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6
버지니아 울프 지음, 이미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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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에 등장한 그녀 버지니아 울프를 기억한다. 아마도 시인은 <목마와 숙녀>를 쓸 때 울프의 <등대로>를 염두해 두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이어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라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시간 속에서 인간은 스러져가지만 돌맹이 하나를 비롯한 자연들과, 온갖 사물들을 포함한 인간의 창작물들은 오래도록 살아 남아 인간의 통속성을 비웃듯 지긋이 바라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등대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것, 인간의 통속성에 대한 것이 아니였을까, 나름 생각해 본다.

 

등대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내가 알지 못할 어떤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첫 페이지를 열고 나의 기대가 영 엉터리 였다는 것을 알았다. 등대로, 가 의미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심연의 바다를 밝히는 '등대'로 향하는 방향성이였던 것이다.

여섯살의 제임스는 등대에 가고 싶어한다. 언뜻 생각에 등대에 가는 것이 무엇이 그리 어려울까만은 소설 속에 등장하는 등대는 배를 타고 험난한 파도를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곳으로, 어린 소년에게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소년이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잔잔한 파도와 배를 움직여줄 부드러운 바람이 함께 필요한 것인데, 그런 날을 만나기란 쉽지않기 때문에 등대로의 원정이 제임스에게는 이룰수 없는 꿈과도 같은 것이다. 

아버지 램지는 그런 제임스의 바램을 여지없이 깨뜨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그는 사실주의자이며, 과학적 사고를 추구하는 철학자로 어린 아들이 삶을 덧없는 희망으로 덧칠하는 것을 용서치 않는 것이다. 아니, 자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삶의 가혹함을 깨닫기를 더더욱 바랬을 것이다. 램지에게 삶이란 고통의 연속이며, 삶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것이 어린 제임스의 희망을 꺾고 아버지에 대한 마음속 분노를 키우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런 램지도 사실은 그 누구보다 타인으로부터 공감의 마음을 갈구하는 사람이였다는 것이다.

 

반면, 램지 부인은 제임스에게 내일은 날이 맑아 반드시 등대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반복해서 주입하는데, 어린 제임스는 어머니의 말을 마치 천사의 언어라도 되는양 흡족하게 받아들인다. 그럴수록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가고, 어린 제임스는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을 지상 최대의 목표로 삼으며 성장하게 된다. 일찍이 프로이트는 다섯살 무렵의 사내 아이는 아버지를 경쟁 상대로 보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고 했는데, 제임스 역시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제임스에게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한때 지나치고 마는 성장통이 아니였다. 제임스는 사춘기 무렵에도 아버지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계속하게 되며 3부에서 드디어 제임스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에도 아버지에 대한 반감을 버리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

한편 램지부인은 자신의 아들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영향이 미치기를 바라는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자신의 행동이 주변 사람들을 좋은 방향으로 이끈다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은 결국 어떻게 되는 걸까? 사람들은 어떻게 판단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이것과 저것을 더해서 좋아한다고 느끼거나 싫어한다고 결론을 내리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결국 이런 말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44쪽

그러나 나로서는 램지 부인의 그런 태도는 영 못마땅했는데, 세상 이치란 것이 혹은 사람의 일이란 것이 요리 레시피처럼 딱딱 들어맞는 그런 것은 아니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다. 어떻든 그런 램지 부인에게도 어느날 불현듯 죽음이 찾아오고, 죽음은 자못 위대한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보였던 앤드류에게도 아름다운 외모로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프루에게도 예외없이 찾아든다.

 

'당신'과 '나' 그리고 '그녀'가 지나가고 사라진다는 것, 그 무엇도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 그러나 단어들이나 그림은 그렇지 않다는 것. -292쪽

고전이 반드시 좋은 책은 아니며, 청소년기에 고전을 많이 읽는 것은 자칫 허무주의나 냉소주의로 빠질 수 있다라 주장을 펴는 지인을 알고 있다. 그는 고전을 많이 읽다보면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깊어질 뿐만 아니라, 최선의 선택은 자살 뿐이라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 것인데, 나 역시 그의 말에 공감하지만 그렇더라도 살아야 할 힘 역시 고전에서 얻게 되더라고 반론하고 싶다.

생의 무의미, 어떻게 살더라도 결과는 죽음뿐이라는... 그러나 그렇더라도 매번 죽음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 것이 인간일지라도, 우리는 등대를 향해 자신만의 노 젖기를 포기하지 않을 이유를 책 속에서 찾을 수 있다라고 나는 믿는다.

 

버지니아 울프의 작품은 <등대로>가 처음이다. <등대로>는 울프의 다른 작품들과도 다른 기법으로 씌인 소설이라는데, 등장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쫓는 것이 바로 그것으로, 책을 읽다보면 자칫 내 의식이 흐려지는 경우가 없지 않아 읽기 쉬운 소설은 아니였다. 그러나 부드러운 바람에 흔들리는 커튼의 일렁임을 따라가듯 펼쳐진 단어들의 나열을 쫓아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말 속에 녹아있는 관계와 의미를 유추하고 상상하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2부, '시간이 흐르다'는 1차세계대전 기간 동안 황폐해지는 램지가족의 별장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마치 서사시를 읽는 듯한 즐거움을 주었다. 마치 집이 생각을 하듯 시간이 흐르는 과정이 물흐르듯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또한 이어지는 3부에서 제임스가 어린시절의 로망이였던 등대원정을 아버지의 권위에 이끌려 반강제적으로 찾아가는 과정 또한 흥미로웠는데, 이 과정에서 소년이 아버지를 넘어서 진정한 성인으로 성장하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가만, 그럼 <등대로>는 성장 소설인 것인가? 음, 죽음 또한 성장의 한 과정이라고 본다면 <등대로>를 성장 소설로 규정한데도 그렇게 틀린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다.

시인 박인환은 '목마와 숙녀'의 종결 부분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생은 외롭지도 않고 그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죽음은, 성장의 한 과정이라는 내 생각이 꽤 그럴듯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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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6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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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래전 <페스트>를 읽겠다고 도전했다가 페스트 발병 과정과 도시의 폐쇄에 따른 불안심리 묘사에 지루해진 나는 그만 카뮈는 내게 너무 부조리한 작가라고 생각했었다. 그후로부터 다시 카뮈를 읽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내게있어 책이란 학문이 아닌 재미, 혹은 즐거움이기 때문에 책을 읽으며 골똘해진 나머지 머리가 아파지고, 줄곧 잠이 쏟아지는 그런 경험은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오디오 북으로 출퇴근길에 <이방인>을 듣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읽기는 벅차지만, 오며가며 듣는 것은 그다지 힘들지 않겠다란 생각으로 우연이 듣기 시작한 것인데, 들으면서 줄곧 <이방인>이 맞는지 계속 확인했다. 글자가 아닌 소리이기 때문인지 지루하기 보다는 장면들이 눈앞에 너무도 선명히 그려지면서 장례식 분위기, 바닷가의 풍경, 해질 무렵의 도시 등등의 묘사가 무척 아름다웠다. 귀로 듣기 때문에 그렇게 느낀 것인지 당장 확인하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 없어 퇴근 후 곧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아니, 어째서 카뮈를 지루의 대명사쯤으로 생각했던 거지? 확실히 <페스트>에 비해서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지루하기보다는 장면의 묘사가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첫 장면은 양로원에 있는 어머니의 사망 전보로 부터 시작된다.

 

뫼르소는 딱 내 스타일이다. 우울한 기질, 감정이 결핍되어 있는 것 같은 냉담함, 그러면서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끈질긴 관찰력, 그리고 과장하지 않는 언어 스타일까지. 다만 감정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는 것만 마음에 걸렸다. 그는 마치 흔히 말하는 사회 부적응자, 더 악랄하게는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있는 것 아닐까 생각될 만큼 감정에 변화가 없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지 않았고, 연인 마리와의 교감을 사랑이라고 여기지도 않는 것 같았다. 확실한 자기 주장 대신 이래도 저래도 별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는 뫼르소라니.

그런 뫼르소의 성격 탓인지, 모든 일들이 우연처럼 일어난다. 살인까지도 그랬는데, 의도하지 않은 탓인지 뫼르소는 살인 후에도 특별히 죄책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는데, 나로서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레몽의 증언처럼 뫼르소와 레몽간의 우정도 우연이었다. 레몽의 행동에 대한 호의적인 증언도 우연이었으며, 따라서 살인도 우연이였다. 다만 뫼르소의 사회 통념에 대한 거부만은 우연이 아닌 타고난 기질로서 그는 조작된 감정, 보여지는 표면적 순응을 거부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는 덜 사회화된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암묵적으로 약속되어 있는 사회적 약속들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어쨌든 분명히 살인자인데, 어쩐지 재판관정에서는 뫼르소가 시스템으로 부터 불이익을 받고 있는 피해자처럼 여겨졌다. 마치 남들이 원하는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는 순교자처럼 여겨진 것이다. 

평화주의자에 대해 생각해 본다. 진정 평화를 사랑하는 이라면 무리에 스며들듯 동조하는 사람일까, 무리에서 튕겨질 망정 평화적이지 않은 모든 관념, 통념을 거부하는 사람일까? 타인의 감정에 스미지 못했고, 거짓으로 감정을 포장할 줄 몰랐으며, 분위기에 맞는 말 한마디 하는 것조차 거부했던 뫼르소는 평화주의자 였을까, 성격 파탄자 였을까?

 

카뮈는 <이방인>을 통해 재판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회고했다. 뫼르소는 카뮈의 대리인이 되어 이야기 한다.

이 재판은 나의 것입니다. 나는 피고인 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나를 빼고 모든 일이 진행되는 것입니까.

카뮈는 정작 자신의 거취를 정해줄 재판에서 피고인은 소외되는 불합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카뮈가 말하고자 한 '부조리'가 아니였을까 생각한다.

<이방인>을 너무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페스트>에 다시 도전할 용기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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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3-24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방인을 읽고 싶어 돌아다니다가 비의딸님의 서평을 보내요 ㅎ 뫼르소는 저에게도 참으로 닮고 싶은 인물입니다 더욱이 카뮈라는 작가는 더 닮고 싶은 인물이구요
뫼르소를 20대 초반에는 이해를 못 했습니다 유교 문화에 쩔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뭐 이런 쌍놈의 자식이 있어 하면서 화를 냈죠
30대 보는 뫼르소는 좀 다르더라구요 고독한 자 끝없이 고독한 자라고 느껴지더라구요
뫼르소와 같은 인물은 특이한 인간은 아니라고도 느꼈구요.
타인에 대한 폭력 마치 뫼르소가 그냥 총을 쐈듯이 제가 보는 인간들은 물리적 총은 안 쏘지만 정신적인 총들은 무지 쏴댑니다.
타인을 정신적으로 죽이는 것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 하는 자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 울지 못 한 것은 그가 어머니에게 배웠어야 할 인간의 감각이랄까 이런 것들을 배우지도 느끼지도 못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 눈 앞에 펼쳐진 인간들 그리고 저 자신도 자신들의 생존만을 위해서 살아가지 타인의 삶을 위해 진정 울어보고 가슴아파 하는 것은 뫼르소 처럼 멈춰지고 망가진 것은 아닐지?
암튼 저에게 뫼르소는 참 흥미로워요.

비의딸 2014-03-29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에게도 뫼르소는 너무 매력적입니다. 몸이 안좋아 요즘 통 책을 못 읽고 있어요... 답변이 많이 늦었네요....^^

루쉰P 2014-04-18 11:25   좋아요 0 | URL
아고 몸이 많이 안 좋으셨군요. -..-
지금은 좀 어떠신 지 궁금하네요...
체력이 좋아야 책도 읽는다는 건 맞는 말이에요.
그나저나 이방인은 새로운 번역으로 새로 나왔다고 하네요. ㅎ
얼른 나으셔서 새로운 번역본도 꼭 보시고, 페스트도 꼭 읽으세요. ㅋ
카뮈는 평전도 읽으며 작가 자체가 굉장히 매력적이라 느낀 사람이에요. ㅎ
뭐랄까 간지난다고 할까요? ㅎ

[그장소] 2014-04-04 1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뫼르소..에 공감하는 사람보니 좋아요.
저는 이방인" 작년..과 제작년을 함께 했어요.아..카뮈와 함께한거죠.
님도..저만큼..비를 좋아하시나봐요.
아프지마시길.

비의딸 2014-04-07 16:27   좋아요 0 | URL
아, 님께서는 <페스트>도 읽으셨겠네요. 저에게는 숙제입니다. 일단 다음 번 카뮈는 <전락>으로 정하고있어요.
님도 저만큼 비를 좋아하시는군요. 반갑습니다. ^^; 그리고 걱정 감사합니다.
 
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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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첫 장의 예측이 무엇이건, 마지막 장에 배신당한다.

이 소설을 표현해 줄 이보다 더 정확한 한 줄은 없다. 마지막 장을 덮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배신. 소설을 덮으며 느낀 것이 바로 배신감이였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 중 누군가에게 반드시 감정이입하기 마련이다.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으며 나는 겐타라는 소년의 감정에 공감하며 빠질 수 있었는데, 그가 밝고 쾌활하면서 낙천적인 인물이라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평범한 열 세살의 소년이기 때문이었다. 겐타는 나서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그 또래의 욕망의 표현이었다. 또한 그는 우정을 소중히 해 정의롭게 행동할 줄 아는 반면 열세살 소년답게 비겁한 면도 있어 등장인물 중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소년으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쉽게 겐타에게 마음을 열어줄 수 있었는데,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고나자 바로 그 겐타에게 배신을 당한 것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중학교 2학년이라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제 한몸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아이라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든 평범한 아이들이 다 그럴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제 한 몸만 사리는 것은 겐타가 미성숙한 중학교 2학년 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나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인간은 제 한몸, 혹은 제 가족만 생각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몹시 평범한 엄마들처럼. 그러나 그녀들이 제 새끼만 위했다고 그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으랴.

 

배가 침몰할 때 가장 먼저 달아나는 사람은 되지 말래. - 243쪽

그런가 하면 에이스케는 영웅심에 도취된 소년이였는데, 그것도 얼마든지 그 나이 또래의 소년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로, 모든 불이익을 혼자 감당하면서 지구라도 구하는 양 소년은 의기 양양해지는 것이다. 에이스케는 이혼한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소년이었지만, 무슨일에나 아들을 믿어주는 든든한 엄마와 유대관계가 깊다. 에이스케의 엄마 유리는 에이스케에게 배가 침몰할 때 가장 먼저 달아나는 사람은 되지 말라며,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하라고 가르친다. 때문에 그는 어린나이부터 과도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영웅심리를 합당화 할 수 있었는다. 그런 에이스케의 엄마 유리도 위기가 닥치자 제 새끼만 챙기고 싶어하는 어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나는 과연 아이에게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달아나라고 가르친 부모는 아니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방 소도시의 중학교 교정에서 한 아이가 추락사 한다. 아이가 떨어진 곳은 이층 높이의 지붕으로 애초에 자살할 목적으로 추락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와중에 네명의 소년이 추락사한 소년인 나구라를 괴롭혔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아이들은 체포되거나 아동 상담소에 맡겨진 채로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그날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답을 반복하고, 그 밖의 아이들 역시도 나구라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함묵한다. 과연 네 소년들은 친구를 살해하거나 혹은 방조했을까? 네 소년들에게 나구라는 친구이기나 했을까? 아니 그밖의 모든 아이들에게 나구라는 친구였을까?

 

소설은 주로 주모자로 몰린 에이스케와 겐타의 엄마와 에이스케에게 관심을 갖고 늘 지켜보았던 소녀 안도 도모미의 입장에서 씌였다. 겐타나 에이스케의 엄마는 물론 자기 자식에게는 죄가 없으며, 친구들에게 휩쓸렸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지만 도모미 외의 다른 아이들도 겐타나 에이스케에게는 잘못이 없다라는 입장이다. 오히려 도모미 외의 아이들은 죽은 나구라가 왕따가 된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식의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나구라는 유명 포목점의 외아들로 어려서부터 도련님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 때문에 상대방의 선의나 배려에 고마움을 표할 줄 모를 정도로 자기만 아는 경향이 있다. 그렇더라도 나구라만큼 외로운 아이가 있을까 싶을만큼 철저하게 외로운 아이였다. 아마 그대로 성인이 되었다해도 올바른 인성의 성인이 되진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번쯤은 나구라의 시점으로 옮겨와 책이 쓰였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부모들의 눈에는 제자식만 보이기 마련이다. 가해자의 부모이건 피해자의 부모이건 그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일 텐데, 당장 제 자식에게 불행이 닥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인 걸까. 피해자의 엄마는 사실을 알고싶다라며 학교를 압박하지만, 실제 그녀가 듣고싶은 말은 죽은 소년의 억울함에 대한 것이라던가, 동정의 말이 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점점 억측을 하며 학교와 아이들을 몰아부치고, 가해자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는 잘못이 없고, 분명 친구들한테 휩쓸렸을 뿐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나 역시 열세살의 아이를 둔 입장에서 양쪽 모두의 마음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지만, 피해자의 엄마 입장이 되고보면 가해자 쪽의 의견이나 주장이 염치없게 들렸고, 반대로 가해자 엄마의 입장이 되면 아무리 아이가 죽었다지만 정도가 심한 억측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나 어떻게 말해도 죽은 아이는 살아돌아오지 못하고, 그렇다면 억울할지라도 아이를 잃은 엄마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배려해야 하는게 맞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네 아이가 중학생들의 축제인 운동대회에 출전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 엄마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자숙의 의미에서 솔선해야 했을 것이다. 나구라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들이 나구라를 괴롭혔던 것은 그들도 인정한 사실이였으니까.

 

왕따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기 마련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조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무죄이지만, 본 것을 못 본 것으로 여기며 가해를 부추긴다는데서는 틀림없는 유죄다. 또한 아이들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모르는 척 넘기는 학교와 가해 학생의 부모들 역시 유죄이다. 물론 피해자의 부모까지도 포함해서.

 

나는 좋은 부모였을까? -266쪽

아들을 잃은 나구라 히로코의 자책에 목 메이지 않을 엄마가 있을까.

나는 좋은 부모일까? 나는 아이에게 배가 침몰 할 때 가장 먼저 도망치는 사람이 되라고 은연중에 가르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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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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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가 욕을 먹으면서도 시청률을 높이는데 성공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어떤 드라마라도 결말이 뻔한 내용은 인기를 끌 수 없을테고, 그러자면 역시 기대하지 못했거나, 기대했더라도 설마 하는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뒷통수를 치거나 혹은 남모르게 속에 묵혀 두었던 비뚤어진 바램을 눈앞에 펼쳐보여 시청자로하여금 어떤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막장 드라마라도 결말은 정해져 있다. 결혼해서 잘 살거나, 이혼하거나, 그도 아니면 죽거나.

그런 의미에서 <면도날>은 결말이 없다. 사실 모든 소설, 모든 드라마의 결말이 없는 것이 맞지 않은가. 인생은 계속되고, 주인공이 죽더라도 그 다음 이야기는 계속 될터이니까. 그렇다고 <면도날>이 막장 드라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어떤 결말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면도날>에서는 그다지 기대할 만한 결말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래리는 전쟁 중 동료의 죽음으로 충격을받고 존재와 삶, 선과 악, 그리고 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런 래리의 고민을 바라보며 얼키고설키는 주변인물들의 이야기가 소설의 줄기이다. 그속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배신하고, 미워하며, 자신의 욕망을 쫓아 동분서주한다. 

인생도 그렇다. '나'라는 주인공이 있고, 그외 나를 둘러싼 인물들의 삶이 있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의 바램이 있고, 각자 자신의 바램을 바라보며 달리는 것이 삶이다. 누군가는 달리는 대신 걸을수도, 멈출 수도 있을테고 말이다.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84쪽

<면도날>의 등장인물들은 결국 원하는 바를 얻었다. 그것이 결말이라면 결말 일 수 있겠는데, 서머싯 몸은 모두가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이는 일종의 성공담이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떤다. 일반적 의미의 성공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좀 의외스러웠지만, 오히려 진정한 성공이란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 아니겠냐는 더무도 당연한 생각이 오히려 새로웠다.

어쨌든 래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닫음을, 이사벨은 빈곤한 영혼을 치장해 줄 돈을, 그레이는 자신을 더욱 남자답게 여기게 할 일을, 소피는 영혼의 안식인 죽음을, 수잔은 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을 얻게된다. 

 

평생 상류사회를 동경해 일류 것이 아니면 늘 거만하게 굴던 속물 엘리엇의 평범한 죽음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도 결말에는 역시 '죽음'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 하나 죽는데서 끝나지 않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죽으면 어떻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기에 죽음은 영원히 위안일 수 밖에 없다. 

엘리엇이 죽으면서도 끝까지 놓지 못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그가 평생 두려워했던 것은 사교계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것이였는데, 욕망의 근원에는 바로 '따돌림'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일로부터 따돌림 당하지 않기위해 동분서주하는 인간군상들이라니. 그대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그 다음으론 예술을 사랑했노라.

삶의 불에 두 손을 녹였노라.

불길이 꺼지려 하니, 나는 이제 떠 준비가 되었도다.

-334쪽, 영국작가 랜더의 글.

한때는 시를 사랑하고 시류에 따르는 것을 시시하게 여겼던, 그럼에도 가족의 행복만큼은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던 소피는 줄곧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상처뿐인 인생이 측은해서 가슴이 아팠다. 그랬던 만큼 이사벨의 냉혹한 이기가 싫었다. 그녀는 래리를 사랑했다고 절규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집착을 한 것이다. 모래가 흘러내리듯 자신의 손아귀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래리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소설 끝까지 미운 인물도 드물었다싶도록 줄곧 이사벨이 망하기를, 무엇보다 그녀가 좋아하는 돈으로부터 멸시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기애가 깊은 이와같은 인물들은 결코 망하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보다. 권선징악을 권하는 소설은 시시하지만, 이처럼 이기적인 인물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역겹다.

 

소설에서도 역시 작가이며 화자로 등장하는 몸 선생은 무엇을 얻었을까. 그는 그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자조적인 만족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 싶을까. 나도 엘리엇처럼 마지막 순간에는 누군가를 욕하며 죽게 될까. 다 이루었다라고 미소짓게 될까.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어야 할까. 적어도 이사벨처럼 빈곤한 영혼으로 세상을 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소피처럼 날마다 파멸을 향해 달리고 싶지도 않다. 물론 래리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할 수 있는 나이도 이미 지났으니, 나는 그저 책을 읽는 무기수의 삶을 계속할 수 밖에 없겠다 생각한다. 그것은 말라붙어 쩍쩍 갈라지는 메마른 영혼에 단비를 뿌리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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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평점 :
품절


과거,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여성은 주체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 작용하기 보다 남자의 보조적인 역할, 혹은 마스코트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여성도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것이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시대가 되면서 오늘날 여자들의 사회적 위상은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은연중에 사람들은 '여성스럽다' 라는 말로 압축된 순종적이고 다소곳한 여성상을 추구하기도 한다. 때문에 드라마나 유행가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자의식 강한 여자를 '나쁜 여자'라 칭하며 숭배하고 노래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 이 책에는 제대로 나쁜 여자가 등장한다. 아리시마 다케오가 <어떤 여자>를 쓴 때는 1900년 대로, 그 시대의 여성은 성적 욕망이 없다거나, 여성은 그저 남성의 부속물 정도로 여겨지던 그런 때 였다. 때문에 한번 이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그러고도 새로운 결혼을 위해 약혼자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사회적 도덕규범에 맞지않는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는 나쁜 여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녀가 나쁜 이유는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다.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되, 자신만의 본능과 감정을 존중할 뿐이고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으로 인해 타인이 받게 되는 불이익이나 고통에는 묘하게도 불감증을 보이기에 나쁜 여자인 것이다.

 

<어떤 여자>는 실화를 토대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사건으로 1902년에 일본이 떠들썩했다고 하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런 개인적인 일을 스캔들로 삼으며 민감했던 것인가 보다. 해설자는 아리시마 다케오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안나의 폭풍우와도 같은 삶에의 강렬한 의지에 매혹되어 <나쁜 여자>를 쓰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을 내놓았다.

 

요코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 이 일만으로 그녀를 지탄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되 모든 중심에 자신만을 두었기 때문에 약혼자나, 상대 남자의 아내 등의 고통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비뚤어진 것은 자신의 잘못이기보다는 자신의 천성이 그렇다거나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어머니나 친척들 등을 탓하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식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뻔뻔하기 때문에 나쁜 여자인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본능이 이성을 능가하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뻔뻔함에는 매번 혀를 내둘렀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아남는 데 기발한 촉수를 갖고 있는 그녀의 본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시마는 요코를 시대를 앞서가는 급진적인 한 여성으로 소개했다. 여성에게는 성적 욕망이 없다는 당시의 통념이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아리시마는 요코의 성적 욕망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요코는 도덕성만을 강조하고 형식에만 사로잡힌 기독교에 반발하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으며 그렇기에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요코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약혼자 기무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으면서 기무라로부터 필요한 것을 취하는 뻔뻔함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코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한편으로 그에게 버림받게 될 경우 약혼자에게 되돌아가려는 속내를 끝끝내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솔직한 여자라고는 하지만 남자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여자, 자신의 아이와 동생의 목숨까지도 자기를 위해 제물로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생각했던,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에 사로잡힌 요코는 영민한듯 굴지만 실제로는 몹시 아둔한 여자다.

 

일여년의 애정의 도피 행각에 대한 끝은 권선징악의 권고같은 고리타분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20세기의 나쁜여자 요코는 21세기의 내가 보기에도 여전히 나쁘다. 단지 그녀를 나쁘게 여기는 이유가 다를 뿐이다. 어쩌면 나도 구시대적 여성관에 사로잡힌 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신여성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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