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품절


무릇 젊음이란 육체와 정신의 허세이며, 혹은 그 반대로 세상물정 모르고 벌여놓은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미숙함의 상징이 아닌가.-12쪽

자신의 마음을 질책하고 싶을 때는 육체를 질책하는 길이 최상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정리된다. -20쪽

재능 있는 감독이 비참한 입장에 몰리자 반권력적인 포즈를 취하며 당사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조자한 사상 영화를 만들었고, 그런 것들은 이미 영화라고도 할 수 없는 엉터리였다. 대형 영화사를 뛰쳐나오면서까지 만들어야 할 작품이 결코 아닌데도 그들은 그 작품의 광고를 위한 문구가 훨씬 멋지게 느껴질 정도로 구질구질한 영화를 세상에 내놓아 비난을 면치 못했다. 그리하여 지금은 텔레비전의 안방용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해 눈물을 머금거나 저널리즘적 사회정의에 영합하여 먹고살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청춘 시절의 추억이 한층 씁쓸해진다. -101쪽

첫 단편을 쓰기 전에 나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목표로 하는 이미지의 7,80퍼센트에 육박하는 작품은 열두 편 중에 고작해야 두 세 편 정도일 것이라고. 즉 네 편에 한 편꼴로 그런 대로 쓸 만한 작품이 나오면 족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 편만 쓰면 되지 않느냐고들 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렇게는 안 된다. 그 서녀편을 써내기 위해 나머지 여덟, 아홉 편이 필요하다는 것을 요즘에야 깨달았다. -111쪽

완성도가 높은 작품을 줄줄이 엮어내려다 끝내 한 줄도 쓰지 못한 시기가 있었다. 잠자코 기다리다 보면 무슨 수가 생길 것이라고 믿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이거다 싶은 테마가 떠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정작 펜을 쥐고 쓰기 시작하면 뜻한 바의 문장이 나오지 않아 도중에 펜을 던져버리는 일이 많았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끊임없이 쓰는 일이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을 탄생시키는 지름길이었다. 다른 길은 없는 듯했다. 그러니 일단 쓴 작품은 좋건 나쁘건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한 처사였다. -111쪽

일류 고등학교와 일류 대학교를 졸업해본들 그 앞에 어떤 나날이 기다리고 있겠는가. 심심하면 "학생 시절이 그나마 제일 좋았어"란 말을 뱉어내는 샐러리맨 신세가 고작 아닌가.

샐러리맨은 상부에서 떨어지는 명령 때문에 개인적으로 아주 중대한 일마저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지나치게 많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전근 명령을 받았다. 새로 이사한 고장은 실로 한심한 곳이었다. 어린 내가 화가 치밀 정도였다. 자기 마음에 드는 장소에서 살 수도 없다니, 이거야 너무 굴욕적인 입장이지 않은가 싶었다. -144쪽

젊은 사람이결론을 ㄴ린다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기껏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봐야 학교 공부 정도가 아닌가 학교에서 몇 년 공부한 정도로, 만족할 만한 대답이 안 나온다고 해서 왜 인생의 전부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인가. 그런 일은 길고 긴 인생에 있어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에 손에 넣지 못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할 만한 것이 과연 있을 까. 그것을 잃으면 끝장이라고 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 과연 있을까. 있다. 그것도 하나나 둘도 아니라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하나나 둘을 잃었다고 해서, 손에 넣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뭐 그리 대수로운가. -156쪽

신슈에 낚시를 하러 오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인지 유료 낚시터에 가고 싶어한다. 그러고는 낚시터가 복잡하면 오늘은 운이 없다는 둥 투덜대면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돌아간다. 왜 낚시터가 복잡하다고 포기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낚시터 바로 옆에 진짜 곤들매기와 산천어가 어슬렁 헤엄쳐다니는 강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강 낚시가 훨씬 재미있는데도 말이다.

선생이나 부모가 열심히 가르치는 길이 유료 낚시터 같은 길이 아닐까. 그리고 젊은이들은 유료 낚시터에만 물고기가 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은 아닐까. -157쪽

물론 부모나 선생은 자기 자식이나 제자가 안정된 길을 걸어주기를 바란다. 그러고는 입을 모아 '성실이 제일'이라고 떠들어댄다. 절대로 도산하지 않을 대기업이나 관공서에 ㅇ비사하여 아무튼 성실하게몇십 년 일하면 퇴직금도 받고 연금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과연 그런 삶만이 성실한 것일까. 그것만 가지고 자신의 삶을 성실하게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바랐던 안정의 결과가 주위의 눈치만 살피고 하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일도 제대로 못 하게 되어 점차 인간미를 잃어가는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다시 한번 선생의 눈을 보라. 다시 한번 부모의 눈을 보라. 입으로는 거창한 말을 줄줄 내뱉으면서도, 그 표정이라니, 도대체 무언가. 왜 활기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인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산다는 것이 그런 표정의 인간이 되는 것을 뜻하는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확실한 보장이라도 있다면, 이번 인생은 이 정도로 해두고 두번째 세번째 인생을 마음껏 누리자고 느긋한 태도를 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생이란 한 사람에게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159쪽

상사의 통신과에서 텔렉스 오퍼레이터로 일하던 시절의 나는,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어떤 회사 조직이든 그 안에 속해 있는 사람은 삶의 보람이 어쩌니저쩌니 해보아야 결국은 허망한 것이다. 누군가를 위해서 일한다는 점에서 서로가 아무 다를 바 없는 비참한 존재들이다. -172쪽

내가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다. 전직, 돈의 필요성, 자유에 대한 동경, 어느 것 하나 틀리지는 않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닌 듯하다. 그런 이유만으로 그만한 정열을 기울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신이 들렸다든가, 무슨 계시가 있었다든가 하는 말은 너무 거창해서 꺼내기가 부끄럽지만, 당시 내 안에 싹트기 시작한 강렬한 힘은 그런 식으로 펴현하지 않으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청춘의 힘이란 그렇게 감당하기 어렵다. 그래서 먼 훗날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소하더라도 어떤 목적이 생겼을 때, 거기에 끝없이 힘을 쏟아부을 수 있으며,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청춘의 힘이며 동시에 청춘의 위험한 일면인지도 모르겠다. -192쪽

어느 쪽이 타당한 것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나 자신을 거역하며 살고 싶었다. 자연 그대로 살고 싶다든가, 자신을 속이지 ㅇ낳고 살고 싶다는 희망은, 늙어 더이상 움직일 수 없는 할아버지가 되었을 때나 매달릴 법한 말이었다. -220쪽

이십대는 친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절로 보인다. 이십대란, 혼자서 많은 일을 해내기 위한 힘을 체득해야 하는 귀중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득도 해도 안 되는 어중간한 친구를 잔뜩 갖고 있어봐야, 그저 외로움이나 달랠 수 있을 뿐이다. 지리멸렬한 만남을 거듭한다면 자립과 독립으로부터 멀어지고 말 따름이다. -236쪽

무슨 일을 시작하든 우선 고독이라는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강을 건너기 이전에 토해낸 언어는 모두 넋두리이거나 주절거림일 따름이다. 그 강을 건너지 않고 제아무리 거창한 말을 입에 담는다 해도, 무슨 대단한 짓거리를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은 어린애 장난이다. 그 강을 건너면서, 이건 이래서 좋고 저건 저래서 싫다는 가치 평가를 내려선 안 된다. 싫어도 건너야만 한다. 건너편 강기슭을 노려보면서 단숨에 몸을 날리는 수밖에 ㅇ벗다. 그 다음은 강물 속에서 온몸으로 몸부림치면 된다. 그 몸짓은 실로 멋대가리 없다. 강기슭에서 바라보는 인간들은 조소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냥 웃게 내버려둬라. 건너편 기슭에 도달하고 나서 그들에게 웃음으로 되돌려주면 된다.

청춘이란 달콤한 향기에 취해 천국같은 나날을 보내는 젊은이들도 많다. 그들이라고 전혀 고뇌가 없는 것은 아니다.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그 강을 건너려 하지 않는다. 가능하면 평생 건너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건너지 않으면 불필요한 고뇌가 항상 따라다닌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 고뇌의 횟수와 내용은 오히려 나날이 불어난다. -250쪽

젊음에 부여된 그칠 줄 모르는 체력과 한결같은 기력은 놀기에 전념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강을 끝까지 건너라고 있는 것이다.

언제든 그 강을 건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커다란 오산이다. 서른을 넘으면 절대로 건널 수 없다. 건너고 싶어도, 이미 체력이 따라오지 않는다. 그 다음은 변명할 말을 찾으며 늙어가든지, 아니면 얕은 개울물에 발이나 담그고 빠진 척하며 즐기는 도리밖에 없다. -250쪽

...그들은 종종 "우리들은 영화를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나에게서 영화를 빼놓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아요"라고도 말한다. 패기는 충분해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것은 영화 그 자체가 아니다. 영화만들기에 따라다니는 주변적인 것, 예컨대 대학교 기숙사나 축제 같은 들뜬 분위기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기야 이런 지적은 다른 세계에도 적용된다. 문학을 사랑해 마지 않는다고 하는 작자들이 문학을 썩게 하고, 나라를 사랑해 마지않는 자들이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다. -259쪽

흔히 역작이라고 불리는, 몇 년 동안이나 질질 늘여 쓴 연재소설이나, 도중에 다른 소설을 쓰면서 느긋하게 쓴 장편소설을 읽다 보면, 여기저기 균형을 잃은 톤 때문에 작품의 질까지 추락하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러한 불균형이 오히려 바람직한 효과를 빚었다는 예는 거의 없다.

인간의 마음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주변의 사소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는다. 날씨의 맑고 궂음, 바람의 세고 약함 등에 흔들리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엉뚱한 행동을 저지르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소설가에게는 그런 변화가 문장으로 바로 드러난다. 하루나 이틀 정도라면 몰라도, 칠 개월 동안이나 일관된 정신을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읽는 쪽에서는 대여섯 시간이면 삼백매짜리 소설을 독파한다.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일관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 독자에게 중요한 것은 그 소설을 접하고 있는 대여섯 시간이지, 작가가 칠 개월 동안 들인 공력은 애당초 상관없는 일이다. -271쪽

내뱉는 말은 차원이 높은데 그들이 쓰는 글은 한심하리만큼 차원이 낮은,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294쪽

글 솜씨를 유지하고, 그 이상으로 향상시키려면 매일 연습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좀 숙달됐다 싶어 연습을 게을리 하면, 금방 둔해집니다. 머리는 이전과 동일한 속도로 치는데, 손가락이 따라와주지 않는 것이죠.

안목은 쇠퇴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의 소설을 읽고 이러니저러니 비평은 할 수 있어요. 눈이 제 구실을 하고 있으니 손에 별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이제 실컷 놀면서 충전을 했으니, 이쯤에서 소설을 해볼까 하고 생각하고 막상 펜을 쥐고 써보지만 한심한 문장밖에 안 나와요. 안목이 그대로 있으니까 자기 자신의 글이 얼마나 한심한지는 압니다. 아니까 당황하죠. 아연실색합니다. 하지만 자존심이 방해를 합니다. 결국 초보자와 같은 스타트 라인에 설 수가 없습니다. -295쪽

세상 사람들은 소설가의 재능에 대해서, 가령 보통 사람들이 열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나 둘쯤 더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일쑤인데 사실은 그렇지 않아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언급하는 것이지만, 소설가는 오히려 하나나 둘쯔 결여되어 있기가 십상이죠. 성격적으로 불완전한 사람이란 이야기죠. 그 불완전함이 즉 소설을 쓰게 하는 힘인데 정도 차이는 있겠지요. 어중간하면 연애소설을 쓰는 작가가 될 것이고, 설사 정신의 깊은 계곡으로 내려가거나 높은 산으로 올라가는 시도를 하더라도 안이하게 자살이란 결론을 얻는 것으로 끝나겠죠. -314쪽

창조적인 일을 하고 조금이나마 나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려 한다면, 단조롭고 평범한 나날을 반복하는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방탕한 생활 속에서 빼어난 작품이 튀어나온다는 식의 신화를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바보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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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4-04-13 0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있는 작가라서 인용글 찬찬히 읽어보았는데 공감이 가는군요. '소설가' 자리에, 되고 싶은 어떤 것을 넣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책 읽어봐야겠어요.

LAYLA 2014-04-14 19:54   좋아요 0 | URL
요즘 이 작가 에세이가 대중의 관심을 받는것 같더라구요. 이렇게 소설가로서의 각오가 대단한데 에세이로 주목받는다는 게 좀 아이러니하긴 하죠..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