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 - 미국이 쓴 착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벗기다
노엄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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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 입니다. -영화 변호인 중에서

 

변호인 역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친 면이 없지않다는 평가를 받는 이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이 곧 국가라는 말은 너무도 지당해서 오히려 불경스럽게 여겨질 지경이다. 노무현 정부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은 2009년 6월 9일,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비서실장이 기억하는 노무현에 대해 묻자, '노 전 대통령을 비주류라 하지만 사실 이땅의 진정한 주류는 서민이 아닌가. 진정한 주류에게 주류의 몫을 돌려주고 싶어했던 대통령으로 기억하노라' 라고 말했다.

노무현, 그는 물론 완벽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대통령이 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노란 풍선을 흔들며 그의 청와대 입성을 마르고 닳도록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을 위해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만이라도 서민의 입장에 서주었던 대통령이 우리의 역사에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는 어쨌든 마지막까지도 너무나 처절하게 서민스럽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의 불행이 바로 그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주류와 비주류의 길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절대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말이다.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를 읽으며,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이 국민과 주류에 관한 것이였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국민을 100으로 보고 비주류와 주류를 80과 10, 더 극단적으로는 99와 1로 나누곤 할 때, 과연 어느 쪽이 주류인가. 국민의 대다수가 주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주류'에 관한 설명을 이렇게 하고 있다. '조직이나 단체 따위의 내부에서 다수파를 이르는 말.'

이 주류에 관한 헷갈림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은 아닌데, 우리에게는 자못 민주주의의 원조격으로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90퍼센트의 국민은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국민의 80%가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정부가 국민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소수의 거대 이익집단에 의해 운영된다고 생각하고, 무려 94%는 정부가 국민의 의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 시기에, 어느 당도 국민 여론을 반영하지 않는 듯 하다. -117쪽

 

한 나라가 나아갈 바를 결정하는 것은 주류일텐데, 미국이든 한국이든 그 주류는 어쨌든 국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일까.

 

이 책은 촘스키가 2007년 부터 2011까지  <뉴욕 타임즈> 신디케이트에 기고한 칼럼을 묶은 것으로 <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에 이은 두번째 칼럼집이다. 이 책의 52개 칼럼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쓴 전쟁광의 질주'와 '속고 속이는 진실 게임:미국에 민주주의는 없다', '세계 최강대국 타이틀전'라는 소제목 아래에 나뉘어 실렸다.

러시아 유대인 이민2세인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며, 인지과학 혁명의 주역이다. 또한 그는 약자편에 서서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일을 팔순을 넘긴 현재에도 멈추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노엄 촘스키의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제국주의에 관한 비판서인 것이다.

촘스키는 기본적으로 미국을 범세계적인 패권국이라 보기 때문에 그의 글은 미국내의 주류 언론에게는 거부 당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국경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고, 이 책 역시 그 중 하나로, 2007년에서 2011년 사이에 있었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들로 미국이 직접적으로 관여된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중동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전쟁들과, 변화와 희망을 내건 오바마의 당선, 그리고 2009년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 승승장구하는 중국의 오늘과 미래, 미국의 영향력으로 부터 점차로 벗어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미국의 강력한 우방이 아닌 까닭에 분할되고 찢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고립과 함께 영토 확장에 대해 공공연하게 들어나는 이스라엘의 야욕, 석유자원과 세계패권을 둘러싼 미국의 제국주의적 음모, 금융위기를 불러왔지만 정작 책임은 서민들에게 지우고 이제 다시 자신들의 배를 불리우며 돈잔치를 벌이고 있는 금융재벌들을 위한 금융 자유화, 정부를 지배하는 까닭에 정부로 부터 보호받고 보조금까지 받으며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세계민을 이용하는 기업들의 전략인 자유무역협정, 그리고 2011년 10월 보스턴에서 일어난 풀뿌리 운동 '점령하라'에 이르기까지, 노엄 촘스키는 이 모든 사건들에서 비판적 시각을 늦추지 않는다.

'인스티튜트 프로페서'. 즉 독립적인 학문기관으로 대우받는 교수인 촘스키는 그야말로 1%의 주류 지식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권력의 불의를 향한 날선 비판과 행동하는 민중 지식인으로서의 모든 활동을 멈추지 않는 덕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촘스키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참여를 게을리하지 말고, 또한 행동하라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미국인이며 유대인이기도 한 그는 가자지구로 향하는 구호선 '자유선단'을 납치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를 스스럼없이 벌이는 이스라엘과 이를 묵인하며 어쩌면 지지하기까지 하는 듯한 미국을 불량국가와 그 후원국이라 칭하며 비꼰다. 또한 미국이 세계에 행동하는 방식은 그들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무시하며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타국가들에서 쿠테타를 조장하기도 하고, 경제 제재를 가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이를 모두 프로파간다(심리공작용으로 선전되는 메세지, 일명 흑색선전)로 무마한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자본이 국경을 초월해 부를 축적하는데만 혈안을 올리는 반면 촘스키는 국경을 초월해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느냐, 모두를 생각하느냐의 차이는 이토록이나 엄청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 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주류'라는 것이 어느쪽이여야 할 지는 굳이 힘들여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모든 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 경제의 흐름은 제조산업에서 점차로 금융 중심으로 옮아갔고, 최고경영자와 금융 대표같은 사람들의 부는 점차로 더 증가했으며, 부를 거머쥔 그들은 정치조차도 자신들의 부를 늘리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에 반해 국민 대다수는 실업과 빚의 굴레를 헤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90%가 없다면 나머지 10%도 없을 것인데, 주류의(다수의) 국민들은 어째서 10%를 용인하는 것일까. 또 소수의 그들은 다수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상상하는 것일까.

 

미국은 실제적으로 일당 체제이다. 즉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파벌로 나뉜 기업 정당 밖에 없다. (중간생략) 유권자들은 양 정당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지난 수세기 경험했듯이 진보적인 법안과 사회복지는 위에서 내려준 선물이 아니라 민중 투쟁을 통해 쟁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민중 투쟁은 성공과 좌절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투쟁은 투표소에서부터 노동현장까지, 진정으로 민의를 반영하는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4년에 한번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114쪽

 

중동, 아프리카, 남미에 이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제주의 해군기지 등 세계 곳곳에서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는 미국인들에 관한 촘스키의 증언을 보면서 정말 못견디게 화가났다.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개탄을 멈출 수가 없는데,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 미국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종 '악'을 뻔뻔하게 행하곤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약한자들의 신은 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까. 혹시 신도 '편애'라는 것을 하는 존재인 것이지 엉뚱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촘스키는 이 모든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상황이 바뀌면 주류조차도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때는 국민여론이 정부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 또한 세계의 공존을 위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재 미국의 주류들은 미국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 함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또한 미국민들은 자국의 모든 범죄행위를 옹호하지 않고,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2011년 보스턴의 '점령하라'와 같은 풀뿌리 운동이 도처에서 끈질기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역시 자본은 초국적으로 거대해져 가고 있고, 국민들은 점차로 더 궁핍해져가고 있는 이 때에 북한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세워 미국의 속국을 자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말이다. 우리 역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애국'이라는 프로파간다에 휘둘리며, 정작 자신들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소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것처럼 과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곧 국가인가. 대다수 국민의 의견은 소외되고 무시되며, 정부에 반하는 개인에 대해서는 음으로 양으로 사찰과 제재를 가하는 정부 아래의 국민들이 정말 국가인가.

촘스키는 앉아서 책을 읽고 개탄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아니며, 행동하고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배우고 성장하라고 말한다. 또한 그래야만 세상 달라질 것이고, 진보할 것이며 진정한 주류인 국민들이 주류의 몫을 돌려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지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약하고 미천한 대중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복종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은 소심해지고 겁먹고 행복해질 것이다. - 193쪽,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발췌

이 책을 읽고 몇년 전 읽다 포기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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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01-25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촘스키 교수님이...
싸이 노래 <젠틀맨>이었나, 패러디에 나오기도 했어요 @.@
아이하고 패러디 영상을 찾아보다가 깜짝 놀랐답니다.
한국에 남달리 눈길을 두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주류와 비주류 이야기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는
도시 : 시골, 이 비율이 99:1이니,
아무래도 시골은 '비주류'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의딸 2014-01-25 12:44   좋아요 0 | URL
함께살기님 댓글을 보고서 저도 싸이 노래를 찾아보았어요. MIT공대에서 만든 '강남 스타일' 패러디에서 촘스키가 언어학자답게 정확한 발음으로 '오빤 촘스키 스타일' 그러네요. ㅎ
이 책에도 마지막 즈음,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에 대한 칼럼이 있어요. 외국 저자의 글을 읽다 '한국'에 대한 부분이 나오면 어떤 내용이건 일단은 좀 위축이 되요. 이건 아무래도 개인적인 자신감 문제일까요?

도시 시골 상관없이 일단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비주류겠지요. 그러니 이상한 세상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이 들어요.
 
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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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수인 데이비드 짐머는 아내와 두 아이를 비행기 사고로 잃고 자기파괴로 삶을 몰아가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1920년대의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보게 된다. 콧수염을 기른 매우 잘생긴 배우가 출연한 '은행원 이야기'는 무성 코메디 영화였는데, 짐머는 바로 그 헥터 만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고 짐짓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6월 이후로 내가 뭘 보고 웃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뜻밖에도 내 가슴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허파가 들먹이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바닥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나의 일부가 계속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쪽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배우자가 되었든 아이가 되었든 가족을 잃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인데, 그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란 상상을 막연하게 해 본다.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건너 아는 사람 중 그런 고통을 당한 이를 알고 있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 딸을 잃고 그 혼자만 살아났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소식은 그가 정신과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였다. 그후로는 그의 불행을 지나가는 말로라도 입에 올리지 않으려 조심하는데, 불경스러운 말 한마디가 그의 불행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짐머는 자기파괴를 일삼던 중, 자신의 삶을 다시 이어가게 해 줄 헥터 만을 알게되고, 무성영화 배우로서의 헥터 만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살고자하는 본능적인 욕망을 이어간다. 짐머가 파헤치는 헥터 만의 일대기는 이 책을 이어가는 중심 스토리인데, 그는 1928년이 다 저물어가던 때에 갑자기 실종되었다. 실종 당시 헥터는 스물여덟이였고, 그후 60년이 지난 1988년에도 그의 실종에 대해서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었다. 이에 데이비드 짐머는 사라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증명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헥터 만의 책이 출판된 후, 짐머는 헥터 만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프리다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게 된다. 이윽고 연이어 밝혀지는 헥터 만의 비밀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치 거미의 입으로 부터 끊임없이 실을 뽑아내듯이 줄줄 흘려나오는 이야기들은 나로하여금 작가 폴 오스터의 끊임없는 상상력에 대해 또한번 놀라게 했다. 오스터는 이 책에서도 역시 '실종'에 얽힌 비밀을 다루고 있는데, 그 비밀들이란 다름 아닌 우연들의 연속이며, 우연들이 한겹한겹 다져진 결과가 바로 생의 비밀인 것이다. <달의 궁전>이나 <브루클린 풍자극>, 그리고 사적인 글쓰기에 관한 책 <빵굽는 타자기>와 <환상의 책>이 알게모르게 모두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인 이 이야기는 한 작가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절정이다. 아, 나는 아직 폴 오스터의 미궁에서 헤어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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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공경희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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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일까>는 앨리스와 에릭이 사랑하고 고민하고 결국 헤어지게 되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분석한 소설로, 이를테면 연애에 대한 다큐멘터리라고 보아도 좋겠다. 누구와 왜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지, 사랑했던 두 사람은 무엇때문에 어떤과정을 거쳐 헤어지게 되는지를 두 남녀의 연대기적, 지역적, 심리적 분석을 통해 하나하나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기위해 수많은 철학과 이론을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전혀 어렵지 않고 오히려 흥미진진한 것이 과연 세간의 평처럼 놀라우리만치 지적인 연예소설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물질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라 주장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사랑은 실용적인 목적에 이용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앨리스는 광고회사에서 잘나가는 커리어 우먼이다. 그녀는 얼핏 냉소주의자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거부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거부에 대한 두려움은 거의 강박증에 가까울 지경으로, 예를들면 소수의 특권층에게 화제가 되고 있는 레스토랑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아니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막상 새로 사귄 애인이 그 레스토랑에 저녁식사를 예약 해두었다는 것을 알고나자 레스토랑에 대한 시선이 싹 바뀌는 식이였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나와 맞지않다거나 내가 좋아하지 않아 무시한다는 식의 허세를 부려보지만 사실은 대상에게 거부당하지 않겠다는 끊임없는 갈망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앨리스인 것이다.

그런 앨리스는 어느날 파티에서 마음에 썩 드는 남자 에릭을 만나고, 그들은 첫눈에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며 그 이후의 순서는 매우 도식적이다. 그러나 앨리스가 사랑하는 남자는 에릭이라는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머릿속에 이미 존재해 있던 매력있는 남자상을 에릭으로 부터 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앨리스에 대한 에릭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지만, 어찌보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만든 이상형에 대한 갈증을 채우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느 한 일면을 보고(대개는 외모겠지만) 반한 상대의 보이지 않는 면까지를 상상하고, 그에대해 사랑에 빠진다. 그러다 문득 상상했던 그 모습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사랑은 삐걱거리게 되는 것이다.

 

앨리스가 지금 에릭을 사랑하는 것일 리가 없다면, 그녀는 아마 사랑을 사랑한 것이다. 이 동어 반복적인 묘한 감정은 무엇인가? 이것은 거울에 비친 사랑이다. 감정을 자아내는 애정의 대상보다는 감정적인 열정에서 더 많은 쾌감을 도출하는 것을 뜻한다. -74쪽

 

누군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 이유가 어떻든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남자 에릭과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건 비록 아무것도 아닐 때일지라도 그저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 변함없는 사랑의 맹세를 필요로 하는 여자 앨리스의 이별은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된 경위만큼이나 정해진 순서인 것이다. 

나로 말하자면 에릭의 생각에 가까운 편으로, 어떤 이유 때문에 사랑하게 되었더라도 결국에는 상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세포들의 조합일 뿐이라는 우리는 매순간 다른 존재가 되며, 그렇더라도 매순간 '나'는 한결같은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다. 사랑하기 이전의 다소 침울한 모습도, 사랑에 빠져 세상 모든 것을 경이롭게 여기는 모습도 역시 '나'라는 것이다.

처지에 맞지 않아 아예 처음부터 자기 취향이 아니라고 손사레 치던 레스토랑을 그곳에서의 단 한번의 식사로 내 인생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여기게 된다고 해서 레스토랑을 가기 전과 후의 내가 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구두 끈을 매는 모습이 매력적인 것도 '나'이며, 걸을 때 무게 중심을 뒤에 두어 신발이 뒤축부터 볼썽사납게 닳게 하는 것도 여전히 '나'라는 것이다. 그러니 구두끈을 매는 모습에 한 눈에 빠져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후 구두 뒤축부터 닳게 하는 그의 걸음걸에는 혐오감을 갖는다해도 그 사랑이 잘못된 선택은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는 처음부터 뭉뚱그려진 것이 아닌 한겹 한겹이 모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과 그 후 사랑에서 빠져나오게 되는 것에 대한 연대기적이고, 지리적이며 또한 심리적인 그 모든 관점들의 해석이 어쩌면 전혀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겠다. 어떻든 사람은 정체되어서는 살 수 없는 유기체이고, 사랑 또한 움직이는 것이니까.

 

에릭과 결별 후 앨리스는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닌 상태일 때 조차도 자신을 사랑해 줄것으로 여겨지는 필립과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결말이 나지만, 이 역시도 에릭의 경우와 크게 다른 사랑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지레짐작을 해 본다. 결국 사랑은 내 머릿속의 이상형과 나누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니 사랑을 사랑했다는 동어반복적인 묘한 감정을 사랑이라고 정의한다고 해서 크게 잘못 된 일은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따라서 이 책의 제목은 '우리는 사랑일까'이기 보다는 '우리는 사랑할까' 혹은 '우리가 사랑을 알까' 정도가 적당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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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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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의 유전자란 게 말이야, 그 뻐꾸기 알 같은 거라고 생각해.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데 몸에 쓰윽 들어와 있으니 말이야. 신고가 다른 사람보다 체력이 좋은 건 내가 녀석의 피에 뻐꾸기 알을 떨어뜨렸기 때문이야. 그걸 본인이 고마워하는지 어떤지는 알 수가 없지.(395쪽) 

 

히다 카자미는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타고난 스키어다. 그녀는 올림픽 출전 경력이 있는 아버지로부터 세 살 무렵부터 스키를 배웠고, 그후로도 스키를 멀리 하지 않은 채 스키선수로 성장했다. 더구나 그녀는 스키를 좋아하고, 경주를 통한 경쟁을 즐긴다. 그러니까 그녀는 한마디로 재능있는, 타고난, 무한가능성이 있는, 장래가 유망되는 스키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도리고에 신고는 스키선수로 적합한 신체적 조건을 타고났지만, 불행히도 그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까지 스키라고는 타본 적이 없고, 그렇다고 스키를 선망했던 것도 아닌 그런 평범한 학생이다. 그러던 어느날 누가 보기에도 '행운'이라고 밖에 보여지지 않는 스키선수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지만, 기타리스트가 꿈인 도리고에 신고에게 스키선수가 되라는 것은 오히려 불행에 가까운 '선고'로 들린다.

 

하고싶은 일과 재능이 일치할 때 그보다 더한 행운이 있을까. 하고싶은 일은 뚜렷한데 그에 대한 재능이 부족한 사람들을 비교적 자주 보게 된다. 작가가 되고 싶지만 타고난 작가적 역량이 부족한 사람, 체조선수를 갈망하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도대체 도약하지 못하는 체조선수, 의사가 되어 여러사람 살리고 싶은데 피만 보면 그야말로 피가 역류해 의사로서는 아무래도 역부족인 의과대학생.

그런가하면 그에 반대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타고난 재능과 좋아하는 일 사이의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는 도리고에 신고 같은 경우 말이다. 이런 경우 재능과 하고싶은 일 가운데 도리고에 신고가 택해야 하는 길은 무엇일까.

유전자를 연구 조사해 스포츠 선수의 재능을 과학적으로 발굴하고, 그에 맞는 최적의 지도와 투자를 기울이므로써 회사의 수익을 노리는 한 대기업의 스포츠 과학 연구소는 카자미와 신고를 영입한다. 그들은 스키어로 대성할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드러나는 카자미의 태생에 얽힌 비밀은 이 책을 마지막까지 몰고가는 견인차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신고의 역할은..? 나는 마지막까지 그의 역할이 무척 궁금했다.

 

히가시노 게이고 폐인이 있을만큼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흥행(?)을 보장받는 작가지만, 나는 히라노 게이치로와 그를 혼동할 만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작가이다. 따라서 그의 책도 <뻐꾸기 알은 누구의 것인가>를 처음으로 읽었다. 책은 처음 손에 쥘 때부터 마지막까지 한호흡으로 읽어낼 만큼 흥미진진했는데, 책을 읽으며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은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 다만, 책을 덮고나서 궁금해 진 것은 재능을 발굴하고, 그에 맞는 지원으로 그를 훌륭한 인재로 키워내는 것은 좋은일 일까, 나쁜일 일까 하는 것이다.

그러고보면 영재교육이니, 맞춤교육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어린나이에 아이의 재능을 미리 알아보고, 아이의 특성에 맞는 교육을 통해 인재로 육성하자는 것인데, 그는 국가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도 좋은일이 아니던가. 그런데 새삼 그것이 좋은일이 맞는 것인지에 대해 의혹이 생긴 것이다. 재능과 적성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말이다.

 

50의 노력밖에 하지 않는 사람이 재능 하나로 100의 노력을 하는 사람을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똑같이 100의 노력을 한다면 결국은 재능이 승부를 가른다. (10쪽)

 

재능을 찾아내어 인재로 육성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않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운동에 적합한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아이들을 발굴한다는 발상이 한단계 더 나아간다면 유전자 조작을 통해 운동능력이 뛰어난 인간을 창조해 내고도 남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우성교배를 통해 찰진 옥수수를 만들어내고, 알이 굵은 콩을 만들어내듯이 말이다. 그러나 인간은 적어도 콩이나 옥수수가 아니기 때문에 유전자 조작을 통한 인재발굴과 재능교육이 썩 유쾌하지 않은 것이다.

인간은 기능적으로만 존재하는 기계이거나 쓸모에 따라 이용되고 평가되는 대상이 아니다. 기능적인면에서는 떨어지더라도 누구라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약해 운동선수로는 적합하지 않은 체력을 지녔지만, 무엇보다 높은 심폐 기능과 순발력이 요구되는 스키의 한 종목 크리스 컨트리로 극도의 성취감을 맛보는 후지이는 남과의 경쟁을 통한 승리가 아닌 자기 자신과의 싸움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은 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도전은 그 자체 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말이다.

주말, 일종의 기분전환용 영화를 보듯 아무 생각없이 몰입할 수 있었던 히가시노 게이고의 <뻐꾸기 알은 누구 것인가>는 할 수 있는 것과 하고싶은 것 사이의 괴리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남겨주는 책 이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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혀끝의 남자
백민석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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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백민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혀끝의 남자>를 읽기 전까지는.

작가의 사적인 역사도 물론 그렇지만, 그의 소설을 단 한편도 읽은 일이 없었으며, 백민석이라는 이름의 작가가 있다는 것 조차 알지 못했다. 나야 뭐 그저 지나가다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정도의 독자이니, 내가 백민석을 몰랐다는 것은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며, 아는 작가보다 모르는 작가가 더 많다는 것은 내게도, 작가에게도 그리 자존심 상할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10 전 작가 그만하겠다고 잠적했었다고 했다. 그러다 10년이 지난 후 <혀끝의 남자>를 들고 다시 등장한 작가라고 했다. <혀끝의 남자>에 대한 홍보글을 읽다보면 유독 '절필 선언 후 10년 만에 복귀한 작가의 소설'에 방점을 두는데, 나는 그것이 전혀 놀랍게 여겨지지 않는다. 오히려 돌아올 것이라면 절필은 왜 하나, 이런 경우는 구차스러운 '번복'에 해당하지 않는 걸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그만큼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백민석이란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이다.

 

혀끝의 남자. 머리에 불을 이고 혀끝을 걸어다니는 남자라니, 도대체 그가 이승에 존재하기나 하는지 나로서는 영 감이 잡히지 않는 이 이야기는 말하자면 인도 여행기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약과 함께한 인도 기행문인데, 타지에 대한 낯설음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마약에 취한 상태를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알 수 없을만큼 '알 수 없는' 단편이다.

두번째 이야기 '폭력의 기원'도 그랬다. 작은 절골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이야기는 무허가 판자촌 아이들의 놀이터인 작은 절골에서 무덤같기도 한 괴상한 틈새를 발견해 내는 이야기다.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냐. 폭력의 기원과 그 틈새는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 나는 여전히 그렇게 작가의 말에 어두운 귀를 달고 세번째 이야기 '연옥 일기'를 읽었다. 이 세번째 이야기가 작가 백민석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고 싶어지는 심정의 절정이였다 할 수 있는데, 이건 뭐 읽으라고 쓴 소설인지 작가 혼자만 알고있는 의미를 독백하고 있는 것인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책의 맨 끝에 실린 '작가의 말'에서 백민석은 '가장 소중한 독자는 나 자신이다.' 라고 했는데, 자기 혼자 음미하려고 소설을 쓰는 작가도 있나 싶은 의문이 들만큼 모호한 단편이었다. 어쩌면 시인의 그것처럼 작가는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자신의 언어로 사실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에 더 난해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젠 그만 포기해야겠다 싶을 무렵에 읽은 네번째 이야기 '신데렐라 게임을 아세요?'부터 나는 백민석에 호기심이 생겼다. 삶에 치인 성년의 남자가 자신이 어린 시절 도서관 소년이였다는 것을 기억해 내며 한 서점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인데, 책을 매개로 쓰인 이야기기 때문에 눈이 번쩍 뜨인 것일 수도 있고, 드디어 작가의 일방적 독백이 아닌 이야기를 만났다고 생각해 반갑기도 했다. 그후로 여덟번째 이야기까지 속사포처럼 읽어나갔다. 특히 마지막의 '사랑과 증오의 이모티콘'은 무표정한 작가의 절필기이며, 필살기이기도 했는데,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백민석이라는 작가의 절필에 이르기까지의 고통,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의지 같은 것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조금이라도 들여다 보았다는 것은 나의 상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나는 그에 대해 지금도 아무것도 모른다. 그저 그가 불후한 어린 시절을 도서관에서 지나왔고, 그후로는 그 사실을 잊고 살았으면서도 어찌어찌 작가가 되었고, 작가로서 나름의 바닥을 치고 절필했다가 10년 만에 다시 펜을 세워 들었다는 정도를 알았을 뿐이다.

살고 싶어 글을 쓰지 않았다 라고 했다. 그리고 이제 살만해서가 아니라 다시 살아야겠기에 글을 쓴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나는 단편 '혀끝의 남자'를 두번 읽었다. 처음 책을 펼치며 읽었고, 마지막으로 책을 덮으며 한번 더 읽었다. 아홉 편의 단편과, 백민석의 귀향(?)을 손꼽은 평론가의 해설과, 10년 만의 귀향 후 가진 문단의 술자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 자신은 좀 더 대범해진(좀 더 수용적이된, 좀 더 폭넓은 시선이 생긴, 좀 더 시크해진) 것 같다란 작가의 말 까지를 읽고나자 나는 백민석이 몹시 궁금해졌다.

백민석이란 작가가 궁금하긴 했는데, 표제작인 '혀끝의 남자'를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처음으로 돌아가서 '혀끝의 남자'를 다시 한 번 더 읽었던 것이다. 머리에 불을 인 혀끝의 남자는 담배 모양의 대마이거나 해시시이며, '신'은 내 삶이 궁핍할 때 나를 거는 그 무엇이란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넘겨짚기 해본다.

 

작품해설을 보니 백민석이 작가로 돌아올 것을 애타게 기다렸다는 평론가는 백민석의 글은 분노의 문학이라고 했다. 그리고 백민석은 자신의 분노는 문화적인 분노가 아닌, 생활에서 오는 분노라고 했다. 그제서야 무허가 판자촌의 어린 소년은 작가 자신이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은 평생 공부만 해온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조금은 완고해 보여 실제 나이보다 더 노숙해 보이기도 하다. 특별히 잘나온 사진을 골라 실었겠지만, 어디에도 삶의 그늘, 무게 같은 것은 들여다 뵈지 않는다. 작가 백민석이 궁금한 것처럼 인간 백민석도 궁금해졌다. 책을 주문하고 몇 일을 기다릴 자신이 없어, 주변의 서점들을 뒤져보지만 <혀끝의 남자>외에는 보유하고 있는 책이 없다했다. 도서관을 검색해보니 몇 권 안되는 책이 그나마도 모두 대출중이었다. 결국 온라인 서점을 통해 두 권의 책을 구입하고 몇일을 기다리기로 한다. <혀끝의 남자>를 읽고 작가로서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백민석이 지나온 시간들이 궁금했다. 그래도 괜찮다면 10년 간의 공백에 대해 들려줄 후속작을 기다린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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