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빈틈없는 사고력과 예민한 감수성에 대해 지불해야 할 세금이다. 고상한 교육을 받은 대상으로서의 고통이다. 그것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난 탓에 받아야 하는 불문의 형벌이다. 그러한 희생을 감수핶기에 자신은 지금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아니, 어떤 때는 그러한 희생 그 자체에 인생의 진정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27쪽

"사람들의 발길이 끊긴 밤 벚꽃놀이는 정말 좋더군."
하고 다이스케가 말했다. 히라오카는 잠자코 술잔을 비우더니 약간 비웃는 듯이 입가를 실룩거리며,
"좋겠지, 나는 아직 본 적이 없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있는 동안은 그래도 팔자 좋은 거지. 사회에 나가 보면 좀처럼 그럴 엄두도 못 내니까."
라고 넌지시 상대방이 사회 경험이 없는 것을 훤히 안다는 듯이 말했다. 다이스케로서는 그의 말투보다도 그 내용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그는 실생활을 통한 세상살이 경험보다도 부활절밤의 경험이 인생에 있어서 더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꾸했다.
"나는 소위 사회생활의 경험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네. 고통스러울 뿐이지 않나?"
히라오카는 취기 오른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생각이 꽤 바뀐 것 같군. 하지만 그 고통이 나중에는 약이 된다는 것이 예전의 자네 지론이지 않았던가?"
"그건 식견이 모자라는 청년이 세속적인 논리에 흠뻑 빠져 적당히 얘기하던 때의 지론이었지. 그런 생각은 이미 오래전에 버렸다네."

-45쪽

"그런 식으로 허세 부려봤자 곧 항복하고 말걸."
"물론 생활이 곤란해지면 언제라도 항복하게 되겠지. 하지만 당장 부족할 게 없는 사람이 뭐하러 애써 그런 무의미한 경험을 해야 하겠나. 인도 사람이 외투를 입고 겨울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과 마찬가지인걸. ... 빵과 관련된 경험은 절실한 것일지는 모르지만 사실은 저열한 거지. 빵을 떠나고, 물을 떠난 고상한 경험을 해보지 않고서야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없지. 자네는 나를 아직도 철부지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살고 있는 고상한 세계에서는 자네보다 내가 훨씬 연장자라고 생각하네"
"그래, 언제까지라도 그런 세계에서 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그 말에는 부에 대한 일종의 저주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이 들렸다.-47쪽

형 정도 되면 집에 있으나 손님으로 초대를 받아서 오나 똑같은 기분인 것 같군. 저렇게 너무 세상살이에 익숙해져도 낙이 없어져 사는 게 시시할 거야-144쪽

다이스케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속으로 서로를 모욕하지 않고서는 감히 서루에게 접촉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양상을 20세기의 타락이라 부르고 있었다. -267쪽

다이스케는 모든 도덕의 출발점은 사회적 사실밖에 없다고 믿고 있었다. 처음부터 머릿속에 고정된 도덕관념을 가지고, 거기서 거꾸로 사회적 사실을 발전시키려 하는 것만큼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의 학교에서와 같은 설교식 윤리 교육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는 옛날식의 도덕을 가르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일반 유럽인들에게나 맞는 도덕을 주입시키고 있다. 격렬한 생활욕에 사로잡힌 불행한 국민의 입장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공론에 불과하다. 그런 현실과 동떨어진 교육을 받은 사람은 훗날 사회를 직접 보았을 때 예전에 받았던 교육을 되새기며 웃어버릴 것이다. 혹은 무시당한 듯한 기분이 들 것이다. -269쪽

세이타로는 올봄부터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자 갑자기 키가 커진 것 같았다. 이제 한 두 해가 지나면 목소리도 변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로 어떤 경로를 거쳐서 성장할지 모르지만, 어차피 하나의 인간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운명에 봉착할 것이 틀림없다. 그때 그는 조용히 남의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거지처럼 뭔가를 찾으면서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서성일 것이다. -330쪽

그는 인간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반대로 인간은 태어나서야 비로소 어떤 목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객관적으로 어떤 목적을 만들어서 그것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것은 그 인간의 자유로운 활동을 태어날 때 이미 빼앗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목적이란 태어난 본인 스스로가 만든 것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어떤 사람이라도 그것을 마음대로 만들 수는 없다. 자기의 존재 목적은 자기 존재의 과정을 통해 이미 천하에 발표한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335쪽

그는 지금 그 책들 한가운데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잠시 후 그토록 잠들어 버린 자신의 의식에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는 주위의 사물들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면서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또다시 멍하니 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마침내 이런 보잘것없는 생활로부터 자신을 구해 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역시 미치요를 만나야겠구나."-338쪽

...요즘은 그런 경험이 정신력의 저하를 수반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내용이 충실치 못한 행위를 억지로 해가며 생활할 때 하나의 징후로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다이스케는 그 점이 불쾌했다. -355쪽

그는 육체와 정신에 있어서의 미의 유형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미에 접할 기회를 얻는 것을 도시인의 특권으로 여겼다. 모든 종류의 미에 접해서 그때마다 갑에서 을로 마음이 바뀌고, 을에서 병으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은 감수성이 부족해서 감상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서 그것이 논란의 여지가 없는 진리라고 믿었다. 그 진리로부터 출발해 도시에서 생활하는 모든 남녀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에 있어서 전부 어떤 계기로 인해 예측하기 힘든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부연하자면, 이미 결혼한 한 싸으이 부부는 양쪽다 세간에서 부정이라 일컫는 관념에 사로잡혀서 결혼이라는 과거로 인해 빚어진 불행과 항상 마주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다.

-380쪽

다이스케는 감수성이 가장 발달했고, 가장 자유롭게 접축할 수 있는 도시인의 대표자로서 게이샤를 선택했다. 그들 중에는 평생 정부를 몇 명 바꾸는지 알 수 없는 사람도 있지 않은가? 일반적인 도시인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게이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이스케는 요즘 같은 세상에 변함없는 사랑을 입에 담는 사람을 제일가는 위선자로 간주했다. -380쪽

그는 우선 아무렇지도 않게 지갑을 가슴 언저리에서 열어 안에 있는 지폐를 세어보지도 않은 채 집은 다음, 이걸 줄 테니까 스라고 대수롭지 않은 듯이 미치요 앞에 내밀었다. 미치요는 하녀를 의식한 듯 낮은 목소리로,

"그래서는 안 돼요."

하며 오히려 양손을 몸에 바싹 붙였다. 하지만 다이스케는 자신의 손을 거둬들일 수는 없었다.

"반지를 받았으면 이것을 받아도 마찬가지지요. 종이 반지라고 여기고 받으세요."-396쪽

평소 다이스케는 만일 감자를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히 여기게 된다면 인간은 끝장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433쪽

미치요가 히라오카에게 시집가기 전에 다이스케와 미치요가 어느 정도 깊은 사이였는지 하는 점은 잠시 젖혀두고라도, 그는 현재의 미치요에 대해서 결코 무관심할 수가 없었다. 그는 병든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그는 아이를 잃은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그는 남편의 사랑을 잃어가고 있는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그는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미치요를 예전의 미치요보다 불쌍히 여겼다. -449쪽

사오 일 동안 그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주사위만 쳐다보며 지냈다. 오늘도 아직 손에 쥐고 있었다. 빨리 운명이 밖에서 찾아와서 그 손을 가볍게 쳐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직 손에 쥐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리쁘기도 했다. -487쪽

다이스케는 묵묵히 미치요의 모습을 살폈다. 미치요는 처음부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다이스케에게는 그 긴 속눈썹이 떨리고 있는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다.
"나에게는 당신이 필요해요. 당신이 꼭 필요해요. 이 말을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당신을 부른 겁니다."
다이스케의 말에는 보통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용하는 달콤한 수식어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의 어조는 그 말과 마찬가지로 간단하고 소박했다. 오히려 엄숙하기까지 했다. 단지 그 정도의 말을 하기 위해서 급한 일이라며 일부러 미치요를 부른 것은 유치한 시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미치요는 원래 세숙적인 의미와는 동떨어진 종류의 급한 용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여자였다. 그리고 그녀는 통속적인 소설에 나오는 젊은 남녀 간의 달콤한 수식어에는 그다지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이스케의 말이 미치요의 감관에 어떤 강렬한 자극도 주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미치요가 그걸 갈망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다이스케의 말은 감관을 초월해서 바로 미치요의 가슴으로 전해졌다. 그녀의 떨리는 속눈썹 사이로 눈물이 나와 뺨 위로 흘러내렸다.
-540쪽

"내 바람을 들어주었으면 좋겠소, 부디 들어주시오."
미치요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다이스케에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소맷자락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로 가져갔다. 짙은 눈썹 일부와 이마, 그리고 앞머리만이 보였다. 다이스케는 의자를 미치요 쪽으로 바싹 가져갔다.
"들어주시겠지요?"-540쪽

비는 저녁 무렵에 그쳤고 밤이 되자 구름이 연이어 흐르고 있었다. 씻은 듯이 맑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스케는 달빛에 빛나는 뜰의 젖은 잎을 오랫동안 툇마루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게다를 신고 뜰로 내려섰다. 원래 넓지도 않은 뜰인 데다가 나무가 상당히 많아서 다이스케가 걸을 만한 공간은 별로 없었다. 다이스케는 그 한가운데에 서서 드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객실에서 낮에 사왔던 백합을 가지고 와서 자기 주위에 뿌렸다. 흐트러진 하얀 꽃잎이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였다. 어떤 것은 나무 밑의 어둠 속에서 희멀겋게 보였다. 다이스케는 별 생각 없이 그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552쪽

다이스케는 어제 아버지와 나눈 이야기들을 돌이켜보면 모든 일이 순리대로 되었다고 생각할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두려웠다. 자신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운명을 이끌어냈으면서도 그 운명이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서 높은 절벽의 끝까지 밀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586쪽

"도대체 어쩔 셈으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단 말이냐?"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이 말했다. 다이스케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했다.

"어떤 여자하고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결혼할 수가 있지 않느냐?"라고 형이 또 말했다. 다이스케는 그래도 역시 잠자코 있었다. 세 번째로 형이 이렇게 말했다.

"너라고 전혀 방탕을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닐 거다. 이런 감당도 못할 짓을 할 바에야 이제까지 돈 쓴 보람이 없지 않느냐?"

다이스케는 지금 와서 형에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용기도 없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도 자신 역시 형과 똑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6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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