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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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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친 부는 타인의 몫을 빼앗는데서 발생되고, 자본과 빈곤은 대물림되며, 자본은 자본만을 무한 증식시킨다는 마르크스의 <자본>에 관한 이론을 높이 사지만, 공산주의에 이르고 나면 왠지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같은 나는, 이 빨간책을 받아들고서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헉! 745쪽, 이게 사전이야 책이야. 새삼스레 왠 공산주의 공부. 기가 질린다. 이걸 언제 읽어. 아니 그보다 이걸 왜 읽어야 해?

 

평등사회를 꿈꾸지만, 그보다 먼저 국가주의 자체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는, 공산주의자보다는 아나키스트에 가깝다는 것을 먼저 고백한다. 내가 마르크스의 시대를 살았더라면 국가의 사멸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편이기보다 그러한 주장은 본질적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간파한 아나키스트 바쿠닌을 지지했을 것 같다.

현재의 나는, 개인의 행복을 위해 국가가 복지를 책임져야 한다라고 믿는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유럽식 사민주의 체제로 가야하는 것이 마땅하다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권리가 묵살되는 공산주의와는 한참이나 다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상향이 실제 공산주의 사회로 실현되었을때, 그들이 주장한 국가의 사멸과는 정확히 반대로 공산주의는 국가 권력을 더욱 더 강고히 했으며, 공산주의의 교리를 설파하고 유지하기 위한 체계 속에서 일개 시민은 묵살되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체제 안에서든, 어떤 식으로든 국가는 개인을 묵살하기도 하더라는 것. 때문에 나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자본주의를 떠나 기본적으로 국가체제를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책은, 지난 세기 동안 세계 3분의 1이 공산주의를 경험했고, 지금 현재도 베트남, 쿠바, 그리고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에 머물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나라에도 적지않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공산주의에 관한 세계사 라고 할 수 있겠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를 지나 바쿠닌, 볼셰비키 혁명,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은 물론이고, 유럽의 공산주의자인 로자 룩셈부르크, 그람시를 지나 미국, 독일, 유고의 티토, 서유럽, 중국의 마오쩌둥, 쿠바의 카스트로, 베트남의 호찌민, 칠레의 아옌데 까지 세계 모든 공산주의 사회와 공산주의자와, 공산주의 혁명, 공산주의에 관계된 지식인들 까지 공산주의를 아우른다. 너무 광범위하고 어지러워서 나로서는 도대체 책을 따라 갈 수가 없을 지경까지 돌고 도는 것이다.

음, 먼저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 말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이 책은 전세계 공산주의 개괄서로서, 공산주의가 전제적인지 아니면 해방적인지에 관한 논쟁의 답을 쓰기 위한 노력이였다고 말이다. 읽었다고 하기엔 뭣하고, 훑었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책을 살펴본 나는, 적어도 이 세계에 존재했던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는 전제적인 것도 해방적인 것도 아니며, 마르크스-레닌이 주장했듯 공산주의 사회가 이상적인 사회도 아니었다는 것을 소련식 공산주의를 통해 증명했다는 정도의 답을 얻었다. 적어도 그들에 의해 선전되고 시행되었던 공산주의는 환상이었다.

사회의 기초를 재건하고자 하는 욕망을 뜻하는 코뮤니즘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이전에도 존재했던 이념이였다. 그러니까 인류는 오래전부터 일종의 평등주의를 꿈꾸었던 것인데, 공산주의 체제가 바로 그 이상향이였던 것이다. 공산주의의 교리는 공산주의 체제 아래서는 누구나 똑같이 일하고, 누구나 똑같이 가질 것이며, 그 누구도 더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전파했다. 역사 속에서 늘 착취의 대상이 되어왔던 프롤레타리아는 흥분했다. 공산주의만이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라고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인류가 진보할 수 있는 마지막 단계로 여겨졌다. 그러나 현실 속의 공산주의는 체제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고,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데만 힘쓴 결과, 세계 어디에서도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보다 나은 체제임을 증명하지 못했다(그러나 나는 잘 모르면서 카스트로의 쿠바식 공산주의에 막연한 기대를 품고 있기도 하다. 쿠바에서도 역시 공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반대파는 처단되고, 경제는 침체 일로이며, 병색이 짙은 노년의 카스트로로 인해 현재 쿠바 사회는 혼란에 빠져있다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은 호된 대가를 치룰 망정 미국을 드러내놓고 경멸할 만한 용기? 베짱? 믿음? 같은 것이 있으니까).

지금도 여전히 북한, 베트남, 쿠바 같은 몇몇 나라에서는 공산당이 계속 집권하고 있지만, 그들을 제외한 그 누구도 더이상 공산주의가 인민을 위한 구원의 방편임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이 지금껏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공산당 외의 다른 정당을 인정하지 않으며, 공산주의를 제외한 모든 이념들을 거부하고, 외국 문화를 전적으로 차단하며, 당이 사법과 언론을 장악한채로 오로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만을 숭상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외국인의 입장에서 보았기 때문이겠지만, 내가 겪은 베트남은 특별히 공산주의 국가라는 것을 느낄 수 없었다).

공산주의는 평등을 기본가치로 내세웠지만, 실제 공산주의 사회에는 독재와 폭력, 차별과 소외가 난무했다. 때문에 나는 내가 이해하는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는 다르다는 인상조차 받는다. 적어도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는 일당 독재체제에 의해 유지되었던 소련식 공산주의는 아니었다라고 믿고 싶다.

저자는 공산주의가 지난 세기의 형태로 부활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지금도 공산주의 신봉자들은 도처에 존재하고 있고, 이데올로기와 정치는 돌연변이를 일으켜 확산될 가능성이 하며, 게다가 공산주의는 전이의 특성을 지녔다고 책을 마무리 한다. 이를 정치, 문화, 경제적 '진화'의 의미로 해석해도 괜찮은 걸까.

 

마르크스 이전의 공산주의 살펴보는 것을 시작으로, 공산주의 기원과 실험을 거쳐 확산되고 변형되는 단계를 넘어 1991년 소련에서 조차 공산주의는 무너져 공산주의가 실패로 종결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공산주의에 관한 자료로서는 훌륭하지만, 한번의 독서를 위한 책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공산주의를 알고싶다는 의욕만으로 함부로 도전해서는 안되는 책이라는 정도의 감상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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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 열심히 일해도, 아무리 쉬어도, 그 무엇을 사도, 여전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정희재 지음 / 갤리온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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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다면

정말 아무거도 하지 않을 테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지워 가다 보면

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들이 드러나겠지.

피로에 젖도록 몰아세우며

얼마나 오래 '되어야 할 나'를 쫓아 왔던가.(228쪽)

 

하루에도 열두번씩 감정의 널을 뛰는 소녀의 비밀 일기를 담은 책 같기도 하고,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한 사람의 유치한 고백을 담은 책 같기도 한, 디자인이 예쁜 이 책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를 넘어 권리를 주장하는 어울리지않게 조금은 저돌적인 책이다.

구구절절한 지은이의 사연을 다 읽지 않고,  목차만 훑어 보아도 그만 속이 뻥하고 뚫리는 것처럼 시원해지는 책이다. 그러니까 내용인즉, 푸념처럼 혼자 되뇌곤 하지만 어디서도 내놓고 주장할 수 없었던 내 멋대로, 내 맘대로 버팅기거나, 해치울 수 있는 권리들에 관한 이야기다. 푹 쉴 권리, 욕망에 끌려다니지 않을 권리, 보험을 들지 않을 권리, 나이값 하지 않을 권리, 사랑받으려 애쓰지 않을 권리, 사교적이지 않을 권리, 스마트하지 않을 권리, 광고를 보지 않을 권리를 넘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에 이르고나면 나는 그만 '악' 소리를 지르고 싶어진다.

 '그래서 이 험한 세상 어찌 살려구!"

 

장래 희망을 '바쁘지 않은 사람'이라고 쓰는 아이를 보면 깨물어 주고 귀여워 했다.(74쪽)

나도 그랬다. 장래 희망이 바쁘지 않은 사람이라니. 그 조그마한 머리통 속의 세계는 얼마나 심오한지...  그러나 바쁘지 않은 사람을 희망하는 그아이가 더이상 귀엽게만 느껴지지 않는 지점은, 그 아이가 바로 내 아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바로 거기였다.

생물학적으로 내가 낳은 아이라는 것 말고는 특별히 귀여울 것이 없는 이 아이가 짐짓 걱정이 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거기서 부터였다.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걸까, 바쁘지 않게 살아도 살아질 수 있는거야? 내아이, 정말 이대로 세상 살아갈 수 있겠어? 나는 정말 심각하게 아이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왜? 남과 같은 보통의 꿈을 꾸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어쨌든 뭐든 상큼하고, 시원하게 한방에 끝내지 못하고 왠 실수가 그리 잦으냐고 퉁박을 주는 제 어미에게 실수하지 않으면 뭐가 잘못인지 알 수 없잖아, 라고 당차게 주장해주는 내 꼬마가 사실은 너무 예쁘다.

 

지은이 정희재가 주장하는 권리들은 너무 매력적이다. 가난해도 기죽지 않을 권리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돈없으면 기죽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니 차라리 솔직하게 돈없어서 기죽는 순간을 쿨하게 받아들일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니, 이쯤이면 지은이의 주장들이 생떼라거나 오기라고 보기 힘들어지는 것이다. 사실, 지은이가 주장하는 권리들은 누군가 딱히 허락해줘야 가능해지는 권리는 아니다. 세상살이에 내 스스로를 맞추다 보니 어느덧 저절로 자기착취를 일삼고 있는 것인데, 그저 그것을 멈추기가 쉽지않은 것이다. 정희재의 <아무것도 하지않을 권리>는 나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한다. '왜 그래야 했지?, 왜 멈출수 없는 거지?, 왜 그래야 하지?'

 

책을 읽다보니 문득, 한글 파일을 켜고 주장하고 싶은 내 권리들을 주욱 써나가 보는 것도 꽤 괜찮은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휴일이 아니어도 늦잠 잘 수 있는 권리, 내 마음을 일일히 설명하지 않을 권리, 남의 주장을 흘려 들을 권리, 머리카락이 상했어도 기죽지 않을 권리, 보다 싼 것을 달라고 당차게 말 할 수 있는 권리, 읽고 싶지 않은 책은 읽지 않겠다라고 주장할 수 있는 권리, 싫은 사람에게 너 싫다라고 당당하게 말 할 권리, 하고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권리, 권위에 복종하지 않겠다고 엉길수 있는 권리, 그러니까 결국엔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릴 권리.... 쓰다보니 좀 과격해지는 면이 없지않지만, 어쨌든 나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고, 하고싶은 것을 할 권리, 좀더 인간다워질 권리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아이에게도 말하고 싶다. '네가 좋은 것을 해' 라고.

음... 그러고보니 예쁘장한 이 책, 꽤 위험한 책이잖아!

 

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며 오늘 하루쯤은 사막의 날로 삼아 볼까, 중얼거려 본다(사막의 날이 어떤 날인지, 책 속에서 만나시라).

그냥 마음가는 대로 하리라. 어떠한 죄책감도 갖지 않은채로.

 

모든 것에 대해 불만족하고 자신에 대해 더욱더 불만족스러운 지금 이밤, 고독과 적막 속에서 나는 스스로 기력을 되찾고 자신을 조금 사랑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내가 찬양하던 사람들의 영혼들이여, 나를 굳세게 해다오. 나를 지탱할 수 있게 해다오. 내가 이 세상의 허위와 부패로부터 멀리 있게 해다오. (110쪽, 보들레르의 <파리의 우울>, 새벽 1시에 중에서 지은이가 인용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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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도서관에 끌리다 선생님들의 이유 있는 도서관 여행
전국학교도서관담당교사 서울모임 엮음 / 우리교육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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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볼라벤'이 우리나라를 강타할때 대부분의 초등학교가 휴교를 했다. 우리아이의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아이를 집에 혼자 둘 수 없어서 나도 직장을 하루 쉬었다. 그러나 생각보다 수도권에서는 태풍피해가 심하지 않았고, 학교까지 휴교할 정도는 아닌듯했다. 해서 아이를 데리고 주민센터에 위치한 도서관을 찾았다. 중앙도서관이 아닌 주민센터의 미니도서관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처음 찾은 미니 도서관은 생각보다 훨씬 아담했고 적당히 아늑했으며, 제법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공간으로 꾸며져있었다. 아이가 방과후에 제 혼자 찾아와 책을 읽을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걷기에는 너무 먼 도서관의 위치가 불만스러웠다. 이사할 때 도서관의 위치를 고려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태풍 덕분에 도서관은 조용한 편이었지만, 한 엄마가 초등학교 2학년은 됨직한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는 소리는 간간히 들리는 바람소리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귀를 어지럽히곤 했다. 아이를 데리고 도서관을 찾는 엄마라면 적어도 주변을 생각하는 여유쯤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들었고, 도서관이 아예 책 읽어주는 엄마와 아이를 위한 별도의 공간을 마련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들었다.

태풍으로 온나라가 소란스럽던 날 아이와 함께 찾은 도서관에서 느낀 불만은 두가지였다. 거리가 멀다는 것과, 조용하지 않다는 것 두가지를 제외한다면 아주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내가 자랄때는 특히나 공공도서관에 얽힌 기억이 없다. 그러나 요즘은 다르다. 아파트 게시판을 보아도 도서관에서 열리는 문화행사는 적지않고, 꼭 책을 읽기위해서만 찾는 곳이 도서관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젠 거의 상식이 된 듯하다. 그럼에도 도서관을 찾는 사람보다는 찾지 않는 쪽이 많을 것이고, 도서관에서 알토란 빼먹듯 정보를 빼먹는 사람보다는 도대체 도서관을 왜 가야하는지 모를 사람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도서관은 우리에게 일반적인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도서관이 공공의 문화장소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첫번째 이유로 거리상으로 너무 멀다는 점이다. 요즘에는 주민센터에 미니 도서관 하나씩 쯤은 가지고 있지만 사실 주민센터가 오분거리마다 있는 것도 아니고, 동네마다 주민센터의 규모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주민센터에 딸린 도서관만으로는 그 수요를 감당하기가 수월치 않다 생각한다.

욕심같아서는 아파트마다 도서관이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그보다는 먼저 학교에 있는 도서관이 좀더 활성화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오래된 학교일수록 도서관 시설이 부족한 것 같고, 그나마 있는 도서관도 잘 활용되지 않고 있는 것 같다. 학교 도서관이 그 학교 학생뿐만이 아닌 지역주민을 위한 도서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은 현직 학교 선생님들의 북미 도서관 기행문으로, 유럽의 도서관 순례에 이은 두번째 책이다. 도서관이 발달된 나라들을 찾아보고 직접 눈으로 공부하고, 우리의 도서관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노력으로 씌여진 책이다. 유럽편은 나는 보지 못했지만, 북미편만 보고서도 평소 우리의 도서관에 갖었던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미국에서는 잘 사는 동네일수록 도서관이 먼저라는 이야기를 읽으며, 교육열이 높고 잘 사는 동네일수록 사교육 시장이 발달된 우리나라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친구들을 보아도 학원이 좋아 이사하는 친구는 보았어도, 도서관이 좋아 이사한다는 친구는 본 적이 없다. 그것이 꼭 자식들이 잘되길 바라는 부모의 잘못이기만 할까.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고쳐져야 할 것은 먼 미래보다는 단기적인 국가 정책일 것이다. 기존의 것들을 버리지 않으면서도 부족한 부분을 상호 보완하며 좀더 가까운 거리에 도서관들이 세워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외국의 사례를 살펴보고 우리의 문화를 개선하자는 취지의 이런 책들을 보다보면 은근히 짜증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우리도..'하는 생각보다 '우리는..' 하는 비관이 먼저 들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도 문화사대주의의 하나겠지 생각을 하며 마음을 다스려본다. 좋은 사례, 좋은 경험을 자꾸만 훑다보면 우리의 문제점이 더 크게 보일 것이고, 문제점을 본다는 것은 개선의 여지를 포함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불평등과 과도한 경쟁이라면 미국 못지않은 우리도 적어도 미국만큼은 도서관 문화가 발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에게도 미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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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연쇄 독서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의 연쇄
김이경 지음 / 후마니타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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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경.  눈에 몹시 익숙한 이름이다. <순례자의 책>, <이것은 옛날이야기>, <마녀의 독서처방>...

내가 읽은 책은 없다. 그러다 발견한 책, <인사동 가는 길>.

몇년 전 인사동 나들이길에 아이들에게 사주었던 그림책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인사동이 곱게 그려진 그림책이 너무 예뻐서 정작 아이들보다는 내가 좋아했던 그림책이다.

<마녀의 연쇄 독서>가 책을 소개하는 책이라는 것 외에도, 이 김이경이 바로 그 김이경이라는 것이 이 책을 선택한 큰 이유가 되었다. 그다지도 예쁜 책을 쓴 이를 따라서 책을 읽는 것은 꽤 기쁜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꽤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나의 짐작은 틀리지않았다. 연쇄독서가 무엇보다 인문서 중심이었다는 것과, 그녀의 서평이 자신의 '앎'을 자랑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는 것이 좋았다. 책 앞에 그녀가 얼만큼 겸손한 마음이었는지, 나는 그냥 느낄수가 있다.

 

내가 미처 모르는 그 인연들 덕분에 이 아슬아슬한 세상에서 나는 태연히 책을 읽고 무사히 살고 있습니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책에서 읽은 모든 것을 잊어도 이 고마움은 잊지 않겠습니다. 모두 고맙습니다.(에필로그 중)

 

책을 읽다보면, 책이 책을 낳는 상황은 쉽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연쇄독서를 하고 있을 것이다. 읽다보면 읽고싶어지는 책은 무한히 생기기 마련이니까. 작가에 의해 촉발되는 연쇄독서, 책 속에서 만난 책을 찾아가는 연쇄독서, 키워드를 따라가는 연쇄독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은 미처 읽지못해 쌓이고 금새 무더기가 되어 나를 압박하기도 한다. 그래도 끝을 모르는 내 책 욕심이여.

이 책에서 김이경은 자신의 느낌을 따라간다. 그 느낌은 자의라기 보다는 책이 주는 느낌, 책이 지시하는 책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김이경을 따라 책사냥의 길을 나섰다.

 

지난주말, 봉사를 해보겠다고 찾았던 노인 요양원에서 세시간만에 튀어나오며 '나는 그저 입만 산 책상물림일 수 밖에 없구나' 생각했다. 죽음을 앞둔 치매 노인들의 말간 눈동자를 차마 마주보지 못하고, 뼈만 남은 노인의 애먼 다리만 세시간을 문지르다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두손 두발 다 드는 내 자신이 몹시 한심했다. 

함께 사는 세상, 서로 돕는 세상, 봉사, 복지.. 경험이나 몸소 체험하기 보다는 책 속에서 배우고 익히며 학습한 것이기에, 실존하며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노인 앞에서는 눈물로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촌스러운 상황을 연출하고 만 것이다.

책을 읽는 것도 그렇다는 생각이 든 요즘이었다. 습관처럼 늘 책을 읽지만, 실제로 내가 변화되고 있는 것을 눈앞의 현실로 체감하기가 쉽지 않다. 통찰력을 키우고, 스스로 발전하기 위한 독서보다는 재미있고, 쉽게 읽히는 책들을 은연중에 찾고 있는 요즘의 나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 같은 내 모습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는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아무리 책을 읽고 새롭게 내가 변화된다 해도 세상은 결코 바뀌지 않으리라는 절망이 책을 읽을수록 더 커져가는 것만 같기도 했다. 이런 나에게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며 스스로의 나태와 비겁을 합리화해 온 지난 시간이 미안해서 울고, 이제라도 그것이 잘못임을 배운 것이 기뻐서 행복합니다. 선은 무력하고 정의는 속절없으며 언제나 권력이 이긴다고 믿었는데, 그래서 참 재미가 없었는데, 이 책을 읽고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재미있고 행복합니다.(227 쪽)'는 김이경의 고백은 정신이 번쩍 들 만큼 짜릿하다.

 

'어둡다고 불평하기 보다 작은 촛불 하나라도 밝히는 것이 낫다'라고 한 것이 공자인지 마더 테레사인지 나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이 책을 표현하는 가장 적당한 말이라 생각한다.  눈 앞에서 마술처럼 번쩍하고 바뀌는 세상따윈 애초에 어디에도 없다.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며, 틈틈히 책을 읽고, 늘 생각하고, 읽은만큼 행동하려 노력하고, 안된다고 절망하며 주춤거리다가 다시 한번 내딛는 발자국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이 아닐까.

김이경의 서평집을 읽고 지난주말 맛보았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는, 팔뚝 근육에 불뚝 힘이 솟는 느낌이 들었다.

은근히 내게로 젖어든 책들은 나를 흔들고, 내 주위를 흔들고, 언젠가는 세상이 흔들리기를 소망한다.

후마니타스, 고마워요. 이런 좋은 책을 망설임없이 출판해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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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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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놓고 아프다고 말하기 쉽지않은 가족문제의 여러 사례를 다룬 한기연의 <나는 더이상 당신의 가족이 아니다>를 읽으며, 나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가족문제로 고민하고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가족의 문제는 다른 여타의 인간관계와 마찬가지로 '우리'로 묶일 것이 아닌, '나'로 분리되어야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가족이기때문에 같아야 하고, 가족이기 때문에 속속들이 알아야 하며, 또한 가족이기 때문에 늘 함께여야 한다는 생각이 소소한 가족문제를 유발하고, 그로인한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분명있는 것이다. 또한 가족은 반드시 사랑이어야 한다는 '당위'가 때때로 삶을 고달프게 한다는 것도 알았다.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을 만났을 때, 가족이기에 서로에게 주는 상처들 혹은 희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일종의 심리서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 모든 폭력적인 일들에 대해 고전을 빗대어 이야기하는 책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물론 그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현실 속의 가족문제가 아닌 고전 속에 뻔하게 드러나있지만, 주의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가족의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라는 것만 빼고.

할머니 무릎에서 옛날 이야기로 들었거나, 혹은 동화로 읽었거나, 그도 아니라면 학창시절 고전문학으로 공부했던 옛이야기는 어린시절에는 그저 재미였고, 학창시절에는 지겨움이었으며, 그 이후에는 '전설의 고향'과 같은 기괴한 귀신 드라마가 아니라면 별로 접할 기회가 없는 고리타분한 것이다. 나만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랬기 때문에 특별히 고전을 읽어야 겠다라거나 하는 생각은 거의 해보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다.

이에 고전을 현재에 되살리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는 저자가 고전을 재미있게 소개할 방법으로 택한 키워드가 '가족의 문제' 아니였을까 추측해 본다. 과연 할머니 무릎베개에서 들었던 옛날 이야기나, 동화, 고전에서는 전혀 깨닫지 못했던 가족간의 '폭력'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만큼 더더욱 은밀하고 오싹한 것이였다.

부모 봉양을 위해 자식을 내다 버리는 이야기나 부모의 눈을 띄우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던지는 이야기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효'의 근본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으며, 본처가 아니라면 후처나 첩들은 한결같이 악독하고, 때문에 계모를 맞는 이들은 불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또한 기녀라도 '정절'은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는 정도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옛이야기 속의 이야기는 오늘날 내가 사는 시대와는 전혀 다른 현실성없는 고래짝 이야기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다만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야기 속에는 그시대 서민들의 희노애락이, 나아가서는 시대적 사회상들을 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옛이야기나 고전은 그냥 한번 재미로 지나치고말 단순한 성격의 것이 아닌 것이다.

 

한문학을 전공하고, 중국어문학 교수로 재직한 김경일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이 있다. 김경일은 현 한국사회의 문제는 공자와 유교문화에서 비롯되었으며, 유교문화는 기득권자의 문화이며, 죽은자의 문화라고 일갈하고 있다. 근본주의적 시각을 갖은 보수주의자들이 판치는 어르신들에 대해 경멸의 시선을 갖고 20대를 보내던 나에게 김경일의 책은 한 줄기 단비와 같은 책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아끼는 책 중의 하나인 이 책을 요즘 다시 읽는다면 그를 세계화주의자라고 비판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기득권자 죽은자의 문화를 그만 죽여없애자 주장했다가 그 자신이 여론의 뭇매로 죽다 살아난 그의 야멸찬 주장에는 지금도 여전히 크게 공감하고 있다.

<가족 기담> 속의 가족문제는 정확히 기득권으로부터 출발한다. 양반, 남자로부터 시작되는 기득권은 가족에의 폭력을 멈추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읽는 <가족 기담>은 그대로 한 편의 옛 이야기로 이어져 술술 책장이 잘도 넘어갔다. 마직막 장을 덮을 때까지 이렇게 재미있게도 고전을 해석해 볼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고리타분하고 오래 묵었다는 이유만으로 '古典'인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많이, 널리 읽혀 왔다는 것은 그만큼 '공감'의 폭이 크고 깊었다는 다른 뜻이다. 그렇기에 '고전'은 그대로 오늘날의 사회상을 해석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라는 것을 <가족기담>을 통해 피부로 체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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