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좋아하시네. 그거야 자기 남편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소리지. 그렇게 돈 잘 벌고 잘 나가는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넙죽 내놓고 싶은 여자가 어디 있겠어? 배 아파서 순순히는 못 내놓지." "맞아요, 아가씨. 아가씨가 순진해서 사랑한다는 소리에 쩔쩔매는 거예요. 우리 나이 이제 사십이에요. 지금 우리가 사랑 때문에 살아요 어디? 우리는 지금 사랑타령할 나이가 지났어요. 알고 보면 결국, 돈이에요. 그 여자도 분명히 그럴거에요."
전혜원의 애끓는 호소를 올케들에게 직접 보여줄 수도 없고, 대략난감이었다. 나이 사십이 무슨 인생의 저주이길래, 곱게 자란 이 여인들은 사랑에 이렇게 돌같이 무감해졌는가?-110쪽
성민과 함께 살아온 십년 동안 우리를 정의했던 하나의 단어를 고르라면 그건 '평화'였다. 그 단어가 '사랑'이 아니라서 불만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작은오빠와 우리 미친 가족들이 그렇게 삶을 들까불러댔는데도 그는 끄떡없었다. 내가 낙관과 비관의 양극단을 초 단위로 오가며 진상을 떨어도, 그러거나 말거나 무던하고 평화로운 게 성민이었다. 우리 사이엔 많은 결핍이 존재했지만, 그 수많은 구멍들을 성민은 타고난 안정감으로 훌륭하게 채웠다. 우리 미친 가족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한 점이 바로 그것이었고 나는 바로 그런 성민을 좋아했다. 나는 성민과 한평생을 함께하리라는 데에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275쪽
삶에는 '사랑한다'와 '사랑하지 않는다' 사이에 아무런 경계가 없어지는 그런 지점이 있었다. 그에게 그곳이 나무가 쓰러진 고속도로였다면, 나에게는 산꼭대기에서 붉은빛이 번져가는 이 산성이었다. 그날 그가 전혜원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흘러갔을 것이다. 내가 오늘 성민에게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어도, 인생은 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흘러갔을 것이다. 시간과 방향의 감각이 없어지는 그런 공간에서는, 인간이 무엇이 부딪쳐 어디로 가든 아무 차이가 없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고속도로를, 또 산성을 지나쳤다. 한번 지나치고 나면, 또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살게 된다. -297쪽
사람들은 보통 작은오빠가 미쳤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 원조는 김덕만 사장이었다. 돈을 잘 버니까 미친병이 크게 두드러져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아빠는 평생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철들 기회가 더 없어서, 미친 증세로 따지자면 작은 오빠의 열 배였다. -310쪽
사람의 마음이란 몸을 덮고 있는 얇은 막을 뚫고 쉽사리 뛰쳐나가는 성질이 있었다. -5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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