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한 날엔 키에르케고르 필로테라피 4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이주영 옮김 / 자음과모음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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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이란 늘 딱딱하고 알 수 없는 문장들의 나열이라는 생각을 가졌을 뿐 독자인 나는 그저 철학이라는 학문의 문외한이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 작품을 통해 철학을 실생활에 적용해볼 수 있는 재미거리를 찾고 싶어 책을 펼쳐든다..그리고 독자들도 철학을 철학자만이 향유했던 학문적 벽이란 한계에 국한 시키지 말고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절망에 관한 대처 혹은 대비법을 직접 실천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저자 또한 이 글을 통해 철학을 일상에 적용시켜, 실천함을 목표로 하는만큼 일반 독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키에르케고르' 그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소박한 철학자로 소개된다. 그리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에 딱 맞는 철학자였으며 그의 이론이 개인주의자편에서 어떠한 영향력을 발휘했을지,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이 작품이 해결해주고 있다.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을 중점으로 절망의 감정에 대한 해석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절망이란 자신을 부정하고 장점은 최소화, 아니 단점만을 바라보며 자신을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게 하는 명백한 마이너스 요인이다. 그것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도 발생함을 개인주의적 삶에 극단적인 결말을 암시하기도 한다. 이는 결국 자신을 향한 자기애 결핍으로 종료되고 결과를 초래한다. 절망에 이르게 되는 요인, 그 이유가 무엇이며 자존감 하락이 왜 당신을 피폐하고 나약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원인을 스스로 깨닫고 찾아보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볼 과제로 보인다.

 

절망에 빠진 경우는 작은 어려움도 일반화 시키는 확대의 오류도 나타난다고 한다. 의학적인 측면에서도 절망을 우울증을 동반한 과대망상 등으로 진단하기도 한다니, 절망을 대하는 인간 개개인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으며, 그 진단 치료의 방법이 철학자 개인의 의견과 연구를 통해 치유되고 해결될지도 자못 궁금해진다.

결과적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아는 사람이 더 정상적이고 정신이 더 건강하며 실존적 고민을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고 정의했다. 그것이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의 고통을 이겨낸 탈출 사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선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자기 비하를 망상처럼 볼 수 없다고 하며, 어떤 특정 이유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무언가의 계기가 되어 절망에 이르게 된다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는 이미 그 과정이나 원인이 그러해서 절망이란 결과가 나타난 것이아니라 이미 그 시작의 조짐, 싹이 이미 자라나고 있었다는 것을 뜻하며, 저자는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의 저작을 통해 그 내용을 전달하고 있다. 쉽게 이야기해 결과보다 이미 스스로의 자아가 자신을 못 미더워하는 것, 그 뿌리에서부터의 불만과 불안이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게 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일 것이다. 역지사지의 생각이 여기서 적용된다. 이를 뒤집는 고민과 사색, 이것이 진정 키에르케고르가 절망을 이겨내고, 버텨 올바른 정신으로 가다듬는 방법이 되었을 것이다.

 

이에 덧붙여 보면 절망과 우울의 관계도 흥미롭다. 절망이 우선이든, 우울이 우선이든 무엇이 중요하지 않다. 이 둘 모두가 인간의 삶에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절망에 빠지다보면 그 비관적인 감정의 여울이 더욱 격해져 우울감을 동반한 극한의 상황까지 도달하기에 이른다. 이러할 경우 의사의 처방이 뒤 따르고, 죽음의 충동에까지 이르게 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는 모든 의욕이 상실됨을 묘사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인용한 부분을 통해 좀 더 현실적으로 와 닿게 되며 의욕상실은 절망과 우울의 연쇄작용이 되어 인간의 삶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요인이 됨을 알 수 있다.

 

또한 절망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내재된 불쾌한 기억을 내면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절망에 빠진 사람이 환자일 수 없고, 비관주의자도 아니며 불치병이란 병도 아님을 설명한다. 이처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느냐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으로써 절망을 받아들이고 극복하거나 좌절하는 감정의 판단은 사람 개개인의 마음가짐이나 역량에 있어서도 큰 차이가 있을 것임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키에르케고르는 '열정'이란 의미 또한 불러일으키기 희망했다고 전한다. 이는 온전한 개인이 되는 것을 상징했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개인의 열정은 사그라 들고 진정한 개인으로 사는 법을 망각해가고 있으며, 부르주아적인 소유주들은 합리적인 이익을 우선시하여 열정을 그저 수동적으로만 판단하는 사회적 전유물로 전락화 시킨 것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개인에 대한 가치에 큰 의의를 두고 있지만 사회는 개인 대신 대중의 영향력, 아니 그 안에 동화되는 것을 더 목표로 했으며 개인의 주장이 아무리 강해도 소속 된 한 집단에 속하게 되면 개인의 의견마저 집단화에 희석되는 것에 경고하고도 있다. 이것이 바로 절망에 이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할 것이나 이건마저 극복하는 것이 인간이란 생각을 가져본다.

 

'인간에게 에너지와 열정을 주자. 그러면 그 사람은 완전한 존재가 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본문 98페이지

 

절망을 탈피하고 목적에 도달하기 열정, 키에르케고르와 저자는 수시로 열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행복으로 결부시키고 그 동의어를 사랑이라고까지 언급한다. 열정과 사랑에 대한 비유와 관계를 중심으로 이들이 더 강해지면 오히려 중독 된 사랑처럼 열정도 사그라듬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이든 적절함이 행복이고 평범함이 보편적인 삶의 지혜가 되는 것처럼 사랑과 열정도 적당한 상호작용으로 절망에 머무르지 않을 절제가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책의 초반부 인간은 영원불멸을 열망하기에 절망에 이른다고 저자는 이야기했다. 세계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물질문명이 발달하며, 4차 산업혁명의 실현으로 인간의 삶은 보다 더 윤택해지고 정보화의 교류 속도도 수십배 빨라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책에서도 비극을 열정에 비유하고 희극과 비극에 대해 논하듯이 세상이 발달한다해도 수명이 늘어난다고해도 보다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만 말 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발전성으로 인해 언제 죽을지 모를 두려움, 반면 이렇게 살아 뭐해~라고 할 수 있는 자괴감 섞인 절망감도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

 

과학의 발전이 인간 모두를 배려하고 모두에게 적용될 수 없는 현실적 상황에서 절망하느니 차라리 프란시스 베이컨의 말처럼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자연을 지휘할 수 있다.란 말을 깨닫고 작가가 정의했듯, 비극일 수 밖에 없는 열정이란 동의어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것이 훨씬 수월한 삶이 되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삶의 고귀함이란 무엇일까? 저자는 모든 것을 너무 픽션화 시키지 말라고 경고한다. 어쩌면 이는 자연스럽게 물 흐르듯 살아가는 삶을 뜻하지 않을까? 책을 읽어가며 생각해보았다. 평범함 속에 찾는 행복, 매번 낭만적인 계획과 실천이 어려움도 설명하고 있다. 책의 내용 중 이 말 또한 단박에 꽂히는 대목이다. "모두 지구를 구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만 정작 어머니의 설거지를 돕고 싶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장 자크 루소의 말이다. 지나친 환상보다 지속적인 가치, 작은 것에 힘쓰라는 풍자 가득한 말인 것이다. 저자 또한 커다란 이벤트보다 매일 매일 이어갈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라고 조언해준다. 이것이 바로 열정이며 절망이란 인간의 감정을 피해가는 행복의 감정이라고도 해도 무방하지 않을런지......

 

선택의 문제, 이 앞에서도 우리는 좌절하고 절망하며 타인의 시선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그 의견이 옭고 그르건 스스로 선택하는 힘을 기르라고 한다. 키에르케고르 역시 그것이 윤리적인 선택이라면 그것을 선택하든 하지 않던간에 문제시 될 수 없다고 한다.

 

항상 사회의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우리들, 상사와 가족과 상황과 능력 안에서 우리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고 휩쓸려 가고만다. 맨처음 언급했던 개인주의적 견해를 단체라는 테두리안에서 뚜렷히 결정하지 못한것 처럼 선택 또한 애매한 상황을 그저 받아 들이는 경우가 많고 기회를 놓치는 경우도 다분하다. 이러면 결국 우린 또 다시 절망하는 것이 아닐까? 진실하게 뚝심있게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며 선택하는 힘을 기르는 것도 나의 발전이며 행복인 걸 잊지말자.

 

윤리적인 삶이 항상 고귀하다고 할 수도 없는 점이 글에 보여진다. 우리는 도덕이라는 이름하에 모든 규범과 규칙을 당연스레 지켜가고 그것을 어기게 될 경우 요즘은 각종 SNS와 댓글등을 통해 상대방을 비방할 수 도 있으며 결국엔 극단적인 상황까지 이르게하는 도덕적 폐혜를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이럴때마다 드는 생각이 적절함이란 단어이다. 지나칠 정도로 규범 혹은 도덕에 치중하다보면 그것이 악법이 될 수 도 있다.

고귀함의 전통은 지키 되 인간 개개인의 주체성과 윤리적 감성을 바탕으로 각각의 도덕적 판단으로 마무리 지어가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언급한다.

 

모든 것이 완벽할 수 없다. 상황과 문화, 환경에 따라 도덕이라 불리우는 윤리적 완성은 다를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를 수긍하는 것은 개개인의 묏이며 각자의 개성을 중시 여기며 스스로가 판단하도록 지켜봐야 할 뿐이다. 그것이 그 안에 담긴 고귀함을 찾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견한다.

 

끝으로 절망에 이르게 하는 죄책감. 모든 상황과결과를 자기 중심화 시켜 결론을 내림으로 죄책감에 휩쌓이는 것이 인간이며, 이를 극복치 못해 절망에 이르는 것도 인간이다. 모든걸 자신이 책임지는 행위도 지양해야하며 그래야만 절망의 무게도 가벼워질 것임을 기억하자.

 

신과 절망의 결부, 책의 마지막 장에는 종교성에 대한 유무와 그 의미, 가치 등을 믿는자와 믿지 않는 자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이기도 한 키에르케고르의 생각을 저자는 인용하여 정리한다. 이미 종교가 무의미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그 종교란 믿음이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고 한다. 그 종교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과 신의 존재 가치에 대한 싸움은 끝없이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는 '철학적 단편에 붙이는 비문학적 해설문'에서 종교가 삶에 있어 끝없이 쫓아다니는 고통이라고도 한다. 그 자체로써 논의의 중심이며 풀리지 않는 정의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렇지만 거기서 좌절하거나 절망스러운 고통을 받아들이지 말고 믿음으로써 체념하지 말 것을 조언하고 있다. 회피하지 않고 버티며 이겨내는 희망을 지니면 삶을 살아가는 것이 키에르케고르가 전하려는 메시지이며 종교란 것이 논쟁의 정 가운데 서 있지만 이를 믿고 유지해가는 지침이 되는 유일 영역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다소 딱딱할 수도 있는 키에르케고르 저서의 철학적 내용을 다양한 사례와 작가의 연구를 통해 좀 더 흥미롭게 철학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작품이며 절망이란 단어 속에서 체념치 않는 인간의 노력과 희망을 끊임없 불사르는 자세, 그것이 절망한 날에 키에르케고르를 생각하며 고통을 극복하는 정답이 됨을 이 책의 정독을 통해 누려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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