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와 책 - 지상에서 가장 관능적인 독서기
정혜윤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정이입이다. 손쉬운 감정이입을 하는 한, 넌 행동하지 못한다."(80쪽)

어느해 겨울 길거리에서 선배가 정혜윤에게 했다던 이 말은 행동 대신 말을 앞세우는 내 문제이며, 내 약점이기도 하다. 연민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곤 하는 손쉬운 감정이입 뒤에 숨은 것은 그와 같은 불합리를 겪는 것이 나는 아니라는 안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이 늘 당면의 문제이기도 하거니와 더 큰소리로 더 강하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문에 수잔 손택의 <타인의 고통>을 읽을 책 목록에 적어둔다.

너의 가장 큰 약점은 감정이입이다. 손쉬운 감정이입을 하는 한, 넌 행동하지 못한다. 이 한 문장 만으로도 이 책을 읽유는 충분했다.

 

정혜윤의 책 이야기를 좋아하지만 한편으로 싫어하기도 한다. 이유인즉, 책 이야기이되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녀의 책 이야기가 좋다. 그런 한편으로 개인적인 감정 난입이 조금 지루하거나 영 생뚱맞아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할 때도 있고, 간혹은 잰체하는 그녀의 문장이 영 싫을 때도 있다. 너무 감각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감각 노출증이 있다 할까. 항상 자신의 감정 최대치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고 할까. 나 역시 관음증자이기 보다는 노출증에 가까운 사람이니, 너무 되바라지게 보여주는 그녀가 가끔은 지루해지는 것으로 질투의 감정을 감추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혜윤의 책 이야기가 좋다. 책을 통해 끝없이 세상과 대면할 기회를 모색하며, 오로지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두어야 할 이유를 찾고, 인간은 끝없이 배워야 한다라고 되뇌는 그녀가,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딱 내 스타일이기 때문에.

 

마지막을 장식한 에피소드 '이 글이 우리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에 베트남 여성 후인마이가 유언처럼 남기고 간 글, '하느님은 나에게 장난치고 있다'가 귀에 자꾸만 울린다. 이처럼 정혜윤 그녀는 책 이야기 하기를 즐기지만, 그녀의 책 이야기 속에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있어 좋다. 때문에 그녀의 책 이야기에는 앞으로도 계속 귀를 기울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책을 덮고 나자 영화 <브로크백 마운틴>을 다시 보고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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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거기, 머물다 - 공경희 북 에세이
공경희 지음, 김수지 그림 / 멜론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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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풍의 힐링책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문제가 무엇이든 개인으로 시작해 개인으로 끝나는, 그래서 지쳐 쓰러지더라도 책임을 다하고 끝끝내 희망을 잃지말라는 둥의 나긋나긋한 강요가 버겁기 때문이다. 고달프고 힘들겠지만, 그건 너 뿐만이 아니며 어떻든 인생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노래하는 그야말로 예쁜 이야기가 그러니 '너도 정신차리고 살라'는 설교로 들리곤 해서 피곤해진다. 그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지만 실제로 행하지는 못할 때, 이상은 높되 현실이 받쳐주지 않을때는 차라리 애초에 나와는 맞지 않는 것이라고 애써 부정하고 싶은 그런 심정으로 힐링서들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에게는 나름의 취향과 작풍이 있듯 번역가에게도 그런 것이 있는 것 같다. 무엇을 번역하든 인문서를 읽는 것 같은 김석희의 번역이 있고, 뉘앙스와 분위기, 조근조근 느낌을 풀어주는 김남주의 번역이 있듯, 말하자면 공경희는 바른 정신 바른 생활을 모토로하는 '힐링풍'의 책들을 주로 번역한다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어떻는 엄친아이며, 엄치아의 엄마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가. 때문에 인생에 대한 부드러운 찬미를 즐기지 않는 나는 공경희 번역의 책들은 많이 읽지 않았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공경희 번역의 책들을 모아 보았다. <무지개 물고기>, <파이 이야기>, <헬렌 니어링의 소박한 밥상>, <템플 그랜든>, <굿바이, 찰리 피스플>, <우리는 사랑일까>,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역시 많지는 않다. 그렇지만 읽은 책은 이보다는 많다. 그녀가 번역작가로 정식 데뷔한 첫 번역작이라는  시드니 샐던의 <시간의 모래밭>을 비롯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세상의 모든 딸들은 어머니가 된다>, <프린세스 다이어리> 등등...  그리고 그 유명한 <마시멜로 이야기>까지.

책 좀 읽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한 두권 쯤 공경희 번역의 책은 읽어보았을 만큼 대중적이면서, 오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빠지지 않는 책들을 끊이지 않고 작업해온 번역자 중 한 사람임에도 단지 좋아하는 분야의 번역자가 아니기 때문에 나는 공경희 번역의 책들은 많이 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꼭 인생을 찬양하는 분위기의 아름다운 글들 만을 번역했던 것은 아니였다. 책 뒤에 실린 그녀의 번역서 목록을 보다 보니 다소 당황스러운 책들도 있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의 <좀비-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라거나, 존 그리샴의 <그래서 그들은 바다로 갔다>와 같은 스릴러부터 유아용 그림책까지 넓게 포진해 있었던 것이다. 아, 글쎄 더글라스 케네디의 책들을 그녀가 번역했다는 것에서는 정말 놀라고 말았다. 어쩌면 그녀는 분야를 아우르며 작품을 선택하되, 그녀만의 독특한 작풍을 유지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싶다. 무엇을 읽든 자기만의 독특한 감상을 남기듯, 번역 또한 역자의 분위기가 묻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테니까. 그래서 번역은 또 하나의 문학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녀의 북 에세이 역시 그런 느낌의 글이다. 번역한 책 중 오십권 가량을 골라 각 책에 실린 '옮긴이의 글'을 옮기고, 그에 대한 현 시점의 감상을 적었는데, '옮긴이의 글'이라지만 딱딱하지 않고, 그녀 특유의 느낌을 살려 번역자로서의 전문성보다는 독자로서의 감상에 치중한 글들이다. 전문적인 서평보다 개인적 감상글을 좋아하는 나는 갓구워나온 말랑하고 부드러운 식빵을 손으로 찢어먹는 것처럼 친근감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앨리스 스타인바흐가 모든 일상을 뒤로하고 떠난 <앨리스, 30년 만의 휴가>를 번역하는 동안 그녀는 '부럽다'라는 느낌을 반복해서 받았다 했는데,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읽는동안 내내 나 역시 '부럽다'라는 생각이 반복해서 들었다.

부럽다... 우연히 들어선 길이라고 고백했지만, 다행히도 번역작가라는 일이 그녀와 잘 맞아서 이십 오년 간 쭈욱 쉬는 날 없이 일하고 있다는 것도 부럽고, 큰 고비없이 물이 흐르듯 그렇게 유유히 흘러온 그녀의 인생도 부럽다. 책상 위에 펼쳐놓은 책을 보고 지나가던 남편이 한마디 한다. '너도 번역작가 하지 그랬어? 잘했을 텐데.' 툭 던지고 가는 그 한마디에 공경희라는 역자가 내게는 끝끝내 부러움으로 남게 되었다.

 

책을 읽다 불현듯,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읽고 싶어졌다. 처음 읽었을 때는 세간에 알려진 만큼의 감동이 없어 조금 실망했던 책이었는데, 독자들은 '잘 죽으려면 잘 살아야 한다'는 부분에서 대부분 감동을 받지만, 역자인 자신은 착취하지 않는 인생에 대해 집중했다는 공경희의 말에 자극을 받았기 때문이다. 해서 잠시 책을 접어두고,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오년만에 다시 읽어 보았다. 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이 정말 좋은 책이라는 것을. 죽음을 앞둔 노학자에 대한 어설픈 동정과 아직은 죽음이 멀었다고 여겨지는 내 삶에 대한 안도가 아닌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골똘한 물음의 책이라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역시 '옮긴이의 글'은 본문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개별적인 글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되었다. 원서로 책을 처음 읽고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번역자는 그저 글자만을 옮기는 단순노동을 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역자가 감동하지 않은 글은 독자도 감동할 수 없는 법이다.

 

출판사에서 외국 출판사와 에이전시와 어렵사리 계약한 책을 나를 믿고 번역 의로하고, 몇 달이나 기다린 끝에 원고를 받아 책으로 엮어내는 일, 그 책이 세상으로 나가 독자에게 찾아가서 그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일. 그 여정 중 어느 한 부분이라도 어그러지면 나는 그 책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할 수 없고, 독자 여러분과도 만날 수 없다. 수개월에 걸친 그 과정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다름없는 기적이다. 거기에는 기대가 있고 믿음이 있고 약속과 성실이 있다. 불면의 밤도 있고 성취의 기쁨도 있다. 때로는 무력감을 낳고 피로가 쌓이고 낙심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설렘과 부끄러움과 보람이 있다. 그러니 모든 과정의 한가운데를 차지하는 '어느 밤의 작업'은 분명 기적이다. 나의 몸과 마음의 건강이 허락해서 그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으며, 글 속의 시간과 공간으로 들어가 여러 인물과 만나며, 거기 담긴 모든 것을 우리 글로 담아 독자에게 전달하는 과정이 내게는 기적이다. 크나큰 기적.(172쪽)

 

그녀가 번역에 임하는 마음가짐을 잘 알 수 있었던 부분이다. 번역한 그녀의 책들이 마치 자식과 같다 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번역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기적'으로 이해한다. 나는 그녀의 말을 오롯이 그대로 마음에 담아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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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살림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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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1979년, 브랜다이스 대학 체육관에서 과 대항 농구 경기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 팀이  뛰자, 학생들은 한 목소리로 응원 구호를 외친다. "1등은 우리 것! 1등은 우리 것!" 모리 교수님이 부근에 앉아 있다. 그는 이 구호에 어리둥절해 한다. 그래서 "1등은 우리 것!" 하고 외치는 중간에, 벌떡 일어나서 그는 소리친다. "2등이면 어때?" 학생들이 그를 바라본다. 그들은 구호 외치기를 멈춘다. 선생님은 앉아서 승리에 찬 미소를 짓고 있다. (204쪽)

 

이 책을 그저 자기계발서나 힐링서들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베스트 셀러를 좋아하지 않아서도 그랬지만, 저 둘 중 한 종류의 책이라고 생각해서 오랜시간 기피한 책이였다. 5년 전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노은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처음 이 책을 읽었던 그때도 고운 시선으로 온전히 책을 읽지 못했다.

 

공경희의 북 에세이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읽다 다시 읽고 싶어진 책이라 책꽂이를 오래 뒤져 찾아내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던 5년 전의 그때는 몰랐었다. 이 책은 노학자의 죽음을 통해 어떻게 살까를 생각하는 힐링서이기도 하지만, 한 사회학자가 바라본 사회심리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 어느 사회분야 책보다도 훌륭한 공동체 문화에 관한 책이라는 것을. 노은사가 죽기전에 유언처럼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진정으로 인간다운 삶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읽어보니 특히 감동적인 부분은 모리가 십대 시절 아버지가 일하는 모피 공장의 열악한 노동 환경을 보고, 다른 사람을 착취하며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부분이였다. 이것은 요즘의 내가 고민하는 일로 인간이 다른 인간을 착취해야만 생존 가능한 자본주의 시대를 처절하게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일 것이다. 오년 전에는 책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역시 그때그때의 상황, 감정, 그간 알게 된 것들에 비례해서 책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보고싶은 것만 보는 것처럼.

해서 나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기를 즐긴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것을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누가 그랬던가, 다시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은 처음부터 읽을 필요가 없는 것이라고.

가수인 미치의 아내가 화석처럼 굳어가는 모리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장면에서 코가 시큰했다. 돌처럼 굳어버린 육체 안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리의 정신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기 때문이다. 

 

'모두들 죽게 된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자기가 죽는다고 믿는 사람은 없어.'(109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것은 한 참 먼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삶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언제 어느때고 덮쳐 올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면, 그 많은 욕망들을 포기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은 '죽음'을 먼 일로, 욕망에 전력투구 하는 동안에는 절대 덮쳐 올 수 없는 것으로 여기도록 사람들을 세뇌한다. 누구든 자신이 언제고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 어쩌면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부드러워지고 삶은 더 나긋나긋 해 질터인데.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좋은 환경이 반드시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모리를 통해 확인한다.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끌어안지도, 말을 걸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8살때 병사했다. 모리는 어린시절부터 따뜻한 사랑을 그리워해왔으며, 자신은 자식이 생기면 그를 끌어안고 키스해주는 아버지가 되주마고 맹세했다.

어떠한 자극(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속에 성장하든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사람은 전혀 다르게 성장할 수 있다. 자긍심, 자존감은 다른 사람이 심어주는 것이 아닌 자기 내면에서 길어올리는 우물과 같은 것이다. 모리는 자신을 믿는 마음과 주변 사람들을 믿는 마음을 끊임없이 길어 올려,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주변의 도움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나는 온전히 함께 하는 시간이 있다고 믿네. 그것은 함께 있는 사람과 정말로 '함께 있는 것'을 뜻해. 지금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난 계속 우리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만 신경을 쓰려고 애쓰네. 지난 주에 나눴던 이야기는 생각하지 않아. 이번 금요일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아. 코펠과 인터뷰 할 일도 생각하지 않고. 혹은 먹어야 되는 약 생각도 안 해. 나는 자네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오직 자네 생각만 하지."(175쪽)

 

온전히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것이 사람이든 음악이든 책이든 함께 하는 대상과 오롯이 함께 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다. 음악을 들을 때는 물론이고, 책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은 금방 딴 생각으로 채워지기 쉽상이다. 하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는 중간중간에도 내 머릿속은 그순간에 전혀 필요치 않은 온갖 것을 찾아 헤맨다. 그러면서도 상대와 함께 있노라고 입은 줄곧 말하는 것이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내 머릿속의 다른 생각들을 밀어내고 온전히 함께 했다면, 모리 교수의 진심을 더 일찍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는 왜 모리와 같은 스승이 없었을까. 내 이야길 들어주고, 내 생각을 물어봐 주는 그런 스승이 내 삶에는 왜 없었을까.  설사 그가 병에 걸려 띄엄띄엄 말할지라도 눈빛과 목소리로 나를 깨워 줄 수 있는 스승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을. 정말 없었을까? 혹시 내가 마음에 문을 꼭꼭 걸어두고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야무지게 다짐했던 것은 아니였을까?

오년 만에 다시 모리 교수와 함께 일요일을 보내며, 내 삶에도 모리와 같은 스승이 있었다면 좋았겠다 하는 부러움을 느낀다. 그나마 책으로 라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감사 할 일이긴 하다. 아, 책으로는 몇 번이고 반복할 수 있는 만남이니 더 감사할 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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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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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일상 속에 어느덧 찾아든 작은 설레임은 격정으로, 격정은 다시 무덤덤한 일상으로... 그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 그 끝에 있는 것은 헤어짐이거나 동료애, 우정 혹은 연민 같은 것으로 남겨지며, 이런 것들이 세월을 덧입으면 '정'이라는 이름으로 끈끈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수순인 것 같다. 간혹 무덤덤해진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을 맞게 된다면 일상은 다시 격정으로, 설레임으로 역순하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랑에는 수명이 있다. 적어도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을 함의한 에로스적  '사랑'에는 말이다.

샹탈과 장 마르크의 사랑도 그랬다. 설레임이 격정으로 변환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불과 하루 반나절하고 30분쯤) 격정이 일상이 될 즈음 샹탈은 권태를 느낀다. 남자들이 더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슬픔어린 그녀의 토로는 나이어린 애인을 향한 투정 아닌 투정일 수 있었겠지만, 장 마르크에게 그것은 샹탈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며, 그녀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혹은 그녀 스스로 나태해져 자신에게 더이상 여자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일종의 불안을 느낀다. 장 마르크는 연상의 여인 샹탈과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모종의 사건을 계획하고, 샹탈은 샹탈대로 연하의 애인 모르게 비밀을 간직하게 되는데...

 

이야기는 재미있고 밀란 쿤데라의 다른 이야기들보다 훨씬 간소하지만, 장면들은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꿈 속인지 현실인지 종잡을 수 없고, 상상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야기들 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으며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시 읽어 보았다. 나 스스로 샹탈이 되어 보았다. 어느날 문득 알 수 없는 존재로 부터 날아온 연모의 편지를 읽은 나는 샹탈과 마찬가지로 한결 생생해지고, 활기차 진다. 알 수 없는 누군가라는 것에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겠지만, 그보다는 미지의 시선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새로운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남자에게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여자로서의 자긍심(?)은 나의 삶 전체를 아우르며 더 살만하고, 더 행복한 세상으로 주변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정체성.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내가 '나'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서로를 비추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정체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꼭 사랑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타인의 존재는 필요하다. 내가 '나'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상은 마침내 의외의 사건 앞에 다시 격정으로 이어지고, 얼마간의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또다시 권태로워지겠지. 의심하겠지. 서로에게 상대가 최선인지를. 그것이 이른바 사랑이며, 인간은 사랑에 의해 더더욱 풍부하고 자긍심 넘치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사랑 이야기가 맞다면, 샹탈과 장 마르크의 사랑은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녀가 이 편지를 쓴 사람이 그라는 것을 짐작했다면 무슨 이유로 그녀는 그것을 그토록 적대적으로 받아들였을까? 왜 그렇게 잔인했을까? 그녀는 모든 것을 짐작해 놓고 왜 그 속임수의 이유는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그의 어떤 면을 의심하는 것까? 이런 모든 의문에 대해 그는 오직 하나의 확신만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긴 그녀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그들의 생각은 전혀 반대되는 방향을 취했고 그 두 방향은 더 이상 만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135쪽)

 

사랑에 위대함이 있다면 그것은 평범을 더이상 평범으로 존재하지 않게 한다는 거다. 일상이 더이상 일상일 수 없게 하는 것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샹탈이 원했던 것은 장 마르크의 일상적 사랑이 아니라, 미지의 남자로부터 받는 일탈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누구나(?) 원하는 사랑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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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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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십대들이 보여주는 삶의 지향이나 행태는 획일화된 외곬으로만 치달은 나머지 살벌한 경쟁 자체가 '모범적인 삶'으로 바뀌어 있다. 사회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을 바람직한 사회생활로 이해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평생을 학습능력 하나로 '단죄'받고 사는 시스템 따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학력차별(학력위계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더 열심이고, 자기계발서를 인생 최고의 경전인 듯 떠받들며 안으로는 극단적 자기관리의 고통에 피가 마르면서도 밖으로는 사소한 경쟁우위를 위해 어떤 차별도 서슴지 않는 걸 '공정'하다고까지 여긴다. 도대체 무엇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걸까? (머리말 중에서)

 

현재 우리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현병호의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를 읽고 난 후, 이 책을 읽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야 겨우 살아남을까 싶은 경쟁으로 부터 내 아이만은 자발적 탈락했다고 좋아라만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열다섯이 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려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보편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강사이고, 이 책은 2008년 부터 시작해 5년간 쓴 박사논문을 일반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재구성한 것이다. 경쟁을 모범적인 삶이라고 여기며 오늘도 '닥치고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이십대 대학생들이 경쟁우위에 서기 위한 경주에서 어떠한 차별도 '공정'하다라고 생각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게 된 경위에 대한 연구이며, 지은이는 그 배후에 노력하면 세상에 못 이룰 게 없다는 식의 '자기계발의 논리'와 그를 배양하고 양산하는 '자기계발서'가 있다고 주장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80% 정도가 대학에 진학하는 오늘날에는 대학 졸업생의 80%는 비정규직에 내몰릴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등장하는, 혹은 지은이에게 강의를 듣고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현재 비정규직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자기계발에 게을러 비정규직이 된 그들은 자기계발에 몸바쳐 헌신하는 자신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모든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보는 불합리한 사회적 함의와 이를 확산하는 자기계발서에 큰 책임이 있다라고 보는 것인데, 이시대의 자기계발이란 진정한 자기함양을 위한 계발이 아니라 고용인으로서 회사에 철저히 충복하기 위한 개발을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십대가 스펙을 쌓고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어떻게든 취업을 하겠다는, 비정규직이 되지 않겠다는,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절체절명의 몸부림인 것이다. 

온오프라인의 서점 판매 순위 1~10위에 있는 이십대 관련서 중 8~9종이 자기계발서라고 지은이는 밝히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한 자기계발과 스펙을 쌓기위해 없는 시간도 쪼개 쓰며, 지칠때마다 자기계발서를 통해 위안을 얻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려니, 전투적인 자기계발 짬짬이 멈춰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살피면서.

 

오늘날의 이십대들이 경쟁을 위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는데, 불안의 이유를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찾지 못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고마는 것이 물론 자기계발서나 힐링서 때문 만은 아니다. 단지 자기계발서 때문이라면 차라리 더 문제가 쉽겠지만, 그 이전에 유아 시절 부터 '나'를 먼저 강조하는(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교육이 문제일 것이고, IMF시대를 지낸 부모의 사회 경제적 불안이 양육과정에서 자녀에게 그대로 전달되며, 공동체의 공존보다는 경쟁을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사회구조적으로 공평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안이겠는데, 구조의 피해자들이 가장 충실한 구조의 유지자로 기여하기에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125쪽) 나가는 것이다. 이에 지은이는 대안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 시발일 수 있다고 보았다.

 나 역시 지은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그 대안을 생각할 때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남을 끌어내리는데 설마 이정도까지 유치하고 각박할까 싶은 것이다. 지은이는 왜 우리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공감하는 게 자기계발 권하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이지 않겠는가(195쪽)고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나는 추상적으로 들린다. 자기계발 논리의 배후로 말하자면 자본일 것인데 말이다. 그것도 거대 자본이.

역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 탈락 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자발적 탈락자들은 어쩌면 패배자로 매도되기 십상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은 높은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허황된 믿음에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올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여기기 십상일 텐데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좀 널리 두루두루 읽혔으면 좋겠다. 적어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보다는 멈추면 보이는 것들 보다는. 그래서 아픈 것은 청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멈춰서 봐야 할 것은 자신의 부족함이 아닌 공동체의 존립 속에 나 개인의 삶이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싶다. 그래야만 우리에게도 미래가 있는 것이니까.


"대개 사람들은 위협당할 때 형편없어지네. 그런데 우리 문화가 사람들을 협박하거든. 우리 경제도 그렇고. 우리 경제 체계에서는 직장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위협을 느끼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니까 걱정이 되어서 말야. 그리고 사람은 위협을 받기 시작하면 자기만 생각하기 시작하네. 돈을 신처럼 여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게 다 우리 문화의 속성이라구."(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세종서적/1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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