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 힐링에서 스탠딩으로!
유시민 지음 / 생각의길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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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며 동시에 지식소매인이라고 그간 자신을 밝혀온 유시민이 출판한 책은 적지 않다. 그중 나는 2009년 출판된 <청춘의 독서>와 2011년 출판된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지식소매상이라고 불리우는 유시민의 책 이야기는 유쾌하였으며,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편 <국가란 무엇인가>에서 그는 훌륭한 국가에서 개인의 훌륭한 삶이 가능하다며 원칙과 상식이 통용되는 사회를 말했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은 글쎄..? 그는 보건복지부 장관시절이든 그 이후든, 최근까지 무던히도 욕을 먹는, 그래서 조금은 지겨운 정치인이라고 생각했다.

유시민은 이 책을 출판하고 난 후, 직업정치를 은퇴하겠노라 선언했다. 그를 고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쯤으로만 이해했던 나는, 그가 정치계에서 은퇴하겠다는 말에 큰울림을 받지 못했다. 정치판에서 이것저것 여러 역할을 해보았지만 설 자리가 마땅치않아 진로를 바꾸려나 생각하는 한편으로, 정치인의 말은 반쯤 의심하고 보는 자동반응이 내 속에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뭐, 책이나 좀 팔아보자는 생각 아니겠어?

그러므로 당연히 <어떻게 살 것인가>도 읽을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지난 3월 15일 한겨레 신문 토요판에 인터뷰 기사인 '김두식의 고백'에서 '내가 졌다'라고 고백하는 인터뷰이 유시민을 발견했다. 김두식은 인터뷰 기사의 제목을 '분재가 되가는 소나무의 슬픔'이라고 압축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고 묻는 이 책이 사실은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노라고 했다. 갑자기 눈이 밝아지는 느낌이였다. 최근들어, '죽음' 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고민이 많다는 것, 그건 어쩐지 그다지 좋은 기분은 아니지만, 사실이 그렇다. 요즈음의 나는 어떻게 죽을까를 고민한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불현듯 우연히 죽고 싶지는 않다. 고통스럽겠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을 준비하며, 또는 애증이 깃든 내 지난 삶과의 이별을 준비하며 죽음을 맞고 싶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또는 헤어짐이 얼마나 두려운지 따위의 감정을 천천히 정리할 시간이 있는 죽음이였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나로서는 좋게말해 지식인이고 자칭 먹물인 유시민은 도대체 어떻게 죽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했다.

이 책의 서문에서 유시민은 <청춘의 독서>와 <국가란 무엇인가>를 쓸 당시에는 직업적 정치인으로서 정치적 자기 검열에 의해 책이 씌여졌음을 고백했다.  그러나 직업 정치인으로서 은퇴를 선언한 이 책에서는 정치적 자기 검열 없이 자신의 내면을 그대로 드러내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만큼 이 책에는 유시민의 개인사라든가, 욕망에 대해 씌였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생각하는 훌륭한 삶, 혹은 행복한 삶이란 무엇인지, 자신은 훌륭하거나 행복하거나 또는 품격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앞으로의 삶은 어떻게 살 것인지, 그리고 죽음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지.

 

사람은 누구든 자기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아니겠냐고 유시민은 묻는다. 그러나 자기삶을 자기 방식대로 산다고 해서 그것을 바로 훌륭한 삶이라고는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방식대로란 자기만의 신념을 의미하며, 그 신념이 옳은 것인지는 반드시 살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옳은 신념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이 잘못될 수 있기 때문에 행복한 삶이 반드시 훌륭한 것이 아니고, 훌륭한 삶이 반드시 행복한 삶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했다. 마음가는대로 솔직하게 자신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나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라는 것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326쪽)

 

1장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주제로 이야기했다면, 2장에서는 본격적으로 어떻게 죽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때, 1장이든 2장이든 3장이든 결국 잘 죽고 싶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그것은 남은 삶에 대한 애착으로 보여진다.

누구에게나 노화가 찾아오고, 그리고 죽음을 맞게 된다. 그가 어떤 삶을 살았든 죽음은 생물학적으로 모두에게 동일한 현상이다. 그러나 죽음을 맞는 방식이나 과정은 누구에게나 동일하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짐에 대한 두려움, 죽음 이후의 알 수 없는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두려워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죽음을 준비하는 매일을 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무엇을 하든 죽음을 염두해 두고 막장으로 살자는 것이 아니라, 당장 죽는다 해도 억울하지 않을 순간을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당장 죽어도 억울하지 않는 순간이란, 그만큼 나를 쏟아붓는 매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하고싶지 않은 일을 타인의 시선이나 기대 때문에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싶은 만큼, 그렇지만 품격을 잃지 않는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 행복한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유시민의 이야기를 이렇게 이해했는데, 내 생각이 앞서 잘못 알아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잘 죽고싶다는 것은 잘 살고싶다는 에두른 표현이 아닌가. 무지와 헛된 욕망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긍정하고 자신이 이룬 것에 만족한다면, 그 인생은 후세에 이름이 남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행복하고 훌륭한 삶이며, 더불어 아름다운 죽음일 수도 있는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그는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 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고 했다. 어떻게 죽을지를 고민할 수록, 어떻게 살지를 숙고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삶이 지겨워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겨워 죽음 또한 고민하게 된다.

 

유시민 자신은 생전 장례식을 흥겨운 파티로 열어 자신의 삶과 죽음을 자기 자신도 충분히 음미하며, 남겨지는 사람들에게도 애통함이 아닌 유쾌한 기억으로 남고 싶다고 했다. 물론 이것은 아직 죽음을 먼 이야기로 생각하는 지금 현재의 생각이고, 세월이 흘러 좀더 죽음에 가까워지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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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약국의 딸들 - 박경리 장편소설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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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이지만 나남출판사에서 출판된 것으로 읽었다고 기억하는 <김약국의 딸들>을 마로니에북스의 재 출간으로 다시 읽게 되었다. 그러나 읽었다는 나의 기억이 잘못된 것인지, 읽지 않았음에도 그 유명세로 인해 읽었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다 깨끗이 잊은것인지, 도통 내용이 기억이 나질 않고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낯설었다. 정말 읽었던 책이라면 한장면이라도 기억이 나야 했을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새로 출간된 <김약국의 딸들>은 양장본이고, 2003년도 판보다 더 깔끔한 디자인이다.

이 책은 박경리의 초기 장편으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씌여진 것이며, 배경 또한 일제시대이고, 항구를 끼고있는 소도시 통영에서도 한 마을의 이야기이다. 때문에 꼭 사투리나 방언, 혼용된 일본어 뿐만 아니라, 시대적 지리적 배경으로 인해 이해되지 않는 용어들이 많았다. 요즘 푹 빠져있는 러시아 문학보다도 더 낯선 용어들이 많았다는 것은 아니러니가 아니랄 수 없다. 때문에 용어해설이 페이지마다 있지않고 마지막에 한꺼번에 정리되어 있어 이야기의 흐름을 끊고 책장을 넘겨봐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싱둥겅둥 웃는다거나, 다글다글 볶는다거나, 감실하게 햇볕에 글은 얼굴 등의 풍부하고 아름다운 어휘와 표현으로 박경리만의 글의 맛을 느낄수 있기도 했다.

 

저의 아버지는 고아로 자라셨어요. 할머니는 자살을 하고 할아버지는 살인을 하고, 그리고 어디서 돌아갔는지 아무도 몰라요. 아버지는 딸을 다섯 두셨어요. 큰딸은 과부, 그리고 영아 살해혐으로 경찰서까지 다녀왔어요. 저는 노처녀구요. 다음 동생이 발광했어요. 집에서 키운 머슴을 사랑했죠. 그것은 허용되지 못했습니다. 저 자신부터 반대했으니까요. 그는 처녀가 아니라는 험 때문에 아편쟁이 부자 아들에게 시집을 갔어요. 결국 그 아편쟁이 남편은 어머니와 그 머슴을 도끼로 찍었습니다. 그 가엾은 동생은 미치광이가 됐죠. 다음 동생이 이번에 죽은 거예요. 오늘 아침에 그 편지를 받았습니다.(408쪽)

 

<김약국의 딸들>의 줄거리는 둘째딸 용빈이 한 위와 같은 고백으로 함축된다. 약국으로 명성을 얻었고, 그후에는 배를 부리는 통영의 유지였던 김약국 집이 몰락해 가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각자 다른 기질의 딸들이 살아가는 혹은 죽어가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정절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난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해 비상을 먹고 자살한 할머니로부터 시작되는 김약국 집안의 불운은 일제라는 시대적 배경과 함께 딸들 각각의 불행을 그린다.

한 자매이지만 각각 다른 기질을 타고난 다섯명의 여인은 꼭 자신의 기질 때문으로만 불행의 길을 걷는 것은 아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하는 불이익과 함께 시대적 문화적 관습에 대한 저항으로 불행해지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볼때 나는 첫째딸 용숙의 탐욕스러운 기질은 어쩌면 가장 합리적인 삶의 방법으로 화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누구도 내 인생을 책임져주지 않는데, 다른 사람이 나를 탐욕스럽게 보든 천박하게 보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이 아니지않은가 말이다. 탐욕으로 똘똘뭉친 용숙은 스스로 일어나는 힘을 간직한 것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다.

다섯 딸들 중 유독 넷째딸인 용옥이 가엾게 여겨졌는데, 그는 소위 '착한'모습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각인되고 싶었던 가장 가엽고, 어떻게 보면 가장 불행한 여인이 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물이 훤칠하지 못했고, 성격적으로 쾌활하지도, 영민하지도 못한 그저 눈에 띄지않는 넷째 딸이였다. 그녀가 부모의 눈에 혹은 타인의 눈에 들 수 있는 방법은 고운 심성을 드러내는 일이였을 것이다. 그녀는 짧을 인생을 그렇게 자신의 속마음 한번 제대로 들어내지 못하고 침몰한 것만 같아 내내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런가 하면 할머니의 운명을 되풀이 하는 것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이루어지지 못하고 미치고 마는 셋째딸의 천진함도 안쓰럽기는 마찬가지다. 내내 용란을 마음에 두었던 용옥의 남편 기두는 용란이 미치고 난 후에야 그녀를 온전히 거둘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지만, 전혀 사랑 이야기가 아니기도 하다. 그보다는 기질이 다른 다섯자매가 시대에 순응하거나, 혹은 불응하며 자신의 삶을 지어가거나 혹은 마감하는 이야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경남 하동을 지날때면 <토지>를 생각하듯, 통영을 생각할 때면 자연스럽게 김약국 집의 다섯딸들이 떠오를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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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2
켄 키지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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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정신병원에 가짜 환자 맥머피가 들어오면서 시작한다. 병원은 수간호사 랫치드의 주도 아래 환자들을 제멋대로 다루고 있었다. 맥머피는 수간호사 랫치드와 사사건건 부딪히는데, 그녀는 환자들을 교묘하게 학대하고, 그로인해 환자들은 더욱 치유불능의 정신병 상태로 빠져든다. 이를 안 맥머피는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로 여기고 병원을 떠날 수 있었음에도 그에 분노하고 저항한다. 이때문에 맥머피는 말썽을 부리는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반복적인 전기치료를 받게 되지만, 전기치료조차도 자의식이 강한 맥머피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맥머피는 수간호사 랫치드가 문제가 아니라 그 뒤에 더 거대한 체제가 있음을 감지한다. 그러나 체제에 대한 불응만이 유일한 힘이었던 맥머피는 결국 수간호사의 주도로 실시된 전두엽절제술을 받고 식물인간이 된다. 맥머피는 전기치료와 전두엽절제술이 두려워 수간호사 랫치드에게 순응하는 환자들에게 독립심과 활기를 불어넣어주지만, 결국 자신도 체제에 불응했을때 받게 되는 최고 처벌의 희생양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너짐은 이 책의 화자인 인디언 부롬든에게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하고, 자유를 향해 날아가도록 한다.

 

이 책을 읽으며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렸다. 체제에 순응하며 '그런가보다'라고 여기는 것이 불가능했던 윈스턴이 총살 당하는 장면이 자꾸 생각났던 것이다. 윈스턴은 빅브라더의 체제를 추종하는 척이 아닌 완전 사랑하는 상태로 그나마 총살 당할 수 있었다. <1984>에서는 어떤 희망도 없이 체제의 폭력앞에 인간은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는 절망 속에 막을 내렸지만, <뻐구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브롬든이 자유를 향해 탈출을 감행함으로써 살아있는 인간상태로 되돌릴 수 있었기에 그나마 희망적이라고 봐야겠지만, 자의식이 넘치고 삶에 의욕적이었던 맥머피의 마지막이 너무도 어이없고 처참해서 한순간 맥이 다 빠져버렸다.

작품해설에서 옮긴이는 맥머피 자신은 무너졌지만, 결국 병원에 환자들에게 자신과 체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었고, 브롬든에게 자신의 힘을 깨닫게 하고, 자유를 향해 전진할 수 있는 의지를 주었기에 맥머피는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 속에 맥머피는 살아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나는 개인 '맥머피'에게서 생각을 떼낼 수 없다. 결국 그는 무너졌다. 다른 패배자들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희생을 통해서야만 구원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다면 희생자는 선택받은 자라고 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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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재즈광, 히피, 마약중독자 그리고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였다
키라 밴 겔더 지음, 서민아 옮김 / 필로소픽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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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라는 열두 살에 첫 자살 시도를 했다. 이유는 시험을 앞두고 수학 노트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 시작되면 반복적인 자해를 하게 되었다. 성인이 된 후에는 한 직장에서 오래 일을 할 수 없어 생계에 지장을 받았다. 외로움과 성적 충동을 제어할 수 없어 본능대로 행동하게 되면서 성적으로 문란해졌고, 약물중독과 우울증으로 6개월 이상 정신병원에서 지냈다. 그동안 키라에게는 우울증, 불안,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약물 의존증 등 병명이 자꾸만 늘어나 이에따른 정신병적 치료약을 열가지가 넘게 복용해야 했다.

그러던 중 키라는 한 정신과 의사를 만나면서 자신이 경계성 인격장애 환자라는 판정을 받는다.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키라는 한편으로 안도한다. 수없는 자해와 상대를 향한 지독한 집착, 자살에 대한 강박관념, 수시로 경계를 넘나드는 변덕 등, 주변인물 뿐 아니라 그녀 자신조차도 끊임없는 고통속에 가두는 그 많은 일들을 벌이는 것은 자신이 구제불능의 실패자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잘못된 감정상태와 행동들은 그녀 자신도 어쩔수 없는 병 때문이였다는 면죄부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키라의 친구와 심리치료사 안나는 그녀가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경계성 인격장애자라는 것은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정신병자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키라는 불과 6살의 나이에 베이비시터에게 성추행을 당했다. 키라는 성추행으로부터 자신을 지키지 못했을뿐더러 내심 부드러움과 관심을 원했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자신을 그런 상황에 내몰아둔 엄마를 비난하고 싶은 무의식이 있다. 어릴 때 성적으로 학대를 당한 사람들이 모두 경계성 인격장애로 이어지는 건 아니지만, 키라는 예민한 아이였기 때문에 깊은 죄책감을 갖게 된 것이다. 또한 그러한 죄책감은 상대방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자신은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로 이어져 림받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섹스에 매달리는 잘못된 행동 패턴을 반복하게 됐다.뿐만 아니라 키라는 죽은 동생에 대해서도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동생 대신 자신이 죽었어야 했다는 잘못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키라가 보이는 일련의 증상들이 이 최초의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키라에게 필요한 것은 단지 네 잘못이 아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다'라는 한마디의 위로가 아니었을까.

 

경계성 인격장애자임을 믿음으로써 오히려 안도하는 키라는 치료를 위한 노력의 하나로 변증법적 행동치료법을 배우게 된다. 변증법적 행동치료는 겉으로 보기에 상반된 듯한 두가지 사항이 동시에 옳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안하거나 격한 상태에서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관찰하며 분석하는 것으로 감정의 강도를 조절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인지행동 치료의 하나로 반복적 연습을 통해 자신의 불쾌한 감정들을 맞닥뜨리고 그를 참고 견디는 것을 익히는 것이였다. 키라는 매주 만나는 변증법적 행동치료 모임을 통해 자신을 효과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집단의 도움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웠다.

또한 키라에게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버거워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같이 공감할 줄 아는 마음을 지닌 누군가로부터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상처받은 내면 아이는 자신의 존재를 긍정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존재를 긍정받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힘을 갖게될 것이었다. 왜냐하면 경계성 인격장애로 구분되는 그들은 원초적인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자신의 존재를 상처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께 친밀감을 키우고 자신의 취약한 부분을 약점으로 보지 않으며, 혼란스러운 키라의 상태를 보고도 차분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강인한 자의식과 자기 세계를 가진 테일러를 만나 사랑하게 된 것은 키라에게는 행운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키라는 의도적으로 그를 밀어냄으로써 또다시 방황을 자처하게 된다. 비정상적인 감정상태를 완벽하게 이해할 뿐만 아니라, 사랑과 결혼을 다짐하는 테일러를 밀어내는 키라의 심리는 어떤 것이였을까. 그것은 소중한 사람으로부터 버림받기 보다는 자신이 먼저 버리겠다는 심리이며, 또 한편으로는 자신은 불행해 마땅한 사람이라는 무의식의 말을 따른 것이 아니였을까.

궁극적으로 키라는 변증법적 행동치료로 자신이 경계성 인격장애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안도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았을까.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난 후에라야, 스스로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받아들일 수 있게되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행동을 좀 더 잘 통제하게 되어 경계성 인격장애로 보여지는 여러 증상들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될 것이였다.

키라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과적 치료라기 보다는 비판받고, 지시받고, 과소평가받음으로써 수치심을 느꼈던 자신이 쓸모없는 존재라는 무의식의 암시를 벗어버리고 현재 자신의 감정에 솔직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였다.

키라는 엉뚱하게도 티벳의 승려를 만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된다. 승려에게 명상하는 법을 배우면서 자신의 존재에 긍정의 메시지를 보내고, 견딜수 없는 감정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참고 견디는 것에 대해 배우게 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이 질병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과,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달라져야할 지를 깨닫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키라는 불교의 가르침이 불안한 감정상태의 모든 고통의 모습들을 정상화시키고, 타인과의 관계를 정상적인 것으로 돌려줄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왜냐하면 불교의 자비심은 자신이 어느 경계의 어느 쪽에 치우쳐 있든, 그대로의 그녀를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불교를 통해 경계성 인격장애라고 명명되는 증상들은 정신이상이 아니라는 믿음을 얻었다.

결국 키라를 경계성 인격장애라는 증상으로부터 떨어뜨려 놓은 것은 정신과 치료도, 정신병적 치료약도 아닌 명상이였다. 명상을 통해 키라는 자신을 들여다 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며 사랑하는 법을 깨닫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면 타인에 대한 이타심은 저절로 생겨나는 성질의 것이라는 것을 깨닫던 것이다.

 

많은 아이들이 그렇듯 키라 역시 부모로부터 아무렇지도 않게 비난을 받고, 화풀이 대상이 되었으며,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로 성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비단 키라의 엄마가 인격장애자 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 역시 부모에게 수시로 자신의 기분을 무시당했고, 인정받지 못하는 외로움 속에 성장했다. 때문에 어린 키라를 대하는 방법의 무엇이 잘못인지 미처 깨닫지 못한채로 같은 양육방식을 굴레처럼 되풀이 한 것이었다. 모범적인 역할 모델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어른이 된 키라가 보이는 행동들은 어떤 정신병적, 혹은 인격장애적 증상이라기 보다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비롯된 흉터를 드러내는 일이었다.

 

'버림받지 않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불안정하고 무질서한 관계, 충동적인 낭비, 성관계, 물질 남용, 자살시도, 공허함, 부적절하고 조절하기 어려운 심한 분노'  DSM-가 말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증상은 나에게도 무척 익숙하다. 나는 경계성 인격장애자라 불리는 키라를 너무나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키라의 증상들은 정도 문제지만 어느정도는 과거의 나이거나, 혹은 현재의 내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도 경계성 인격장애자인 것일까.

지난 주, 민들레 출판사에서 진행한 일본의 교육자 나까지마 히로카즈의 강연회에 다녀왔다. 나카지마 히로카즈는 <마음을 상품화하는 사회>, <카운슬링의 환상과 현실>, <마음을 원격관리 하는 사회>와 같은 책을 통해, 문제 해결의 근원을 개인의 내면으로 보는 사회 풍조를 통렬히 비판해 왔다고 했다. 그는 개인의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상호 영향 구조 안에서 발생하고, 그 해결의 실마리 역시 그 구조 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일본의 탈학교 청소년들과 만나고 있다고 했다.

 

'나는...'하고 설정된 문제조차도 문제의 성립 과정을 개인의 내면에서만 구할 수는 없다. 문제를 심리적으로만 설명하려고 해도 무리다. 문제는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역으로 문제를 사회학적 경제학적으로만 설명하려 해도 무리가 따른다. 문제는 사회에서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개인과 사회, 개인과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다. 문제는 오직 개인의 내면 또는 사회만으로 환원할 수 없다.(격월간 <민들레>83호, '마음 돌보기를 권하는 사회의 함정)

 

나카지마는 강연회에서 개인의 심리적 문제가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치료행위에도 이점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정상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의문을 제기 했는데, 현대 사회는 갈수록 정신과적 혹은 인격적 장애를 세분화하고 확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등교를 거부하는 학생이 있다고 해서 그 학생을 비정상으로 볼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나는 나카지마의 주장에 동감한다.

 

정신병자도 치료해야 할 대상으로 변해버렸다. 그는 이제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인격이 아니다. 정신병자의 특성과 개인사는 그저 먼지처럼 제거된다. 옛 정신의학서에는 환자의 증언이 가득하지만, 오늘날 교과서에는 수학을 흉내낸 도표와 통계뿐이다. 환자에 대한 연구를 보아도 개인 사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거의 나오지 않고, 사례들을 합산한 숫자가 나온다. 연구 결과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환자 개인이 왜 치료에 반응했고 정확히 어떻게 반응했는지 절대 알 수 없다. 그저 몇 퍼센트의 환자가 반응했는지 알 수 있을 뿐이다. 환자 개인은 증발해버렸다.(광기, 대니언 리더, 도서출판 까치)

 

 스트레스에 약하고 쉽게 좌절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서, 감정이 지나치게 예민하고 격하며 감정조절에 서투르다고 해서, 관계끊기에 두려움을 보인다고 해서 그것이 꼭 어떤 인격적 결핍혹은 정신적인 병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오늘날의 현대 사회는 규범을 따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정신과적 장애자로 보는 경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정해진 답을 내놓지 않는 이들을 비정상이라는 틀로 묶어 치료행위가 필요하다는 소견을 보이는 경향 또한 날로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다른 것은 잘못되고, 고쳐야만 하는 질병인 것일까.

 

엄마, 난 정당성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환경에서 자랐어. 내가 딱부러지게 말했다. 아무도 내 문제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았어. 하는 행동마다 비난을 받았어. 내가 속상해서 화를 내도 아무도 나에게 스스로 돌보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았어. 엄마는 자주 해외로 여행을 다녔고, 여행을 가지 않을 땐 언제나 다른 일에 몰두했어. 엄마는 내곁에 있을 때조차 나에게 멀리 있었어. 난 철저하게 외로웠어.(본문 중에서)

 

이 책을 읽으며, DSM-가 제시하는 경계성 인격장애의 증상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당했던 과거를 잊고 차라리 경계성인격장애라는 병명을 받아들이는 키라의 외로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후반으로 치닫을수록 키라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과적 의료적 진단이나 약이 아닌 키라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줄 수 있는 사랑이 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정신장애를 구분하는 일괄적인 축(DSM-와 같은)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의문을 갖게 되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독특한 문화와 관습, 기질, 성장 환경에 따라 모두 다르다. 그렇기때문에 사회규범이 필요한 것이며, 이것은 시스템을 유지하는 기본이 된다. 때문에 결국 정신적 장애라는 것은 사회규범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마음의 상태에 무어라 이름을 붙이고 경계를 짓는 것은 당사자를 위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자본주의 시대는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것 조차도 모두 병으로 회귀되어 치료를 요하는 시대라는 것에 심한 공포를 느꼈다.

결론적으로 한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고 경계짓기 보다는 개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먼저 앞서야 할 것이다. 또한 치료적 개입이 필요한 정신과적 진료에 있어서도 개인의 독특성은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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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
석영중 지음 / 예담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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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영중 교수의 책이라면 일전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도움을 받은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가 있다. <안나 카레니나>를 먼저 읽었는지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를 먼저 읽었는지, 기억이 선명하진 않지만 어쨌든 두 책을 연달아 읽은 셈인데 석영중 교수의 책으로, 안나와 톨스토이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때문에 석영중 교수의 러시아 문학 강연이라면 일부러라도 찾아 가고 싶은 심정이다. 또한 아닌게 아니라 요즘 부쩍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 고골, 체호프에 관심이 많아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연>도 점찍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이책이 반가웠다.
푸슈킨의 소박한 부엌, 곤차로프의 죽음에 이르는 요리, 투르게네프의 마이너스 식사, 톨스토이의 소식·채식·절식, 고골과 뱃속의 악마, 체호프의 끝없이 범속한 수박, 도스토예프스키의 생명의 빵, 올레샤의 썩지않는 소시지, 자먀틴의 미래의 음식, 파스테르나크와 시인을 위한 가정식 백반, 불가코프의 개밥과 불타는 레스토랑, 솔제니친의 위대한 식사가 석영중 교수가 이 책에서 꼽는 러시아 문학의 코드인데, 그러니까 이 책은 음식을 통해 보는 러시아 문학의 개괄이며 이해인 셈이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음식을 먹어야만 살 수 있지만, 사실 인간이라면 '살기위해 먹기'보다는 '먹기위해 산다'는 표현이 그다지 틀리지 않을만큼 살기위한 영양분의 섭취뿐만 아니라 음식의 차림과 분위기, 그리고 먹는 행위까지도 즐긴다. 때문에 음식은 문학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예술 등 삶과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중요한 코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가장 최근에 읽은 러시아 문학 중 <안나 카레니나>에서 귀족들이 어째서 그렇게 프랑스말과 음식, 프랑스인 가정교사 따위에 집착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호나 취향이 아닌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의 연속선상이였던 것이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이후, 러시아에서는 모든 러시아적이 것은 촌스러운 것, 타파해야 할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되었다. 석영중 교수는 이를 옛 음식과 새 음식의 대립이라고 까지 확장해서 보았는데,  남의 것은 좋고 내 것은 부끄럽다는 이러한 표트르 대제를 비롯한 러시아 귀족들의 생각은 한때 개방과 서구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던 우리의 모습을 생각나게 한다. 다만 그것이 '한때'로 기억되는 성질의 것이 아닌,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모습이기에 그 씁쓸함이 더하다. 이처럼 이 책은 문학 속의 음식을 통한 러시아의 이해이지만 사실은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들여다보는 작업인 것이다.

19세기 중엽 농노제도하의 러시아에 한 귀족 지식인의 무기력한 삶을 통해 보여주는 소설 <오블로모프>와 엄청난 식욕을 부끄러워해 그 마지막은 굶어죽기를 택했다는 천재작가 고골의 <옛 기질의 지주>, 반복적 일상의 범속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국어선생>을 읽고싶은 책 목록에 적어둔다.

 

해마다 꽃바람과 함께 부는 다이어트 열풍을 타고 일명 '해독쥬스'가 요즈음 인기다. 해독쥬스는 몇가지의 삶은 채소와 과일을 갈아 만드는데, 한 여성 연예인의 다이어트 성공담으로 더더욱 그 인기가 높다. 더군다나 이 해독쥬스는 다이어트 뿐 아니라, 고혈압이나 고지혈증, 암과 같은 병의 치료에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얼핏 생각에도 고지방 고열량 음식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에게 채소나 과일의 꾸준한 섭취는 건강에 많은 도움이 될 듯하다. 어느날 아침 불현듯 발견한 일간지 특집기사로 나역시 '해독쥬스'를 마셔볼까 하는 유혹을 느끼고 있는 찰라에 <러시아 문학의 맛있는 코드>를 읽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 만난 이름도 생소한 여러 음식들 앞에 '해독쥬스'는 나에게 그저 강건너 남일이 되고 말았다. 먹기 위해 사는 것은 절대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먹는 즐거움에 대한 포기가 지금의 나로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시대와 사회의 가치를 담는 것이 문화이며 문학이라면, '해독쥬스' 또한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를 이해하는 코드가 될 것이며, 어떤 작가는 '해독쥬스'를 코드로 우리의 문화를 풀어내는 일을 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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