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여자 대산세계문학총서 91
아리시마 다케오 지음, 김옥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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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에서도 여성은 주체성을 가진 한 개인으로 작용하기 보다 남자의 보조적인 역할, 혹은 마스코트와 같은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여성도 자신의 욕망과 감정에 충실한 것이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시대가 되면서 오늘날 여자들의 사회적 위상은 과거에 비할 수 없이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은연중에 사람들은 '여성스럽다' 라는 말로 압축된 순종적이고 다소곳한 여성상을 추구하기도 한다. 때문에 드라마나 유행가는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는 자의식 강한 여자를 '나쁜 여자'라 칭하며 숭배하고 노래하기도 하는 것이다.

 

여기 이 책에는 제대로 나쁜 여자가 등장한다. 아리시마 다케오가 <어떤 여자>를 쓴 때는 1900년 대로, 그 시대의 여성은 성적 욕망이 없다거나, 여성은 그저 남성의 부속물 정도로 여겨지던 그런 때 였다. 때문에 한번 이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으며 그러고도 새로운 결혼을 위해 약혼자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사회적 도덕규범에 맞지않는 여자였기 때문에 그녀는 나쁜 여자로 묘사된다. 그러나 내 생각에 그녀가 나쁜 이유는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충실하기 때문이 아니다. 본능과 욕망에 충실하되, 자신만의 본능과 감정을 존중할 뿐이고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으로 인해 타인이 받게 되는 불이익이나 고통에는 묘하게도 불감증을 보이기에 나쁜 여자인 것이다.

 

<어떤 여자>는 실화를 토대로 구성된 작품이다. 이 사건으로 1902년에 일본이 떠들썩했다고 하는데, 시대가 시대인지라 이런 개인적인 일을 스캔들로 삼으며 민감했던 것인가 보다. 해설자는 아리시마 다케오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안나의 폭풍우와도 같은 삶에의 강렬한 의지에 매혹되어 <나쁜 여자>를 쓰게 된 것이 아닐까 하는 해석을 내놓았다.

 

요코는 약혼자가 있음에도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사람이기에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일, 이 일만으로 그녀를 지탄할 수 없다.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되 모든 중심에 자신만을 두었기 때문에 약혼자나, 상대 남자의 아내 등의 고통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토록 비뚤어진 것은 자신의 잘못이기보다는 자신의 천성이 그렇다거나 자신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어머니나 친척들 등을 탓하며 자신은 피해자라는 식이다. 한마디로 그녀는 뻔뻔하기 때문에 나쁜 여자인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본능이 이성을 능가하는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뻔뻔함에는 매번 혀를 내둘렀지만, 또 한편으로는 살아남는 데 기발한 촉수를 갖고 있는 그녀의 본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리시마는 요코를 시대를 앞서가는 급진적인 한 여성으로 소개했다. 여성에게는 성적 욕망이 없다는 당시의 통념이 일반적이었던데 반해 아리시마는 요코의 성적 욕망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요코는 도덕성만을 강조하고 형식에만 사로잡힌 기독교에 반발하며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고자 했으며 그렇기에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렸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요코는 아무것도 버리지 않았다. 약혼자 기무라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느끼지 않으면서 기무라로부터 필요한 것을 취하는 뻔뻔함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요코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한편으로 그에게 버림받게 될 경우 약혼자에게 되돌아가려는 속내를 끝끝내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솔직한 여자라고는 하지만 남자의 도움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여자, 자신의 아이와 동생의 목숨까지도 자기를 위해 제물로 기꺼이 내놓을 수 있다 생각했던, 오로지 자신만의 욕망에 사로잡힌 요코는 영민한듯 굴지만 실제로는 몹시 아둔한 여자다.

 

일여년의 애정의 도피 행각에 대한 끝은 권선징악의 권고같은 고리타분한 느낌이 없지 않았으나, 어쨌든 20세기의 나쁜여자 요코는 21세기의 내가 보기에도 여전히 나쁘다. 단지 그녀를 나쁘게 여기는 이유가 다를 뿐이다. 어쩌면 나도 구시대적 여성관에 사로잡힌 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신여성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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