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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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답사

 

돈황(敦煌) 명사산(鳴沙山) 자락에 자리잡은 막고굴(莫高窟)에는 4세기경부터 시작해서 14세기까지 약 1천 년간에 걸쳐 석굴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은 492개인데, 이 중 수(隋)나라 때 97기, 당(唐)나라 때 225기가 만들어졌다니 전체 석굴의 4분의 3이 수당시대에 만들어진 셈이다.

막고굴 석굴의 관람은 보존을 위해 하루 6천 명으로 관람인원을 제한하고 예약된 관광객만 15분 단위로 입장시키는 등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막고굴 석굴을 관람하려면 먼저 막고굴 디지털 전시 센터로 가서 돈황과 막고굴에 대한 영상을 본 후 막고굴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막고굴 부근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막고굴 입구의 솟슬대문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여기서 가이드를 만나 석굴을 구경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관람자 별로 2시간 동안 8개의 석굴을 볼 수 있으며, “막고굴 석굴 중 가장 큰 불상인 북대불(北大佛)이 있는 제96굴과 돈황문서가 발견된 장경동(제17굴)이 있는 제16굴은 공통으로 보여주고 나머지는 관람객들이 겹치지 않게 가이드가 조절하여 안내” [pp. 23~24]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 1부 ‘막고굴’에서 두 차례에 걸쳐 11개의 석굴을 관람하고 막고굴에 있는 불상과 벽화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5굴의 모형(돈황박물관)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13

 

박공식의 제254굴 천장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8

 

북두형 천장의 제285굴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9

 

제275굴 교각미륵상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93

 

돈황문서 수난기

 

막고굴은 한동안 잊혔다가 20세기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00년 도사(道士)를 자처한 왕원록(王圓?, 1851~1931)에 의해 제16실 안에 있는 감실, 지금은 제17굴로 불리는 장경동(藏經洞)에서 돈황문서 3만 점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 문서 가운데 연도를 알 수 있는 것을 보면 “가장 오래된 것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인 353년의 필사본이고,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것은 북송(北宋) 때인 1030년에 작성된 필사본이다.” [p. 112]

비록 이곳에서 발견된 불경의 “대부분이 잔권(殘卷) 단편들이고 가짜 경전으로 의심되는 위경(僞經)도 적지 않다. 심지어 잘못 베껴 버려진 두루마리와 먹을 덕지덕지 칠한 잡다한 글씨의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응당 있어야 할 <대장경>에 수록된 주요 경전이나 <대반야경> 등 고급 불경이 없다”[p. 113]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황문서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불행히도 이후 중국에서 ‘도보자(盜寶者)’라고 부르는 영국의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 미국의 랭던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 등이 돈황문서와 유물을 가져가 전세계로 흩어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05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오브루체프(Vladimir A. Obruchev, 1863~1956)가 왕원록에게 승려의복용 직물, 향, 등잔용 기름, 구리 주발 등이 든 6꾸러미를 주고 고문서 2상자를 가져간 것을 시작으로, “1907년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어리숙한 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약1만 점을 유출하여 영국박물관에 가져갔고,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다시 5천 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가져갔는데 그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필사본도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청나라 정부가 북경으로 옮겨갔다. 뒤이어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흩어져 있던 (약 600종의) 문서와 불상을 유출해갔고, 미국의 랭덤 워너는 (돈황문서가 아니라) 불상과 벽화를 뜯어갔다.” [p. 49]

 

돈황문서는 이렇게 흩어졌지만 남아있는 돈황벽화라도 수호한 이들도 있었다. 제백석(齊白石)과 함께 현대 중국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대천(張大千, 1899~1983)은 1941년부터 막고굴 벽화를 모사하는 동시에 석굴마다 번호를 매기며 조사했다. 파리에서 활동한 전도유망한 화가였지만 귀국해 40여 년을 막고굴 보호와 연구에 헌신한 만주족 화가 상서홍(常書鴻, 1904~1994)도 있다. 조선족 화가 한락연(韓樂然, 1898~1947)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려는 창조파에 속했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중국 국민당 고급장교를 상대로 하는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했고, 이로 인해 국공합작의 와해 이후 체포되었다. 다행히 각계의 구명활동으로 “활동 지역을 서북지역[감숙성과 신강성]으로 한정할 것과 작품에 노동 인민을 그리지 않을 것을 조건” [pp. 234~235]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돈황 벽화를 모사하며 발굴조사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막고굴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호하였다. 오늘날에는 돈황연구원이 그들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20세기에 일어난 막고굴 약탈, 즉 돈황문서의 수난사는 어떻게 보면 답사기와는 다소 핀트가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막고굴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기에 수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아 감정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돈황에는 막고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돈황 인근에는 막고굴 외에도 가볼 만한 답사처가 많다. 과주(瓜州) 혹은 안서(安西)에 있는 유림굴(楡林窟)은 막고굴의 자매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제2굴과 제3굴에서 탕구트계의 나라 서하(西夏)가 남긴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제2굴 서쪽 벽의 남측과 북측의 수월관음도는 고려의 불화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떠올리게 한다.

 

제2굴의 수월관음도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p. 284~285

 

돈황 시내에서 각각 서남쪽, 서북쪽에 위치한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은 예부터 서역으로 열린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실크로드라고 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은 아니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사막답게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회하는 길일 뿐이다. 그래서 실크로드의 두 관문인 양관과 옥문관을 따라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형성된 것이다. “양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남로는 곤륜산맥의 오아시스 도시인 누란(樓蘭)과 호탄[Khotan, 和田]을 거쳐 카스[喀什]에 이르는 길이다. 옥문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북로는 천산산맥을 따라가는 길로 투르판[Turfan, 吐魯蕃]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천산남로는 쿠얼러[Korla, 庫爾勒]와 쿠차([Kucha, 庫車]를 지나 카슈가르[Kashgar, 喀什, 카스]에 이르고, 북쪽으로 나아가는 천산북로는 우루무치[Urumqi, 烏魯木齊]를 지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로 나아가는 초원의 길이다. 강인욱 교수의 지적대로 실크로드는 선이 아니라 오아시스 도시를 잇는 점을 말한다.” [p. 304]

 

다음 권에서는 <서유기(西遊記)>의 모델이 된 현장법사(玄?法師)가 불경을 찾기 위해 떠났던 길을 따라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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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고세훈 지음 / 한길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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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이 책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이하 ‘오웰’)로 알려진 사람의 전기가 아니다. 이는 이 책이 한 개인의 삶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늘어놓는 연대기 혹은 편년체(編年體)라는 일반적인 전기 형식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서사와 사상을 연대기적으로 묶어서 서술하다가 읽는 즐거움과 주인공의 일관되고 체계적인 사유방식을 모두 놓칠까 염려” [p. 39]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크게 오웰의 삶을 그린 ‘1부 생애’와 그의 사상과 작가로서의 글쓰기 태도를 다룬 ‘2부 사상과 글쓰기’로 엮여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을 한 사람의 일생에 평론을 곁들인 평전(評傳)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조지 오웰’이라는 모범 답안을 두고, 은연중 그와 비교하면서,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한 것으로도 보인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글을 엮어나가다 보니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튀어나와 아쉬웠다.

 

 

오웰의 사상과 글쓰기 태도

 

장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이하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이란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 [p. 14]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비슷하게 오웰은 “권력 언저리에서 킁킁대며 안일과 위선과 표변을 일삼는 지식인에 대한 거대한 보고서” [p. 33]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을 통해 지식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웰이 보는 지식인은 어떤 존재일까?

첫째, 지식인은 무지몽매한 민중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흔히 지식인이라고 하면, 무지몽매한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84>와 <동물 농장>으로 알려진 오웰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제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즉, “그는 궁핍과 질병이 주는 삶의 신산(辛酸)함에도 불구하고 승자 진영에 편입되고자 안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을 피해자 편에 서서 그들의 눈과 입을 빌려 관찰하고 발언하기를 지속했다. “오웰은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설교하지 않았으며,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 그는 결코 시끄럽지 않았으며, 불안한 자의 독단을 보이지 않았다 (…) 그는 관광여행의 안내자의 태도를 취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p. 34]

 

둘째, 지식인은 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지녔음직한 정치적 편견 혹은 종교적 가치에 대해 스스로 민감할수록 미적, 지적, 정직성의 희생 없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진다. 인간에겐 너무도 명백하여 변경 불가능한 사실들, 그리하여 조만간 직면해야 할 사실들을 무시하는 능력, 곧 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믿으려는 성향이 있다. 마침내 틀렸음이 밝혀졌을 때에도 옳음을 보이기 위해 사실들을 비트는 것이 인간이다.” [p. 503]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회에서 가장 소외 받는 계층, 즉 일반적으로 피지배계층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확장된 이익을 대변하는 ‘보편적 계급’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이들의 입장에 서거나 이들을 대변할 경우에만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는 지배계층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이 자신의 시각으로 피지배계층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시각을 가지려 해야 한다는 얘기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 피지배계층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오웰은 이러한 샤르트르의 주장을 가장 잘 구현한 지식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웰에게는) 이데올로기든 신앙이든 혹은 권력에 의해서든 그것이 작가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율성을 제한한다면, 작가의 생명인 정직성 또한 제약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해 보였다.

오웰로서는 진실, 사실과의 정직한 대면, 그리고 그러한 대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인간이 주관적인 감정을 온전히 배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가능하면 사고로부터 그것을 걷어내는 일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읽을 만한 것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pp. 502~503]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정치적 글쓰기라는 예술

 

우리가 학창시절에 KAPF나 프로문학을 배우면서, 문학에 정치적 의도가 들어가면 작품이 아니라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정치적 글쓰기라고 하면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웰에게 문학과 정치적 가치는 상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그는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늘 가장 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p. 503]

오웰이 보기에는 “소설을 쓰는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보통사람과 계급적으로 유리된 중간계급에 속해 있다. 보통사람, 특히 노동계급(의 삶)과의 접촉이 쉽지 않을 때 작가들은 주제나 소재의 부재에 시달리며, 단어와 표현의 미학적 유희에 쉽게 빠져든다. (그 결과로 산출된 작품들은) 모든 것이 허용된 듯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재미는 있을지라도 감동은 찾기 힘들다.” [pp. 526~527]

오웰이 이런 말을 한 것에는 어떤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혹은 독자들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오웰은 ‘보통사람들의 품위(common decency)’가 사회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을 꿈꿨다. 언어가 간결하고 명료하면 보통사람들이 정치적 논의로부터 배제되거나, 지도자들에 의해 쉽사리 속임을 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정치작가로서의 다짐을 이렇게 토로했다.

책을 쓰는 일이란, 어떤 고통스런 질병을 한 차례 길게 앓는 것 같은 끔찍하고 탈진시키는 투쟁이다. (...)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쓸 수 없다. (...) 내 작업을 돌아볼 때, 내가 생기 없는 책을 쓰고, 미사여구, 의미 없는 문장, 화려한 수사, 곧 눈속임에 취해 있을 때는 예외 없이 정치적 목적을 결여했을 때였다는 것을 본다.” [p. 36]

 

즉, 오웰에게 중요한 것은 “일관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관된 도덕적 힘이었다. 무릇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推動) 한다. 오웰의 도덕적 힘은 (<카탈로니아에 경의를[Homage to Catalonia]> (1938) 등에서 드러나는) 피해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버마 나날들[Burmese Days]>(1934)에서 보듯이) 가해자로서의 수치와 죄의식에 터를 잡고 있다.” [p. 35]

따라서 그가 사회주의자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결과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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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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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이 나오기까지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이라고 하면 대부분 <코스모스(Cosmos)>(1980)라는 이름의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떠올린다.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Cosmos: Possible Worlds)>의 저자인 앤 드루얀(Ann Druyan, 1949~ )은 바로 그 칼 세이건의 아내이자 천문학자인 스티븐 소터(Steven Soter, 1943~ )와 함께 <코스모스>의 원고를 함께 작성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1996년 칼 세이건이 사망한 후에도 그녀는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스티븐 소터와 함께 2014년 <코스모스>(1980)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코스모스: 스페이스타임 오디세이(Cosmos: A Space Time Odyssey)>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을 뿐 아니라 제작 및 감독에 참여했다.

그렇기에 40년의 시간이 흐른 2020년에 앤 드루얀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같은 방식으로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Cosmos: Possible Worlds)>을 출간하고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왜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을 출간 및 제작했을까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이하 ‘아인슈타인’)은 1939년 세계박람회 개막식에서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p. 26]라고 말했다.

앤 드루얀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이 말이 ‘코스모스’ 프로젝트의 꿈이라고 한다. 그녀가 보기에는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여러 위기를 전부는 아니라도 많이 해결해 줄 만한 열쇠” [p. 7]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과학의 성취를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 이해한다는 것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과학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p. 7]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과학을 도구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그녀는 과학을 도구가 아닌 사상 혹은 관점으로 수용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그녀도 과학이 가지는 부정적인 영향력은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처럼 과학이라는 학문을 내용적 측면이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과학자들처럼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른바 지도자들은 다음 선거 혹은 사분기 평가까지의 시간에만 신경 씁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근시안적 사고를 지속할 여유가 더는 없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우리가 제대로 해결해 내지 못할 경우, 지구 문명 전체를 파괴할 위기이니까요.” [p. 9]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인류는 이 책의 1장 처음에 쓰여진 것처럼 “우리는 이 광막한 우주에 출현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존재” [p. 39]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술적 사춘기’ 즉, “젊은 문명이 스스로를 파괴할 기술적 수단을 갖추었지만, 아직 그런 파국을 예방할 성숙함과 지혜를 갖지 못한 위험천만한 시기” [p. 421]를 거치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저자가 인류가 자초한 ‘대멸종의 시대’를 언급하면서도 낙관적인 전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우리 중 충분히 많은 수가 전 세계 과학자들의 말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리고 행동한다면, 이 재앙을 충분히 멈추고 되돌릴 수 있다고” [p. 8]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칼 세이건 <코스모스>의 정식 후속작’이라는 책소개를 들어 저자가 <코스모스>(1980)에 대한 신뢰와 지지에 기대어 이 책을 썼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말한 대로 과학이라는 열쇠로 인류가 재앙을 멈출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시켜 무의식 중에 파멸로 향하는 인류의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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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 부산 근대건축 스케치
최윤식 지음 / 루아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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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근대의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일본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내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되고 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1876년도 주요한 후보 가운데 하나이다.

동래부(東萊府) 관할이었던 부산포(釜山浦)가 도시로서의 틀을 잡게 된 것이 앞에서 언급한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장으로 지정된 이후이니 어떻게 보면  ‘부산(釜山)’이라는 도시의 존재감은 근대도시로 형성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또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과정에서 근대도시 부산의 거리와 건축물은 훼손되거나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자는 “오래된 것이 낡은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은 것이 낡은 것이다. 그 낡은 것조차 얼마 남지 않았으니 뒤를 이을 부산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p. 5]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렇기에 1910년대 부산항과 1926년 무렵의 광복로, 1930년대 대청정 거리 모습에서 시작해 1943년 화재로 소실된 태평관,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옛 부산역, 공회당 그리고, 부산우편국, 1979년에 철거된 부산세관, 1983년에 헐린 상품진열관, 마지막으로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석당박물관, 일신여학교, 임시수도기념관, 부산근대역사관 등에 대한 68점의 세밀화를 우리에게 건네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910년대 부산항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8~9

 

부산우편국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72~73

 

석당박물관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84~8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화되어 간다. 도시의 거리와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거리와 건축물에는 그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단순히 우리가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러한 공간들을 계속해서 파괴하기만 하면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던 자연 파괴의 대가를 지금에 받는 것처럼 또 다른 형태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가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있는 건축물, 잊혀진 거리를 세밀화의 방식으로 남기는 것은 벌목으로 더 이상 나이테가 생기지 못하는 나무처럼, 그 공간에 쌓인 추억과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는 건축에 관심 있거나 부산의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에게는 큰 선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책등이 없는 누드 사철 제본으로 되어 있어 68점의 세밀화를 보다 편하고 제대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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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빵과 진저브레드 -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
김지현 지음, 최연호 감수 / 비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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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의 어려움

 

다른 언어로 쓰여진 글을 읽으려면 그 나라 언어를 할 줄 알면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언어가 존재하고 그 언어들을 한 개인이 다 익히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그 언어를 번역해주는 사람, 즉 번역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해당 언어를 아는 것만으로 번역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외국 문물을 ‘적절하게’ 옮기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번역을 아무리 잘한다 해도, 일한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옮겨지는 순간 원래의 의미는 어떻게든 손실될 수밖에 없다. 번역된 문장은 결국 번역가 자신이 쓴 문장이므로, 번역가 고유의 생각, 가치관, 판단, 개성이 개입되게 마련이다. 더 나아가 한국어로 번역된 문장이라면 한국어라는 언어가 비롯된 한국적 토양, 사회, 문화, 사고방식이 담길 수밖에 없다.” [p. 7]

 

뿐만 아니다. 거의 잊혀진 단어나 기존에 없던 단어를 번역할 때에도 어떻게 번역하는가의 문제가 발생한다.

예를 들면, “<폭풍의 언덕>에서 캐서린의 딸은 풀밭에서 린턴과 대화를 나누다 심심해지자 월귤(越橘)을 따 모아서 유모에게 나눠주면 손장난을 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신사 숙녀들은 말린 월귤에 사탕수수 엿물로 단맛을 낸 후식을 즐기고, <초원의 집>에서는 월귤로 파이를 굽거나 거위 구이에 발라 먹을 젤리를 만들고, (<호호 아줌마가 작아졌어요>에서) ‘호호 아줌마’는 남편이 팬케이크 발라 먹을 잼을 만들려고 숲에서 월귤을 따서 양동이에 담는다.” [pp. 252~253]

 

월귤(Lingonberry)



출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p. 250

 

여기서 월귤은 ‘링곤베리(lingonberry)’의 번역어지만, 거의 잊혀진 단어이기 때문에 저자처럼 “월귤이라는 이름에 ‘귤’이 들어가므로 귤과 비슷한 과일이라고 상상”[p. 253]하기 쉽다. 게다가 “블루베리 (blueberry)나 크랜베리(cranberry)같은 열매들은 아예 이렇다 할 번역어가 따로 없어서 혼란이 더욱 가중된다. 영한사전 편찬자들은 블루베리나 크랜베리의 한국어 뜻풀이를 ‘월귤의 일종’이라든지 ‘월귤의 사촌’이라고 기재하고, 그걸 본 번역가들이 책에다 블루베리나 크랜베리를 ‘월귤’이라고 뭉뚱그려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결과적으로 한국어 번역서에 월귤이 나오면 그게 원문에서 링곤베리인지, 블루베리인지, 크랜베리인지 알 수가 없다.” [p. 255]

 

하나 더 언급하자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생강빵’과 ‘진저브레드’는 같은 종류의 음식을 가리키는 단어지만 두 단어가 주는 어감 혹은 분위기는 서로 다른 음식인 것처럼 이질적이다. 그래서 저자도 “‘라즈베리 코디얼’을 마시는 소녀와 ‘산딸기 주스’를 마시는 소녀는 외모도, 성격도, 말투도 다를 것만 같다. 그러므로 진저브레드, 블루베리, 라즈베리 코디얼이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과, 생강빵, 월귤, 산딸기 주스가 나오는 책을 읽은 독자의 경험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훌륭한 책은 번역판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이롭다는 말이 있다. 다양한 번역이 나올수록 그만큼 다양한 의미가 생겨나고, 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경험의 폭도 넓어지기 때문” [p. 6]이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문학 작품 속 음식들

 

‘소설과 음식 그리고 번역 이야기’라는 소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이 책은 온전히 번역에 대한 이야기 혹은 번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소설에 등장한 음식들에 대한 에세이에 가깝다. 이는 이 책이 전채(前菜, appetizer)에 해당하는 제1부 ‘빵과 수프’, 본 요리에 해당하는 제2부 ‘주요리’, 후식(後食), dessert)에 해당하는 제3부 ‘디저트와 그 밖의 음식들’로 구성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음식 이름을 제목으로 한 각 챕터는 해당 음식이 등장하는 소설의 한 장면과 해당 음식에 대한 아기자기한 삽화로 시작한다. 예를 들면 ‘햄과 그레이비(Ham with Gravy)’의 경우 마거릿 미첼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으로 시작한다.

어멈의 커다랗고 검은 두 손에 들린 쟁반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버터 바른 참마 두덩이, 수북이 쌓인 메밀 팬케이크 위로 뚝뚝 흘러내리는 시럽, 그레이비에 둥둥 떠 있는 커다란 햄 한 조각. 어멈이 가져온 무거운 음식상을 보자 스칼렛의 얼굴에 떠올랐던 가벼운 짜증은 고집스러운 독기로 바뀌었다.” [p. 104]

 

그리고 각 챕터 끝에는 최연호 파티시에의 감수를 받아 음식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정보를 덧붙였다.

 

꿀벌빵(Bienenstich)


출처: <생강빵과 진저브레드>, pp. 296~297

 

덕분에 이 책은 분명히 번역가의 에세이임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어려움을 호소하거나 번역가의 삶 등은 거의 언급하지 않고 소설에 언급된 요리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일종의 ‘문학 작품 속 요리 사전’의 분위기를 짙게 풍긴다. 그런 의미에서 평소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낯선 요리에 궁금증이 있는 이에게는 안성맞춤인 책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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