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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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령껏 꾸려나가 겉보기에는 화려해 보이지만, 부족한 것이 많은 세 자매의 옷가지와 살림살이가 조금 남았을 따름이다. 그런데 이모는 염치도 없이 그런 것까지 탐을 내는 것이다. 백지와도 같은 덧없는 외로움과, `알거지가 될 바에는 아주 깨끗한 알거지가 되어주지` 하는 불같은 반항심이 사정없이 요코의 가슴을 태웠다 식혔다 했다.

요코는 남을 비웃으면서, 또한 스스로를 경멸하면서, 정체불명의 커다란 힘에 이끌려 불가사의한 길로 어느 틈에 들어서서 끝내는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했다. 요코가 갈 길을 안내해주는 사람도 없었으며, 다른 올바른 길을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었다. 어쩌다 큰 소리로 불러 세우는 사람이 있다 해도,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를 써서 고리타분한 여인네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런 심정으로 나이를 먹어가는 동안 요코는 물론 몇 번씩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그리고 혼자서 무릎에 묻은 흙을 털어내야만 했다. 그런 생활을 계속하다 스물다섯이 된 지금, 문득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니 요코와 함께 달리던 소녀들은 오래전에 이미 평범한 여자가 되어 까마득히 먼 곳에서 동정하는 듯한, 혹은 경멸하는 듯한 표정으로 요코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요코는 이미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설령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저도 하나님의 뜻인지 뭔지에 따라 제멋대로 사는 여자이니까, 아저씨와는 부딪칠 수밖에 없죠. 그래도 남자는 괜찮아요, 그런 아집이 통하니까. 여자들은 아집을 관철시키려면 기를 써야만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을 따름이죠. 이 모든 것이 전생의 업이라는 거겠지요.

요코는 대부분의 경우 약자의 편을 들었다. 어떤 경우든 강자가 자신의 힘을 휘둘러 약자를 압박하는 것을 보면, 요코는 화가 치밀어 어떻게 해서든 약자를 이기게 해주고 싶었다. 지금 같은 경우 기무라는 단순한 약자일뿐 아니라 처지 또한 비참할 정도로 의지할 데 없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할 정도로 기무라에 대해서는 동정심이 일지 않았다. 젊은, 세련된 외모, 부유한 환경, 뛰어난 재능과 같은 것을 바탕으로 한 남자들의 매력은 사무장 앞에서는 훅 불면 날아가는 먼지처럼 맥을 못 추었다. 이 남자 앞에서는 약한 자는 불쌍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추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약간 떨리는 듯한, 전혀 때 묻지 않은 목소리로 낮고 차분하게 말하는 오카의 모습에는 자연스럽고 기품 있는 외로움이 배어 있었다. 장지문을 흔들며 눈발이 휘몰아치는 문밖의 거친 자연의 풍경과 비교되어 그 모습은 더욱더 도드라져 보였다.

잠시 침묵한 뒤에, 오카는 당혹스러운 듯이 쓸쓸히 혼잣말을 하더니 또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오카는 아무리 쓸쓸해 보이는 때에도 좀처럼 울지 않았다. 그런 점이 그를 더욱 쓸쓸하게 보이게 했다.

요코는 오카의 목소리를 듣자 갑자기 지금까지 자기한테서 빠져나갔던 힘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역경에 처한 여자에게 있어서 어떤 남자든 남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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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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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꿈에서조차 그를 온통 사로잡은 이 감정이 절대적인 열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를 뒤흔들어놓을 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행위였다. 그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그 감정을 감탄, 경외심, 애착 따위의 이름을 덧씌워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미친 듯 날뛰는 절체절명의 열정적 사랑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열정이 지탱하던 긴장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식물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는 자기 고유의 색을 유지하고, 꽃과 줄기가 시들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땅속의 새로운 자양분과 하늘의 새로운 빛이 필요하다. 하물며 인간의 꿈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언뜻 보기에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꿈조차도 현실적인 감각에서 양분을 얻어야 하고,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징표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추억의 잎도, 열매도 메말라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은 대부분 감정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만, 동물은 말을 할 수 없기에 모든 감정 표현을 동공에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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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야상곡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박상진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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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지 지구는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형편없었다. 어느 유명 사진작가의 사진들에서 그곳을 본 적이 있었기에 인간의 비참한 상황에 직면할 준비야 되어 있다고 생각했으나, 사진은 어디까지나 피사체를 정방형에 가둬둔 것이다. 프레임 바깥의 피사체는 언제나 또다른 무엇이다. 게다가 그 피사체는 너무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너무나 많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유럽인은 어떤 식으로든 다 가톨릭교도들이죠. 기독교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어쨌든 실제로는 다 같은 거지요."
그 사람은 마치 음미하든 `실제로는`이란 말을 반복했다. 그의 영어는 매우 우아했다. 여느 대학에서 그러듯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을 두면서 약간 길게 늘여서 접속사들을 발음했다. "프랙티컬리...액츄얼리." 그가 말했다.
"참 희한한 말들입니다. 영국에서 흔하게 들은 말들입니다. 당신네 유럽인들은 이 말을 자주 쓰지요." 그러고는 오랫동안 말을 잊시 않았지만, 그의 말이 끝난 건 아니었다. "저는 그게 비관주의인지 낙관주의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누구든 평생에 한 번쯤 주아리 호텔에서 묵을 일이 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특별히 행복한 모험이겠거니 하고 여기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돌이켜보면, 사실 돌이켜보는 한에서는, 냄새라든가 색깔이라든가, 세면대 밑에 보이는 종을 알 수 없는 곤충과 같이 직접적인 육체적 감각이 어느 정도 여과되고 나면 경험은 모호해져서 한껏 더 나은 이미지로 남게 마련이다. 지나간 현실은 늘 실제로 그랬던 것보다는 나쁘지 않은 법이다. 기억은 가공할 만한 위조자인 것이다. 그럴 의도가 없더라도 왜곡은 거듭 일어난다. 우리의 환상 속에는 여러 호텔이 가득하다. 조지프 콘래드나 서머싯 모의 책들에서, 키플링이나 브롬필드의 소설을 각색한 미국 영화들에서, 우리는 벌써 여러 호텔을 만난 바 있다. 마치 그곳에 가 본 듯 친근하다.

"사실 말이지만 내 취향도 몹시 까다롭습니다. 최상품이 아니면 돈을 안 씁니다." 내 말에 무게감을 싣기 위해 일단 말을 끊었다. 동시에 그에게만 진심을 털어놓는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마치 어떤 영화 속에 들어간 기분이 들었고, 나는 제법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슬픔은 뒤늦게 올 것이었다. 난 그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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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조한 마음 대산세계문학총서 116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이유정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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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선에서 가장 용감했다는 군인들을 개인적으로, 민간인 신분으로 만나보면 영웅이라는 칭호가 어울리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녀의 눈은 마치 커피콩 같았고 그녀가 웃으면 콩 볶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중개인`이라는 직함은 그 속에 온갖 것을 숨길 수 있는 멋진 말이었거든요. 케케스팔바는 그 속에 자신이 더 이상 일개 중개인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재산가이자 사업가라는 사실을 숨긴 것입니다. 그는 겉으로 부자로 보이는 것보다 실질적으로 부자가 되는 것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의학과 윤리는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모든 질병은 그 자체가 무법행위입니다. 자연에 대한 반란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수단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된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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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2-03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정말정말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

transient-guest 2016-02-10 0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정말 좋아하는 작가입니다!!ㅎㅎ 이건 아직 못 읽어봤네요. 발자크 평전을 읽고부터 츠바이크의 책을 한 권씩 읽기 시작했습니다.
 
태엽 감는 새 3 - 새잡이꾼 편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 문학사상사 /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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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이었지만, 나는 난로에 불을 붙이는 일조차 가끔씩 잊었다. 그것이 진짜 추위인지 혹은 내 속에 있는 추위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잘 온도게를 보고 정말로 춥다는 게 납득이 되면 난로에 불을 붙였다. 하지만 난로에 불을 피워 아무리 방을 따뜻하게 해도 체감 온도로 느끼는 추위가 가시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렇게 개미처럼 한눈도 팔지 않고 일을 함으로써 점점 `참다운 자신`에게 가까이 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조차 드는 거에요. 뭐라고 할까요, 제대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자신의 중심에 다가가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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