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여행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정희.남기철 옮김 / 이숲에올빼미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그녀를 처음 본 순간 그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꿈에서조차 그를 온통 사로잡은 이 감정이 절대적인 열정이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를 뒤흔들어놓을 만한 결정적인 계기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감정을 명료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하는 행위였다. 그는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그 감정을 감탄, 경외심, 애착 따위의 이름을 덧씌워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것이 미친 듯 날뛰는 절체절명의 열정적 사랑이라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이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믿었지만, 열정이 지탱하던 긴장감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인간은 추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식물만이 아니라 모든 창조물에는 자기 고유의 색을 유지하고, 꽃과 줄기가 시들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땅속의 새로운 자양분과 하늘의 새로운 빛이 필요하다. 하물며 인간의 꿈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언뜻 보기에 지상의 것이 아닌 듯한 꿈조차도 현실적인 감각에서 양분을 얻어야 하고,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징표의 도움이 필요하다. 만약 그런 것이 없다면 추억의 잎도, 열매도 메말라버리게 마련이다.

인간은 대부분 감정이나 생각을 말로 표현하지만, 동물은 말을 할 수 없기에 모든 감정 표현을 동공에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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