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품절


무릇 젊음이란 육체와 정신의 허세이며, 혹은 그 반대로 세상물정 모르고 벌여놓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미숙함의 상징이 아닌가.-12쪽

자신의 마음을 질책하고 싶을 때는 육체를 질책하는 길이 최상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20쪽

재능 있는 감독이 비참한 입장에 몰리자 반권력적인 포즈를 취하며 당사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조자한 사상 영화를 만들었고, 그런 것들은 이미 영화라고도 할 수 없는 엉터리였다. 대형 영화사를 뛰쳐나오면서까지 만들어야 할 작품이 결코 아닌데도 그들은 그 작품의 광고를 위한 문구가 훨씬 멋지게 느껴질 정도로 구질구질한 영화를 세상에 내놓아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텔레비전의 안방용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해 눈물을 머금거나 저널리즘적 사회정의에 영합하여 먹고살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청춘 시절의 추억이 한층 씁쓸해진다. -101쪽

첫 단편을 쓰기 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목표로 하는 이미지의 7,80퍼센트에 육박하는 작품은 열두 편 중에 고작해야 두 세 편 정도일 것이라고. 즉 네 편에 한 편꼴로 그런 대로 쓸 만한 작품이 나오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 편만 쓰면 되지 않느냐고들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는 안 된다. 그 서녀편을 써내기 위해 나머지 여덟, 아홉 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달았다. -111쪽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줄줄이 엮어내려다 끝내 한 줄도 쓰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잠자코 기다리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이거다 싶은 테마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작 펜을 쥐고 쓰기 시작하면 뜻한 바의 문장이 나오지 않아 도중에 펜을 던져버리는 일이 많았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끊임없이 쓰는 일이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지름길이었다. 다른 길은 없는 듯했다. 그러니 일단 쓴 작품은 좋건 나쁘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111쪽

일류 고등학교와 일류 대학교를 졸업해본들 그 앞에 어떤 나날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심심하면 "학생 시절이 그나마 제일 좋았어"란 말을 뱉어내는 샐러리맨 신세가 고작 아닌가.

샐러리맨은 상부에서 떨어지는 명령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주 중대한 일마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전근 명령을 받았다. 새로 이사한 고장은 실로 한심한 곳이었다. 어린 내가 화가 치밀 정도였다. 자기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살 수도 없다니, 이거야 너무 굴욕적인 입장이지 않은가 싶었다. -144쪽

젊은 사람이결론을 ㄴ린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기껏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봐야 학교 공부 정도가 아닌가 학교에서 몇 년 공부한 정도로,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안 나온다고 해서 왜 인생의 전부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길고 긴 인생에 있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손에 넣지 못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과연 있을 까. 그것을 잃으면 끝장이라고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있다. 그것도 하나나 둘도 아니라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나 둘을 잃었다고 해서, 손에 넣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가. -156쪽

신슈에 낚시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인지 유료 낚시터에 가고 싶어한다. 그러고는 낚시터가 복잡하면 오늘은 운이 없다는 둥 투덜대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간다. 왜 낚시터가 복잡하다고 포기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낚시터 바로 옆에 진짜 곤들매기와 산천어가 어슬렁 헤엄쳐다니는 강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강 낚시가 훨씬 재미있는데도 말이다.

선생이나 부모가 열심히 가르치는 길이 유료 낚시터 같은 길이 아닐까. 그리고 젊은이들은 유료 낚시터에만 물고기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157쪽

물론 부모나 선생은 자기 자식이나 제자가 안정된 길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그러고는 입을 모아 '성실이 제일'이라고 떠들어댄다. 절대로 도산하지 않을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ㅇ비사하여 아무튼 성실하게몇십 년 일하면 퇴직금도 받고 연금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 삶만이 성실한 것일까. 그것만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바랐던 안정의 결과가 주위의 눈치만 살피고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되어 점차 인간미를 잃어가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다시 한번 선생의 눈을 보라. 다시 한번 부모의 눈을 보라. 입으로는 거창한 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그 표정이라니, 도대체 무언가. 왜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그런 표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라도 있다면, 이번 인생은 이 정도로 해두고 두번째 세번째 인생을 마음껏 누리자고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 사람에게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159쪽

상사의 통신과에서 텔렉스 오퍼레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나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떤 회사 조직이든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삶의 보람이 어쩌니저쩌니 해보아야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아무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다. -172쪽

내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다. 전직, 돈의 필요성, 자유에 대한 동경, 어느 것 하나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그런 이유만으로 그만한 정열을 기울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이 들렸다든가, 무슨 계시가 있었다든가 하는 말은 너무 거창해서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당시 내 안에 싹트기 시작한 강렬한 힘은 그런 식으로 펴현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청춘의 힘이란 그렇게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먼 훗날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생겼을 때, 거기에 끝없이 힘을 쏟아부을 수 있으며,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청춘의 힘이며 동시에 청춘의 위험한 일면인지도 모르겠다. -192쪽

어느 쪽이 타당한 것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거역하며 살고 싶었다. 자연 그대로 살고 싶다든가, 자신을 속이지 ㅇ낳고 살고 싶다는 희망은, 늙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나 매달릴 법한 말이었다. -220쪽

이십대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절로 보인다. 이십대란, 혼자서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한 힘을 체득해야 하는 귀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득도 해도 안 되는 어중간한 친구를 잔뜩 갖고 있어봐야, 그저 외로움이나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지리멸렬한 만남을 거듭한다면 자립과 독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따름이다. -236쪽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는 모두 넋두리이거나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제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어린애 장난이다. 그 강을 건너면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는 가치 평가를 내려선 안 된다. 싫어도 건너야만 한다. 건너편 강기슭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몸을 날리는 수밖에 ㅇ벗다. 그 다음은 강물 속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면 된다. 그 몸짓은 실로 멋대가리 없다.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냥 웃게 내버려둬라. 건너편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그들에게 웃음으로 되돌려주면 된다.

청춘이란 달콤한 향기에 취해 천국같은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이라고 전혀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평생 건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너지 않으면 불필요한 고뇌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고뇌의 횟수와 내용은 오히려 나날이 불어난다. -250쪽

젊음에 부여된 그칠 줄 모르는 체력과 한결같은 기력은 놀기에 전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끝까지 건너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서른을 넘으면 절대로 건널 수 없다. 건너고 싶어도, 이미 체력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 다음은 변명할 말을 찾으며 늙어가든지, 아니면 얕은 개울물에 발이나 담그고 빠진 척하며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250쪽

...그들은 종종 "우리들은 영화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나에게서 영화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라고도 말한다. 패기는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것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니다. 영화만들기에 따라다니는 주변적인 것, 예컨대 대학교 기숙사나 축제 같은 들뜬 분위기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이런 지적은 다른 세계에도 적용된다. 문학을 사랑해 마지 않는다고 하는 작자들이 문학을 썩게 하고, 나라를 사랑해 마지않는 자들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다. -259쪽

흔히 역작이라고 불리는, 몇 년 동안이나 질질 늘여 쓴 연재소설이나, 도중에 다른 소설을 쓰면서 느긋하게 쓴 장편소설을 읽다 보면, 여기저기 균형을 잃은 톤 때문에 작품의 질까지 추락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한 불균형이 오히려 바람직한 효과를 빚었다는 예는 거의 없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주변의 사소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날씨의 맑고 궂음, 바람의 세고 약함 등에 흔들리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엉뚱한 행동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소설가에게는 그런 변화가 문장으로 바로 드러난다. 하루나 이틀 정도라면 몰라도, 칠 개월 동안이나 일관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읽는 쪽에서는 대여섯 시간이면 삼백매짜리 소설을 독파한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일관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소설을 접하고 있는 대여섯 시간이지, 작가가 칠 개월 동안 들인 공력은 애당초 상관없는 일이다. -271쪽

내뱉는 말은 차원이 높은데 그들이 쓰는 글은 한심하리만큼 차원이 낮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294쪽

글 솜씨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향상시키려면 매일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좀 숙달됐다 싶어 연습을 게을리 하면, 금방 둔해집니다. 머리는 이전과 동일한 속도로 치는데, 손가락이 따라와주지 않는 것이죠.

안목은 쇠퇴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소설을 읽고 이러니저러니 비평은 할 수 있어요. 눈이 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손에 별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제 실컷 놀면서 충전을 했으니, 이쯤에서 소설을 해볼까 하고 생각하고 막상 펜을 쥐고 써보지만 한심한 문장밖에 안 나와요. 안목이 그대로 있으니까 자기 자신의 글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압니다. 아니까 당황하죠. 아연실색합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방해를 합니다. 결국 초보자와 같은 스타트 라인에 설 수가 없습니다. -295쪽

세상 사람들은 소설가의 재능에 대해서, 가령 보통 사람들이 열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나 둘쯤 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일쑤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하는 것이지만, 소설가는 오히려 하나나 둘쯔 결여되어 있기가 십상이죠. 성격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이란 이야기죠. 그 불완전함이 즉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인데 정도 차이는 있겠지요. 어중간하면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가 될 것이고, 설사 정신의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거나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시도를 하더라도 안이하게 자살이란 결론을 얻는 것으로 끝나겠죠. -314쪽

창조적인 일을 하고 조금이나마 나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려 한다면, 단조롭고 평범한 나날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빼어난 작품이 튀어나온다는 식의 신화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바보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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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4-13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는 작가라서 인용글 찬찬히 읽어보았는데 공감이 가는군요. '소설가' 자리에, 되고 싶은 어떤 것을 넣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책 읽어봐야겠어요.

LAYLA 2014-04-14 19:54   좋아요 0 | URL
요즘 이 작가 에세이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것 같더라구요. 이렇게 소설가로서의 각오가 대단한데 에세이로 주목받는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긴 하죠.. ㅎㅎㅎ
 
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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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세상에는 오직 작가만이 적당한 언어를 찾아 표현할 수 있는 면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번쩍거리는 마케팅 팸플릿은 어던 맥락에서는 대단히 효과적인 소통의 수단이 되었겠지만, 한 작가의 목소리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진정성까지는 늘 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12쪽

부자들일수록 짐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지위와 주로 다니는 여행지 덕분에 이제는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눈에 자주 띄는 경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43쪽

산업화의 초기에는 노동력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아주 쉬웠다. 한 가지 기본적인 도구, 즉 채찍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채찍으로 노동자를 힘껏 후려쳐도 아무 일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는 더 열심히 돌을 캐고 노를 저었다. 그러나 일을 하는 사람이 원한을 꾹꾹 누르며 복종하기보다는 스스로 크게 만족해야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직업들-21세기 초에는 이런 직업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이 나타나면서 규칙도 바뀌어야 했다. -51쪽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위하여 쓴 '분노에 관하여'라는 논문, 그중에서도 특히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여, 존재에 풍토병처럼 따라다니는 좌절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57쪽

우리가 미학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기쁨을 끌어내는 능력은 이해, 공감, 존중 등 그보다 더 중요한 여러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요구를 먼저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위태롭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헌신하고 있는 관계가 몰이해와 원한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는 종려나무와 하늘색 수영장을 즐길 수가 없는 것이다. -76쪽

가지각색의 색깔과 글자체로 이루어진 이 지폐들은 지도자, 독재자, 창건자, 바나나 나무, 작은 요정들로 장식되어 있다. -105쪽

나는 앞으로 빠른 시간 안에는 콩코드 룸에 다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슬픔을 희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구역에 꽤나 자주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증오를 기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브리오슈를 바닥에 깐 포르치니 버섯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이 라운지가 사실은 족벌 등용과 다양한 속임수 덕분에 자격도 없으면서 이곳에 들어올 권한을 얻게 된 독점적 지배자들의 은신처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본 결과 안타깝게도 내 눈에 띄는 증거들은 그 위로가 되는 명제를 뒷받침하기는커녕 모순만 일으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주위에 있는 손님들은 부자의 상투적인 틀에 전혀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아주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골의 엄청난 땅을 상속한 나약한 상속자들이 아니라, 마이크로 칩과 스프레드시트가 사람들 대신 일을 하게 하는 방법을 궁리해낸 보통 사람들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옷을 입고 맬컴 글래드웰이 쓴 책을 읽는 이들은 지능과 정력 덕분에 부자가 된 -125쪽

엘리트였다. 이들은 공급 사슬의 불규칙성을 교정하는 엑센츄어에서 일을 하거나, MIT에서 소득 비율 모델을 구축했다. 텔레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창업했거나 솔크 연구소에서 천체물리학을 연구했다. 우리 사회가 풍족한 것은 대체로 가장 부유한 시민들이 부자들은 이럴 것이다 하는 대중의 통념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약탈만 해서는 절대 이런 종류의 라운지(세계화되고, 다양하고, 엄격하고, 테크놀로지에 익숙했다)를 지을 수 없다. 기껏해야 금을 바른 쾌락의 궁전이나 몇 동 지어놓고 다른 곳의 봉건적이고 후진적인 풍경은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127쪽

그 방을 돌며서 비행기 객실의 초기 디자인들을 꼼꼼히 살피며 받은 느낌은 출간된 책의 초고를 볼 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잘 다듬어진 당당한 산문도 처음에는 주춤거리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출발했음을 확인하는 즐거움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첫 시도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위로가 됨직한 교훈이었다. -133쪽

요즘 여행자는 화요일에는 아부자에 있다가 수요일에는 히드로의 새 터미널의 보조 비행장 끝에 있을 수도 있다. 어제 점심에는 아프리카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우세 지구에서 튀긴 바나나를 먹었지만, 오늘 아침 8시에는 히드로에 와 있다. 기장은 코스타 커피 체인 옆의 게이트에서 777기의 쌍발 엔진을 끈다.

피로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완전히 깨어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빛, 도로 표지, 바닥 광택, 피부색, 쇳소리, 광고. 마약을 한 상태이거나, 갓난아기 또는 톨스토이가 된 것처럼 감각이 날카롭다. 갑자기 고향이 다른 어디보다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까지 돌아다녔던 다른 땅에 의해서 세세한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173쪽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는 힘과 강인함을 투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지독하게 연약하고 위태로운 피조물들이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을 습관적으로 무시하고 또 그들 역시 우리를 무시하지만, 늘 우리의 행복의 가능성을 볼모로 잡고 있는 소수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냄새만으로도 인식할 수 있으며, 그들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191쪽

그러나 주차장의 가차 없는 형광등 불빛 밑에서 시민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애초에 여행을 떠났던 이유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말려들곤 하던 천박하고 성난 분위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 아니었던가. -199쪽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대륙을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것이다. 배우자나 자식과 다시 말다툼을 시작할 것이다. 영국의 풍경을 보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매미를 잊고, 펠레폰네소스 반도에서 보낸 마지막 날 함께 품었던 희망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두브로브니크와 프라하에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해변과 중세의 거리가 주는 힘을 다시 순수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내년에는 어딘가에 별장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또 해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무료 저녁 뷔헤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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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채우다
심윤경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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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좋아하시네. 그거야 자기 남편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소리지. 그렇게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넙죽 내놓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 배 아파서 순순히는 못 내놓지."
"맞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순진해서 사랑한다는 소리에 쩔쩔매는 거예요. 우리 나이 이제 사십이에요. 지금 우리가 사랑 때문에 살아요 어디? 우리는 지금 사랑타령할 나이가 지났어요. 알고 보면 결국, 돈이에요. 그 여자도 분명히 그럴거에요."

전혜원의 애끓는 호소를 올케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도 없고, 대략난감이었다. 나이 사십이 무슨 인생의 저주이길래, 곱게 자란 이 여인들은 사랑에 이렇게 돌같이 무감해졌는가?-110쪽

성민과 함께 살아온 십년 동안 우리를 정의했던 하나의 단어를 고르라면 그건 '평화'였다. 그 단어가 '사랑'이 아니라서 불만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작은오빠와 우리 미친 가족들이 그렇게 삶을 들까불러댔는데도 그는 끄떡없었다. 내가 낙관과 비관의 양극단을 초 단위로 오가며 진상을 떨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무던하고 평화로운 게 성민이었다. 우리 사이엔 많은 결핍이 존재했지만, 그 수많은 구멍들을 성민은 타고난 안정감으로 훌륭하게 채웠다. 우리 미친 가족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고 나는 바로 그런 성민을 좋아했다. 나는 성민과 한평생을 함께하리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275쪽

삶에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어지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그에게 그곳이 나무가 쓰러진 고속도로였다면, 나에게는 산꼭대기에서 붉은빛이 번져가는 이 산성이었다. 그날 그가 전혜원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오늘 성민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과 방향의 감각이 없어지는 그런 공간에서는, 인간이 무엇이 부딪쳐 어디로 가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또 산성을 지나쳤다. 한번 지나치고 나면, 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게 된다. -297쪽

사람들은 보통 작은오빠가 미쳤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원조는 김덕만 사장이었다. 돈을 잘 버니까 미친병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빠는 평생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철들 기회가 더 없어서, 미친 증세로 따지자면 작은 오빠의 열 배였다. -310쪽

사람의 마음이란 몸을 덮고 있는 얇은 막을 뚫고 쉽사리 뛰쳐나가는 성질이 있었다. -5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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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하트 - 제1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정아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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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 뒤에 여러 종류의 담배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뒤 편의점을 한 바퀴 돌았다. 냉장고 옆쪽으로 10대로 보이는 남녀가 간이 식탁 위에 컵라면을 올려놓고 같이 먹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입 좀 다물고 먹어. 후루룩 짭짭, 그게 뭐냐? 여자애가."
"남 말 하네. 너 먹는 소리가 백배는 더 크거든요."
"뭐? 너? 이게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너 오빠한테 자꾸 그러면 확, 한 번 더 해버린다."
말과 동시에 남자애가 여자애의 허리를 확 당겨 안았다. 여자애가 꺄악, 소리를 지르며 간이식탁을 붙잡았다. 그 바람에 라면 용기가 떨어지면서 옆으로 지나가던 내게 국물이 쏟아졌다.
"엄마!"
얼른 옆으로 비켜섰지만 이미 추리닝 윗도리에 라면 가락과 야채 조각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뒤였다.
"어머, 어떡해."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애가 남자애 품으로 파고들었다.
"죄송합니다."
남자애가 여자애를 당겨 안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서로 꼭 끌어안고 나를 응시하는 남녀. 무슨 대단한 적군이라도 만난 것처럼 서로를 보호하기에 여념이 없다. 나는 두 사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자애 얼굴은 군데군데 화장이 지워져 있고, 남자애 얼굴에는 자신-470쪽

감이 넘친다. 막 성관계를 마치고 나온 연인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분위기. 인생의 비밀스러운 곳을 함께 탐험하고 온 이들 사이에서만 오갈 수 있는 긴밀하고 친근한 분위기였다. 순간 가슴이 뻐근해지도록 질투심이 치솟았다. 이 아이들, 얼마나 아름다운가. 얼마나 건전한가. 술에 취해 몸을 섞은 뒤 단절로 대응했던 태환과 나보다는 편의점에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성관계를 암시하는 말을 타인이 알아챌 정도로 함부로 내뱉는 이들이 백배는 더 건강하고 아름다우리라. -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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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 산도르 마라이 산문집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3년 11월
구판절판


용감한 사람들

나는 무익한 것도 느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들, 과감하게 무익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을 존중한다. 우리는 모두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이다..... 아주 유능하다. 나는 용기있게 '나' 또는 '아름답고 무정한 권태여, 나는 너를 사랑한다' 같은 말들을 생각하는 사람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현실적인 가능성과 관련하여...'라는 말로 하루를 시작하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것처럼 구는 사람들은 절대로 높이 사지 않는다. -11쪽

운명

사람들은 언제나 운명이 번개와 번득이는 불꽃, 티파니와 북, 트럼펫을 거느리고 천둥처럼 요란하게 들이닥친다고 믿는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에 부딪히면 그 매너가 훨씬 더 섬세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폐암, 빈곤, 굴욕, 아니면 치명적인 사랑이 살며시 나타나 문을 두드리고는 정중하게 허락을 청한다.

"들어가도 될까요?"

그러고 나서야 들어온다. -63쪽

연민

동물들은 연민을 안다. 그것은 원시적인 연민, 더듬거리는 외마디 연민이다. 내가 어쩌다 삶이나 문학 논쟁에서 한 방 먹거나 아픈 곳을 찔리면 개는 정확하게 내 상처를 안다. 개는 다가와서 내 무릎에 머리를 올려놓고, 다 안다는 듯이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며 말없이 슬기롭게 위로한다. "기운을 내, 곧 다시 좋아질 거야." 개는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결코 좋아질 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동물의 연민은 고매하고 용감하다. 그들은 위로하는 게 아니라 확인할 뿐이다. 이런 객관성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편안하게 한다.-77쪽

당장

당장 무엇을 할 것인가?
이십 년 전부터 구상해온 소설을 드디어 쓰자. 그동안 나는 이 과제를 미루려고 수십 권의 다른 책을 썼다. 또 중국과 그린랜드로 여행을 하고, 가족을 일구어 적어도 아이를 셋은 낳고, 이따금 로빈슨과 카사노바처럼 자유로운 삶을 구가하고, 인간의 과거와 현재에 대해 확실한 것을 알려주는 삼사천권의 책을 읽고, 독립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더 독립적이 되기 위해서 모든 물질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죽음과 친근해지고 삶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자...이제 이런 일들을 더 미루지 말고 실천에 옮겨야 한다. 이런 것들을 성취하지 못하거나 소유하지 못한 삶은 덧없고 의미없다. 이 모든 것은 내 의무이고, 또 당장 나한테 필요한 일이다. 인간은 죽음이 가까이 오면, 출발 오 분 전에야 짐을 꾸리지 않은 것을 알아차린 여행자처럼 허둥지둥 서두르기 시작한다. 그러니 자, 지금 시작하자. 당장, 우리 삶을 꾸리자. -84쪽

절대로 가격을 흥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삶.-10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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