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항에서 일주일을 - 히드로 다이어리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청미래 / 2010년 1월
장바구니담기


어쩌면 세상에는 오직 작가만이 적당한 언어를 찾아 표현할 수 있는 면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번쩍거리는 마케팅 팸플릿은 어던 맥락에서는 대단히 효과적인 소통의 수단이 되었겠지만, 한 작가의 목소리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진정성까지는 늘 전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12쪽

부자들일수록 짐이 적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지위와 주로 다니는 여행지 덕분에 이제는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살 수 있다는, 눈에 자주 띄는 경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43쪽

산업화의 초기에는 노동력에 동기를 부여하기가 아주 쉬웠다. 한 가지 기본적인 도구, 즉 채찍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채찍으로 노동자를 힘껏 후려쳐도 아무 일 없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는 더 열심히 돌을 캐고 노를 저었다. 그러나 일을 하는 사람이 원한을 꾹꾹 누르며 복종하기보다는 스스로 크게 만족해야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직업들-21세기 초에는 이런 직업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이 나타나면서 규칙도 바뀌어야 했다. -51쪽

나는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가 네로 황제를 위하여 쓴 '분노에 관하여'라는 논문, 그중에서도 특히 분노의 뿌리는 희망이라는 명제가 떠올랐다. 우리는 지나치게 낙관하여, 존재에 풍토병처럼 따라다니는 좌절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기 때문에 분노한다. -57쪽

우리가 미학적이거나 물질적인 것들로부터 기쁨을 끌어내는 능력은 이해, 공감, 존중 등 그보다 더 중요한 여러 감정적이고 심리적인 요구를 먼저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실에 위태롭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가 헌신하고 있는 관계가 몰이해와 원한으로 물들어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드러나면 우리는 종려나무와 하늘색 수영장을 즐길 수가 없는 것이다. -76쪽

가지각색의 색깔과 글자체로 이루어진 이 지폐들은 지도자, 독재자, 창건자, 바나나 나무, 작은 요정들로 장식되어 있다. -105쪽

나는 앞으로 빠른 시간 안에는 콩코드 룸에 다시 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슬픔을 희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구역에 꽤나 자주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철저한 증오를 기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브리오슈를 바닥에 깐 포르치니 버섯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이 라운지가 사실은 족벌 등용과 다양한 속임수 덕분에 자격도 없으면서 이곳에 들어올 권한을 얻게 된 독점적 지배자들의 은신처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나 꼼꼼하게 살펴본 결과 안타깝게도 내 눈에 띄는 증거들은 그 위로가 되는 명제를 뒷받침하기는커녕 모순만 일으킨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주위에 있는 손님들은 부자의 상투적인 틀에 전혀 들어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이 두드러져 보이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들이 아주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시골의 엄청난 땅을 상속한 나약한 상속자들이 아니라, 마이크로 칩과 스프레드시트가 사람들 대신 일을 하게 하는 방법을 궁리해낸 보통 사람들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옷을 입고 맬컴 글래드웰이 쓴 책을 읽는 이들은 지능과 정력 덕분에 부자가 된 -125쪽

엘리트였다. 이들은 공급 사슬의 불규칙성을 교정하는 엑센츄어에서 일을 하거나, MIT에서 소득 비율 모델을 구축했다. 텔레커뮤니케이션 회사를 창업했거나 솔크 연구소에서 천체물리학을 연구했다. 우리 사회가 풍족한 것은 대체로 가장 부유한 시민들이 부자들은 이럴 것이다 하는 대중의 통념대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약탈만 해서는 절대 이런 종류의 라운지(세계화되고, 다양하고, 엄격하고, 테크놀로지에 익숙했다)를 지을 수 없다. 기껏해야 금을 바른 쾌락의 궁전이나 몇 동 지어놓고 다른 곳의 봉건적이고 후진적인 풍경은 그대로 두었을 것이다. -127쪽

그 방을 돌며서 비행기 객실의 초기 디자인들을 꼼꼼히 살피며 받은 느낌은 출간된 책의 초고를 볼 때 받은 느낌과 비슷했다. 잘 다듬어진 당당한 산문도 처음에는 주춤거리는 혼란스러운 상태에서 출발했음을 확인하는 즐거움이었다. 무엇이 되었든 첫 시도에는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위로가 됨직한 교훈이었다. -133쪽

요즘 여행자는 화요일에는 아부자에 있다가 수요일에는 히드로의 새 터미널의 보조 비행장 끝에 있을 수도 있다. 어제 점심에는 아프리카 뻐꾸기 소리를 들으며 우세 지구에서 튀긴 바나나를 먹었지만, 오늘 아침 8시에는 히드로에 와 있다. 기장은 코스타 커피 체인 옆의 게이트에서 777기의 쌍발 엔진을 끈다.

피로에도 불구하고 감각은 완전히 깨어나 모든 것을 흡수한다. 빛, 도로 표지, 바닥 광택, 피부색, 쇳소리, 광고. 마약을 한 상태이거나, 갓난아기 또는 톨스토이가 된 것처럼 감각이 날카롭다. 갑자기 고향이 다른 어디보다 낯설게 느껴진다. 이제까지 돌아다녔던 다른 땅에 의해서 세세한 모든 것들이 상대화되었기 때문이다. -173쪽

우리는 사회 생활에서는 힘과 강인함을 투사하며 많은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결국은 지독하게 연약하고 위태로운 피조물들이다. 우리는 더불어 사는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을 습관적으로 무시하고 또 그들 역시 우리를 무시하지만, 늘 우리의 행복의 가능성을 볼모로 잡고 있는 소수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냄새만으로도 인식할 수 있으며, 그들 없이 사느니 차라리 죽는 쪽을 택할 것이다. -191쪽

그러나 주차장의 가차 없는 형광등 불빛 밑에서 시민답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면서, 우리는 애초에 여행을 떠났던 이유를 떠올릴 수도 있다. 일상생활에서 쉽게 말려들곤 하던 천박하고 성난 분위기에 제대로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는 것 아니었던가. -199쪽

여행자들은 곧 여행을 잊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사무실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하나의 대륙을 몇 줄의 문장으로 압축할 것이다. 배우자나 자식과 다시 말다툼을 시작할 것이다. 영국의 풍경을 보며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것이다. 매미를 잊고, 펠레폰네소스 반도에서 보낸 마지막 날 함께 품었던 희망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다시 두브로브니크와 프라하에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해변과 중세의 거리가 주는 힘을 다시 순수한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내년에는 어딘가에 별장을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또 해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잊는다. 우리가 읽은 책, 일본의 절, 룩소르의 무덤, 비행기를 타려고 섰던 줄,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 등 모두 다.그래서 우리는 점차 행복을 이곳이 아닌 다른 곳과 동일시하는 일로 돌아간다. 항구를 굽어보는 방 두 개짜리 숙소, 시칠리아의 순교자 성 아가타의 유해를 자랑하는 언덕 꼭대기의 교회,무료 저녁 뷔헤가 제공되는 야자나무들 속의 방갈로. 우리는 짐을 싸고, 희망을 품고, 비명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회복한다.곧 다시 돌아가 공항의 중요한 교훈들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하는 것이다-205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