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 자본이 만든 메트로폴리스 1830-1871 현대의 고전 13
데이비드 하비 지음, 김병화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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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티의 수도, 파리]는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2003)는 1830년부터 1871년까지의 파리의 근대적 도시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책이다. 하지만 온전히 새로 쓰여진 글은 아니다.

 

2부에 나오는 파리 연구는 <의식과 도시 경험>에 실린 논문을 개정하고 확장한 것이다. 종결부인 ‘사크레쾨르 바실리카의 건설’은 원문에서 약간 개정되었다. 발자크의 연구는 <코스모폴리스의 지리학>(2002)과 <도시의 잔상>(2002)에 각각 실렸던 것을 개정하고 확장했다. 2장과 이 서문은 새로 쓴 것이다. [p. 42]

 

즉, 18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부 형체를 갖다: 파리 1848~1870’[3장~17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 도시문제를 분석한 <의식과 도시 경험(Consciousness and the Urban Experience)>(1985)에 실린 주요 논문을 개정, 증보한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을 <의식과 도시 경험>의 개정증보판이라고도 볼 여지도 있다. 하지만, <의식과 도시 경험>과는 달리 이 책은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영향력이 짙게 배여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와 <의식과 도시 경험>은 비슷하지만 다른 책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파리 개조 사업’이라는 창조적 파괴 행위

 

저자는 서문에서 ‘근대가 그 이전과 근본적으로 단절된 시대라고 보는 것이 허구적인 신화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신화를 조장한 것이 파리 개조 사업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조르주외젠 오스만 남작(Baron Georges-Eugene Haussmann, 1809~1891, 이하 ‘오스만 남작’)과 그가 남긴 <회고록>이라고 말한다.

왜 오스만 남작은 그런 허구의, ‘근대 신화’를 만들고 배포했을까?

 

그는 근본적인 단절이라는 신화, 오늘까지도 살아남은 이 신화로 자신과 황제를 포장할 필요가 있었다. 왜냐하면 예전에 시행된 것들이 부적절하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기 때문이다. 자신과 루이 나폴레옹은 어떤 면으로도 이제 막 지나간 과거의 사고방식이나 관례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이 부정은 그 이중의 의무를 달성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건국신화를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이 베푸는 자비로운 전제주의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p. 22]

 

사실 파리 개조 사업 전후를 비교해보면, 오스만 남작이 과거와 단절된 근대를 얘기하는 것도 그럴 듯하게 보인다. 그는 파리의 시가지를 깔끔하게 정비하여 도시 위생을 향상시켰고, 상수도 설비를 완전히 갈아엎어 새로 만들었으며, 도시에 대규모 공원과 광장을 조성했다. 이때의 도시계획으로 파리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저자는 파리의 개조 계획이 오스만 남작의 파리 지사 임명 이전에 이미 세워져 있고, 과거와의 근본적인 단절은 존재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오스만 남작이 파리의 도시계획에 기여한 정도를 평가절하하는 것도 아니다. 파리 개조 계획 자체는 오스만 남작이 시작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자는 오스만 남작에 의해 ‘파리’라는 도시가 강제로 ‘근대’로 몰아 넣어졌다고 본다. 이는 파리 개조 계획이 자본주의가 새로운 부를 창조하기 위해 그에 어울리는 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해 기존의 경제질서를 파괴, 재편하는 ‘창조적 파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스만 남작이 시행한 일련의 도시 개편 작업의 결과 파리의 근교화가 촉진되었고, 그에 따라 공장 지대와 노동자 거주 지역, 부유층 주거지가 격리되었으며, 그들 간의 의식적 단절은 극단적으로 심화되었다. ‘코뮌(Commune)’, 즉 파리 코뮌은 그 극단적인 단절이 낳은 결과물이다.

 

코뮌에서 정확하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제2제정 파리의 변형 과정과 그 영향에 뿌리가 있었다. [p. 539]

 

코뮌은 유일하고, 독특하고, 극적인 사건이었고, 아마 자본주의 도시의 역사에서 이런 종류로서는 가장 특별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 불씨에 불을 붙인 것은 전쟁, 프로이센에 포위되었다는 절망감과 패배의 굴욕감이었다. 하지만 코뮌의 원재료는 이 도시의 역사적 지형이 자본주의적으로 변형되는 느린 리듬에 맞추어 이미 한데 모여 있었다. [p. 542]

 

 

사실주의 예술가라는 렌즈

 

저자는 파리 개조 계획을 전후한 ‘파리’라는 도시의 구체적 상황들을 설명하고 분석하기 위해 사실주의 예술가들의 작품을 통해 그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구체적으로는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외제니 그랑테> 등 ‘인간 희극’ 시리즈를 기획한 오노래 드 발자크(Honore de Balzac, 1799~1850, 이하 ‘발자크’), 프랑스어로 쓰인 최초의 위대한 모더니즘 소설이라는 <보바리 부인>을 쓴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 루이 필리프 1세(재위 1830~1848)의 세금정책을 풍자한 <가르강튀아(Gargantua)>(1831)나 고된 하루를 보내고 삼등열차에 오른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삼등열차>(1862) 화가이자 판화가인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등을 들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의 풍자화 <가르강튀아>

출처: <모더니티의 수도, 파리>, p. 117

 

이들 사실주의 예술가들이 본 파리는 오스만 남작이 개조하려고 했던 그 낡은 ‘파리’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 무렵 진행되고 있던 자본주의가 빚어내는 인간형과 그들을 지배하는 ‘파리’라는 도시의 위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작품에서 ‘파리’라는 도시는 또 하나의 주인공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면, 대표적인 사실주의 소설가인 발자크는 <인간 희극> 시리즈에서

 

대개 시골 출신들이 파리 생활에 적응해가는 통과의례의 장면을 묘사하는데, 상인이든 야심 찬 젊은 귀족이든, 아니면 연줄이 좋은 여자든 상관없다. 일단 적응하고 나면 그들은 절대로 뒤돌아보지 않는다. 설령 자신들이 파리에서 겪은 실패 때문에 결국 파멸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지방 출신이라는 것, 지방의 권력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이렇게 발전하여 파리 생활의 창립 신화 가운데 하나가 된다. 즉 파리는 독자적인 실체이며, 어떤 면으로든 그것이 그렇게 경멸하는 지방 세계에 의존하지 안는다는 신화다. [p. 61]

 

 

공간과 기억, 근대를 만들다

 

역사지리학자인 저자는 발자크의 소설에 구체적으로 나타난 공간적 유형을 분석한다. ‘공간은 인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상류계급과 귀족은 자기들만의 중심을 가지고 있고, 평민들도 언제나 자기만의 특별한 구역을 갖고 있다.

 

도시 자체가 그 주민들의 집합적 기억이라고 할 수 있으며, 기억이 그렇듯이 그것도 대상과 장소에 결합되어 있다. 도시는 집합적 기억의 장소다. 그렇다면 장소와 주민 사이의 이 같은 관계는 건축학적으로나 지형적으로 도시의 지배적 이미지가 되고, 어떤 물건이 기억의 일부가 되듯이 새로운 기억이 솟아난다. 이렇게 전적으로 긍정적인 의미에서 도시의 역사에는 엄청나게 많은 상념이 흘러가며 도시에 형태를 부여한다. [pp. 103~104]

 

발자크는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공간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지 보여준다.

 

그의 인물들은 심지어 한 구역에서 다른 구역으로 이사하면 성격이 바뀌기까지 한다. [p. 79]

 

이런 공간의 변화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영향 가운데 하나다. 왜냐하면 오스만 남작의 계획에 따라 건설된 대로변과 그 뒷길 사이의 토지 가격의 격차와 그로 인한 임대료 수준의 격차, 중심부에서 변두리로 갈수록 점증적으로 낮아지는 임대료로 인해 파리의 여러 지역은 서로 다른 직업적, 계급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 등의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격리되고 그들간에 의식적 무의식적 단절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가 루아예는 19세기 파리의 설계와 건설 관례를 자세하게 재구성하면서, 당시 준수되던 원칙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본주의가 건축에 미친 가장 중요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기획 규모의 변화였다.” [p. 26]

 

공간에 이어 이야기 되는 것은 ‘기억’이다. 발자크는 ‘희망은 욕구하는 기억[99’이라고 했는데, 기억과 욕구의 이러한 결합은 근대성의 신화가 어떻게 그처럼 강력한 힘으로 유통되는 지 보여준다. 나아가 발자크는 공간과 기억이 결합되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 지를 <인간 희곡> 시리즈를 통해 드러낸다.

 

발자크는 <인간 희극> 전체를 관통하여 이 연관성을 끈질기게 다루었다. 그는 도시의 역사에 등장하는 위대한 상념의 흐름에 뭔가를 추가하고 보완한다. 그는 도시를 기억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그렇게 함으로써 집합적 기억을 위한 특별한 장소를 상상 속에 구축한다. 이것은 혁명의 순간이 오면 “번뜩이는” 어떤 정치적 감수성의 근거가 된다. 이것이 바로 작동중인 도시를 근거로 한 혁명적 변형으로서의 근대성의 신화다. 기억이 1830년에 “번뜩여” 혁명적 감수성을 이어 붙이는 데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고, 1848년과 1871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혁명적 순간들이 전통에 호소하는 바람에 짐이 더 무거워지기는 했지만, 그들에게는 미래를 향해 열릴지도 모르는, 완전히 다른 길로 나아가는 급격한 단절을 추구하는 강렬한 근대적 면모도 있었다. 그러므로 희망이 기억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욕망에 연결된 기억이 희망을 발생시킨다. [p. 104]

 

 

사크레쾨르 성당, 핏자국을 눈으로 덮으려는 시도

 

사크레쾨르 바실리카가 아름답거나 우아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것이 충격적이고 눈에 확 들어온다는 점, 스타일이 특이하고 유별나서, 그 발밑에 펼쳐진 도시로부터 존경을 요구하는 일종의 거만하거고 장엄한 분위기를 빚어낸다는 점도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중략 ~

그리하여 사크레쾨르는 성스러운 장엄함의 이미지, 영원한 기억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의 기억인가? [p. 548]

 

1871년 파리 코뮌이 성립될 당시 군중에게 발포 명령을 내렸던 정부군의 르콩드 장군과 1848년 6월 혁명기간에 잔혹한 학살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던 토마 장군이 군중들에 의해 총살되고, 32살의 코뮌의 지도자 외젠 발랭이 군중에게 모욕받으며 몽마르트르 언덕길 주위를 끌려다니다가 총살되었다. 바로 그 자리에 사크레쾨르 바실리카는 세워졌고, 그 내부에 그려진 반구형의 천장화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의 승리[Le Triomphe du Sacre-Cœur de Jesus] 아래에는 흔히 프랑스는 회개하노라[GALLIA POENITENS]”로 알려진 “SACRATISSIMO CORDI JESU GALLIA POENITENS ET DEVOTA ET GRATIA”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파리 코뮌 당시 좌우익의 희생자를 기념하는, 순결한 영묘(靈廟)처럼 생긴 이 바실리카 혹은 대성당에는 무엇이 묻혀 있는 것일까?

 

1789년의 정신인가? 프랑스의 죄악이 묻혀 있는가? 비타협적인 가톨릭주의와 반동적 군주제의 동맹인가? 르콩드와 클레망 토마 같은 순교자의 피? 아니면 외젠 발랭과 그와 함께 무자비하게 도살된 2만 명 이상의 코뮌 가담자들의 피인가? [p. 598]

 

잘 모르겠다. 하지만 잔혹한 전쟁터에 내린 눈처럼, 이 바실리카는 그 모든 것을 묻어버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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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미(親美)에서 반미(反美)로, 호치민[胡志明]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불리는 호치민[胡志明, 1890~1969]는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그는 이념보다 민족을 앞세운 독립운동가였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제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1935)처럼 좌파 민족주의자 혹은 민족적 사회주의자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는 서술되지 않았지만, 호치민은 젊은 시절 파리에서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 1881~1950),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의 주인공 유진 초이(Eugene Choi)의 실제 인물이라는 황기환(黃玘煥, EARL K. WHANG, 1886~1923), 블라디보스토크에 설립된 대한국민의회에서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한 윤해(尹海, 1888~?) 등과 만나 교류했으며, 그들을 모범으로 삼아 활동했다고 한다.1) 그래서인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의 동남아 지도자2)들은 일본에 협력했지만, 호치민은 이와 반대로 미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심지어 CIA의 전신(前身)인 OSS와 협력관계에 있을 정도였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볼 때, 미국이 베트남의 독립을 용인하고 지원했다면, 호치민의 베트남은 친미(親美)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히도 프랑스의 베트남 재점령에 부정적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F.D.Roosevelt, 1882~1945)가 1945년 4월에 급사한 후 워싱턴 정가의 분위기는 반공(反共)으로 흘렀다. 당연히 ‘공산주의자’ 호치민은 미국의 대안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에서는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越南獨立同盟會]에 자치권을 부여하는 협상조차 반대하는 매파가 득세했다. 결국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생했고, 1954년 디엔비엔푸[奠邊府]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패배하여 프랑스의 식민지라는 선택지는 사라졌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마무리하는 제네바 합의에는 “2년 내에 국제사회 감시하에 선거를 치뤄 통일정권을 세우도록 해주겠소”[p. 40]라는 조항이 있었다. 이때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는 ‘도미노 현상’을 막기 위해 미국이 선택한 것은 저명한 반공(反共) 반(反)프랑스 민족주의자 응오딘디엠[吳廷琰, 1901~1963]이다. 가톨릭을 믿는, 지주 출신의 정통 엘리트였던 그는 대중 앞에 서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고 비판에 민감했다. 여기에 깐깐한 원칙주의자였던 응오딘디엠은 정권을 잡자마자 반공(反共)을 내걸고 날뛰는 사조직, 즉 메콩델타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가톨릭 교리를 흉내 낸 종교 단체 ‘카오다이[高臺]’와 사이공 인근의 촐론에서 공권력 노릇을 하는 깡패 조직인 ‘빈슈옌[平川]’을 군대를 보내 소탕3)했다. 그 결과 이들의 잔존세력은 우리에게 ‘베트콩’으로 알려진 인민해방전선(NLF)으로 귀순했다.

응오딘디엠 본인은 당시 동남아 지도자 가운데 드물게 부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이끄는 베트남 공화국은 부패하고 무능했다. 게다가 선민의식(選民意識)을 가지고 그를 따르는 북부 출신의 반공주의자를 우대하면서, 노골적으로 친(親)가톨릭 반(反)불교 정책을 펼쳐 그를 선택한 미국조차 그에 대한 기대를 버리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의 뒤를 이은 정치군인들이 응오딘디엠 만도 못했다는 것이다.

 

 

시하누크의 외줄타기, 킬링필드의 비극을 빚다

 

비시 프랑스 정부가 선택한 캄보디아의 왕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1922~2012, 이하 ‘시하누크’)는 뛰어난 외교능력으로 1949년 프랑스 연합의 반(半)독립국이 되고, 태국으로부터 시엠립과 바탐방도 다시 찾아왔다. 나아가 1953년 프랑스로부터 완전히 독립도 했다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그는 미국과 소련 양쪽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지원을 받는 등거리 중립외교를 펼쳤다. 문제는 시하누크가 말했듯이 약소국이 중립외교를 할 때는 어느 한 쪽에 기울어지면 안 되는데, 베트남 전쟁(1955~1975)이 진행 중인 1963년에 시하누크는 남베트남과 단교를 선언하고, 1965년에는 미국과도 단교를 선언했다. 이렇게 한쪽으로 기울어지자 시하누크에게 선택권이 사라졌고, 어쩔 수 없이 베트남의 병참수송로[호치민 루트] 역할을 떠 맡아야 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우파 민족주의자였던 총리 론 놀(Lon Nol, 1913~1985)은 쿠데타를 통해 ‘크메르 공화국’이라는 친미 정부를 세우고 베트남인 말살정책을 펼쳤다.  권좌(權座)에서 쫓겨난 시하누크는 극좌파인 폴 포트(Pol Pot, 1925~1998)의 크메르 루즈와 협력, 부패한 론 놀 정부를 무너뜨리고 ‘민주 캄푸치아 공화국’을 세웠다. 이 정권의 실질적인 리더는 폴 포트로, 그가 마오쩌둥의 문화혁명을 벤치마킹한 결과 대학살이 벌어졌다. 그것이 영화 <킬링필드(The Killing Fields)>(1984)로 널리 알려진 그 학살이다. 이 과정에서 침공을 당한 베트남은 반격에 나서 크메르 루즈를 쫓아내고 괴뢰정권인 ‘캄푸치아 인민공화국(PRK)’을 세웠다. 베트남군의 철수 후 시하누크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수상 출신 훈 센(Hun Sen, 1952~ )이 권력을 나눠가졌다. 하지만 이 기형적인 정치체제는 1997년 훈 센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1인 독재로 다시 회귀했다.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말라야 정권이냐 말레이 정권이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은 연방말레이주(FMS)에 속하는 4개 주와 비연방말레이주(UMS)에 속하는 5개의 주, 해협식민지인 페낭과 믈라카를 합쳐 말라야 연방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수용되어 독립하는 과정에서 말레이인을 위한 정권인 ‘말레이 정권’이냐 말라야 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정권인 ‘말라야 정권’이냐 논의가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말레이시아 건국의 아버지로 꼽히는 초대 수상 툰쿠 압돌 라만(Tunku Abdul Rahman, 1903~1990)을 중심으로 하는 UMNO(United Malays National Orgaization)는 영국과 타협, 말라야 정권을 표방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해협 중국인계 MCA(Malayan Chinese Association)와 연립정권, 중국계 및 인도계의 참정권 자격의 거주기간 제한 단축 등의 혜택과 다른 종교도 허용하나 이슬람 교도를 타 종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금지하고 말레이인에게 경제적 특혜를 부여하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시행했다. 독립 당시 말레이인이 과반수가 아니었고[말레이인 230만, 중국인 200만, 인도인 54만], 중국계가 경제권을 쥐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것은 비주류인 인도계 출신의 4대 수상 마하티르 모하맛(Mahathir Mohamad, 1925~ )도 장기간 집권하면서 대형 사업에서 말레이인의 지분을 늘리는 등 부미푸트라 정책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 국가 경제의 발전을 위해 일본과 한국으로부터 배우자는 Look East 정책을 펼쳐 고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하지만 부미푸트라 정책의 지속은 인종차별적인 말레이시아를 만들었고, 차별에 반발한 중국계 우수인력의 해외유출도 이루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특이한 것은 동남아 국가로는 유일하게 군부 쿠데타가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테러는 군대가 아닌 경찰의 문제라고 본 말레이시아 지도부의 입장이 작용했다. 그래서 중국인 중심으로 조직된 말라야 공산당(MCP)이 친펭[陳平, 1924~2013]의 지도 하에 무장투쟁을 전개했지만, 정부는 범죄자들의 테러라면서 끝까지 경찰로만 대응했다고 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렇게 “군부에게 권력의 지분을 주장할 명분을 주지 않았기에 이후 말레이시아는 동남아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니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될 수 있었다” [p. 163]고 한다.

 

 

미국의 판단,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 독립을 지원하다.

 

일본에 협조하고 있던 수카르노(Soekarno, 1901~1970)와 모하맛 하타(Mohammad Hatta, 1902~1980, 이하 ‘하타’)는 종전이 가까워지자, 해군소장 및 자카르타 주재무관으로 근무 중이던 마에다 타다시(前田精, 1898~1977, 이하 ‘마에다’)의 지원을 받아 독립선언 준비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1945년 8월 17일의 인도네시아 독립선언이 마에다의 관저에서 이루어지고, 1976년에 마에다에게 인도네시아 국가 및 국민에게 주어지는 최고영예인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점을 감안하면 그럴 듯하다.

 

어쨌든 수카르노와 하타가 독립선언을 했으나 젊은 과격파가 득세하여 인도스(네덜란드 혼혈)이나 중국계를 대상으로 하는 사적 보복으로 혼란이 지속됐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독립지도자들의 친일부역 전과와 공산주의 의혹을 제기하며 복귀를 서둘렀다 [인도네시아 독립전쟁(1945~1949)]. 이때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이 수카르노가 이끄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에 반기를 들고 마디운(Madiun)에서 정권을 세웠다. 수카르노는 이들과 타협하지 않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덕분에 인도네시아 공화국은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는 패배했으나 무난히 독립할 수 있었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미국을 도와 일본과 싸웠다. 하지만 미국은 그를 민족주의자라기보다 공산주의자로 판단하였다. 반면에 수카르노는 일본에 부역한 전력이 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닌 민족주의자로 판단하였다. 이 차이로 베트남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를 몰아내고도 미국과 7년의 가혹한 전쟁을 치뤄야 했고, 인도네시아는 네덜란드에 패하고도 미국이 지지한 덕에 온전한 신생독립국의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p. 238]

 

독립은 했지만 다양한 종교를 믿는 수많은 인종과 언어로 갈라진 군도(群島)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에 수카르노는 사실상 독재인 교도(敎導) 민주주의를 제창했고,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하타는 이에 반발해서 사임했다. 점차 독재자로 변하면서 수카르노는 많은 지지를 받는 인도네시아 공산당(PKI)을 통해 군부를 견제했다. 이는 반미(反美)정책을 통한 지지자 결집을 가져왔지만, 미국의 불안도 증가시켰다. 여기에 좌우로 쪼개진 군부를 통해 인도네시아 공산당이 쿠데타를 기도했지만, 하지 모하마드 수하르토(Haji Mohammad Soeharto, 1921~2008)에게 진압됐다.

 

 

싱가폴, 사형제도가 있는 디즈니랜드

 

해협중국인 출신의 리콴유[李光耀, 1923~2015]는 이주중국인 출신의 림친시옹[林淸祥, 1933~1996]등 정적들을 제거하고 말레이시아의 싱가폴주(州)를 만들었다. 하지만 2년 만에 싱가폴은 말레이시아로부터 퇴출되어 강제적으로 독립되었다. 여기서 리콴유는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조그만 섬인 싱가폴의 위기의식을 자극해서 극단적인 공익우선과 실용주의를 실천하는 싱가폴을 기획, 연출했다.

구체적으로 1969년 노조의 파업권 등을 노조 활동을 제한하는 법안을 통과시켜 강성노조를 무력화시키고,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국가가 주관하는 시험을 통해 상급학교 진학여부 등이 결정되게 만들었다. 또한 공무원 보수를 민간기업보다 높여 충분한 보상을 하되, 부패행위가 적발되면 파멸적 징계[파면, 가혹한 형량 선고, 벌금, 신문1면에 대문짝만 하게 사진을 실어 사회적으로 사망 선고 등]를 하여 싱가폴을 부패 없는 풍요로운 도시로 만들었다.

 

이렇게 <우리가 몰랐던 동남아이야기 3>에서는 동남아 각국의 독립과정과 베트남[호치민, 응오딘디엠], 캄보디아[시하누크, 론 놀, 폴 포트, 훈 센], 말레이시아[마하티르 모하맛], 인도네시아 [수하르노, 수카르노], 싱가폴[리콴유] 등 각국의 독재자와 관련된 에피소드를 보여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동남아 각국의 리더와 국민들의 선택 하나하나가 모여 그들의 오늘을 만든 것이라는 점을 만화를 통해 가볍게 보여주는 셈이다. 하지만 영웅이 될 수도 있던 동남아 리더들이 독재자로 전락(轉落)하는 모습들은 왠지 씁쓸했다.

 

1) 김용래,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 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 <연합뉴스> 2018.09.30 (https://www.yna.co.kr/view/AKR20180929039500081)

2)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Achmed Sukarno, 1901~1970)는 일본군의 점령에 협력하고 일본군의 묵인을 얻어 독립을 선언했다. 타이의 피분송크람(Luang Phibun Songkhram, 1897~1964)는 일본과 방위동맹을 체결(1942)하고 일본과 협력하여 참전했다. 미얀마의 아웅 산(Aung San, 1915~1947)은 일본의 원조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군과 함께 미얀마로 침입하였다.

3) 빈슈옌과의 전투과정에서 민족주의 독립운동가인 찐민테[程明世, 1920~1955]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미국이 가지고 있던 ‘응오딘디엠’의 대안이 사라졌다. 또한 응오딘디엠에 협조적이었던, 그가 속해있던 반(反)베트민[越盟] 조직은 유력한 지도자를 잃었고, 그의 부하들은 해산되어 흩어져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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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 - 지금 우리에게 서양철학은 무엇일까?
박병기.강수정 지음 / 인간사랑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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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 이해의 난해함

 

전공자가 아닌 보통 사람에게 ‘철학’은 난해한 학문이다. 교과서에 쓰여진 것처럼 성리학(性理學)하면 ‘이기론(理氣論)’, 양명학(陽明學)하면 ‘지행합일(知行合一)’ 같은 방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비교적 유사한 풍토에서 나와 오랜 시간 한국인의 사고에 맞게 현지화한 유교철학과 불교철학만 해도 그런데 아예 전혀 다른 풍토에서 태어난 서양 철학의 경우에는 더욱 난해할 것이다.

이런 서양철학을 저자들은 선(禪)불교에서 수행하는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붙들고 있는 물음, 즉 ‘화두(話頭)’의 형식을 빌려 소개하고 있다. 마치 불교가 중국에 전래 되던 초기에 불교 교리를 노장(老莊)사상 등 전통 중국 사상의 개념을 적용하여, 비교하고 유추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려던 것[격의(格義)]처럼.

 

이 책, <화두로 만나는 서양철학>은 행복, 환상, 운명, 쾌락, 자기보존, 감정, 실존적 삶, 일상 속의 철학이라는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데카르트, 스토아 철학, 에피쿠로스, 벤담, J.S.밀, 스피노자, 홉스, 흄, 칸트, 니체, 사르트르, 싱어, 롤스, 하버마스의 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8개의 화두(話頭), 17개의 답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수레바퀴 아래에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는 진정한 자아(自我)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가 끝내 물에 빠져 죽는다. 이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은 무엇인지 알아가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야 진짜 행복을 찾고 누릴 수 있지 않을까?

트리나 폴러스의 동화 <꽃들에게 희망을>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통해 무엇이 진짜 행복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트리나 폴러스(Trina Paulus)의 책 <꽃들에게 희망을>에서 주인공인 호랑 애벌레는 행복을 찾아가는 세 가지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와 풀밭에서 먹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삶, 치열한 경쟁과 속도의 덩어리인 애벌레 기둥을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삶, 그리고 자신의 전 존재를 걸고 잠재된 참모습을 끌어내 나비가 되는 삶,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p. 39]

 

 

우리가 생각하는 환상 혹은 판타지와는 다소 다르지만 빨간 약을 먹고 진짜 세계를 알게 되는 영화 <매트릭스>와 지혜의 힘으로 무지의 사슬을 끊고 현실이라는 동굴 밖을 나가 이데아의 세계를 기억하고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살아야 한다는 플라톤의 주장은 다르지만 닮았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지금 있는 곳이 현실 세계인가에 대해 자문해야 하는 영화<인셉션>은 진리를 찾기 위해 끝없이 의심한 끝에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를 남긴 데카르트와 연결된다. 이런 영화들을 보고 나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진짜 세계인가 아니면 진짜 세계라고 믿는 환상일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아마도 이를 입증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 타블로 사건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니까.

 

 

운명론이며 결정론인 스토아 철학을 얘기하는 자들에 있어 인간은 신(神)이라는 감독이 써놓은 시나리오에 따라 맡은 바 배역을 소화해야 할 연극배우다. 만약 그것이 진실이라면 삶은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고정시켜놓고 팔을 휘둘러 발버둥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드라마 <도깨비>는 운명을 반대로 얘기한다.

 

신은 여전히 듣고 있지 않으니.

투덜대기에

기억을 지운 신의 뜻이 있겠지.

넘겨짚기에

 

늘 듣고 있었다.

죽음을 탄원하기에 기회도 줬다.

 

기억을 지운 적 없다.

스스로 기억을 지운 선택을 했을 뿐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pp. 93~94]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운명이라는 화두와 함께 소개되고 있지만, 오히려 쾌락에 대해 논의하는 파트에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에피쿠르스’라고 하면 흔히 ‘쾌락주의자’ 혹은 ‘쾌락주의 철학자’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는 쾌락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처럼 감각적인 쾌락이 아니다.

 

에피쿠르스는 쾌락주의자이자만 적극적인 쾌락의 추구보다는 고통을 제거함으로써 평정심에 이르는 소극적인 쾌락을 강조하는 사상가이다. 그는 자연적이고 필수적인 욕망조차도 과도하게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계한다. [p. 109]

 

오히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불교의 교리와도 통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월포드는 설국열차 안에서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해 5살 이하의 몸집이 작은 아이를 엔진의 부품으로 사용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의 원리에 따르면 이는 정당화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영화를 보지 않아 어떤 방식으로 아이들이 선발되고 희생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라면, 양심의 가책 없이 그 아이들에게 다수 혹은 공동체의 행복(=쾌락과 안전)을 위해 너희의 삶을 바치라고 할 수 있을까?

 

 

홉스는 국가가 만들어지기 전의 ‘자연상태’의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당할 수 있는 평등하면서도 취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라고 불리는 폭력사태가 일상화된다고 주장한다. 월리엄 골딩의 <파리 대왕>에서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아포칼립스는 바로 이런 ‘자연상태’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자연상태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권리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사회의 규율과 통솔에 대해 최소한의 합의[자연법]을 따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개인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육체가 사라져도 ‘기억’ 등을 통해 가족, 친구, 동료 등에게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나는 단수가 아니다’라는 말처럼 개체가 아닌 종족으로서의 ‘자기 보존’을 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나오는 태아(胎兒) 생산과 세뇌 등을 통해 미래가 결정되는 신세계를 거부하는 존은 자유의지를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후예이자 역설적으로 자기 보존을 위한 또 다른 선택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감정을 다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주인공 라일리의 감정 캐릭터 중 기쁨과 슬픔이 감정 컨트롤 본부에서 이탈했다가 복귀하는 내용이다. 감정 입장에서 인간의 행동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감을 통해 사회적 차원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고, 이러한 공감이 인간의 도덕성을 규정하는 가장 강력한 원리라는 흄의 철학과도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드라마 <비밀의 숲>의 주인공인 황시목 검사는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이성(理性)에만 충실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이익이나 평판에도, 동료나 선후배 간의 인간 관계에도, 금전적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다. 밥 한끼에서 시작된 균열에서 무너진 강직했던 선배 검사 이창준과 달리. 어쩌면 그래서 저자들은 감정 따위를 초월한 선(善)의지, 이성적 준칙에 의한 도덕적 결단만이 인간 본연의 의무를 완성한다고 주장하는 칸트와 이 드라마를 연결시킨 것이 아닐까?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가 시민사회에 적응하려는 ‘인간’과 복잡하면서도 부조리한 현실로부터 도피하려는, 자유를 구가하는 ‘이리’를 대비시켰다면, 서미싯 몸의 <달과 6펜스>에서 ‘달’은 화가의 이상을, ‘6펜스’는 절망적인 현실을 대비시킨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인간의 실존 혹은 실존적 삶을 논의할 그 무엇이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실존주의 철학자 니체와 사르트르를 거론한 것이 아닐까?

 

 

철학이라고 하면 뭔가 거창하고 사변적(思辨的)인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상 속에서도 철학이 가능하다. 여기서 공리주의(功利主義)와 연결되는 두 철학자 피터 싱어와 롤스가 거론된다.

피터 싱어는 영화 <옥자>에 등장하는 공장식 축산으로 대표되는 동물에 대한 착취와 학대에 대한 비판을 담은 <동물해방>을 통해 종차별주의(speciesism)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실천 윤리를 주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채식주의 등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실천하고 있다. 반면에 공리주의적 정의론의 약점을 지적한 롤스는 공정한 조건에서 가상적 사회적 합의를 통해 정의가 도출되었다면 공정하다고 주장한다. 이른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제시한 셈이다. 이는 프랑스 사회당이 그의 차등의 원칙을 바탕으로 한 분배 정책을 공식 정책으로 채택했던 것으로, 이런 점에서 그를 현실적 이상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것 같다.

 

 

이 책은 이런 방식으로 8개의 화두(話頭)를 매개로 17명의 서양 철학자들의 주요 학설을 소개한다. 다만 그렇다 보니 8개의 화두와 그 화두에 이어지는 철학자들의 사상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도 있다. 다시 말하면, 화두에 자의적(恣意的)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끼워 맞춰, 서로 따로 노는 듯해서 아쉬운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철학자들의 사상을 대학입시를 대비한 수험서를 읽듯이 가능한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각각의 챕터 끝에 해당 철학자들의 생애와 핵심 성과에 대해 요약한 부록이 곁들여져 있어 서양철학 혹은 서양철학사에 대해 입문하는 이라면 유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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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습관 - 예술과 실용 사이 좋은 습관 시리즈 24
김선동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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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의 습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용상 1부에 해당하는, [건축가의 습관]에서는 18개의 키워드로 건축가의 습관을 얘기하고 있다.

먼저 건축가의 아이디어를 즉각적으로 시각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스케치가 있다. 그리고 건축주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대지를 분석하는 내용, 설계안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내용, 회사의 강점을 소개하는 내용 등을 담은 보고서를 제시해야 하기 때문에, 건축가는 자기 생각을 글로 잘 표현해야 한다[‘글쓰기’]. 따라서 건축가는 스케치글쓰기를 연습해서 습관화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서라도.



건축이라는 것이 단순히 건축주의 지시에 따라 건물을 짓기만 하는 것이라 여긴다면 그 사람은 건축가가 아니라 건축기술자라고 할 수 있다. 건축가가 되려면 르 코르뷔제(Le Corbusier, 1887~1965) <건축을 향하여(Vers une Architecture)>(1922)나 승효상(承孝相, 1952~ ) <빈자의 미학>(1996)처럼 자신의 건축 철학 혹은 건축 세계를 만들려고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쌓기 위해 독서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큰 설계사무소에서 7년 정도 실무 경험을 쌓고 작은 설계사무소로 이직한 직후, 업무영역 변화에 저자가 어떻게 적응해갔는지를 소개한다. 이에 따르면, 저자는 이직 후 집짓기에 대한 실무적인 지식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이를 건축을 잘 모르는 건축주를 대상으로 집짓기의 전체적인 과정과 노하우를 설명한 책들을 읽으면서 보완했다고 한다.


건축은 결국 그 안에 사는 사람을 위해서 짓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독서입니다. 물론 건축주를 직접 만나고 대화하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많은 독서를 통해 사람과 사회에 대한 관심을 두고 지식을 넓혀가는 과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pp. 67~68]


나아가 내 건축에 영감을 주는 장소사람’, 그리고 건축물을 이루는 재료를 관찰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디테일관찰해야 한다.


<논어(論語)>


세 사람이 길을 같이 걸어가면 그 가운데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살펴 스스로 고쳐야 한다[三人行必有我師焉 擇其善者而從之 其不善者而改之]


라는 말이 있다. 건축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저자는


건축가라고 해도 체험할 수 있는 프로젝트의 숫자는 제한적입니다. 이 말은 모든 재료를 다 다뤄보기는 힘들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프로젝트를 통한 간접적인 학습은 어찌 보면 필수적인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p. 87]


고 말한다.


건축가 되려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건축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 여기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느 사업에서나 가장 중요한 자산인 신뢰. 건축주나 현장 소장, 설계 사무소의 내부 직원들의 말을 경청(傾聽)’하는 것도 필요하다.


흔히 건축을 예술분야에 속한다고 본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건축은 예술이기에 앞서 사업이다. 따라서 사업 전략, 관계자들과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는 것도, ‘라는 브랜드를 홍보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런 부분까지 습관이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건축혹은 건축가에 대해 기본적인 흐름을 알려주는 요소임을 확실하다.


내용상 2부에 해당하는, [못다한 건축 이야기]건물이 지어지는 과정건축주가 묻고 건축가가 답하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에서는 땅 구매설계 사무소 물색 및 설계 상담 의뢰계약 체결 후 대지측량기본설계1), 인허가 접수, 심의, 실시설계2), 시공사 선정, 착공신고 및 감리자 선정, 사용승인에 이르는 10단계의 과정을 안내하고 있다.


건축주가 묻고 건축가가 답하다는 건축주들이 자주 물어보는 질문에 대한 저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이 녹아있는 답변이 적혀 있다. ‘저자와의 대화같은 이벤트에서 볼 수 있는, 일종의 Q&A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쉽게 접하기 힘든 건축가의 경험에서 우러나는 문답이기에 건축가를 지망하는 사람뿐 아니라, 집을 짓는 것에 관심 있는 일반인에게도 충분히 유용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위 도서를 소개하면서 좋은습관연구소로부터 무료로 도서를 받았습니다



1) 기본설계(basic design)는 대지 조건과 건축주 상황, 요구 조건 등을 고려해 건물의 전체적인 레이아웃과 구성, 형태, 재료 등이 정하는 작업이다.


2) 실시설계(working design)는 기본설계도에 입각하여, 건물의 디테일 한 사항들, 즉 재료나 세부적인 설비 스펙 등을 결정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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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도쿄
호즈미 가즈오 지음, 이용화 옮김 / 논형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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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明治]의 시작은 1868년이다. 1868년은 일본 역사에 큰 의미가 있는 해인데, 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라 중세에서 근대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에도[江戶]가 신정부의 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에도가 당시 일본의 중심이 되는 대도시였고, 보신[戊辰] 전쟁 당시 도쿠가와 막부측의 가쓰 가이슈[勝 海舟, 1823~1899]와 메이지 신정부군측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鄕 隆盛, 1828~1877]의 협상으로 ‘에도’라는 도시가 전쟁의 피해를 보지 않고 온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탄생한 메이지 정부의 도쿄는 어떤 모습일까?

먼저 ‘1장 문명개화’에서 소개된 메이지 시대의 특징을 보면,

 

에도 이래의 전통과 서구의 근대문명이 뒤섞여진 이상한 이국정취야말로 메이지의 독특한 매력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전통과 근대화라는 이중구조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생활과 사고방식까지 영향을 주고 있다 [pp. 18~19]

 

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메이지 정부가 목표로 한 것은 ‘근대도시’로서의 도쿄였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국의 수도’ 즉 국가의 수도로서의 딱딱한 관리사회를 의미하고 있었다. 요컨대 걸핏하면 쾌적성보다도 국가의 체면과 통치가 우선되어 정치성과 경제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도쿄의 일반시민들은 에도 이후의 시민문화를 이어받아 자유로운 생활공간을 추구했다. 메이지의 도쿄는 ‘천황’의 의향과 ‘시민’의 목소리라는 두 개의 요소가 대립과 공존하면서 성립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p. 19]

 

라고 한다.

 

이러한 메이지의 도쿄를 보여주는 것 가운데 하나가 도쿄 최초의 본격적인 호텔이라고 불리는 ‘쓰키지[築地] 호텔관’이다.

 

쓰키지[築地] 호텔관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8~29

 

이곳의 설계는 미국인 리차드 브리젠스(Richard P. Bridgens)가 했지만, 건축은 훗날 시미즈[淸水] 건설의 창업자의 양자인 2代 시미즈 기스케[淸水 喜助, 1815~1881]가 맡았다. 그래서인지 완성된 쓰키지 호텔관은 시미즈 기스케의 독창적인 디자인이 가미되었다. 쓰키지 호텔관의 외관은 흙과 회로 두껍게 바른 것 같은 해삼벽[海鼠壁]1)이고, 지붕 중앙에는 절의 종루를 닮은 탑이 솟아 있다. 탑으로 오르는 입구에는 나선형 계단이 있어 일본식도 서양식도 아닌 너무나도 기묘한 건축물이 되었다. 게다가 외국인이 바다에서 직접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는 바람에 원래 후문으로 설계된 나가야문[長屋門]2)이 정문으로 바뀌는 등의 설계상의 변동도 발생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아쉽게도 1872년 긴자[銀座] 대화재로 소실되었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호텔들은 메이지 정부가 내세운 ‘서구화 정책’ 혹은 ‘근대 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명개화(文明開化)의 또 다른 상징으로는 긴자[銀座]의 벽돌거리가 있다. 1872년 발생한 긴자 대화재를 기점으로 메이지 정부는 도쿄 전체를 불에 타지 않는 서구식 건물로 바꾸겠다는 방침 아래 화재로 인한 폐허 위에 서구식 거리(street)를 건설하기로 결정했고, 토마스 워터스(Thomas J. Waters, 1842~1898)에게 설계를 맡겼다. 이렇게 조성된 ‘벽돌거리’ 혹은 ‘렌가가이[煉瓦街]’는 일본 최초로 대로를 중심으로 차도와 인도를 분리했으며 가로수를 심고 가스등을 세웠다. 대로변의 상점 건물을 붉은 벽돌로 지었으며, 부채꼴의 벽돌로 만든 원주로 지탱되는 아케이드를 상가 입구에 붙였다. 이렇게 건설된 벽돌거리의 모습은 19세기 영국과 그 식민지에서 볼 수 있었던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모습 그대로3) 였다고 한다. 하지만 습기가 많은 일본 환경과 거주자를 고려하지 않고 조성했기 때문인지, 완공 후 약 5~6년간 가옥들이 거의 빈 채로 있었고, 입주 후에도 목조 부엌과 변소 등을 건물 외부에 대나무로 만든 전통 빗물 보호대를 설치하는 등 일본적 요소를 추가한 대대적인 개축 등을 실행했다4)고 한다.

 

벽돌거리의 계획은 수도의 체제를 정비하려는 정부의 생각만으로 진행된, 이를테면 주민 부재의 지역 개발이었다. 타고 남은 가옥의 강제철거를 시작으로 벽돌구조의 비싼 건축비로 인한 집세와 불하료5)문제, 일본의 기후습도에 어울리지 않는 설계상의 약점, 게다가 거주자의 생활양식과 맞지 않는 점도 특이할 만하다. [p. 37]

 

긴자[銀座] 벽돌거리의 변화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34~35

 

출처: <메이지의 도쿄>, pp. 242~243

 

이처럼 일방적으로 서구화를 하다 보니 웃지 못할 에피소드들도 발생했다.

 

메이지 5년(1872) 연말은 실로 황당하고도 묘한 일이 벌어졌다. 왜냐하면 정령에 의해 지금까지의 태음력 대신에 태양력이 채택되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12월은 겨우 이틀 만에 끝나고, 다음날인 3일은 다시 메이지 6년(1873) 1월 1일이 되었다. 이 때문에 관공서에서 지불하는 월급이 1개월분 덜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런 설 준비로 시민들은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pp. 95~96]

 

메이지의 패션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48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0

 

일본 여성의 머리모양과 속발

출처: <메이지의 도쿄>, p. 253

 

당대의 아이돌이었다는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와 메이지 시대의 오빠 부대인 ‘도스루 팬클럽[ド-スル連]’의 얘기는 신기했다. 다만, 이 책에서 언급된 뮤수메 기다유[娘 義太夫]가 사람 이름인지 아니면 ‘걸그룹’처럼 장르 혹은 분야의 명칭인지 명확하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냐하면, 한국의 판소리처럼, 일본에는 독특한 창법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다유[太夫]와 다유의 표현을 리드하고 반주하는 샤미센[三味線]으로 구성된 기다유부시[義太夫節]라는 장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저자는 문명개화, 새 나라 만들기, 도시의 시설, 언론의 시대, 도시 만들기, 시민의 생활, 도시의 즐거움, 메이지의 쇠퇴기라는 8개의 주제로 메이지 시대의 건축물과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으로부터 들여 온 새로운 문화, 풍습, 사회 현상 등을 깔끔한 일러스트와 함께 차분하게 서술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건축학과 출신의 일러스트레이터 호즈미 가즈오[穗積 和夫, 1930~ ]이기 때문이 아닐까? 전체적으로 역사에 기반을 두면서도 건축물, 도로와 철도, 도시 계획 등에 초점을 맞춰 오늘날의 도쿄가 어떤 기틀에서 형성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백과사전적인 측면이 있다 보니 메이지 시대의 역사를 살피고자 하는 이에게는 다소 난잡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또 흑백 일러스트이기에 건축물들이 비슷비슷해 보인다는 점도 아쉽다.

 

1) 흙벽돌로 된 외벽에 네모진 평평한 기와를 붙이고 그 이은 틈을 석회로 불룩하게 만든 벽

2) 다이묘[大名]이 자신의 저택 주변에 가신들을 위해 나가야[長屋]을 지어 살게 하고 그 일부에 문을 연 것에서 비롯된, 일본 무가 저택의 전통식 문(門)의 형식.

3) 김효진, “일본의 초기 근대 건축의 양상과 변모”, <일본비평> 15호, (2016), pp. 264~265

4) 김효진, 앞의 글, pp. 266~268

5) 불하(拂下)는 국유나 공유재산 또는 귀속재산을 개인에게 팔아 넘기는 일. 다만, ‘불하’라는 단어는 일본식 한자어이기에 ‘매각’ 또는 ‘팔다’로 순화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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