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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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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출근길, 두발을 편히 딛기도 비좁은 공간. 앞에 서있는 여자가 넘기는 머리칼도, 옆에 선 남자의 팔꿈치도, 뒤꼭지를 자꾸만 밀어대는 뒷사람의 가방도 불편을 넘어 불쾌로 이어질 정도이다. 그처럼 비좁은 틈을 비집고 선 그들은 모두 손바닥만한 스마트폰이나 노트만한 패드를 꺼내들고 제마다 밀린 tv를 보거나, 영화를 보거나, 그도 아니라면 외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개중에는 열심히 '팡'을 터트리는 사람도 있겠지만.

하나같이 화난 표정으로 화면을 노려보는 그들의 얼굴에선 혹여 누가 자신의 발을 밟기라도 하면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비장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한 여자가 웃고 있다. 입꼬리를 격하게 올려가며 가끔은 '풋'하는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기도 하는데, 그녀가 팔아프게 들고있는 패드에서는 노홍철의 노란머리와 커다란 입이 보인다. 나는 그녀가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히죽일때마다 힐끗거리며 그녀를 본다. 그때마다 내속에서는 어떤 경멸의 감정이 울컥 솟곤 한다.

 

화면에 머리를 박은채로 두팔과 두다리에 불끈 힘을 주고 선 그들은 어쩐지 모두 고독해 보인다.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흘겨보고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 나조차도 숨쉬기 힘들만큼 빼곡히 들어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고독을 느낀다. 그러나 바우만은 현대의 우리들은 고독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유동하는 세계에서 고독할 자유를 잃었다고.

만원전철의 사람들 속에서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장그르니에가 말한 '우리는 혼자 살다 혼자 죽을 수 밖에 없는 섬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느끼는 고독감과는 다른 종류의 고통이다. 바우만의 표현으로 하자면 '유동하는 근대'를 사는 우리는 언제 어디서건 접속할 수 있는 많은 네트워크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전혀 혼자라고 느끼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고독하다. 개인의 사적인 비밀들이 트위터나 페이스북, 블로그 같은 채널에 의해 실시간으로 중계되고 있음에도 우리는 고독하다. 채널을 닫고나면, 접속을 끊고나면 우리는 여전히 혼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네트워크가 다양하지 않았던 그 시절보다 우리는 몇배는 더 외롭게 된다. 가상의 대중들에 둘러쌓였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페이스북, 트위터, 블로그 등의 가상세계는 실제 개인이 접할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만나는 관계망에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주변인들을 확장시키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그들과의 관계는 지속적이지 못하다. 그러한 피상적인 관계속에서 각 개인은 외롭다고 느끼지 않지만, 실제의 자신은 외로움으로 몹시 고통스럽다. 그건 삶의 감미로운 기쁨과 이유모를 슬픔을 이해하기 위한 장 그르니에가 말하는 '절대고독'의 시간과는 다른 종류의 고독으로, 관계를 거듭할 수록 실제의 나는 더 외룁게 된다. 관계를 통한 만족감이 물건을 사들이는 순간의 기쁨처럼 반복되면서 온라인 속의 관계들은 손쉽게 무한 확장되지만 그 속에서 정작 나를 채워주는 친구를 만나기란 불가능하다. 재빨리 얻고 재빨리 버려지는 소비사회는 인간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바우만은 유동하는 근대에는 인터넷, 휴대전화, 아이팟, 게임기기라는 스피드와 편리함을 얻었지만, 대신 '절대고독'의 권리를 잃었으며, 기기들을 통한 다량의 다양한 즐거움을 얻었지만, 즐거움의 질을 놓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또한 평범한 우리들은 대때로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와 같은 괴물이 될 가능성이 깊어지게 되었다고 이야기 한다.

 

여기 실린 44통의 바우만의 편지는 2008년 부터 2009년까지 2년에 걸쳐 씌여진 것으로 세대차이, 신용카드, 신종 플루, 교육, 종교, 성격 등의 다양한 주제들에 대한 것이지만 결국 주제는 '사적인 자유'를 암시하는 '고독'으로 귀속된다.

사적인 영역을 공적장소로 끌어냄으로서 고독의 시간을 거부하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이제와서 어떻게해야 하는 것일까. 결국에는 본질적인 것을 되찾자는 것일텐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자본을 좇아 돌기 시작한지 이미 오래인 수레바퀴를 멈출수 없다면, 수레바퀴의 원심력에 휩쓸리지 않도록 각자가 강해지는 방법말고는 달리 해법이 없을 듯하다.  문명을 되돌릴 순 없지만 문화를 되돌리기는 의외로 쉬운 일이 아닐까, 바우만을 통해 생각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의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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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天葬)
박하선 글, 사진 / 커뮤니케이션즈와우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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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바라봐온 박하선의 天葬을 드디어 손에 쥐었다. 보고싶은 책은 도서관을 이용하기보다 직접 구입해 내 책장에 꽂아놓고 아무때고 뽑아 볼 수 있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에게 매달 책 값의 압박은 만만치 않다.

 

天葬을 오래도록 바라만 보다가 드디어 내 손에 쥐기까지 역시 책 가격에 대한 압박이 적지않았으나, 그보다는 책 속에서 만나게 될 이질적인 문화에의 충격을 감당할 자신이 그간에는 없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없던 자신이 갑자기 생기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소설<적절한 균형>의 작가 로힌턴 미스트리의 <그토록 먼 여행>에서 영혼을 하늘로 올려보내는 의식이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장례식 모습을 인상깊게 보았던 것이다.

 

차마 상상하기조차 힘들만큼 끔찍한 모습일 것이라는 그간의 생각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나조차도 그들 틈에서 죽은자의 영혼을 위해 기도를 올리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그순간, 나는 박하선의 天葬을 떠올렸다. 죽음을 대하는 티벳인들의 鳥葬을 이제야말로 두려움 없이 볼 수 있겠다, 하는 용기가 났던 것이다.

 

'티벳인의 정신 세계가 담긴 죽음의 의식, 떠난 자들의 첫 공양' 이라는 부제가 달린 天葬.

오래전 인도에서부터 시작된 장례절차 라는데, 이방인들은 이들의 죽음문화를 '야만적'이라 재단하며 티벳인들을 욕되게 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해서 천장터에 이방인은 엄격하게 제한되고 있고, 실제로 숨어서 천장터를 촬영하던 한 서양인은 칼부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박하선은 죽음을 무릅쓰고 천장터를 찾았다. 그리고 그는 책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끔찍함을 두 눈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책에서는 이랬다. 어쩌면 잘 꾸며진 영화 촬영지처럼 전혀 두려움 없이 오래도록 세세하게 들여다 볼 여유가 있었고, 그랬음에도 조금도 끔찍하지 않은 장면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새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밀랍으로 만들어진 형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박하선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망자를 새들에게 내맡기는 참혹함에 대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문명의 눈으로 문화의 다름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라는 경고였을까, 그도 아니라면 어떻게 살든 결과는 죽음에 이를뿐임을 일깨우고 싶었던 것일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천상병의 '귀천'을 몇번이고 씹으며, 책을 덮는다.

 

오래도록 탐했던 天葬을 가슴에 품고 잠이 들었던 지난 밤, 나는 하늘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별을 보았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은하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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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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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좋은 물을 많이 마셔라(목이 마르기 전에)

2. 신선한 공기를 마셔라(가정, 사무실에 화분을 키워라)

3. 매일 영양제를 먹어라 (종합비타민, 칼슘, 오메가3)

4. 단백질을 꾸준히 먹어라(육류, 계란을 매일 먹을것)

5. 노화방지 식품을 먹어라(마늘, 녹차, 토마토)

6. 운동을 꾸준히 하라(노래 부르기가 힘들 정도로)

7. 건강수치에 관심을 갖어라(허리둘레, 혈압 등)

8. 규칙적인 검진을 받아라(내시경, 초음파)

9. 주치의를 정하라

10. 스트레스를 없애라

이상은 인터넷에서 떠돌고 있는 의사도 말해주지 않는다는 건강 10계명 이다. 이외에도 건강·무병장수를 위해 매일 지켜야 할 것으로는 매일 요구르트를 먹어라, 금연과 금주 정도가 될 것 같다.

건강을 위한 이런 정보들은 과연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사실들일까. 정말 위의 것들을 지킨다면 누구나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일까. 그 대답은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능할 것 같다. 그야말로 무병장수를 위한 지침은 '그때그때 달라요'가 정답 아닐까.

 

완전식품으로 알려진 우유는 '가장 위험한 식품'과 '완전 식품' 사이를 왔다갔다 하며 한때는 영유아 사망의 주범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세균과의 전쟁을 통해 태어난 요구르트는 수명 연장의 꿈으로 통하며 흥망성쇠를 거듭하다 최근에는 다이어트 식품으로까지 각광받고 있다. 건강에 좋은 성분을 첨가했다고 요란하게 광고하는 가공식품은 알고보니 영양소라고는 하나도 없는 빈껍데기로 밝혀졌다. 동물성 지방인 버터 대신 몸에 좋다고 알려진 식물성 마가린이 동맥경화의 주범이라는 것은 그다지 새로운 사실도 아니다. 이처럼 식품 성분이 건강에 끼치는 영향은 이권과 자본의 흐름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져 왔다. 새로운 사실이 발표될 때마다 대형 식품업체들은 새로운 수익 창출을 위한 기회를 마다하지 않았고, 의사와 약사들은 식품업체들의 입장에 동조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었다' 라는 말 자체에 이미 오류가 있다. 과학이라는 것은 부동의 완전한 진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 과학만큼 이권의 흐름에 민감한 학문이 또 있을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식품에 대한 공포는 대부분 사실이 아니며, 산업화와 도시화를 통해 생겨난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되고 일반화된 면이 있다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미국 식품 산업의 역사적 사건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힘의 핵심에는 거대 자본이 있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저자가 제시한 세세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사건의 나열들을 굳이 읽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과음, 과식을 피하고 매일 유산소 운동을 하며, 유제품과 비타민 섭취에 게으르지 않는다면 무병장수 할 수 있을까. 글쎄, 그것을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삶이 무척 단조로우리라는 짐작은 할 수 있겠다. 내 아버지는 평생을 소식小食하고, 아침마다 우유 한컵과 곡물가루 먹는 것을 지키셨고, 수시로 물을 마시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며 일주일 한번은 꼭 필드에 나가 녹초가 되기를 즐기셨지만, 61세의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뜨셨다.

아버지는 우유와 골프를 좋아하신 만큼 맥주와 커피도 사랑하셨던 것이다. 지금까지는 맥주와 커피가 위암의 원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의심해 본적이 없지만, 이 책을 읽고서는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되었다. 과학이 아무것도 증명하거나 예언하지 못한다면 건강을 위한 수칙 따위는 저멀리 던져버려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먹고 싶지 않은 것을 먹지 않으며 삶을 즐길 수 있다면 남들보다 조금 먼저 세상을 뜨게 된다해도 그다지 억울할 것 같지는 않다. 차라리 그편이 자본과 이권에 놀아나지 않고 속편하게 내 건강을 지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없다고 봐야겠지만, 그나마 새롭게 다짐하는 사실은 있다. 그것은 TV나 매체를 통해 새롭거나 혹은 강하게 제기되는 주장에 혹하기 보다는 그를 통해 누가 이익을 보게 될 것인지를 곰곰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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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가 살아갈 행복한 사회 - 복지국가를 생각한다
이상이 외 지음 / 한권의책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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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대선을 앞두고 복지논쟁이 뜨겁다. 신문을 봐도 뉴스를 봐도 온통 '복지복지' 하는데, 나 역시 복지국가를 희망하면서도 구체적인 복지국가의 상이 없다. 그저 막연하게 개인의 불행을 개인의 차원에서 책임지우는 것이 아니라, 탄탄한 사회적 안정망이 갖춰져 이처럼 불안한 사회를 종식시켜주었으면 하는 희망을 갖고 있을 뿐이다. 더불어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좀더 너그러워지고 유연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내가 생각하는 복지국가의 상이라고 할까.

복지에 대한 이런 막연한 생각으로 대선후보들의 복지공약을 듣다보니, 좀처럼 이해도 쉽지 않고, 그저 마구 퍼주겠다는 후보의 말은 오히려 실현가능성이 없게 들린다. 후보들의 복지 담론을 담은 책이 출판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전에 우리가 꿈꿔야할 복지국가의 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여기던 많은 사람들 조차 생활이 불안해 지면서 복지에 대한 요구가 본격화 되었다라고 이 책의 지은이들은 말하고 있다.

내가 피부로 느낀 본격적 복지논쟁은 김상곤 교육감의 무상급식으로 부터 였다. 2010년 교육감 선거를 앞두고 무상급식 논쟁으로 온나라가 들썩였는데, 이는 비단 한달에 몇만원하는 급식비 때문만이 아니라 어째서 나라가 아이들의 급식을 책임져야 하는지의 문제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적으로 없던 의식이 생기는 데는 두가지의 경로가 있다고 한다. 첫번째는 시민의식이나 사회의식이 수용되어 정책적으로 제도화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의 생활에서 실질적 요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으며, 우리나라의 무상급식 외 복지논쟁은 후자에 가깝다고 지은이들은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다수 국민들이 무상급식을 실제 필요에 의해 요구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인데,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내가 경험한 무상급식은 실직적 필요라기 보다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인권의 문제 즉, 의식의 문제였다라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무상급식을 받아야 하는 이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생각하기 전에 욕구가 먼저일 것이다. 그러나 무상급식을 실질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도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식 뒤에는 '동일시'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나는 무상급식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나에게도 무상급식의 욕구가 생길 수 있는 여지를 염두해 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현재 무상 지원을 받아야 할 만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언제든 변화할 수 있으며,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라면 그 유동의 가능성은 더 크다고 본다. 그렇기때문에 삶이 불안 한 것이다. 언제가 내가 떨어질 수도 있을 나락에서 아무런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면 어떻게 태평할 수 있겠는가. 복지체계가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우리들은 불안하지 않은 내일에 대한 기대로 오늘을 송두리째 저당잡히는 삶을 멈추지 않고 있지 않은가. 학생들은 더 나은 취업을 위해, 성인들은 빈곤하지 않을 노후를 위해. 그것이 우리사회가 불안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직장에서 잘리고 사업에 실패해도 사회가 보호해준다면, 다른 사람을 해하거나 나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키기 위해 그토록 난폭해 질 이유가 없을 것이다. 나는 무상급식을 통해 국가의 존립 이유를 생각해 보았다. 국가의 존재이유는 압력을 행사해 국민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닌, 국민 각 개인의 삶을 안정적이고 풍요롭게 하는데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헌법에 명기된 국가의 의무이기도 하다. 국가 주도의 보편적 복지는 꼭 필요한 제도라고 생각한다.

 

복지를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항상 '도덕적 해이', '복지병'을 문제 삼는다. 그리스나 스페인을 예로 들면서 복지를 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극단적 논리를 피기도 하는데, 복지국가를 주장하는 나는, 남유럽의 이야기만 나오면 할 말이 없어지곤 했다. 관광수입만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는 국가들이 도대체 복지 때문에 망하고 있다니,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도대체 모르겠는 거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그 답을 알게 되었다.

남유럽은 유럽 내에서도 복지지출이 몹시 낮은 수준이며, 대부분의 복지제도가 현금성이다. 노령연금, 공무원연금, 실업급여 등 현금급여 정책은 아주 소극적인 복지정책으로, 도덕적 해이와 복지병을 부추긴다. 또한 세무를 담당하는 국가 공무원의 부패수준이 높을뿐 아니라, 가장 중요한 세금이 잘 걷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지에 관한 문제를 늘어놓고 보면 복지를 해서 나라가 망한다는 주장은 일견 맞는 주장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복지로 나라가 망한다는 주장이 합당하려면, 남유럽보다는 복지에 더 많이 지출하는 스웨덴이나 핀란드 등 북유럽이 먼저 망해야 한다. 북유럽 국가들은 현금성의 소극적 복지 정책이 아닌 일자리 창출을 위한 교육과 직업훈련등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적극적 복지를 시행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복지를 위한 높은 세율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거다. 그만큼 사회적 신용이 높다고 하겠다. 즉,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편적이고 적극적인 복지 정책이다.

북유럽과 같은 높은 수준의 복지를 실천할테니 세금을 많이 내라고 하면 당장 우리나라에서는 엄청난 반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국가에 대한 불신이 높다. 세금으로 실제 생활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도 믿음도 없는 것이다. 세금을 많이 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며, 어떻게든 낼 것은 적게 내고 국가가 제공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도 악착같이 받아서 쌓아두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반적인 생각이 아닐까. 이것은 우리나라의 국민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그간의 경험상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 예의 하나로 보육정책을 들 수가 있겠는데, 이명박 정부는 집권 후반기 들어 보육서비스 혜택을 70%까지 확대했다. 0세부터 2세까지의 영유아와 5세 아이에 대해서는 대상자의 100%에게 무상보육 혜택을 주고, 3세와 4세 아이들에 대해서는 소득 하위 70%에게 무상보육 혜택을 준 것이다. 책에서 김윤태, 이상이 교수는 이를 두고 대단히 잘 한 정책이라고 칭찬했는데, 나는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0세에서 2세까지의 영유아기 아이는 엄마에게서 양육되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부모에게서나 혹은 조부모에게서 자란 아이들은 보육시설에서 정해진 분량만큼의 관심을 받고 자라는 아이들보다 감성적으로나 인성적으로나 더 안정적이다. 정서적으로 안정된 아이들은 불안정한 시기의 사춘기도 무난하게 지낼 수 있고, 안정적인 어른으로 성장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상보육 서비스가 실행되고 나자 일을 하지 않는 엄마들조차 공짜 서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마구잡이로 아기들을 보육시설에 내맡기고 있다.

복지가 경제, 생산 쪽으로만 기울여지다 보니 생산을 위한 재생산, 그러니까 가정에서의 주부 역할을 너무 가볍게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면 '복지국가'의 출발이 노동과 생산을 위한 것이었다라는 것을 생각해 볼때, 생산성에만 중점을 두는 것은 그다지 잘못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생산성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재생산에 의해 좌우된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여성복지는 '재생산'에 주력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한다. 원만한 가정이 원만한 사회를 만든다는 전통적 주장을 믿는 까닭이다.

 

그리고 또하나 복지를 생각할 때 늘 불만이였던 것은, '무상'이라는 용어다. 무상이라는 용어는 인정이나 시혜를 먼저 떠오르게 하고, 이는 주는 쪽이나 받는 쪽에 모두 불쾌감을 준다. 대선후보들이 '무상'이라는 강력한 주장을 펼때 몹시 거북스럽다. 어째서 무상인가, 복지는 국가의 돈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국가의 돈은 국민의 피같은 세금이 모인 것인데 말이다. '무상'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정작 복지를 누려할 국민들이 강건너 불구경하듯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지국가가 되려면 무엇보다 높은 세율을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국민의식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무상'이라는 프레임부터 걷어낼 필요가 있다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이책을 읽고 나서 막연하게 아이가 잘 사는 세상을 꿈꾸었던 나는 복지의 기본 부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런 책은 전 국민에게, 전 가정에 무상으로 배부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을 읽고 본 어젯밤 9시 뉴스에서 보도한 대선후보들의 복지정책은 유난히 더욱 쏙쏙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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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닮은 집, 삶을 담은 집 - 현실을 담고 ‘사는 맛’을 돋워주는 19개의 집 건축 이야기
김미리.박세미.채민기 지음 / 더숲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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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준다'는 광고가 있었다. 그 광고를 보며 아무리 팔기 위한 광고라지만, 사는 곳으로 한 사람이 평가받게 된다라는 주장은 너무 비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나 그 광고가 이야기 하는 것이 고급스러움이라거나 품격이 아닌 '일반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 비정함이 더 크게 다가온 것인데, 일반의 삶조차도 꿈에 지나지 않을 보통의 사람들이 느낄 소외감은 이루 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래서 그토록 그 광고를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따지고 보면 물건에의 취향이라는 것도 결국 선택의 여지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되는 몹시 불평등한 자본주의적 발상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개인의 취향이라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요건이 아니라고 보여진다. 개인의 취향 이전에 '보통', '평범', '일반'이 있기 때문이며, 평범하기 위해 우리는 테두리를 넘지 않는 삶을 지향한다. 집에 관한한 특히나 더 그러하다고 생각되는데, 그렇기 때문에 판에 박힌듯 똑같은 아파트를 선호하는 것이 아닐까.

살기 편하다는 것 외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파트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남과 다르지 않다는 동질감일 것이다. 적어도 남만큼은 나도 하고 산다는 생각말이다.

아파트를 벗어나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을 할 즈음이였다. 나는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 동질감을 그만 벗어버리고 이질적인 존재가 되고자하는 충동이 그만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시절을 포함해 줄곳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나와, 마당에 오줌을 누며 졸린 눈으로 새벽별을 보았다는 남편은 꼭 같은 꿈이 있다. 마당있는 우리들만의 집을 짓고 골든 리트리버든 잉글리쉬 쉽독이든 커다란 개를 키우자는 그런 꿈을 꼭 같이 꾸고 있는 것이다.

이 책에 실린 집의 주인들도 나와 비슷한 꿈을 꾸었다. 자기들의 삶을 담을, 자기들의 삶을 닮은 꿈을 꾸었다. 그들이 나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들은 그 꿈을 이뤘다는 것이다.

 

최근에 한 선배가 경기도 화성 즈음에 집을 지었다. 너는 좀 뭘 아는 애니 집 도면을 같이 봐달라는 부탁을 들었을때, 나는 눈앞이 캄캄해 질 정도는 아니였다해도 즐거운 기분으로 선뜻 오케이 할 수 없었다. 도통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로 도면을 보며 마냥 부러워만 해야할 궁색스런 순간은 피해야만 했는데, 그 이유가 일단은 도면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뭘 좀 안다'는 말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뭘 좀 아는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보여지고 싶었던 것과는 다르게 나는 사실 뭘 좀 모르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아는 것도 없이 눈만 높다고 해야 하나.

그때 당시 이 책을 보았더라면, 정말 뭘 좀 아는 것처럼 근사하게 충고 한마디 했을지도 모르겠다. 집은 집주인을 닮기 때문에 내가 보아도 잘 모를거라고.

 

 

 

 

 

한 일간지의 시리즈 물로 기획되었다는 이 책에 등장하는 집들은 그야말로 기가막히게 멋있다. 마치 딴 세상에 등장하는 집들처럼 보이는 데, 지은이는 좋은 집을 보며 집에 대한 안목을 넓히라고 권하고 있다. 그림같은 집들을 보며 지은이의 권유가 그다지 틀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내 집은 아니지만, 부럽다는 생각보다 나도 언젠가는 이런 집을 짓겠다는 다짐이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다. 꿈은 구체화 할 수록 이루어진다나 뭐라나.

 

집을 의뢰받는 건축가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집을 짓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원하는 집의 뚜렷한 상이 없다라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막연하게 언제가 집을 짓겠다는 꿈만 꿀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집을 확실하게 머릿속에 그려둬야 겠다 생각한다.

일단 내가 짓고 싶은 집은 책장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 이책에 실린 경기도 파주의 '책의 주택' 정도면 딱, 내 스타일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두번째로는 천장에 유리창을 많이 내고 싶다. 밤에는 반짝이는 별을 지붕 삼아 잠이 들고, 아침이면 쏟아지는 햇살과 함께 눈을 뜨고 싶다. 뿐만아니라 유리창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내몸을 적시지 않은채로 고스란히 맞고 싶은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작더라도 마당은 꼭 있을것 정도로 내 집을 그려본다.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고 소파에 앉아 차를 마시며, 사진 속에 실린 집들에 대해 두런 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편은 집이 너무 모난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이야기 하고, 나는 조금 튀는 디자인이 좋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 사이에 앉은 우리 아이는 자기는 아무런 집이라도 마당있는 집이라면 다 좋다라고 헤벌쭉 웃는다. 우리들의 집을 짓기 위해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의논 정도지만, 이렇게 새록새록 우리를 담을, 우리를 닮은 집을 짓기 위한 노력이 구체화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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