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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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라는 소설이 있다. 그 소설에서 드래곤의 ‘라자’로 선택된 사람은 개인이 아닌 드래곤과 인간 사이의 중개인으로서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 임천자, 장미수, 신목화는 드래곤의 ‘라자’처럼 최초의 나무와 인간 사이의 중개인으로 선택되고, 중개인으로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나무와 인간 사이의 중개라는 것이 참 요상하다. 중개인으로 선택된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죽는 꿈을 꾸고, 그 중 정해진,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 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p. 72]


사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꿈이라고 해도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것 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아니 매일 이런 꿈을 꿔야 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건 ‘저주’다. 이걸 저주라고 할 수 없다면 무엇을 저주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 최초에 씨앗에서 움튼 나무가 선택한 단 한 사람을 내가 행동함으로써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일이 단순히 저주에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있다. 물론 장미수가 바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단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들자마자 죽음이 보였다. 곳곳이 불탔다. 연기가 자욱했다. 숨이 막혔다. 목화는 내내 어린아이만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의식을 잃은 그 아이를 목화는 간절히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화의 의지는 소용없었다. 나무의 선택만이 중요했다. [p. 140]


장미수는 첫 번째 임신을 하면서, 임신 기간 동안 이 업의 수행이 유예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녀는 동료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계속 임신을 시도했다. 이런 것을 보면, 차라리 죽음으로써 이 고통을 벗어나려 시도하는 이도 있었을 텐데……. 의외로 고행(苦行)하는 수행자처럼 임천자, 장미수, 신목화는 대를 이어가며, 이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을 미쳐버릴 상황에서,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무는 왜 단 한 사람만 구할 기회를 부여할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선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드라마 <도깨비>의


‘신은 여전히 듣고 있지 않으니’, 투덜대기에

‘기억을 지은 신의 뜻이 있겠지’, 넘겨짚기에

늘 듣고 있었다.

죽음을 탄원하기에 기회도 줬다.

헌데, 왜 아직 살아있는 것이지?

기억을 지운 적 없다.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했을 뿐.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라는 유명한 대사처럼 진짜 신(神)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신들처럼 인간적이기보다는 방관하는 초월자(超越者)나 감정 없는 법칙(法則)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고 나무를 신(神) 혹은 그에 가까운 존재로 간주하면 임천자, 장미수, 신목화가 겪은 현상들이 납득이 가긴 한다.

물론 납득이 간다고 해서 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수용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니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사람을 구하는 일을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업을 거부할 경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웬만한 남자보다 힘이 센 할머니 임천자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간호사인 어머니 장미수는 두통을 앓아야 했다.

무병(巫病)을 앓는 이가 내림굿을 통해 무당이 되듯, 할머니 임천자는 중개자의 역할에 순응한다. 그러다가 죽음이 가까워지자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나는 왜 죽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떠올린다.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살아났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된다.

반면 어머니 장미수에게 구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죽음에 비해 겨우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저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 한 사람조차 자신이 선택할 수 없으니……. 그녀에게 이 업(業)은 정해진 죽음의 대상자 가운데 신의 변덕 혹은 옹졸한 차별에 의해 한 사람을 제외시키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신(神)을 저주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신목화는 이 ‘업(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목화는 액자 속의 글귀를 곱씹었다.

그분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언젠가 목화는 임천자의 혼잣말을 들었다.

신을 찾는 사람은 자기 속부터 들여다봐야 해. 거기 짐승이 있는지, 연꽃이 있는지.

언젠가 목화는 장미수의 혼잣말을 들었다.

기도로 구할 수 있는 건 감사하다는 말뿐이지. 나머지는 다 인간 몫이야.

목화는 종종 상상했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가 홀로 죽은 사람을. 작은 행성의 드넓은 바다에서 홀로 탄생해 홀로 숨 쉬다 홀로 소멸한 생명을. 끝없는 사막에서 홀로 피어나 홀로 메말라 가는 식물을. 그들이 확실히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신은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우주에서 생명이란 너무나도 이상한 현상. 신은 생명에 관심이 없다. 살려달라는 기도를 신은 이해하지 못한다. [pp.141~142]


그녀는 자신이 살려준 사람이 다시 자살하는 것을 보고, 질문하며 확인하고 싶어졌다.


이전까지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살아난 자가 얼마나 더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무가 주는 생명에 시한이 있는가? 목화는 그 답을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p. 165]


아무리 기록을 남겼다고 해도 그 수많은 죽음을, 아니 살아난 단 한 사람을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행히 어머니 장미수는 종합병원에서 일했던 간호사였고 아버지 신복일도 그 종합병원 약제부에서 일했던 약사(?)였다.


병원으로 이송되거나 병원에서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미수와 복일의 도움으로 목화는 그 중 몇 사람을 더 찾아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신을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길거리에서 증언했다.

~ 중략 ~

어떤 사람은 주말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독거노인의 집을 청소하고 수리하는 일이었다.

~ 중략 ~

바닷가 근처에 사는 단 한 명은 아침저녁으로 해변의 쓰레기를 주웠다.

~중략 ~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아내와 통화하며 큰 소리로 심한 욕을 했다. 오래 듣지 않아도 폭력적인 남편임을 알 수 있었다. [pp. 218~219


어쩌면 죽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그렇다면 중개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해답은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 나오는 어린 남매의 비둘기처럼 바로 옆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심처럼 해답도 같이 붙어 있다는 게 포인트야. 각자 자기 근심에서 빠져나갈 길도 같이 품고 있는데 당장 너무 힘들고 아프니까 나갈 길은 못 보고 지옥만 보는 거지.

~ 중략 ~

내 동생의 역할은 나갈 길 쪽으로 그 사람의 몸을 조금 돌려주는 거고. 그게 무슨 말이겠어. 내 동생이 그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구한다는 뜻이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잖아. [p. 203]


이를 깨달은


목화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판단을 멈추었다. 그리고 중개 중에 이전에는 하지 않는 것을 했다.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pp. 220~221]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중개자로서 일하는 꿈 속의 공간은 일종의 응급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응급실에서는 의사가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하는 위급환자라고 판단되면, 접수 순서에 상관없이 진료에 들어간다. 그렇게 보면, 최초의 나무가 판단한 단 한 사람을 중개자가 구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할머니 임천자의 추측대로 누군가의 ‘단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살아난 자가 중개인으로 뽑힌다면, 얘기는 다르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가로 내가 살아났다면, 그 삶과 죽음의 무게만큼 내가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저주라고 느낄 만큼 무거운 업(業)을 수행하는 것일지라도.


모르겠다. 거듭 생각해봐도 운명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신이 던진 ‘운명’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다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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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9-01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당선~축하드립니다!

KOEMMA 2024-09-07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