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 열국지 10
김구용 옮김 / 민음사 / 1990년 7월
평점 :
절판


東周 列國志

                                                                   

[ 10 ]

진시황, 천하를 하나로

  조나라 군사 40여만 명이 학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조나라는 온통 울음바다로 변했다. 조효성왕은 지난날 조괄의 어머니가 남편의 말에 따라 자기 자식을 장수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리던 일이 생각나 그녀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많은 비

단과 곡식을 주어 위로했다.

 

  세객 소대가 범저를 만나 백기를 견제하게 만들었고 진소양왕은 백기와 군사들을 소환하였다. 이후 범저는 칭병하고 전장에 나가지 않는 백기를 국외로 추방하였고 가는 도중 진왕이 칼을 전해 자결하게 하였다.

 

  진소양왕은 기필코 조나라를 무찌르고야 말겠다는 생각으로 조나라를 압박하고 있었고 조나라는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주변 나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외교전을 펼치고 있었다. 이때 조나라의 상인 여불위는 장차 큰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사람에게 투자하기로 결심하고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던 진나라 왕손 이인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은 다음 임신한 애첩 조희를 그와 결혼시켰다. 그 후 조희는 아

들을 낳았고 이름을 조정이라 지었다.

 

  여불위는 천금의 재산을 이용하여 이인을, 자식이 없는 진나라 세자 안국군의 정실 화양부인의 적장자가 되게 만들었고 이인과 함께 아슬아슬하게 조나라를 탈출하였다. 범저는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위하여 진소양왕에게 주나라를 쳐 없애고 제왕이 되기를 권한다. 결국 서주는 함락되고 주난왕은 진나라로 잡혀갔다. 주난왕은 목숨은 부지했으나 천자의 왕호를 삭탈당하고 한낱 진나라의 벼슬아치로 전락했.

 

  진소양왕은 주나라에 있던 구정(九鼎)을 진나라로 운반하게 하였다. 구정을 실은 배가 사수의 중류쯤 갔을 때 솥 하나가 저절로 강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가 그것을 찾으려 하자 갑자기 청룡 한 마리가 나타나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는 바람에 솥을 건지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 주나라의 종묘를 헐었던 장군 영규도 꿈 속에 나타난 주무왕에게 곤장 3백 대를 맞고 등창이 생기더니 한 달 후 등창이 터져 죽었다.

 

  진소양왕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 안국군이 등극하였다. 그가 진효문왕이었다. 그런데 그는 부왕의 장례를 마친 사흘 만에 갑자기 죽었고 자초로 이름을 바꾼 이인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불위가 진효문왕을 독살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진장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화양부인은 태후가 되었고 여불위의 애첩이었던 조희는 왕후가 되었으며 조정이 진나라 세자가 되었다. 그는 어머니 성을 버리고 그저 세자 정이라고 불렸다.

 

 채택이 즉시 승상의 인을 내어 놓았고 여불위가 승상이 되었다. 진장양왕은 여불위를 대장으로 삼아 동주를 공격하여 동주 일곱 고을을 모조리 점령하였다. 이로서 주나라는 38873년 만에 진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진장양왕은 신릉군을 없애려고 그를 초청하지만 그는 초대에 응하지 않았고 대신 사신으로 간 주해가 억류당했다가 자살하였다. 이후 진장양왕은 신릉군이 왕위를 노린다는 모함으로 위안리왕과의 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하였고 신릉군은 결국 벼

슬과 권세를 버리고 주색에 빠졌다.

 

  진장양왕이 왕위에 있은 지 3년 만에 병이 났다. 그러자 왕후와 여불위가 옛정이 되살아나서 교정하기 시작했다. 진장양왕은 여불위가 바치는 약을 먹은 지 불과 한 달 만에 죽고 말았다. 세자 정이 왕위에 올랐다 그가 진왕 정이었다. 이때 진왕의 나이 열세 살이었다 그래서 여불위가 나라 일을 도맡아 처리했고 옛 강태공과 견줄 만하다고 상보라 칭했다.

 

  진왕 정이 등극하고 3년째 되던 해부터 천하는 다시 전란에 빠졌다. 한편, 여불위는 조나라와의 전투에 진왕 정의 아우인 장안군 성교를 참전시켰고 성교는 장수 번어기의 충동질에 반란을 일으키는데 동의하게 되었다. 반란은 실패하였고 번어기는 달아나고 말았다. 진왕 정은 왕태후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성교를 참하게 했.

 

  이때 진왕 정은 이미 장성하여 키가 85촌이었고 워낙 영특하고 위대했으며 총명하고 탁월했다. 그는 모든 일을 오로지 자기 주장대로 했다. 어머니 왕태후와 여불위도 그 앞에선 꼼짝하지 못했다.

 

  왕태후의 궁실에 드나들면서 교정을 해 오던 여불위는 왕태후의 끊임없는 음탕한 욕심에 겁이 나서 양물이 크기로 소문난 노애를 내시로 가장하여 왕태후에게 보냈다. 노애를 침실로 불러들여 시험해 본 왕태후는 너무나 만족하여 밤만 되면 노애

와 쾌락을 즐겼다. 그러다가 덜컥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자 왕태후는 병이 났다고 핑계하고 함양성을 떠나 옹주성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하여 그곳에 산 지 2년 동안 노애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았고 그들을 밀실에 감춰두고 길렀다. 그런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 가서 옹주성에 머물던 진왕 정이 이 사실을 알았고, 본색이 탄로 난 노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를 붙잡아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했다. 노애의 두 아들은 포대에 넣어져 진왕 정이 직접 쳐 죽였고 노애는 차열형을 받았다. 왕태후는 아주 작은 역양궁으로 옮겨져 엄중히 감시하게 했다.

 

  이후 진왕 정은 왕태후의 처우에 관해 간하는 신하 27명을 죽였고 28번째 죽음을 무릅쓰고 간한 모초에게 설복되어 왕태후와의 관계를 복원하였다. 하지만 여불위에게는 진나라 도읍을 떠나 시골 하남 땅에서 일생을 마치라는 서신을 보냈다.

이에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자진하였다.

 

  진왕 정은 이사를 데려와 객경 벼슬을 주었고 또 한나라의 한비가 쓴 책(오늘날 전하는 한비자’ 20)을 읽고 그를 등용하려고 이사와 상의했다. 원래 한비와 이사는 순경 밑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었는데 한비의 탁월함을 질투, 시기한 이사가 진왕 정에게 한비를 죽이라고 간한다. 이에 진왕 정이 한비를 감금하자 한비는 스스로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이사는 진왕 정에게 병법에 달통한 위요를 천거하였고 진왕 정은 그를 태위 벼슬을 주고 병권을 일임했다. 이후 진왕 정은 부고의 황금을 풀어 모든 나라로 침투해 들어가서 그 나라의 유력한 대신들을 매수하도록 했다. 이렇게 사전 작업을 착착 진행한 진왕 정은 드디어 군사를 일으켜 전쟁을 시작하였고 출중한 장군 왕전은 그 위명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럴 즈음, 연나라 태자 단은 형가를 시켜 진왕 정을 암살할 계획을 하고 연나라에 망명 생활을 하고 있던 번어기의 수급과 연나라 독항 땅 지도를 가지고 진왕 정을 만나 거사를 하게 하였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였다. 형가는 진왕 정의 칼날 아래 쓰러졌고 진나라 신하들의 몽둥이찜질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진나라는 드디어 연, , , , , 조 육국을 쓰러뜨리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바로 진왕 정 26년이었다. 진왕 정은 황제란 칭호를 썼고 자신이 시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화씨의 옥으로 국새를 만들었다. 이후 진시황제는 천하의 모든 무기를 함양성으로 거두어 녹여 버렸고 아방궁을 지었으며 분서갱유를 일으켰고 만리장성을 쌓는 등  폭군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였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후로 영원히 세상을 다스릴 줄 알았던 진나라는 불과 진시황의 손자 자영의 대에 이르러 망하고 말았다. 힘은 이긴다. 그러나 자고로 오래간 예가 없다. 힘보다 강한 것은 덕이다. 열국이 망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덕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열국의 시대는 끝났다.

 

  염선이 열국지를 다 읽고 나서 그 소감을 읊은 구절 중의 하나다. “모든 원인은 당시에 어진 신하를 등용했느냐, 아니면 간신을 등용했느냐에 따라 판가름이 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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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별 2020-02-2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국지 열심히 읽으세네요...응원합니다 ~~^^

하길태 2020-02-23 06:52   좋아요 0 | URL
예, 감사합니다. 초록별님!
대하소설을 많이 좋아해서요~~ㅎㅎ 좋은 날들 보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