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거리에서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첫 장의 예측이 무엇이건, 마지막 장에 배신당한다.

이 소설을 표현해 줄 이보다 더 정확한 한 줄은 없다. 마지막 장을 덮고 소름이 오소소 돋는 것 같았다.

배신. 소설을 덮으며 느낀 것이 바로 배신감이였다.

독자는 소설을 읽으며 등장인물 중 누군가에게 반드시 감정이입하기 마련이다. <침묵의 거리에서>를 읽으며 나는 겐타라는 소년의 감정에 공감하며 빠질 수 있었는데, 그가 밝고 쾌활하면서 낙천적인 인물이라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평범한 열 세살의 소년이기 때문이었다. 겐타는 나서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고 싶다는 지극히 정상적인 그 또래의 욕망의 표현이었다. 또한 그는 우정을 소중히 해 정의롭게 행동할 줄 아는 반면 열세살 소년답게 비겁한 면도 있어 등장인물 중 그 누구보다도 평범한 소년으로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쉽게 겐타에게 마음을 열어줄 수 있었는데, 소설을 마지막까지 읽고나자 바로 그 겐타에게 배신을 당한 것같은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미성숙한 중학교 2학년이라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제 한몸 밖에는 생각할 줄 모르는 지극히 이기적인 아이라는 것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든 평범한 아이들이 다 그럴까.

그러나 생각해보면 제 한 몸만 사리는 것은 겐타가 미성숙한 중학교 2학년 생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구나 위기의 순간이 닥치면 인간은 제 한몸, 혹은 제 가족만 생각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몹시 평범한 엄마들처럼. 그러나 그녀들이 제 새끼만 위했다고 그 누가 손가락질 할 수 있으랴.

 

배가 침몰할 때 가장 먼저 달아나는 사람은 되지 말래. - 243쪽

그런가 하면 에이스케는 영웅심에 도취된 소년이였는데, 그것도 얼마든지 그 나이 또래의 소년에게는 있을 수 있는 일로, 모든 불이익을 혼자 감당하면서 지구라도 구하는 양 소년은 의기 양양해지는 것이다. 에이스케는 이혼한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가는 소년이었지만, 무슨일에나 아들을 믿어주는 든든한 엄마와 유대관계가 깊다. 에이스케의 엄마 유리는 에이스케에게 배가 침몰할 때 가장 먼저 달아나는 사람은 되지 말라며,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하라고 가르친다. 때문에 그는 어린나이부터 과도한 책임감으로 자신의 영웅심리를 합당화 할 수 있었는다. 그런 에이스케의 엄마 유리도 위기가 닥치자 제 새끼만 챙기고 싶어하는 어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에 실망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나는 과연 아이에게 위기 상황에서 가장 먼저 달아나라고 가르친 부모는 아니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지방 소도시의 중학교 교정에서 한 아이가 추락사 한다. 아이가 떨어진 곳은 이층 높이의 지붕으로 애초에 자살할 목적으로 추락했을 가능성은 없다. 그와중에 네명의 소년이 추락사한 소년인 나구라를 괴롭혔다는 정황이 포착되고, 아이들은 체포되거나 아동 상담소에 맡겨진 채로 조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두 그날의 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답을 반복하고, 그 밖의 아이들 역시도 나구라에 관한 일이라면 모두 함묵한다. 과연 네 소년들은 친구를 살해하거나 혹은 방조했을까? 네 소년들에게 나구라는 친구이기나 했을까? 아니 그밖의 모든 아이들에게 나구라는 친구였을까?

 

소설은 주로 주모자로 몰린 에이스케와 겐타의 엄마와 에이스케에게 관심을 갖고 늘 지켜보았던 소녀 안도 도모미의 입장에서 씌였다. 겐타나 에이스케의 엄마는 물론 자기 자식에게는 죄가 없으며, 친구들에게 휩쓸렸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지만 도모미 외의 다른 아이들도 겐타나 에이스케에게는 잘못이 없다라는 입장이다. 오히려 도모미 외의 아이들은 죽은 나구라가 왕따가 된 것은 자업자득이라는 식의 의견을 보이기도 한다. 나구라는 유명 포목점의 외아들로 어려서부터 도련님 대접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 때문에 상대방의 선의나 배려에 고마움을 표할 줄 모를 정도로 자기만 아는 경향이 있다. 그렇더라도 나구라만큼 외로운 아이가 있을까 싶을만큼 철저하게 외로운 아이였다. 아마 그대로 성인이 되었다해도 올바른 인성의 성인이 되진 못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번쯤은 나구라의 시점으로 옮겨와 책이 쓰였어도 좋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부모들의 눈에는 제자식만 보이기 마련이다. 가해자의 부모이건 피해자의 부모이건 그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일 텐데, 당장 제 자식에게 불행이 닥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 인 걸까. 피해자의 엄마는 사실을 알고싶다라며 학교를 압박하지만, 실제 그녀가 듣고싶은 말은 죽은 소년의 억울함에 대한 것이라던가, 동정의 말이 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녀는 점점 억측을 하며 학교와 아이들을 몰아부치고, 가해자의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는 잘못이 없고, 분명 친구들한테 휩쓸렸을 뿐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나 역시 열세살의 아이를 둔 입장에서 양쪽 모두의 마음을 대충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지만, 피해자의 엄마 입장이 되고보면 가해자 쪽의 의견이나 주장이 염치없게 들렸고, 반대로 가해자 엄마의 입장이 되면 아무리 아이가 죽었다지만 정도가 심한 억측을 부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나 어떻게 말해도 죽은 아이는 살아돌아오지 못하고, 그렇다면 억울할지라도 아이를 잃은 엄마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더 배려해야 하는게 맞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네 아이가 중학생들의 축제인 운동대회에 출전하지 않는 것은 피해자 엄마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자숙의 의미에서 솔선해야 했을 것이다. 나구라의 죽음에 직접적인 관여를 하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들이 나구라를 괴롭혔던 것은 그들도 인정한 사실이였으니까.

 

왕따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기 마련이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조자가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피해자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무죄이지만, 본 것을 못 본 것으로 여기며 가해를 부추긴다는데서는 틀림없는 유죄다. 또한 아이들의 문제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모르는 척 넘기는 학교와 가해 학생의 부모들 역시 유죄이다. 물론 피해자의 부모까지도 포함해서.

 

나는 좋은 부모였을까? -266쪽

아들을 잃은 나구라 히로코의 자책에 목 메이지 않을 엄마가 있을까.

나는 좋은 부모일까? 나는 아이에게 배가 침몰 할 때 가장 먼저 도망치는 사람이 되라고 은연중에 가르치지는 않았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