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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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드라마가 욕을 먹으면서도 시청률을 높이는데 성공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그 어떤 드라마라도 결말이 뻔한 내용은 인기를 끌 수 없을테고, 그러자면 역시 기대하지 못했거나, 기대했더라도 설마 하는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사람들의 뒷통수를 치거나 혹은 남모르게 속에 묵혀 두었던 비뚤어진 바램을 눈앞에 펼쳐보여 시청자로하여금 어떤 통쾌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닐까.

어쨌든 막장 드라마라도 결말은 정해져 있다. 결혼해서 잘 살거나, 이혼하거나, 그도 아니면 죽거나.

그런 의미에서 <면도날>은 결말이 없다. 사실 모든 소설, 모든 드라마의 결말이 없는 것이 맞지 않은가. 인생은 계속되고, 주인공이 죽더라도 그 다음 이야기는 계속 될터이니까. 그렇다고 <면도날>이 막장 드라마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단지 어떤 결말을 읽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면 <면도날>에서는 그다지 기대할 만한 결말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1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래리는 전쟁 중 동료의 죽음으로 충격을받고 존재와 삶, 선과 악, 그리고 신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이런 래리의 고민을 바라보며 얼키고설키는 주변인물들의 이야기가 소설의 줄기이다. 그속에서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배신하고, 미워하며, 자신의 욕망을 쫓아 동분서주한다. 

인생도 그렇다. '나'라는 주인공이 있고, 그외 나를 둘러싼 인물들의 삶이 있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대로의 바램이 있고, 각자 자신의 바램을 바라보며 달리는 것이 삶이다. 누군가는 달리는 대신 걸을수도, 멈출 수도 있을테고 말이다.

 

이런 것 저런 것을 고민하는 나라는 사람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내가 거만하고 몹쓸 인간이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도 남들 가는 길을 가면서, 그럭저럭 세상사에 순응하면서 사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하지만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쌩쌩하던 녀석이 죽은 모습으로 누워 있던 게 떠올라. 그러면 모든 게 얼마나 잔인하고, 얼마나 무의미한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인생이란 대체 무엇인가, 산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삶이란 눈 먼 운명의 신이 만들어 내는 비극적인 실수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 -84쪽

<면도날>의 등장인물들은 결국 원하는 바를 얻었다. 그것이 결말이라면 결말 일 수 있겠는데, 서머싯 몸은 모두가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이는 일종의 성공담이 아니겠냐며 너스레를 떤다. 일반적 의미의 성공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좀 의외스러웠지만, 오히려 진정한 성공이란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는 것이 아니겠냐는 더무도 당연한 생각이 오히려 새로웠다.

어쨌든 래리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라는 깨닫음을, 이사벨은 빈곤한 영혼을 치장해 줄 돈을, 그레이는 자신을 더욱 남자답게 여기게 할 일을, 소피는 영혼의 안식인 죽음을, 수잔은 딸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안정을 얻게된다. 

 

평생 상류사회를 동경해 일류 것이 아니면 늘 거만하게 굴던 속물 엘리엇의 평범한 죽음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도 결말에는 역시 '죽음'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 하나 죽는데서 끝나지 않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 억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죽으면 어떻든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기에 죽음은 영원히 위안일 수 밖에 없다. 

엘리엇이 죽으면서도 끝까지 놓지 못했던 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이었다. 그가 평생 두려워했던 것은 사교계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것이였는데, 욕망의 근원에는 바로 '따돌림'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돈으로부터, 사람들로부터, 일로부터 따돌림 당하지 않기위해 동분서주하는 인간군상들이라니. 그대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나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 싸울 만한 상대가 없었기에.

자연을 사랑했고 그 다음으론 예술을 사랑했노라.

삶의 불에 두 손을 녹였노라.

불길이 꺼지려 하니, 나는 이제 떠 준비가 되었도다.

-334쪽, 영국작가 랜더의 글.

한때는 시를 사랑하고 시류에 따르는 것을 시시하게 여겼던, 그럼에도 가족의 행복만큼은 그 무엇보다 소중히 여겼던 소피는 줄곧 죽음을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상처뿐인 인생이 측은해서 가슴이 아팠다. 그랬던 만큼 이사벨의 냉혹한 이기가 싫었다. 그녀는 래리를 사랑했다고 절규하지만, 그녀는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집착을 한 것이다. 모래가 흘러내리듯 자신의 손아귀 사이에서 빠져나가는 래리를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토록 소설 끝까지 미운 인물도 드물었다싶도록 줄곧 이사벨이 망하기를, 무엇보다 그녀가 좋아하는 돈으로부터 멸시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기애가 깊은 이와같은 인물들은 결코 망하지 않는 것이 세상 이치인가보다. 권선징악을 권하는 소설은 시시하지만, 이처럼 이기적인 인물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은 역겹다.

 

소설에서도 역시 작가이며 화자로 등장하는 몸 선생은 무엇을 얻었을까. 그는 그 모든 것을 관찰하고 기록하며 자조적인 만족을 얻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얻고 싶을까. 나도 엘리엇처럼 마지막 순간에는 누군가를 욕하며 죽게 될까. 다 이루었다라고 미소짓게 될까. 누구나 원하는 것을 얻는 것이 인생이라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이루어야 할까. 적어도 이사벨처럼 빈곤한 영혼으로 세상을 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소피처럼 날마다 파멸을 향해 달리고 싶지도 않다. 물론 래리처럼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할 수 있는 나이도 이미 지났으니, 나는 그저 책을 읽는 무기수의 삶을 계속할 수 밖에 없겠다 생각한다. 그것은 말라붙어 쩍쩍 갈라지는 메마른 영혼에 단비를 뿌리는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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