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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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산책방/모리마리/문학/산문

독자로서 잘 알지 못했던 유명 작가의 작품을 마주 한다는 것은 잃어버렸던 빛 바랜 보석을 천천히 닦아가며 그 과거의 화려했던 찬란함을 다시 회상하는 듯한 느낌이다. 일본 소설을 조금 안다고 여겼지만 모리 마리라는 작가를 몰랐기에 그녀의 파란만장하고도 자유분방했던 삶이 더욱 이채롭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두 번의 이혼과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글 쓰기지만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 작가였다는 '모리 오가이'의 딸답게 글을 쓸 당시의 상황과 기행은 그저 애교로 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자신의 자존감과 정체성을 확실히 다져가며 굽히지 않으며 삶의 영화를 누리며 살아간 그녀의 작품의 이야기 속에서 바쁜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 또한 작게나마 영혼의 안식처같은 휴식을 만끽하길 바란다.

"요리 가운데 맛있는 것을 떠올리면 나는
바로 유쾌해진다."

20세기 초, 일본 시대를 살아갔던 작가. 요리를 대하는 모습에도 자유분방함이 느껴지며, 요리를 만들며, 혹은 맛보며 다양한 사람들과의 진솔한 이야기, 이에 더해 자신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글에 담고 있다.

국내 에세이도 작가 내면과 실제를 끌어내 감정을 울리는 묘미가 있지만 일본의 에세이같은 경우, 국내에 소개 된 몇 편의 에세이를 읽다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아기자기한 이야기, 생활 밀착형의 사실적 이야기들이 거침없이 표현된다는 것-음식을 먹고나서의 호불로를 명확하게 드러내지만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상대방의 태도 -이 소소한 일상을 매우 직설적이며 세밀하게 그리고 있구나를 독자로써 느끼게 한다.

요리는 인생에서 빠질 수 없는 친구와 같은
달콤함을 느끼게 하는 이야기!

그런 면에서 모리 마리의 '홍차와 장미의 나날'이란 에세이 제목의 이야기 속에 담겨진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같은 흐름의 공감대를 형성하게끔하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닫혀진 기억과 가슴 속 품었던 일상의 자유, 그것이 요리이건 주변의 인간관계이건, 또 다른 세계로의 일탈이건 간에 이 작품을 통해 대리만족과 동시에 자신의 뚜렷한 삶의 재미를 계획해보는 것도 책을 통해 얻는 삶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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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 - 왜곡과 날조로 뒤엉킨 사이비역사학의 욕망을 파헤치다
젊은역사학자모임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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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문집/젊은역사학자모임/인문학/역사


사이비(似而非)「명사」
겉으로는 비슷하나 속은 완전히 다름. 또는 그런 것.

 ≒사시이비. 국어대사전 수록

사이비 역사란 단어는 생소하다. 사이비 종교, 사이비 의사 등은 종종 뉴스를 통해 접하게 되었으나 역사의 사실을 왜곡시키는 사이비 역사, 그 실체를 알아볼 수 있는 호기어린 역사가들의 작품이란 기대로 책을 펼쳐본다. 독자인 나 또한 중학시절 국사 선생님(이른 나이에 고인이 되신)의 영향으로 사학과 진학을 꿈꾸기도했던 기억이 있어, 역사는 외우기 힘들지만(그 후 역사는 이해란 걸 깨달음)내겐 과거를 상상하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였기에 더욱 호감이 가고 좋아하는 과목이었다. 사실 이 책이 얼마만큼의 진실을 통해 사실을 글로 담았을지 확신할 수 없지만 그래도 순결함을 바탕으로 그들이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고자 노력한 열정에 큰 의미를 두고 책과 이야기하고 싶다.

역사란 위정자 혹은 사가들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그 폐해를 없애기 위한 역사학자들의 객관적 진실이 담보 된 이 책에 응원 한페이지도 보탠다. 아무튼 국정교과서 문제도 있었고 암울한 시기를 지나 경제가 또 어려워지는 시기 역사의 바로 잡음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격이 조금씩 상승되기를 기대하며 책장을 넘겨본다. 그리고 세대를 차별하지않고 많은 분들에게 이 책은 읽어볼 가치가 있음을 추천으로 대신한다.

고조선에서 군부독재의 시절까지 우리가 정획히 알지 못했고 일부 사가들에 의해 정의내려진 연구를 그저 사실인냥, 민족의 주체성 증진을 위한 민족주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사랑하고, 쇄국적 마인드로 지켜오지 않았나 반성도 해본다. 고조선의 건국 설화, 어찌보면 부족간의 만남과 결합이 이루어 낸 국가적 태생이나 이를 토테미즘, 애니미즘 사상에 입각해 지나치게 설화적 측면을 강조한 역사관을 우리는 배우고 살지 않았나 싶다.

 

조선의 시작과 과정은 일연의 ‘삼국유사‘, 이승휴의 ‘제왕운기‘에도 담겨져 있다니 이 고전들과 현대 역사학자들이 평가하는 고조선 관련 연구 서적도 비교분석하며 읽어보아도 흥미로울 것 같다. 또한 고조선의 멸망을 두고 등장하는 낙랑군의 지리적 위치설, 학계의 의견이 분분하다기보다는 일부 부족한 연구 성과와 식민적 사관에 집착해 과도하게 지난 과거의 사실을 부정하는, 일부 학자들에 의해 파이가 커진 논쟁거리로 역사적 사실이란 근거세 재를 뿌리는 행위가 아닌지도 생각해본다.

이처럼 이 책 속의 내용들은 근거 부족한 지식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역사적 정체성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려는 양자간의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도 포함된 것 같아 씁쓸한 느낌도 들곤 했다. 하지만 이는 모두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하고 무심했던 독자들에게 5,000년 이상의 역사 속에 담긴 과오 또한 전달하며 올바른 역사 관점을 고취시키는데 의의가 있다. 분을 삯이기 힘든 부분도 있으나 그것이 이 역사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독자들의 몫이기도 하다.

책의 내용을 연대기순으로 읽고 따져보면 역사적 왜곡이 심각함을 깊이감 있게 체험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 비를 설명하는 부분에서도, 각 국가의 시대적 상황과 입장에 따라 의미와 해석을 달리함에 혼란을 겪기도 하는데, 그 진실의 판단이현재까지 대두된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료가 부족하며, 희미한 기억처럼 남아 있음에 그 사실성이라는 희미한 단서가 절실하기만 하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통해서만봐도 한중일 삼국의 반응은 극단적이다. 비문의 증거를 통해 임나일본설 주장하는 일본과 이를 무시하는 대한민국, 중국의 동북공정등 풀리지 않는 해답이 난무해 어디에 어떤 상황으로 결론 지어질지도 귀추가 주목된다. 이 책은 이만큼 많은 생각과 사이비 역사 연구의 폐해를 들추고 독자로 하여금 고민케하는 중요한 기록물임을 재확인한다.

칠지도 및 책에서 언급하는 내용 및 기록들이 사실인냥 인식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이 책의 저자들은 좀 더 날 선 자세의 태도로 자국의 이익 및 현실제 상황만을 고려한 역사 고증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료 제시를 통해 독자 및 역사를 공부하는 학도들에게도 진실 된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맥락에 맞는 역사 검증의 필요성을 각 챕터별로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도 과거의 권위와 힘의 상징을 승리자의 입장, 자국을 대변하는 입장하는 편협한 역사관보다 잘못은 인정하고 극복할 것은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 지금부터 좀 더 사실적인 자료 발굴과 조사 등으로 투명성을 확보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한 의도의 젊은 역사학자들의 땀과 노고가 이 작품에 담겨 있다고 느끼며, 역사 바로서기의 측면에서 많은 이들이 이 작품과 대면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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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무삭제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23
공자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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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라 하면 일반 독자들에겐 어렵다, 읽기 까다롭지 않을까?라는 선입견부터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책 안에서 몇 천년이 흐른 당 시대상을 느끼며 현실적 가치를 논해보고 연구해보는 것도 유익한 시간이 되리라 여겨진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인 것처럼, 옛 성현의 말들도 현세 어디에나 대비될 수 있으며 함께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에서 논어는 현대인이면 한 번쯤 읽어보고 그 내용들을 이해하고 깨닫는 사유의 시간이 한 번쯤은 있어야 올바른 삶, 독서의 생활화화 되지 않을까 공자의 '논어'를 읽으며 생각해보았다. 여기에 논어 몇 편을 함께 나누며 깨달음과 실천의 방법을 직접 행해보는 독서가 되길 바라는 마음에 글을 정리해본다.

학이 편
'공자가 논어를 통하여 시종 제시하는 길은 인간 세상에서 자기 인격의 완성하는 군자의 길이다.                    본문 18페이지

인격의 완성이란 학문의 완성일 수도 있으며, 자아의 완성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군자의 길은 멀고도 험하지만 스스로를 닦아 나가고 세상을 통해 학문을 익히다 보면 군자의 길이란 정해진 때를 통해 나타나리라 확신해보는 대목이다.
말씀과 대화 나눔 모두가 인생에 소중한 가치이자 무릎을 탁 치고,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한 명언들의 집합체이라 '사기' 해설서 이후 이렇게 부족한 내 스스로를 탓해 본 적은 없던 독서이다. 탄식과 환희, 좌절까지, 그래서 우리는 고전을 통해 옛 성현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내 삶에 적용시켜보려 하는 것 같다.

'공자가 말했다."남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걱정해야 한다.             본문 30페이지

사실 상대방의 삶이나 이익을 챙기기 힘든 시기이다. 스스로를 가꾸어 나가는 것도 벅찬 삶이자 급변하는 현대의 흐름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주변을 둘러보는 의미 있는 가치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로 다가오는 구절이며, 힘들 때일수록 나보다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마음속 다짐을 한다.

위정 편
'공자가 말했다. "유야! 너에게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아는 것이다."                                                       본문 41페이지

가장 소박하고 평이한 언어로 표현된 진실이다.라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다. 솔직하지 못한 사회, 고위공직자들도 비리와 부정부패로 폭망하는 사회이다. 그만큼 진실보단 부정과 친하고, 투명함 보다 은밀함이 판치는 요즘 세상에 필요한 가장 담백한 의미의 격언이 아닌가 싶다. 모르면 솔직히 말하고 배움을 익히는 것이 참된 제자이며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이자 기본자세임에도 그렇지 못하다. 그냥 넘겨서 그 순간의 위기 모면에 급급한 거짓 미소 짓기. 그리고 모든 걸 진실인 양 묻어버리는 인간의 부도덕한 됨됨이에 비수를 꼽는 듯한 가볍지만 깊은 공자의 말씀이다.

팔일 편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에는 조상이 앞에 있는 듯하였고, 신을 제사 지낼 때에는 신이 앞에 있는 듯이 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제사에 참여하지 않으면 마치 제사를 모시지 않은 것과 같다."      본문 56페이지

이는 경건함을 강조하며 종교가 아닌 도덕 활동임을 이야기한다. 윤리 도덕적 측면에서 조상을 숭상하고 기리는 것이지 그것이 맹목적인 섬김이나 종교적 의례는 아니라고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아마 인간의 마음 깊숙이 담긴 죽은 자, 혹은 신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의 경건함을 강조하는 의미일 수도 있다. 윗 분을 공경하고 예의에 충실한 삶을 지켜왔던 현생에서의 관계를 망자가 되고 나서 기리는 측면에서 예와 윤리, 도덕적 철학을 중시했던 공자의 삶을 반영하는 문구이다. , 아쉬운 것은 국가 제례 행사시 천자만이 이를 주관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제 의식에 대한 불필요함, 부질없음을 이야기하는 팔일의 구절은 형식을 겉치레라 여기는 21세기와는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려, 시대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 문화적 차이도 느껴지는 문장들도 보였다. 성현의 모든 말씀이 지금 사회에 통용되기도 하지만 이를 또 다른 방향의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도 옛것을 통해 배우는 가치이다.

이인 편
공자가 말했다. "오직 인자만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어떤 사람이 나쁜 사람인가를 판별할 수 있다."    

본문 68페이지

인의예지, 우리가 갖춰야 할 덕목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서 공자는 인을 강조하고 읺다. 어진 사람이 상대방에 대한 파악을 잘 하고 넓은 안목으로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음을 다년간의 인간관계 속에서 알아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의 인, 인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이는 끊임없는 수련과 학문의 연구 없이는 힘들 수도 있다. 경험 속에서도 이를 자신의 잣대로만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바라보는 올바른 정신, 그것이 인을 실현해 상대를 배려하고 파악하며 선과 악을 구분 가능한 능력으로 거듭날 것이다.

공자는 또 부모가 계실 경우 멀리 떠나지 말며, 떠날 경우 이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라고 권한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이 마음을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얼마 전 부모가 자녀와 함께 하는 시간이 일생에 2프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통계를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 품을 떠나면 이제 각자의 독립된 개체가 되지만 자녀 또한 부모이며, 자식이기에 부모를 섬길 땐 진실되게 행동하며 세월이 지나고 출가를 할수록 더 자주 뵙고, 안부를 묻는 습관이 지금 어느 시대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한다.

옹야
"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정직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정직하지 않으면서도 살아가는 것은 요행으로 재앙을 벗어난 것이다."

정직하게 삽시다. 정직한 사람이다. 이것은 솔직하고 담백한 사람을 의미하는데 그 의미가 변치 않고 고스란히 인생의 교훈이 되는 것이 정직함이다. 나에 대한 고결함을 지켜나가는 것들, 그러나 일상생활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거짓을 고하게 되고 진실을 외면하여 불성실한 사람이 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경우 정직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고 만다. 하물며 성자도 정직성에서 벗어나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며 인간으로서 지닌 최고의 덕목 중 하니임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일이기에 늘 고민하게끔 하는 단어이다. 그래서 흔히 종교적으로 말하는 우리는 모두 죄인인 걸까? 우스갯소리지만 그래서 공자가 말한 것처럼 정직을 잃은 인간이 요행으로 살아가다가 모두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공자의 논어는 그의 말을 바탕으로 끝없는 사유와 고민을 하게 하는 고대의 유물 같다.

술이 편에서 공자의 성실함을 의미하는 문구가 나온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곧 만사를 안 것이 아니고, 옛것을 좋아하여 성실하게 노력하여 그것을 구한 자이다."

끈기이자 부지런함이며, 성실함에 기인한 결과이다. 과거를 통해 현재를 배워 탁월한 식견을 후대까지 설파한 공자처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꾸준함을 배워보자. 모든 것이 의지이고 과정의 결실이지 무조건 생겨나는 이는 이 지구상엔 없다.

태백 편에서는 욕심에 대해 논하고 있다. "용맹을 좋아하고 가난을 싫어하는 것도 난을 일으키고, 사람으로서 인하지 못한 것을 너무 심하게 미워하는 것도 난을 일으키게 된다."

어질지 못하고 승부욕이 강한 사람, 아마도 거침없이 자신을 위한 방어막으로 가득 찬 인물의 성향을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내려놓음으로써 사람은 어질어지고 관대함이 높아가지만 이와 반대의 경우는 늘상 정복하려 하고 기고만장하며 없는 것에 대해 참을성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요소요소에 인간의 마음을 들추어내어 집도하듯 공자의 말은 몸과 맘에 박히게 되니, 그래서 옛 성현의 참된 진리, 그 말씀을 통해 책과 마주한 순간이라도 내 스스로 변화하려 하는 계기를 마련케 된다.

향당이란 부분에는 공자의 품격과 성품 됨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 상세히 나온다. 군주 앞에선 충신의 모습으로 장엄하며 예를 알고 군주와 둘이 있을 때는 편안한 마음으로 군신의 대화를 나눈다고 전해진다. 또한 제를 지낼 때도 목욕재계의 예를 지켜 명의를 입는다고 하니 모든 제자들의 표본이 될 수밖에 없는 스승임을 다시금 확인케 된다. 식습관에서도 검소함을 보이며 진수성찬은 마다하고 정해진 음식을 정확한 기한 내에 먹어야 하는 음식의 '예도' 또한 생활에 적용시키는 공자의 모습을 배움으로 그의 제자를 비롯해 규칙적인 삶, 예절, 음식의 소중함을 배우길 바란다.

제자를 아끼고 사랑한 논어 속 공자, 그리고 쓴소리도 거침없이 하지만 그의 제자들이 도를 통해 학습하고 사유하며 각자 학문의 틀을 넓혀가길 바랐던 공자의 면모를 통해 그가 왜 2,500년간 인류 역사의 성인으로 인정받고 있는지 작게나마 알게 되고 느낄 수 있는 논어와의 만남이었다. 무엇보다 과거 서양 철학자들처럼 공자 또한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며 그것이 인과 맞물려 참된 군자의 모습을 발현해내길 원한 것 같은 추측을 해본다. 20여 편의 제목이 다른 고결한 문장들의 사실과 일화이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 모두는 인류의 모든 이들이 정직함과 고결함을 유지하고 ''''를 길러 도덕적 성과류 얻고자 하는데 합일점을 두고 있을 것이다

국가 및 군주의 안위와 평화, 개인의 욕심과 영달보다 사랑하는 제자들과 펼치는 끝없는 학문적 열정. 촌철살인은 있을지언정 그것이 상황을 주도하려는 말이 아니라 공자의 말로 하여금 제자들이 좀 더 깊은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하는 모습이 논어를 통해 드러남을 깊이 깨닫고 어렵겠지만 그의 말과 기록된 글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보자. 그것이 이 책을 읽은 독자로써 논어를 읽고 얻은 작은 교훈이 되고 곁에 책을 두고 가끔씩 꺼내보며 삶에 적용하는 기적이 일어나길 바란다.


나에게도 '논어'란 다시 꺼내 두고두고 보아야 한다는
숙제를 남겨 둔 명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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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귤
김혜나 지음 / 은행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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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혜나 작가의 신작 소설집 ‘청귤’.  6편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그간 문예지 혹은 웹진에 발표된 이야기들을 하나로 묵은 작품이다김혜나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하는 나로서는 ‘청귤이라는 시큼하면서 달콤한 제목에 끌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지금 딱 알맞은 계절의 작품 제목이자 출간된 소설집이라고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겼다.
 
 
로레나

첫 작품 ‘로레나’, 필리핀에서 우연히 만난 주인공 나의 막내 삼촌 용희의 여자 친구애인이라고 해야 할까? 이미 결혼을 해 남매를 두고 있는 용희 삼촌이지만잠시 필리핀에 거주하다가 두 남매와 로레나라는 볼품없고 가진 것 없으며소심한 필리핀 여성과 함께 귀국하게 된다사촌 조카의 돌잔치에서 처음 주인공과 용희 삼촌이 만난 자리로레나라는 이름의 발음을 정확히 발음하기 힘든 주인공에게 용희 삼촌은 ‘’ 발음을 강하게 하면 영어의 L 발음이 더 쉽다고 힌트까지 주며 그의 이름을 불러보라고 한다. 그곳 돌잔치 장소에서 연신 술을 퍼마시는 용희그는 인생의 패배자이자 낙오자 같지만 왠지 모를 자존심으로 살아가는 남성이기도 해 보인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남매필리핀 여성 로레나그들은 주인공인 나에게 의지하여 시간의 흐름을 함께 이야기 속에서 공유하는 인물들로 그려지는 듯하다.
 
이어서 사촌 조카의 돌잔치에서 헤어지는 마지막 인사로 로레나는 주인공인 나에게 ‘’ 소리 나는 듯한 볼 뽀뽀를 한다영화에서나 친한 친구들끼리 볼 뽀뽀를 하거나친근함의 표현으로 하는 것을 본 것이 전부인 주인공그 의미를 계속 간직하다가 다시 설날 용희 삼촌의 가족들과 해후한다그리고 이야기는 여기서 극적인 사건을 더 발화한다고 할까네일아트에 능숙한아니 이것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생업이자 삶이라 이야기하는 용희 삼촌의 말처럼 로레나는 주인공인 나를 시작으로 많은 가족들에게 3시간 이상의 네일 아트를 선물해 주고 있다그러나 이런 로레나의 모습에 걱정을 하던 주인공그리고 용희 삼촌에게 이를 만류시키라고까지 하나설날 휴식을 즐기던 용희 삼촌은 형제들과의 화투판을 난장판 만드는데 이어 네일 아트를 친척들에게 해주고 있는 로레나의 도구 상자까지 바깥으로 던져 당시의 분위기를 불 보듯 뻔하게 만들고 만다주인공인 나이게 욕설까지 퍼붓고 밖으로 향한 용희 삼촌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용희 삼촌을 따랐기에 그런 행동은 큰 행위의 잘못이 아닌 것이다놀이터에서 용희 삼촌을 발견한 주인공은 삼촌과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나눈다그리고 용희 삼촌은 소주 한 잔 더 하겠다며 유유히 편의점으로 향한다그리고 로레나는 방 한편에 웅크린 채 엎드려 있다주인공이 나도 그녀 곁에 조용히 같은 자세로 그 상황을 공유할 뿐이다.
 
문장이 어렵지 않고 가독성이 좋아 읽기가 참 편한 글이다용희 삼촌이 어떻게 로레나를 만나 여기까지에 이르렀다는 전후 사정이 없어도 우리 독자는 앞서간 상상력으로 대략 어떤 상황으로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으며 로레나와 용희 삼촌이 그러한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도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 삼촌과의 아련했던 추억으로 그들의 행동과 상황을 그저 받아들이며 관조적인 자세로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어찌 보면 측은함, 동정, 아니면 과거의 편했던 삼촌이란 존재에서 지금은 사회성이 부족하고하루하루 살아가기 힘든 그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 자체로 인식하고 극의 중심에 서서 설명하고자 하는 건 아니었을지 생각해 보는 소설 읽기였다그리고 소설 마무리 마지막 주인공의 낯선 질문, “괜찮겠지?” 그리고 수긍하듯 "괜찮다"라고 이야기하는 삼촌그것이 로레나일 수도불확실한 용희 삼촌 자신의 미래일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이야기
 
자신이 태어난 이야기가족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 나어떻게 해도 이야기를 능숙하고 재밌게 하기 힘든 것이 자신이라고 설명한다그리고 이야기 방식에 따라 같은 내용을 이야기함에도 흥미롭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도 많다고 알려준다하지만 끊임없이 나를 상대방에게 이야기하고그것을 부자연스럽다고 이야기하지만 오히려 다양한 이야기의 공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읽어나갈 수 있는 인생 전기와 같은 흐름의 독백이었다.
 
여기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한 이유필리핀 여자인 로레나와의 첫 만남단편 ‘로레나에서의 이야기와 이어지는 것인가 잠시 생각했지만 또다시 이야기는 자신이 살아온 역경에 대한 넋두리와 같은 이야기로 전개된다. 이야기를 하기 힘들고 못하지만 자신이 타자와 이야기함으로써 변해가는 모습에 끝까지 이야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는 아이러니함하지만 하기 싫던 것도 하고잘 하던 것들도 못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이를 독백하듯이 풀어내는 화자의 나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것이다그 이야기가 혹시 당신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청귤
 
미영과 지영의 만남은 또래의 만남
 
"사람들은 여름에도 귤이 난다면서 신기해하고 그것을 먹어보려고 하지. 그런데 이걸 막상 나무에서 따서 손으로 가져와 보면 예쁘지도 않고 맛있지도 않아. 이건 그냥 쓰고, 시고, 딱딱하기만 해. 진짜로 먹을 수는 없어."
 
감귤은 먹으면 그만이지만 청귤은 오래 두고 다양한 용도로도 사용 가능하다. 그래서 미영은 청귤이 좋다고 한다. 여기 소설 속 두 영은 다르지만 같은 대학시절의 친구로 시작된다. 하지만 청귤은 들 영근만 큰 풋풋함과 부자연스러움과 막연함이란 의미가 남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미영의 끝없는 분노와 욕설이 낯설고 불편하기도 하지만 그 생 날것이라는 느낌을 알기에 그 안에서 자신의 자유를 부르짖으며 부정한 것들에 끝없이 항의하고 원초적인 본능에 충실한 모습이 미영, 그녀의 참 모습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모습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소설가 지영. 청귤의 투박함, 부족함을 지닌 듯 한두 사람. 그 강도가 더하게 보이는 미영, 그러한 부족함을 소리 없이 받아들이고 스며들게 하는 지영의 우정이 청귤의 시큼함을 상큼함으로 변화시키는 듯하다.
 
폭력적이거나 혐오가 아닌 원초적 감정 그대로의 소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낯설지만 신선하고 개성이 넘치기에 흥미롭고 농밀한 이야기도 서서히 독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지 않을지 평해본다. 그리고 소설 속 멘트, 청귤이든 감귤이든 다 비슷하고 흡사하며 인간도 그런 종류의 일부일 뿐임을 공감한다.
 
《오샤 와》
 
캐나다인 앤드루를 남편으로 둔 한국인 여성인 화자. 화자인 나와 남편 앤드루가 캐나다라는 미지의 세계와도 같은 공간이자, 남편의 고향이기도 한 오샤 와 그리고 교차 편집되듯 구성된 토론토를 오가며 펼쳐지는 버디 무비와도 같은 느낌을 받은 소설이다. 인간에겐 누구나 작은 아픔에서 큰 아픔까지 존재는 알 수 없지만 마음속 응어리가 있기 마련이다.
 
주인공의 남편인 앤드루 또한 자신의 동생인 노아를 '자살'이라는 이름의 죽음으로 잃고 만다. 그래서 특히나 '자살'이라는 단어에 혐오감을 느끼며 담배 대사 '위드'라는 신경 안정 수단(?)으로 자신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 같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시점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남편인 앤드루의 친구들과 만나고 소통함으로써 그들을 알아가는 구성으로 흐르는 것 같았다. , 주드, , 남편 앤드루의 큰 형인 세스, 헬렌 등 각자의 추억과 현재를 공유하며 전개되는 이야기에 이를 자연스레 관찰하듯 지켜보며 이야기 속에 담기는 주인공 나의 모습이 정적이며 잔잔한 분위기로 풍겨지는 작품이었다.
 
차 문 뒤 언덕을 오르며
 
낯선 곳이기에 더 호기심이 생기고 왜 메이가 차 문 뒤 언덕의 일출을 보기 위해 집착했는지 그 상황을 알게 되기까지는 책의 내용을 집중하여 곱씹듯 읽어야 함을 느낀다. 저자가 풀어가는 이 소설의 구조는 기존 오이 샤워 같은 장소적 이동의 교차식 구성은 아니나 메이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넘나들 듯 과거를 회상하며 현재를 극복하려는 의지, 그리고 좌절이 동시에 보인다.
 
주인공 메이가 왜 인도에 왔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목적에서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한 것인지를 생각하며 소설을 접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엔딩을 접하는 독자들의 마음도 궁금하여 메이의 구슬픈 독백과 같은 자기 암시적 대사, 마무리를 통해 다양한 생각을 해보아도 좋을 인도처럼 신비감 가득한 소설이다. 물론 독자마다 호불호가 있겠지만 낯선 요가 용어, 혹은 미지의 나라 인도에서 사용되는 신의 언어 등, 물음표가 붙여지지만 저자의 친절한 해설을 살펴 가며 이야기를 읽어나간다면 메이의 표현하고자 하는 진실이 독자의 마음속에 안착하지 않을지 생각한다.
 
그랑 쥬떼 》
 
발이 참 큰 여자아이 예정이 있었다. 그녀의 친구 '리나'는 촉망받는 발레리나 지망생이었으나 그녀는 오히려 발이 큰 예정이를 부러워했다.
그렇게 예정이는 큰 발 콤플렉스에서 벗어나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고 결국엔 작은 학원의 보조 강시 및 사무 담다 격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또 다른 감춰진 비밀이 많은 아이이다. 그 이야기들이 그랑 쥐 떼 사이사이에 이 단편집의 실마리를 던져주듯 숨겨져 있는 것이 이야기의 묘미 같다. 마치 감춰진 비밀을 들춰내는 듯한 청량감, 그리고 안타까움 등의 만감이 교차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큰 발, 그리고 포인트가 서는 발등-고등을 지닌 예정.
그렇지만 그녀에게 일상은 그저 흐름의 반복처럼 무미건조하다. 그리고 소설 속 이야기도 잔잔하게 무용학원을 일상을 스케치하듯하지만 주인공 예정의 마음 깊은 곳엔 끊임없이 떠오르는 상처의 스크래치 같은 것이 있어 보이는 작품이다. 어린 유치원생들의 옷을 갈아입히며 아팠던 과거의 악몽을 떠올리는 그녀. 크게 보면 엄청나고 섬뜩한 일이기에 그녀에겐 작은 것 하나, 하나도 엄청난 트라우마로 느껴진다. 그러나 일상은 또 무미건조회 반복되고, 또 잘못된 것이 당연한 듯 반복되는 사람 살기 힘든 세상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을 갖게 된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 그것은 성인이 된 예정에게 현실에 존재하는 악몽, 환영과도 같은 존재로 반복된다. 오히려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그녀를 괴롭히던 초등시절 남자 친구들과의 악연마저도 멀어지게 하고,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도 멀어지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유일한 친구였던 리나, 결국 그녀와의 이별도 이미 예견되었던 것인지 의도치 않은 우정의 이별이 오히려 이번엔 주인공 예정의 주도하에 마무리된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주인공 예정의 감정과 주변 상황들, 그리고 인물들과의 관계 설정. 조금은 복잡하지만 이 모든 구조가 하나로 연결되고
예정, 그녀는 다시 날아오르던 과거의 추억을 자신의 큰 발, 고를 바라보며 워밍업, 천천히 다시 날갯짓을 하듯 날아오르려 한다.
 
이 소설집의 6편의 이야기는 다른 것 같지만 어찌 보면 하나로 연결된 연작의 느낌, 비슷한 아픔과 상처를 겪거나 바라보는 여성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야기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 그리고 로레나, 다시 그 이야기 속의 인물이 그랑 쥐 떼의 예정이라는 인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 외 에피소드별 여성 주인공들의 캐릭터. 개성이 활활 타오르는 인물들이라기보다 덤덤하지만 주변과의 관계와 이야기의 흐름 안에 살며 노 자신을 맡기며 스며들듯 흡수되는 인물의 성격을 지닌 캐릭터들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조금은 무겁기도, 정열적이기도 했던 스토리들의 깊이 감 속에서 다양한 사유를 할 수 있었던 소설 읽기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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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필로테라피 4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이주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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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란 늘 딱딱하고 알 수 없는 문장들의 나열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뿐 독자인 나는 그저 철학이라는 학문의 문외한이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작품을 통해 철학을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재미거리를 찾고 싶어 책을 펼쳐든다..그리고 독자들도 철학을 철학자만이 향유했던 학문적 벽이란 한계에 국한 시키지 말고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절망에 관한 대처 혹은 대비법을 직접 실천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저자 또한 이 글을 통해 철학을 일상에 적용시켜, 실천함을 목표로 하는만큼 일반 독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소박한 철학자로 소개된다. 그리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에 딱 맞는 철학자였으며 그의 이론이 개인주의자편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을지,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이 작품이 해결해주고 있다.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중점으로 절망의 감정에 대한 해석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절망이란 자신을 부정하고 장점은 최소화, 아니 단점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게 하는 명백한 마이너스 요인이다. 그것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발생함을 개인주의적 삶에 극단적인 결말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자신을 향한 자기애 결핍으로 종료되고 결과를 초래한다. 절망에 이르게 되는 요인, 그 이유가 무엇이며 자존감 하락이 왜 당신을 피폐하고 나약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원인을 스스로 깨닫고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볼 과제로 보인다.

 

절망에 빠진 경우는 작은 어려움도 일반화 시키는 확대의 오류도 나타난다고 한다. 의학적인 측면에서도 절망을 우울증을 동반한 과대망상 등으로 진단하기도 한다니, 절망을 대하는 인간 개개인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으며, 그 진단 치료의 방법이 철학자 개인의 의견과 연구를 통해 치유되고 해결될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결과적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아는 사람이 더 정상적이고 정신이 더 건강하며 실존적 고민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고 정의했다. 그것이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의 고통을 이겨낸 탈출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선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자기 비하를 망상처럼 볼 수 없다고 하며, 어떤 특정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무언가의 계기가 되어 절망에 이르게 된다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이미 그 과정이나 원인이 그러해서 절망이란 결과가 나타난 것이아니라 이미 그 시작의 조짐, 싹이 이미 자라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작을 통해 그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해 결과보다 이미 스스로의 자아가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것, 그 뿌리에서부터의 불만과 불안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일 것이다. 역지사지의 생각이 여기서 적용된다. 이를 뒤집는 고민과 사색, 이것이 진정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을 이겨내고, 버텨 올바른 정신으로 가다듬는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보면 절망과 우울의 관계도 흥미롭다. 절망이 우선이든, 우울이 우선이든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 이 둘 모두가 인간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절망에 빠지다보면 그 비관적인 감정의 여울이 더욱 격해져 우울감을 동반한 극한의 상황까지 도달하기에 이른다. 이러할 경우 의사의 처방이 뒤 따르고, 죽음의 충동에까지 이르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의욕이 상실됨을 묘사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인용한 부분을 통해 좀 더 현실적으로 와 닿게 되며 의욕상실은 절망과 우울의 연쇄작용이 되어 인간의 삶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절망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불쾌한 기억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절망에 빠진 사람이 환자일 수 없고, 비관주의자도 아니며 불치병이란 병도 아님을 설명한다. 이처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써 절망을 받아들이고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감정의 판단은 사람 개개인의 마음가짐이나 역량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열정'이란 의미 또한 불러일으키기 희망했다고 전한다. 이는 온전한 개인이 되는 것을 상징했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개인의 열정은 사그라 들고 진정한 개인으로 사는 법을 망각해가고 있으며, 부르주아적인 소유주들은 합리적인 이익을 우선시하여 열정을 그저 수동적으로만 판단하는 사회적 전유물로 전락화 시킨 것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개인에 대한 가치에 큰 의의를 두고 있지만 사회는 개인 대신 대중의 영향력, 아니 그 안에 동화되는 것을 더 목표로 했으며 개인의 주장이 아무리 강해도 소속 된 한 집단에 속하게 되면 개인의 의견마저 집단화에 희석되는 것에 경고하고도 있다. 이것이 바로 절망에 이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나 이건마저 극복하는 것이 인간이란 생각을 가져본다.

 

'인간에게 에너지와 열정을 주자. 그러면 그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본문 98페이지

 

절망을 탈피하고 목적에 도달하기 열정, 키에르케고르와 저자는 수시로 열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행복으로 결부시키고 그 동의어를 사랑이라고까지 언급한다. 열정과 사랑에 대한 비유와 관계를 중심으로 이들이 더 강해지면 오히려 중독 된 사랑처럼 열정도 사그라듬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이든 적절함이 행복이고 평범함이 보편적인 삶의 지혜가 되는 것처럼 사랑과 열정도 적당한 상호작용으로 절망에 머무르지 않을 절제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책의 초반부 인간은 영원불멸을 열망하기에 절망에 이른다고 저자는 이야기했다.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물질문명이 발달하며, 4차 산업혁명의 실현으로 인간의 삶은 보다 더 윤택해지고 정보화의 교류 속도도 수십배 빨라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에서도 비극을 열정에 비유하고 희극과 비극에 대해 논하듯이 세상이 발달한다해도 수명이 늘어난다고해도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만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발전성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를 두려움, 반면 이렇게 살아 뭐해~라고 할 수 있는 자괴감 섞인 절망감도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 모두를 배려하고 모두에게 적용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절망하느니 차라리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을 지휘할 수 있다.란 말을 깨닫고 작가가 정의했듯, 비극일 수 밖에 없는 열정이란 동의어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수월한 삶이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삶의 고귀함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모든 것을 너무 픽션화 시키지 말라고 경고한다. 어쩌면 이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삶을 뜻하지 않을까?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보았다. 평범함 속에 찾는 행복, 매번 낭만적인 계획과 실천이 어려움도 설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 중 이 말 또한 단박에 꽂히는 대목이다. "모두 지구를 구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설거지를 돕고 싶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장 자크 루소의 말이다. 지나친 환상보다 지속적인 가치, 작은 것에 힘쓰라는 풍자 가득한 말인 것이다. 저자 또한 커다란 이벤트보다 매일 매일 이어갈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라고 조언해준다. 이것이 바로 열정이며 절망이란 인간의 감정을 피해가는 행복의 감정이라고도 해도 무방하지 않을런지......

 

선택의 문제, 이 앞에서도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며 타인의 시선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의견이 옭고 그르건 스스로 선택하는 힘을 기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그것이 윤리적인 선택이라면 그것을 선택하든 하지 않던간에 문제시 될 수 없다고 한다.

 

항상 사회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우리들, 상사와 가족과 상황과 능력 안에서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휩쓸려 가고만다. 맨처음 언급했던 개인주의적 견해를 단체라는 테두리안에서 뚜렷히 결정하지 못한것 처럼 선택 또한 애매한 상황을 그저 받아 들이는 경우가 많고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다분하다. 이러면 결국 우린 또 다시 절망하는 것이 아닐까? 진실하게 뚝심있게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며 선택하는 힘을 기르는 것도 나의 발전이며 행복인 걸 잊지말자.

 

윤리적인 삶이 항상 고귀하다고 할 수도 없는 점이 글에 보여진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규범과 규칙을 당연스레 지켜가고 그것을 어기게 될 경우 요즘은 각종 SNS와 댓글등을 통해 상대방을 비방할 수 도 있으며 결국엔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르게하는 도덕적 폐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럴때마다 드는 생각이 적절함이란 단어이다. 지나칠 정도로 규범 혹은 도덕에 치중하다보면 그것이 악법이 될 수 도 있다.

고귀함의 전통은 지키 되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과 윤리적 감성을 바탕으로 각각의 도덕적 판단으로 마무리 지어가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언급한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 상황과 문화, 환경에 따라 도덕이라 불리우는 윤리적 완성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를 수긍하는 것은 개개인의 묏이며 각자의 개성을 중시 여기며 스스로가 판단하도록 지켜봐야 할 뿐이다. 그것이 그 안에 담긴 고귀함을 찾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견한다.

 

끝으로 절망에 이르게 하는 죄책감. 모든 상황과결과를 자기 중심화 시켜 결론을 내림으로 죄책감에 휩쌓이는 것이 인간이며, 이를 극복치 못해 절망에 이르는 것도 인간이다. 모든걸 자신이 책임지는 행위도 지양해야하며 그래야만 절망의 무게도 가벼워질 것임을 기억하자.

 

신과 절망의 결부, 책의 마지막 장에는 종교성에 대한 유무와 그 의미, 가치 등을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이기도 한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을 저자는 인용하여 정리한다. 이미 종교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종교란 믿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 종교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싸움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에서 종교가 삶에 있어 끝없이 쫓아다니는 고통이라고도 한다. 그 자체로써 논의의 중심이며 풀리지 않는 정의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 좌절하거나 절망스러운 고통을 받아들이지 말고 믿음으로써 체념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회피하지 않고 버티며 이겨내는 희망을 지니면 삶을 살아가는 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전하려는 메시지이며 종교란 것이 논쟁의 정 가운데 서 있지만 이를 믿고 유지해가는 지침이 되는 유일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다소 딱딱할 수도 있는 키에르케고르 저서의 철학적 내용을 다양한 사례와 작가의 연구를 통해 좀 더 흥미롭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작품이며 절망이란 단어 속에서 체념치 않는 인간의 노력과 희망을 끊임없 불사르는 자세, 그것이 절망한 날에 키에르케고르를 생각하며 고통을 극복하는 정답이 됨을 이 책의 정독을 통해 누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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