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그릇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8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병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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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한국정쟁의 종전과 더불어 전쟁특수호황기가 끝나가는 시점의 일본이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떠오르는 신세대 문화가이며, 권위로 똘똘 뭉친 오래된 것들은 그것이 문화이든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공개적으로 경멸하는 새로운 세력인 '누보그룹' 중의 한 명이다. 권위적 욕망을 거부하는 '누보그룹'의 모습을 마냥 찬양하는 대중 속에서 그는 새로운 권력을 형성하고, 그 맛에 취하며 더 높은 것을 향한 욕망에 길들여져 가는데...

 

도쿄의 한 기차역에서 첫차의 출발 전 점검 중 얼굴이 뭉개진 시체가 발견된다. 사체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참혹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그마저도 기차에 의해 절단되길 노린 점으로 보아 원한에 의한 살인이라고 경찰은 추정하지만, 일정기간이 지나도록 사건의 실마리는 물론이고, 피해자의 신원조차도 불분명한 상태로 사건은 미궁에 빠지려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중견 형사 이마니시 에이타로는 형사다운 끈질긴 근성으로 사건을 추적하고, 범인을 추정하며, 그에 맞는 증거를 찾고, 결국 사건을 결말 짓는다.

이마니시는 처음부터 형사의 직감을 들어 한 사람을 범인으로 추측하는데, 때맞춰 증거들은 속속 그의 앞에 엎드려 준다. 범인의 피묻은 옷을 처리해준 것으로 추정되는 이가 그의 동네 아파트로 이사를 오는가 하면, 사건과는 전혀 상관없는 신문 기사를 보고 사건과 연결시키기도 하고, 이마니시가 추측한 범인의 내연녀는 동생의 아파트에 세들거나 하는 식이다.

범인을 정해 두고, 사건을 몰아가는 구성 방식이 너무 뻔하고, 한사람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정황이 없지 않기에 다소 거북스러웠다. 아무리 사건을 해결하는 형사의 노력이라지만, 인권침해의 요소가 없지않고, 근성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형사의 끈질김이 내 정서에 맞지 않아 소설 자체가 시시하게 여겨질 무렵, 의외의 사실이 밝혀진다. 과연 형사의 직감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며, 괜히 마쓰모토 세이초가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기는 했지만, 여하튼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권위를 부정하는 누보그룹의 새로운 권력이라니, 혹여 '모래그릇'을 쓸 당시의 마쓰모토 세이초는 떠오르는 새로운 세력에 불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였을까.

 

사상누각. 제목인 '모래그릇'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 점 아니겠는가. 사회적 차별이니, 편견에 대한 고발이라고 거창하게 해설되어 있지만, 뿌리없고 근본없는 모래성은 단 한번의 매서운 파도만으로도 무참히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다만 이 경우 매서운 파도는 외파가 아니라 근본없는 자신을 보잘 것 없이 여긴 바로 자기 자신의 내부 불안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근본없음을 불안하게 여기게 된 것은 역시 사회적 맥락이 아니겠느냐고 한다면 그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음,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물의 대모인 미야베 미유키의 정신적 아버지로 불릴만큼 사회파 추리소설의 거장이며, 효시로까지 볼 수 있는데, <제로의 초점> <짐승의 길> 등 몇 권의 작품을 읽어본 결과 그가 그처럼 거장으로 추앙받는 이유를 아직은 잘 모르겠다. 트릭이나 범죄 자체에 초점을 두기보다 사건이 일어나게 된 사회적 동기에 더 중점을 두는 사회파 소설을 좋아하지만, <모래 그릇>의 경우는 꼭 사회적 배경이나 환경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다라고 보기 힘들다는 생각이다. 이미 범인은 어린 나이부터 자신의 본 모습을 숨겨왔고, 그래야만 출세를 보장받을 수 있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모두가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뻔한 논리이지만 역시 그렇게 주장할 수 밖에 없다.

더구나 이 소설은 신문에 연재된 것 때문인지 상황이나 이야기가 중복되서 설명되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긴박감이 떨어졌다. 다만 이 소설이 씌인 1960년대 일본의 '누보그룹'과 같은 문화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과, 자신이 많은 여행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해 평소 여행서적을 즐겨 읽었다는 마쓰모토 세이초가 <제로의 초점>과 같이 사건의 해결을 위해 일본의 여러곳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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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고백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
미시마 유키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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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인간에게도 저마다의 드라마가 있고 남에게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으며 제각각의 특수한 사정이 있다고 어른들은 생각하지만, 청년은 자신의 특수한 사정을 세계에서 유일한 예인 것처럼 생각한다. -나의 편력시대/미시마 유키오

 

미야베 미유키는 <솔로몬의 위증>에서 '인간은 거짓말을 한다'라고 단언했다. <가면의 고백>을 읽고 나는, '인간은 연기를 한다.'라는 것을 깨닫았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아가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춘 '내 모습'을 연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진정한 내 모습이란 어떤 것인지, 어떤 것이 연기이고 가면인지 스스로조차도 알 수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유는 단 하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정상적으로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적이지 않거나, 혹은 일반적이여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모습들을 흔히 '비정상적' 범주에 두며 안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비정상적인 모습을 감추거나 지우려하는 것이다.

 

미시마 유키오의 자전적 소설 제목이 <가면의 고백>인 것은, 정상성을 연기하는 일상의 모습을 미시마는 가면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런만큼 책 속에서 그의 고백은 진솔하다. 그 솔직함의 도가 지나쳐 책을 읽는동안 나는 자주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소설 속에 '나'로 표현된 주인공은 이성에 대해 육체적 욕망을 느끼지 못한다.(어쨌든 미시마 유키오는 결혼하고 자식까지 두었으니, 그가 동성애자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가 '악습'이라고 이름붙힌 최초의 마스터베이션은 구이도 레니의 성화 '성 세바스티아누스'를 본 직후였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3세기 중엽 로마 군대의 친위대장으로, 기독교에 귀의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구이도 레니의 성화 속 세바스티아누스는 천 조각으로 허리 아래를 가리고 나무에 묶인채로 두발의 화살을 맞은 모습이다. 탐미주의자인 미시마는 이 그림 속의 세바스티아누스에게서 사형수의 처참한 모습이 아닌 고통으로 비틀린 육체에서 나른한 아름다움을 보았다.

 

태생부터 약체였던 탓에 주인공 '나'는 또래이거나 젊은 남자들의 강건한 모습에 매료되는 한편으로 도대체 이성에게서는 어떠한 육체적 매력도 찾아내질 못한다. 자전적 소설이라 하였으니, 자전적인 요소와 함께 소설적 요소도 포함된 것이므로 과연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픽션인지 알수 없지만, 어쨌든 미시마는 건강한 육체를 탐하므로써 삶을 갈구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평생 죽음의 그림자를 동경해 온 것처럼 보이고, 끝내는 할복으로 마흔 다섯해의 삶을 마감한 미시마는 건강한 육체의 파멸을 상상하면서 죽음에의 두려움을 승화시킨 것이 아니었을까. 때문에 소설 속의 그는 동성애자이기 보다는 성행위가 불가능한 사람으로 보는편이 더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성행위도 결국은 삶을 갈망하는 행위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삶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성이기보다는 후천적인 교육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인간은 본시 죽음을 갈망하는 존재이지만, 그래서는 종족 번식의 관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므로 죽음은 두려운 것으로, 삶은 축복으로 여겨고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 아닐까. 누구에게나 삶이 만족스럽지 않고, 때로는 버거운 고통이기도 한 것인데, 모두가 다 같이 죽음을 두려움이며 슬픔으로 치부하는 것이 새삼 이상스럽게 여겨지는 것이다. 후세를 기약하는 종교적 관점에서는 더더군다나 그렇지 않은가.

미시마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그에게 종교가 있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어쨌든 그는 죽음을 두려움으로 여기진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게 죽음은 언제고 이루어 낼 당면 과제 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그런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나라면 총알에 맞아도 아프지 않을 것(113)' 이며, '나만은 절대 죽지 않는다(129)' 는 주술에 대한 확신을 믿지 않던가.

 

 

 

성도착증으로까지 보이는, 자신조차도 정상적인 범주로 여기지 않는 성적 기호를 다만 추억함으로써 가면을 벗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한때의 취향으로 치부될 지라도 자신을 진솔하게 남기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면의 고백>을 썼을 당시 미시마는 그만큼 자신의 맨얼굴에 대해 자신이 있었던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태생이 밝은 사람이라는 평을 듣곤 하는 나는 언제쯤이나 이 많은 가면 중에 진짜 내 얼굴을 발견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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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식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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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판 1쇄 1999년 4월 8일, 값 6,800원.

아마도 나는 이 책을, 출간되고 얼마 안되어서 구입했었던가 보다. 그런데 정작 지금까지도 책을 읽지는 않았다. 물론 시도는 했지만, 그당시에 나는 이 책에 대해 세간에 알려진 만큼의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의고체라고 해석된 어려운 문장이 독서를 방해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히라노는 책 뒤에 실린 제일문화평론가 장기권과의 인터뷰에서 표현이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지적에 대해 소설이라고 사전을 찾아가며 읽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했지만, 세상살이에 전력투구해야만 하는 나로서는 소설을 읽으며 그 많은 에너지를 쏟을 여력이 없었던 거라고 변명하고 싶다. 그렇게 책꽂이만 장식하던 이 책을 꺼내 읽게 된 것은, <일식>을 읽어보면 유럽사에 대한 히라노의 탄탄한 배경지식에 놀라게 될 것이라는 추천의 글 때문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일식>에 대한 호평은 차고 넘쳤지만, 유독 그 추천말에 끌렸던 것은 역시 히라노의 소설 <결괴>를 읽고 난 직후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괴>는 범죄소설이지만, 딱히 범죄소설이라고 분류하기엔 너무 아까운 소설이다. 내 나름으로는 올해 읽은 책 중 최고의 책이라고 여겨지는 책이 바로 <결괴>인데, 소설이지만 설렁설렁 읽을수만은 없는 그런 책이였다. 때문에 히라노의 데뷔작이며,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일식>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찰라에 히라노의 박식함에 놀라게 될 것이라는 추천글이 더더욱 반가웠던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직히 나는 히라노가 <일식>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겠다. 히라노는 <책을 읽는 방법>에서 책을 천천히 읽을 것을 말했는데, 그의 책은 특히나 더 천천히 읽어야 한다. 사전을 찾고 공부하는 것처럼 읽지는 못하더라도, 천천히 문장들을 음미하며 읽을 필요가 있는 것이 히라노의 소설인 것이다. 

<일식> 역시 천천히 읽을 수밖에 없는 책인데, 그렇다고 해서 재미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몰입도가 떨어지는 책도 아니다. '의고체'라는 고풍스러운 문체로 씌였지만, 훌륭한 번역 덕분으로 그다지 읽기 힘든 책도 아니며, 오히려 긴장감과 속도감이 충만해서 몰입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책이다. 고전을 읽는 것 같은 문장들 속에서 판타지 영화의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그건 마치, 고소하면서도 비릿한 먼지 냄새를 일으키는 차가운 촉감의 그것은 '비'라는 것을 처음 안 소경의 기분과 같은 것이였다. 천천히 음미하는 문장 속에서 묘하게 상쾌해지는 그런 기분을 느낄수 있었던 것이다.  

 

1482년 파리. 이교도를 이해하고 그를 통해 기독교 사상을 더 탄탄히 하기 위해 이교도의 철학책을 찾아나선 한 수도사가 그 과정에서 연금술이며 마녀사냥을 겪으며 경험한 신비에 대해 적은 이 책은 히라노가 대학교에 재학중이던 스물세살에 쓴 것이다. 그는 법학도였으며,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피어싱을 한 신세대이기도 했는데, 어떻게 이런 고전적인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랐다. 뿐만아니라 이 책을 읽은 직접적 계기가 되었던 추천글처럼 히라노의 박식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었는데, 그럼에도불구하고 정작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유럽사와 기독교사에 커다란 오점으로 남은 '마녀사냥'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유일신'은 지식인이 추종할 만한 사상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인지, 혹은 남과 여, 육체와 영혼식으로 나뉘는 이원론적인 이론으로는 인간도 종교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천재라고 밖에 여길 수 없는 작가가 <일식>을 쓰면서 지적유희를 즐기고 싶었던 것인지 나로서는 정말 모르겠는데 그저 인간의 편협함과 대중심리에 편승하는 나약함에 반하는,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저쪽 넘어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광범위하게 넘겨짚어 본다.

그러나 어쨌든 <일식>이 잘 쓰여진 소설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 탄탄하고 몰입도 또한 뛰어난 소설이며 더불어 번역도 훌륭해 한문장 한문장 읽으면서는 줄곳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지만, 읽고나자 모르겠다고 여겨지는 것은 전적으로 내 지적능력 탓이라 할 수 밖에.

아직은 실험적 성격이 몹시 두드러지는 히라노의 작품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는 생각이지만, 한번에 뜻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문체로 씌인 번역되지 않은 원문은 좀 피곤했을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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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3-11-26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후 저랑 독서법이 비슷하신 듯 ㅋㅋ
'읽고 나자 모르겠다' 독서법의 저의 오랜 습관입니다.
뭐랄까...동지를 만난 듯한 이 느낌 -.-
전 지금 어디서 올 것 인지 생각 중입니다.
오늘 비 오네요 흠...

비의딸 2013-11-26 22:16   좋아요 0 | URL
음..? 드뎌 오신건가요..?
어디서 오는가보다는 어디로 가는가가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쓰잘데기 없는 생각을 해보는 밤입니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은 더 모르겠네요.
그런데도 내려놓을 수가 없는 책이네요.
내일은 전국적으로 큰눈이 온다던데,
아침에 창문을 열었을 때 푸지게 눈이 쌓였으면 좋겠다 싶지만
그러면 참 여러사람 곤란하겠죠. 그래도, 그래도요. ^^

루쉰P 2013-11-27 16:43   좋아요 0 | URL
'왔다'긴 보다 '들른다'가 맞겠죠 ㅋㅋ
어디로 가는 지를 계속 고민 중이니까요 후후
모르는 책을 계속 읽으신다니....저보다 더 멘탈이 훌륭하신 듯 싶어요.
그건 정말 힘든 작업인 데 ㅎ
안타깝게도 눈이 다 녹아버리는 이 현실..
어쩌죠 어쩌죠....ㅋ
 
게 가공선 창비세계문학 8
고바야시 다키지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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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하다. 1929년 일본의 게 가공선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면서 노예와 같은 착취를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은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부를 늘리는 사업에 자신들이 기여하고 있다는데에 일종의 자부심을 갖기도 했으며, 어쩌다 지나가는 제국군함의 자국국기만 보아도 눈물을 흘리곤 했다.  그러나 조악한 식사와 비참한 위생환경, 과도한 노동과 도를 넘어선 폭력으로 병들고 죽어가는 노동자가 생기면서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우와 댓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며 목숨조차 '게'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러던중 폭풍우 때문에 조난당했던 일부 노동자들이 러시아인들을 만나면서 세상의 틀에 도전할 방법을 배운다. 일하는 사람은 위대하며, 일하지 않는 사람이 뻐기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 일하는 사람은 다수이고 일하지 않으면서도 큰소리치는 사람은 소수이기 때문에 정작 일하는 사람들이 함께 싸운다면 세상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은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단결한다. "살해당하고 싶지 않은 자는 오라!" 라고 외치며.

즉, 이 책은 노동자들의 궐기를 촉구하는 궐기문과 같은 단편 소설이다. 때문에 문학적 성과보다는 대중의 각성을 위해 씌여졌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작가 코바야시 타끼지는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운동의 대표적 작가이며, 일본 공산당원 이었다. 일본은 1929년 전국적으로 공산당원을 일제 검거하여 339명을 기소하였고, 코바야시 타까지는 1933년 체포되어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자본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것은 자본주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때문에 1929년 게 가공선의 비참한 노동환경은 신자본주의시대라는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의 뒷편 부록에는 일본의 반빈곤운동가와 원로 평론가의 글을 실어 1929년의 게 가공선이 어떻게 오늘날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에서는 경기침체로 프리터니 니트족이니 히키코모리가 등장하였고, 이를 계기로 잊혀졌던 코바야시 타끼지의 책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고 한다.

소설 속 이야기의 결말은 태업을 주도하고 노동환경을 개선하고자 교섭에 나섰던 몇몇 선각자들이 자신편이라고 믿었던 제국의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고, 그후 노동자 각자들이 각성하고 다시한번 떨치고 일어나는 희망적인 내용이지만 배신자, 단 한 명의 배반도 일어나지 않아야 하는 현실의 노동운동은 글쎄...?

 

게 가공선의 노동환경은 비단 1920년대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며, 조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1960~80년대의 구로공단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모두가 다 잘 살게 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 현재 비정규직들의 절규에도 그 처참함은 묻어나고 있으며, 이는 비단 일본이나 우리나라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니다. 자본이 절대권력이 된 신자유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의 일이건만 다중은 애써 그를 모른체 하며, 나만은 더 나은 노동환경을 보장받고자 게 가공선의 그들이 담배 한대에 양심을 팔았던 것처럼 눈을 감곤 하는 것이다. 인간은 본시 이기적 동물이라고 얼버무리기엔 너무나 비루한 현실인 것이다.

공산당이라고 하면 일단 빨갱이로 몰아치고, 마치 나라를 망칠 악마의 종자라도 되는 양 여기는 우리나라에서 코바야시 타끼지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읽힌다니 세상은 정말 변하고 있는 것이 맞지만, 큰 틀에서 보면 그다지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다. 문제는 소설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이 아니라 내 눈앞에 이익인 것이다. 노동자이면서도 감독이 되기를 희망하는 것이 연대해 본 일 없고, 궐기해 본 일은 더더욱 없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는 더 쉬운 일처럼 여겨지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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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2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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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미문학의 거봉으로 불리우는 미시마 유키오는 1925년 도쿄에서 출생하였고, 동경 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으로 문단에 데뷔했으며 대표작으로 <가면의 고백>과 <금각사>가 있고, 이중 나는 <금각사>를 읽었다. 주인공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금각사'라고 생각하는 말더듬이이다. '나'는 말더듬이를 결핍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해지고 싶었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금각사 또한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폭격이나 담배불씨 따위에 쉽게 사그러질 아름다움임을 알았기에 아름다운 순간을 각인하기 위해 주인공 '나'는 방화를 저지른다. 파괴함으로써 오히려 아름다움을 기억한다니, 나로서는 언뜻 이해되지 않는 소설 <금각사>이긴 하지만, 정작 미시마 유키오에 대해 놀랐던 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극적인 찬미보다 할복이라는 방법으로 시행된 그의 자살이였다. 자위대의 각성을 요구하며 미시마 유키오는 할복했던 것인데, 더욱 당황스러웠던 것은 허약한 체질로 태어난 미시마가 육체적열등감을 벗어나는 방법으로 보디빌딩을 통해 복근을 단련시킨 후 자살을 감행했다는 것다. 파괴를 위해 가장 보기좋은 상태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또한 아름다운 것의 파멸 장면이라는 퍼포먼스였던 것이며, 이를 위해 자신의 몸을 이용하고 끔찍한 모습의 주검을 연출했다는 것이 놀랍고도 당황스러운 것이다. 

소설 <결괴>에는 '단순한 파괴충동'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미네 사네미라는 젊은 화가는 도청 청사가 폭발해서 붕괴 직전에 있는 그림이라던가, 일본의 유명 광고회사를 무너뜨리고, 불길 속에서 사원을 파괴하기도 하는 등의 과격한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단순한 파괴충동'이라고 표현한다. 금각사의 '나'도 그렇고, 미시마 유키오의 할복도 그렇고 이렇듯 '단순한 파괴충동'으로 이해한다면 내가 너무 몰지각한 것일까. 어쨌든 소설<결괴> 속의 화가 미네 사네미와, 실존 인물인 미시마 유키오는 파괴충동을 예술적으로 승화 시킨 것만은 분명하다. 미네 사네미가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을 정도만으로 자신의 파괴충동을 조절했다면, 그에 비해 미시마가 가진 파괴 충동은 '탐미'라는 이름으로 걸러지긴 하였으되, 할복이라는 충격요법으로 마무리 되었다. <결괴>의 다른 등장인물인 살인범도 파괴충동 조절에 실패 혹은 스스로 포기한 그런 이탈자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히라노 게이치로는 미시마 유키오의 재래라는 평을 듣는 젊은 작가이다. 그 또한 교토대 법학부 재학중 문단에 데뷔하였고, 그 자신도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 문체를 동경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의 데뷔작이며, 대표작인 <일식>은 읽지 못했다. 의고체라고 불리는 문체가 어렵기도 했고, 일본 청년이 쓴 중세의 수도사 이야기라는 게 어쩐지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아 읽어보려는 시도는 해보았으되 그냥 멈추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2006년에 발표한 <얼굴없는 나체들>은 읽어보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19금의 딱지를 붙이고 출판된 책으로 바로 그점때문에 호기심이 더 동했던 것도 사실이나, 무엇보다 현대의 일본 사회를 조명하고 있으며, 그 도구가 인터넷이였다는 것에 특히나 관심이 있었다. 그후, <책을 읽는 방법>과 <문명의 우울>을 읽었고, 이번 책 <결괴>는 내가 읽은 히라노 게이치로의 네번째 작품이었다. 

<문명의 우울>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는 '정체 모를 것', '낙서의 단상' 이란 제목 아래 미디어에 대해 이처럼 적었다.

 

매스미디어가 못마땅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가끔, 마치 하나의 생물처럼, 정보의 수신자와 송신자 모두를 배신해버리기 때문이다. 이제 유입된 정보에 미치는 매체의 영향에 더욱 명확한 의식을 가져야 할 때가 왔다. 언론은 이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수신자인 우리도 매스미디어와 좀더 냉정하고 적합한 거리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문명의 우울/정체 모를 것, 19쪽)

내가 보기에 낙서는 지금 새로운 적절한 장소를 찾아내 무한히 증식해가고 있는 듯하다. 익명성을 유지하면서도 이해받기를 바라는 어딘가 켕기는 욕구를 가장 손쉽게 만족시켜주는 곳, 그것은 무법지대로 변한 인터넷일 것이다.(문명의 우울/낙서의 단상, 45쪽)

 

보이는 현실과 보이지 않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 썼던 <얼굴없는 나체들>과 과도하다고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현대 문명과 그에따라 달라지는 소소한 인간사를 적은 에세이 <문명의 우울>을 쓴 후, <결괴>는 필연적으로 히라노가 쓸 수 밖에 없는 결과물로 여겨진다. 역시 <결괴>에서 사건의 시작은 인터넷이 발단이 된 것이다. 현실의 아내를 비롯한 가족과 나눌 수 없는 마음의 상처, 비밀, 이해받고 싶은 마음 따위를 낙서하듯 블로그에 적음으로써, 익명의 누군가를 불러들이게 되는데 그것이 사건이 시작이다.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고도 교토의 중심지에서, '악마'의 메시지가 박힌 사람의 머리가 절단된 양쪽 손발과 함께 발견되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보도되고 일주일. 그후 쓰루미 강 하천부지에서 오른팔, 후쿠야마에서 왼팔, 다카쓰키에서 왼다리, 교토 시 니시교 구에서 몸통이 발견되면서 사건은 전대미문의 광역 사체유기사건으로 발전했다. 나아가 니시아자부와 사이타마에서 발견된 손과 발의 신원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다. 잔학무도한 범행으로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있는 수수께끼의 '이탈자' 집단. 수사선상에 오른 의외의 인물은- (2권, 110쪽)

 

사건은 1권이 거의 마무리되는 단계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범죄 소설임을 이미 알고 읽기 시작했기에 더딘 진행이 자못 지루했고, 모든 인물과 모든 대화가 다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벌어질 거지? 도대체 이들 중 누가 죽는거지? 누가 죽일거지? 그리고 그러한 살인 사건은 왜 일어날 거지? 어떤 시작, 어떤 과거, 어떤 어린시절을 거쳤기에 누군가는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거지..? 이런 생각때문에 오본을 맞아 귀향하는 평범한 한 가정의 구성원들의 행동이 모두 기묘하게 보였으며, 그들이 건네는 말 한마디가 모두 속뜻을 품은 것처럼 미스터리하게 여겨졌다. 그런 긴장감이 점점 무료해지고 자못 짜증으로 변해갈 때 쯤 사건이 시작된다. 너무 잔인하고, 처참한 모습으로. 작가가 하려는 말은 고작 상상 이상의 잔인한 살인장면 뿐이였을까 의심이 갈 만큼 잔혹한 살육이.

1권이 사건의 시작과 형 다카시의 정체에 대한 의심을 증폭시키는 기폭장치였다면, 2권에서는 그야말로 '결괴'로 악마의 메세지를 담은 모방 살인사건은 일본열도 곳곳에서 발발하며, 인터넷에서는 악마를 자처하는 범행성명문이 흘러 넘친다. 이처럼 한번 터진 '악'에 관한 봇물은 주체하지 못할 곳으로 점차 흘러 넘치며, 급기야 한 소년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해 묻는다. '왜 사람을 죽이면 안되나요..?'

왜 안되는가. 내가 남으로 부터 억지로 비명횡사하지 않기 위해. 내 가족이 그러한 처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사회속의 개인들은 해서는 안되는 일과 해도 되는 일에대해 암묵적인 약속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 사실은 터져버린 방죽처럼 생활 곳곳으로 스며들어 축축한 습기를 남기며 점차로 암묵적인 사회규약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간다. '왜 일까..?'

 

살해된 것은 한 사람이지만, 정작 죽음보다도 깊은 고통을 겪게되는 것은 남아있는 그들 가족 모두였다. 가족이 살해되었다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나눠가졌지만, 그들은 그들끼리도 서로 상처내고, 원망한다. 직접적인 사인은 네가 아닐지라도 결과적으로 너 때문에 죽었을 것이라는 서로를 향한 원망의 속 뜻은 자기자신을 향한 자책을 피하고자하는 나름의 방어기제일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믿기 위해 너를 원망해야 하는데, 다카시는 애초부터 방어기제랄 것 없이 자기 자신을 원망했던 것 같다.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지나치게 유능한 다카시는 어디서나 인정받고 사랑받는 존재였지만, 그때문에 거북한 존재이기도 했다. 부모에게도 형제에게도. 뿐만아니라 자기조차 자신을 믿지않을 때, 그는 어떻게 해야할까. 그리고 그가 살아갈 수 없도록 주변의 상관없는 사람들은 정의를 가장한 호기심으로 점차로 그가 설 공간을 압박해 간다. 너 따위는 죽어버려! 라는 메세지는 도처에서 넘쳐나고, 사람들은 모두 그런일은 없었다는 표정을 짓는다.

살인이 꼭 손에 칼을 들어야만, 피를 묻혀야만 살인이 아닌 것이다. 책임질 수 없는 말, 자신의 감정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말, 혹은 감정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말들로 사람은 죽기도 하는 것이다. 범인은 살해 전에 희생자에게 말한다. "말이 너 자신과 완전히 일치하도록 책임을 져! 라고.

그런 한편으로 상대에 따라 말과 분위기를 맞출줄 알아 모두로부터 다정다감한 인간으로 여겨지던 다카시야말로 사실은 공감능력 제로의 반사회적인격장애자 였던것이 아니였나 의심이 든다. 모두에게 왕따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로부터 자신을 왕따시키는 자. 다카시는 그 스스로 '이탈자'가 되어 궤도를 이탈해 버린다. 나는 다카시의 행동에 의혹과 함께 안쓰러움을 느낀다. 조금쯤은 무능한척 그렇게 적응할 수는 없었을까. 순응하는 자가 되어 그렇듯 무심하게 살아갈 수는 없었을까.

 

현대는 갈수록 정신병과 관련한 병명을 늘려가고,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는 자들을 이른바 '부적응자'로 분류하며 관리한다. 근대형 권력 형태는 인간의 신체를 적극적으로 관리 경영해 왔다는 다카시의 말처럼 권력은 점차로 인간의 정신 조차도 관리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현대의 악이 그야말로 건강의 결여에 불과하다면 용서니, 책임이니 하는 것들은 다 듣기좋은 말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다카시는 용서의 불필요를 믿었던 것이다. 용서를 받을 필요도, 용서를 할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더불어 살아갈 이유조차도.

1권을 읽고서 히라노 게이치로도 자극적이고, 변태적인 범죄 소설을 써버렸다고 한탄했던 것과 달리 2권을 읽고나자, 그토록 잔인한 살인이 아니였다면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을 세상을 살고 있는 거라고 막연하게 끄덕이게 된다. 금각사가 불타지 않았으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남지 못했을 것이며, 미시마 유키오가 할복하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탐미문학의 거봉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의미에서 이 소설은 그저 단순히 범죄소설이 아니다. 철학서 만큼이나 복잡하고 생각거리가 많으며 그만큼 어렵다.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라 한가닥으로 정리하기조차 힘겹다. 많은 말들이 속에서 웅웅거리는데, 어떻게 꺼내야할지 도대체 모르겠는거다. 어쨌든 히라노 게이치로 그는 천재일뿐만 아니라, 음울한 관찰자이다. 어쩌면 다카시는 그의 분신일 수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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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11-13 1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식>을 읽다보면 유럽사에 대한 히라노 게이치로의 탄탄한 배경지식에 놀라게 됩니다.초중고교 내내 교과서,참고서,문제집만 학습하는 우리 학교 교육에서는 그런 해박한 지식을 20대에 갖추기가 힘들죠.

비의딸 2013-11-13 17:20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덕분에 <일식>을 읽어볼 용기가 생기는데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