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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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 씨'라는 영화 제목에서 차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막돼먹은 영애 씨'를 아버지 카라마조프를 보면서 떠올렸다. '막돼먹은 영애 씨'라는 프로를 안 보았기 때문에 영애 씨가 정말 막돼먹었는지, 막돼먹었다면 어떤식으로 막돼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카라마조프 가의 아버지 표도르를 보면서 그야말로 '막돼먹은 표도르 씨'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두 아내에게서 세 아들을 얻었다. 지참금을 들고 온 아내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지참금은 고스란히 표도르의 차지가 되었으며, 그녀들이 남긴 아들들에 대해서라면 표도르는 소 닭 보듯 여긴다. 결국 그들은 남의 손에 의해 성인이 되어 표도르를 방문한다. 첫째 아들 미챠는 어머니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아버지와의 담판을 위해, 둘째 이반은 형의 약혼녀인 카체리나에 빠져서, 셋째 알료샤는 거룩한 수도사가 되기 위해 그들의 고향이며 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는다. 그 와중에 미챠는 아버지가 눈독을 들여온 그루센카에게 홀딱 반하고, 아버지는 아들과 연적이 된다. 그리고 곧 일어나는 살인 사건. 과연 범인은 미챠로, 친부를 살해한 것일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나면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회심리학 교수의 말에 힘입어 오래 전에 읽기를 시도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1권의 1/3도 채 읽지 못했다. 불화중인 카라마조프 가의 남자들이 추종자들에 의해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화해를 위한 회합을 갖기로 한 장면 쯤 까지로 기억하는데, 자못 연극적이며 장황한 대사들에 기가 질렸고, 셋째 아들인 알료샤를 비롯한 종교적인 장면들이 거북스러웠던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읽기를 시도했던 민음사 출판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전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권 한 권이 너무도 두껍고 투박한 일명 벽돌책이기 때문에 미리부터도 잔뜩 긴장했던 탓도 있겠다(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에 대해서라면 나름 불만이 좀 있는데, 번역이 좋고 책이 튼실하다는 훌륭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홀쭉한 판형으로 인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처럼 들고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책들이 더러 있다). 원본의 판본을 따른 탓이겠지만, 4부 12편에 에필로그까지 있는 마당이라면 좀 더 읽기 좋게 나누어 분철했더라도 좋지 않았을까. 이건 뭐 책 세 권을 읽는 동안 손목 골절이라도 생긴 것 마냥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읽기를 실패한 후, 오랜기간 다시 읽기를 시도하기조차 껄끄러웠던 카라마조프네의 이야기를 읽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은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를 읽으면서 였다. 촘스키는 이 책에서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의 서사시 '대심문관'에서 발췌한 부분을 인용했는데, 바로 이 글을 읽고 지금이라면 카라마조프가 어렵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약하고 미천한 대중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복종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은 소심해지고 겁먹고 행복해 질 것이다.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 193쪽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해 낸 것일 수 있겠다는 의심을 요즘들어 하고 있는 나에게 이보다 더 흥미로운 글이 없었다.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닐 수 있겠다 라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인간과 세상을 그의 피조물로써 '사랑'한다면 우리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고나면 어서 빨리 자신이 경배할 대상을 찾는 것보다 더 끊임없고 더 고통스러운 근심거리는 없는 법.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이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 공통적으로 함께 경배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서로를 검으로 박멸해 나갔지. 그들은 신을 창조했고, 서로서로에게 너희의 신을 버리고 와서 우리의 신들 앞에 경배하라. 그러지않으면 너희와 너희 신들에게 죽음이! 라고 호소했지. -1권, 535쪽

1600쪽이 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역시 백미라면 이반이 열 페이지 넘게 읊어대는 자신의 서사시 '대심문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심문관은 어느날 재림한 예수를 비난하는데, 인간에게는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희생 할 만한  믿음이 없으며, 때문에 그들에게는 권위에의 복종을 위한 신비나 기적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도 설득력있게 들려서 나는 대번에 이반에게 빠져들었다. 이반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악마에 가깝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악마라기 보다는 투철한 자의식으로 무장한 지적인 인간인 것이다. 오히려 악마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므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반의 주장은 악마적이기 보다는 탐구적으로 여겨지며 바로 그점이 나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그는 뭇대중처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서지 않으며, 경배를 받쳐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의심을 내려 놓지않는, 그러나 결국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그에 비해 순종적이며, 지극히 선하고 순수해 그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천사와 같은 알료샤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역시 반감을 가졌는데, 정령 인간은 천사일 수 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카라마조프의 핏줄이 아니던가. 인간에 대해 의심이 많은 나로서는 알료샤의 내면에 대해서도 역시 믿을 수 없다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아버지인 파블로비치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첫째 미챠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머리보다는 행동으로 말하고 부패 속에 영혼을 질식시키는 방탕한 자이며, 다소 희극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저열함도 언뜻언뜻 비쳤는데, 그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적 저열함이라고 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카라마조프라고 여겨지는(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와 백치 여인 사이에서 잉태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하인 스메르자코프에 의하면 표도르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은 의외로 둘째인 '이반'으로 밝혀진다. 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케케묵은 위선과 미사여구에 대한 반항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반의 그것은 아버지인 표도르의 광대짓에 견줄만도 하다 싶다.

 

방탕하고 탐욕스럽고 저열하며 막무가내인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살해 되고, 미챠는 친부 살해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미챠가 살해범이라는 증거는 바닷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널려있고, 사람들은 모두 미챠가 범인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료샤만은 미챠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는다.

3권의 삼분의 일 가량을 차지하는 이 재판 장면은 소설의 절정인데, 미챠를 친부 살해범으로 모는 검사의 가열찬 주장이나 배심원의 동정을 유발하기 위한 변호사의 절절 끓는 논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특기인 장황함으로 몇 장에 걸쳐 계속되지만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없다. 변호인으로 페테르부르크로부터 초빙된 페츄코비치는 살인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친부 살해는 아니라는 희안한 주장을 펼치는데, 낳았다고 다 아버지가 아닌 즉 아버지 노릇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를 아버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친부 살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페츄코비치의 바로 이 주장 때문에 미챠는 전락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막돼먹은 아버지일지라도 어떻든 부권에 대한 도전은 폐륜이며, 살인은 죄악이라고 보는 심성은 꼭 배심원들이 촌놈에 지나지 않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이 역시도 어쩌면 가장 러시아 적인 심성이 아니였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십 대에 사회주의 경향을 띤 모임에 참석하고,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극적으로 감형된 후, 어이없게도 극우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때문에 친부 살해라는 본 사건은 조국인 러시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거나 신에 대한 반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 최후의 작품으로 그의 모든 인생과 역량이 집대성 되어 있는 만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죄와 벌>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라마조프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죄와 벌>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졌고, 그 외의 <악령>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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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블로모프 1 대산세계문학총서 10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곤차로프 지음, 최윤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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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차로프의 몇 편 되지않는 작품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작품이라는 <오블로모프>를 읽었다. 곤차로프라는 작가의 이름조차 몰랐던 나는 석영중 교수가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에서 먹다가 죽은 남자로 소개한 '오블로모프'에 급 호감을 느끼고 이 책을 읽게 된 것이다. 석영중 교수는 <오블로모프>는 러시아 요리의 백과사전이랄 만큼의 온갖 요리들과 함께, 한 귀족지식인의 무기력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이라 했다.

당시 대다수 러시아 작가들과 마찬가지로 곤차로프 역시 중류 계층의 지주 귀족을 주인공으로 등장 시켰다. 이 소설로 인해 허무감에 빠지고 무기력하며 시대에 뒤떨어진 19세기 러시아 사람을 일컫어 오블로모프 기질(오블로모프시치나)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곤차로프는 소설에서 느긋한 몽상가 오블로모프와 민첩한 실리적 인물의 전형인 독일계의 슈톨츠를 대조하며 옛 러시아 귀족주의 전통과 함께 막 발달하기 시작한 자본주의 산업화가 서로 불안하게 공존하는 당시 러시아 사회 상황을 조명한 것이다.

게으르며 무사 태평한 타고난 귀족 오블로모프는 죽음과 같이 잠든 상태에서 그만 깨어나라고 소리치는 슈톨츠에게, '자만심과 우월감으로 가득찬 혐오스러운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며, 자신이 더 고상하다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항상 누구보다 앞서야 한다는 경쟁심에 사로잡혀 쫓기듯 사는 사람들이 오히려 잠을 자고있는 것은 아니냐, 그들이 오히려 죽은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냐'고 강변한다.

 

누구에게서도 환하고 평온한 시선을 발견할 수가 없어. 모두들 서로에게 어떤 괴롭기 그지없는 근심과 우수라는 전염병을 옮기고 있고 병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어. 진리며 선행도 자신에게나 관대할 뿐 남을 위한 것들은 전혀 없고, 동료의 성공에 얼굴이 백짓장으로 변해버린 단 말일세. 어떤 이는 근심을 하지. 내일 관청에 출근을 해야 하는데, 일이 오 년째 답보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반대파가 치고 올라오고 있어. 그러니 오 년 내내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야. 어떻게 해서든지 반대파를 막고 공격에 대비해서 자신의 행복이라는 건물을 쌓아올리고야 말겠다는 야심. 오 년 동안을 하루같이 왔다갔다하고, 사무실에 앉아서 한숨만 내쉰다네. 바로 이것이 삶의 이상이자 목표란 말일세! 또 어떤 사람은, 매일 관청에 출근해서 오후 5시까지 근무를 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왜 나에겐 행운이 찾아오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무거운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네. -285쪽

오블로모프의 이러한 모습은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떠오르게 한다. 바틀비는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자발적 의지를 강하게 표하며 어느날 그렇게 죽어간다. 물론 오블로모프의 경우, 어린시절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귀족의식에 의한 '무위'이다. 다른 사람의 수고를 통해서만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면서도 그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귀족'이라는 족속의 생리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오블로모프는 바틀비와는 전적으로 다르며, 또한 바로 그렇기때문에 오블로모프의 '무위'는 게으름으로 지탄받아 마땅할 것이다.

귀족이나 하인, 농노의 개념은 사라졌지만 자본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오늘날에도 인간 사회의 계층이나 제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으며, 바틀비는 바로 그것을 거부했던 것이다.

 

한편, 귀족적 무위 의식에 허우적거리는 오블로모프는 사랑조차도 자기 스스로 챙길 수 없는 무능력한 존재로 보여 답답했다. 때문에 오블로모프와 올가의 사랑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1권이 지루했다. 먹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라니 이보다 더 지루한 이야기가 있을까. 사랑하는 여인 올가와 헤어지게 되면 죽어버리겠다는 말을 그야말로 밥 먹듯이 하는 오블로모프이지만, 그녀와 헤어지게 되더라도 절대 그가 죽기 않으리라는 것은 올가도 알고, 나도 알고 오블로모프 그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죽겠다는 그의 말은 그저 그 순간을 모면하고, 자신의 사랑을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한 핑계인 것이다.

 

또한 오블로모프는 자기가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것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주어지는 것인지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로 차려지는데로 무작정 받아 먹고 마시며 잠만 잔다. 심하게 비약하지 않더라도 그 모습은 막사의 돼지를 떠오르게 하는데 그것이 오블로모프 기질, 즉 19세기 러시아 귀족의 모습이라니 곤차로프가 귀족에게 어떤 억하심정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좀 의심이 가는 대목이다.

어쨌든 오블로모프는 농노의 피를 받아마시며 무위도식하는 러시아 귀족의 대표격으로, 자신의 시중을 받는 자하르와 아가피아 마트베이브나와 그밖의 3백명이나 되는 농노들의 맹목적 충성심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궁금한 것은 자하르와 아가피아 마트베이브나 같은 충성심을 바치는 쪽 인간들의 심리인데, 그들의 노예근성이 내심 놀라웠던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본시 누구에겐가, 혹은 무엇에겐가 충성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을 만큼 약한 것은 않을까 하는 생각하는 한편,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숙명이었다 라고 여겨진다. 귀족계급은 조상대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농노들의 충성으로 살아온 이상, 하얀얼굴에 부드러운 손, 여린 심성의 귀족 기질을 후손대대로 이어갈 수 밖에 없는 것 아닌가 말이다. 결국 귀족이란 족속은 스스로 살아갈 방도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멸족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편 정력적이고 활동적인 슈톨츠는 미사여구로 노동을 예찬하고 바쁘게 돌아다니며 부지런한 삶을 예찬하지만 그의 목적은 부의 축적에 있다. 그런만큼 그는 계산적이고 노련한 삶의 방식을 고수한다. 슈톨츠의 이런 약삭빠른 모습 때문에 오히려 인간성과 미덕을 갖춘 인물로 그려지는 오블로모프의 '무위'가 더 인간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순간도 있었으니, 이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어떻든 나 역시도 할 수만 있다면 되도록 활동이나 노동을 줄이고, 정신적인 활동에 더 많은 중점을 둔 생을 살고싶은 것이 사실이니까. 다만, 다른 사람을 나의 필요를 위해 이용하지는 않아야 겠지만 말이다.

오블로모프의 삶의 방식을 돼지의 그것이라고 비하하는 심정과 함께,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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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0
니꼴라이 고골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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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골은 인간의 약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인간의 약점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속물성이다.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속물성에 대해 고찰해 보자. 속물성은 자주 웃음과 혐오를 유발한다. 고골은 자기 인물들의 속물성을 곧 그들의 도덕적 결점으로 인정하였다.  속물성은 상투적 생각, 즉 독자적인 내면적 지향을 지니지 못한 인물들의 특징이다. 그것은 창조성과 무관하며 일반적이고 상투적인 생각의 집합일 뿐만 아니라 진부한 표현과 속물적 언어의 사용으로 나타난다. 속물성은 중간계급의 보편적 산물이며 순응주의자들의 속성이다. 그것은 집단적 성격을 반영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가짜다. 그들의 속물적 일상성은 세계에 대한 주체적 인식과 적극적 발언의 자리를 마련하지 않는다. 속물적 인간들의 주요 관심은 주로 세속적인 욕망으로 衣, 食, 住, 性, 富, 명예, 승진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러한 물욕에만 관심을 두고 진부한 표현과 속물적 언어를 구사하는 시장과 지방 관료, 그리고 홀레스따꼬프는 대표적인 속물들이라 할 수 있다. -201쪽, 작품해설 중.

러시아의 소도시에 암행 검찰관이 뜬다는 소문을 들은 시장과 관료들은 여관에서 돈이 없어 떠나지 못하는  홀레스따꼬프를 검찰관으로 여기고 자신들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극진히 대접하며, 돈까지  바친다. 한편 거짓말쟁이, 사기꾼, 바람둥이 홀레스따꼬프는 자의는 아니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순순히 이용해 한몫 단단히 챙긴후 마을을 뜬다. 그리고 이어서 마을에는 진짜 검찰관의 도착 소식이 울려퍼진다.

재미있는 것은 이 희곡을 읽는 동안 거짓말쟁이 사기꾼 홀레스따꼬프의 사기 행각이 발각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생기더라는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민초들을 이용하는 부패한 관리들에게 따끔한 맛을 뵈주었으면, 싶은 바램이 있었기 때문이다.되는대로 막 지껄이는 홀레스따꼬프의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들의 틀 속에 재단하는 부정한 관리들은 홀레스따꼬프의 황당한 거짓말에 두려움의 진위를 판단할 이성조차 잊은채로 두려움을 느낀다.

사기꾼 홀레스따꼬프나 부패한 시장은 같은 종류의 인간들이다. 때문에 나라나 법에 의해 처벌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종류의 속물적 인간에 속아넘어가는 시장과 관료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실에 실소하며 통쾌함을 느꼈다.

 

홀레스따꼬프의 속물성은 홀레스따꼬프시치나(홀레스따꼬프주의)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홀레스따꼬프시치나는 자기 비하와 자기 경멸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홀레스따꼬프의 거짓말은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무한한 경멸에서 출발한다. 때문에 거짓말 속에서 그 자신은 말도안되는 여러 인물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고, 홀레스따꼬프와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이랄 수 있는 시장 및 그밖의 인물들이 홀레스따꼬프의 황당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 갈 수 있었다.

또한가지 중요하게 볼 점은 고골의 작품속에 등장하는 풍자적 웃음은 언제나 '누군가를 비웃는 것은 자신을 비웃는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검찰관>의 부제는 '제 낯짝 비뚤어진 줄 모르고 거울만 탓한다.'라는 속담이라고 한다. 이 희곡을 읽으며 실소하고 통쾌해 하는 독자조차도, 제 속물성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씁쓸하다. <검찰관>에 등장하는 속물적 인간들의 모습은 부정하고 싶지만 바로 내 모습일 수 있으므로.

독자적인 내면의 깊이를 완성하기 위해, 적어도 순응주의자는 되지 않기 위해 나는 오늘도 책을 읽을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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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 - 박홍규, '에세'를 읽으며 웃다
박홍규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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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몽테뉴의 <수상록>이 학창 시절 필독서였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쨌든 학교에서 필독서라고 꼭 집어주던 책들은 몹시도 재미없고, 지루하며, 고리타분했다는 기억이 있고, 덕분에 고전이라 불리는 책들을 더더욱 멀리하게 되더라는 청개구리 심보는 잘 기억하고 있다. 이것이 꼭 내 청개구리 기질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지만, 아이를 키우다보니 부모가 혹은 학교에서 좋은거라고 권하는건 꼭 하지않더라는 건 알겠다.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책 읽기'라는 부제를 단 김운하의 <카프카의 서재>를 읽다가 몽테뉴에 급작스러운 관심이 생겼다. 김운하는 사는게 뭔가 싶은 고독과 우울속에서 집어들게 되는 책이 몽테뉴의 <수상록>이라고 했다. 나로서는 살아야 할 이유보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몽테뉴를 읽고 싶어졌다. 그러한 이유로 사다놓은 <수상록>(권응호 옮김/홍신문화사)는 읽기가 쉽지 않다. 어쩐지 책만 집어들면 잠이 쏟아져 한두 페이지를 넘기가 힘겹다. 오랜 세월의 탓도 있겠으나, 문화의 탓도 있겠고, 번역의 탓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해서 책장에 곱게 모셔둔 <수상록>을 볼 때마다, 읽어야 한다는 강박만 깊어지는 듯 하다.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읽으며, <몽테뉴의 숲에서 거닐다>와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전기를 알았다. 왠일인지 두 책다 절판 된 상태로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었지만 홋타 요시에의 몽테뉴 전기는 도서관에서, 박홍규의 이 책은 중고서점에서 어렵게 구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몽테뉴 <수상록>의 해설판과 같은 책이다. 몽테뉴가 에세를 쓰게 된 배경, 몽테뉴의 개인적 이야기, 에세가 의미하는 것, 에세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또 몽테뉴와 현대는 어떻게 조화로운지 등등. 나처럼 몽테뉴의 '에세'가 궁금하지만, 쉽게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참고서 같은 책이다. 이 책의 도움으로 <수상록>에서 '철학은 죽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를 읽었다. 그러나 역시 몽테뉴의 문장 그대로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않다. 그나마 이 책이 없었다면, 그 한꼭지 조차도 끝까지 읽지 못했을 것 같다.

박홍규 교수에 의하면 수상록과 같은 좋은 책이 우리나라에서 좋은 번역으로 출판되지 않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데, 나역시 그렇다. 읽기에 버겁고, 펼치기만 하면 졸음이 쏟아지는 그런 책 말고 읽고싶어지는 그리하여 충실하게 살고 싶어지는, 혹은 죽음을 겁내하지 않게 되는 그런 '에세'가 출판되어 준다면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이다. 박홍규 교수야 뭘 좀 아는 사람이니 그런 말을 자신있게 하는 것일테고, 나는 뭘 좀 모르니까 쉽게 읽고싶을 뿐이다.

 

물론 책을 읽어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는 케케묵은 것인지도 모르나,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리라. 그 가능성의 하나가 글쓰기의 문제다. 나는 새로운 글쓰기의 표본으로 몽테뉴를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99쪽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고서만 백날 읽은들 소용없는 일 일터. 읽기 쉽고 지루하지 않은 몽테뉴의 '에세'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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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4-03-23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저도 있고 박홍규 교수님은 저도 무척 좋아하는 저자에요 이 분 책은 매번 사죠
 
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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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날마다 중계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 안의 사람들은 그것이 비극인지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이, 지켜보는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든다. 사건 현장에는 경찰이 출동하고, 방송 카메라가 들이닥친다. 인터넷은 비난여론으로 끓어오르고, 사회는 경악한다. 현대의 비극은 그렇게 떠들썩하게 상연된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288쪽/해설/차미령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의 불행에 대해. 표면적으로 들어난 조각들을 대충 끼워맞춰 보여주는 언론플레이 외의 사실, 진실에 대해서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고통스러웠는지, 그들이 얼만큼 불행을 느꼈는지,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는지, 결과로 중계되는 현실 사건은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일인지.

 

백가흠. 여인인줄 알았더니 꽃미남이다. 책날개에 인쇄된 사진을 들여다 본다. 살짝 숙인 얼굴과 손가락의 각도, 부드럽게 주름진 웃음짓는 눈꼬리와 입꼬리. 백가흠이라는 이름에서 느꼈던 어딘가 당찬 여자, 이를테면 <아웃>의 기리노 나쓰오 같은 타입의 여자일 것이라는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백가흠의 모습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자, 백가흠이란 미묘한 이름이 더더욱 미묘해지고 부드러운 그의 웃음이 약간은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뼈아픈 이야기를 썼지만,

<조대리의 트렁크>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은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뼈가 아프지는 않았다. 가출 소녀에게 일방적인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아이를 매일 기다리는 폐품팔이 할아버지의 헌신에, 쓰레기와 함게 뒹구는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굶주림에도, 옷장안에 숨어 누군가의 자살을 엿보는 한 아이의 비참한 마음도, 권위에의 맹종이 불러온 참사로 꽃게처럼 걷게 된 한 젊은 남자의 비극에도, 나는 가끔 가슴을 쓸며 그저 얼마간의 안타까움과, 혀차기, 그리고 '세상이 뭐이래!' 따위의 불만 한마디면 충분한 것 같았다.

나는 모른다. 폐품팔이 할아버지가 말도 안되는 헌신을 하고도 자신을 비참하게 느끼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아이를 쓰레기더미 속에 방치하면서도 때때로 행복했을 한 어린 엄마의 마음을, 멀쩡한 몸으로 군대를 간 후 꽃게걸음을 걷게 된 아들을 둔 엄마의 찢어지는 가슴을,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살아갈 세월을. 어쩌면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쉬운 연민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읽다가 <조대리의 트렁크>를 발견했다. <침대와 책>에 의하면, 백가흠은 신문의 사회면을 자주 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보다 현실이 더 가혹한 것 아니냐고 했다는데.... 가혹한 현실을 내 피부로 느끼지 않음을 그나마 감사하며 살고 싶은 소시민적 생각이 든다.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은 나의 이기심을 그저 소심함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아, 눈 감는다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이여. 그러나 본다고 해서 내 것처럼 느낄수 없고, 사실은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러나 느낄 수 있어야만 좋은 세상이 되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있는...

 

동정Sympathy은 상대방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나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슬퍼할 때 나도 같이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동정이다. 그러나 공감Empathy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을 깊이 이해한 후에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을 하려면 타인을 나와 분리된 독립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고, 그의 마음을 잠시 내 것처럼 느껴도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건강한 자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아의 경계가 약한 사람들은 공감해야 할 순간에 상대방과 하나로 합쳐져 버린다. 즉 남의 고통에 사로잡혀 자신도 구덩이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탓에 시련이나 아픔과 만나는 것을 꺼린다. (심리학 나 좀 구해줘/폴커 키츠, 마누엘 투쉬 지음/갤리온/86쪽)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지만, 이 책에 의하면 나는 적당한 거리의 안정된 내 울타리 안에서 가끔 눈물을 흘리는 정도로만 만족하며, 그들을 동정하고 편한한 내 삶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이 끔찍하게 여겨 질 때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는 아직도 내겐 요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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