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
찰스 부카우스키 지음, 설준규 옮김, 로버트 크럼 그림 / 모멘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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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중에 넣은 찰스 부카우스키(부코스키보다 왠지 이렇게 부르는 게 더 멋지게 들린다 나는)의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를 영화 <싱글맨>을 다 보고 나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책 너무 재밌다. 얼핏 보면 작가라기 보다 기인에 가까운 찰스 부카우스키라는 걸 그의 소설인 <우체국>과 <여자들>을 읽으면서 느낀 바 있지 않은가. 그의 자유분방한 삶은 경이스럽다고 해야 할 정도인데, 일흔 살을 넘긴 노작가의 삶도 왕년의 그것에 비해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살면서도 꾸준하게 글을 쓰고, 돈을 벌어 생계를 할 수 있다는 점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는 표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다. 그가 이 저널을 쓰고 난지 3년 뒤에 그는 책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는 ‘하데스의 세계’로 위치이동을 했다. 과연 부카우스키는 왼쪽 주머니에 죽음을 찔러 넣고 다니며 언제라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어떤 회한 없이 먹고 마시고 섹스하면서 산 70평생을 마감 지을 무렵에 노작가는 마음의 준비가 단단히 되어 있던 모양이다. 인간이라면 모름지기 두려워할 법한 죽음조차도 이 작가가 가진 불굴의 또라이 정신은 꺾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지. 대단하다 대단해 정말.

 

그의 저널에서 경마장 이야기는 거의 빠지지 않는다. 오랜 시간 복잡한 길을 거쳐 운전을 해 가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마장에 마치 인생의 비밀이라도 숨어 있다는 것처럼 부카우스키는 뻔뻔하게 경마장에서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에 대해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양반이 아주 또라이는 아닌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당시 아버지 조지 부시 행정부에 대해서 날카로운 비판하는 모습도 보인다. 별것도 아닌 전쟁에서 이긴 것(걸프전)을 가지고 으스대지만, 실상 경제는 이미 바닥을 치고 있더라는 냉정한 분석에 할리우드에서 수천만 달러를 들여 만든 거지같은 영화들이 소비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기도 한다. 어라, 이 양반 보통 노인네가 아닌데 그래.

 

작가론도 눈여겨 볼만하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을 위해 글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장면에서는 정말 압권이다. 하긴 그 시절만 하더라도 요즘처럼 SNS 같이 실시간으로 달리는 악플이 없었을 시절이니. 비록 사반세기 전의 일들이긴 하지만 아직까지 부카우스키가 살아 있가도 해도, 강철멘탈의 소유자인 이 늙다리 작가는 소통만능의 시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들을 글로 내질르며, 술도 양껏 마시고 경마장에 출입하며 그렇게 살아겠지 싶다. 내가 가진 도덕률 때문에 그의 글들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없지만 묘하게도 공감하는 발언들이 이어진다.

 

시인들의 삶에 대한 예리한 지적도 눈길을 끈다. 도대체 전업시인으로 어떻게 먹고 살 수 있는지 부카우스키는 매우 궁금하다. 나 역시 그렇다. 주변에 보면 시를 읽는다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소설이나 다른 책들은 제법 읽지만 시 소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그가 알아낸 바에 의하면, 하나 같이 부르주아 계급 출신인 시인들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부동산에서 나오는 수입 혹은 부모에게 급료를 받으며 풍족하게 산다는 것이다. 거 참... 심지어 어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을 대신해서 시까지 써준다나. 세상은 참말로 요지경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된 부카우스키를 만나고 싶어하는 이들이 참 많았던 모양이다. 대부분의 경우에 거절했지만, 인터뷰를 하겠다고 꼬시고 전문적으로 사진촬영을 하겠다고 덤비면 그도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그 후에 아무 연락이 없었던 경우가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들이 진짜 팬이라기보다, 이제는 전설이 된 작가가 어울려 술마시고 노닥거릴 수 있는 영광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의 삶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편지에 현금을 보낸 케이스도 있다. 대단하지 않은가? 비록 다큐멘터리 제작은 엎어졌지만, 아마 받은 돈으로 우리의 부카우스키가 경마장으로 달려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상상하면 그 또한 삶의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런데 내가 부카우스키의 팬이었던가? 부카우스키의 새로운 책이 나왔을 걸 알게 된 순간 그의 책을 냉큼 사서 헐레벌떡 읽은 걸 보면 말이다. 그전에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우체국>과 <여자들>을 읽었는데 가히 충격적이었다. 아마 그래서 전자는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썼는데 후자는 아예 후기를 쓸 생각도 못한 것 같다. 내년에 다시 한 번 부카우스키를 읽어봐야겠다. 참,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의 원제목은 <선장은 점심 먹으러 나가버리고 선원들이 배를 접수했다>이다. 그런데 뭔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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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깨비 2015-12-21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덕분에 몰랐던 작가님 한 분을 소개받네요. 특히 우체국이 재밌을 것 같아요. 북플을 하다 보니 정말 세상에 재밌는 책이 참 많네요.

레삭매냐 2015-12-21 15:34   좋아요 0 | URL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
세상은 참 넓고 읽을 책은 감당해내지 못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찰스 부카우스키 아주
재밌는 작가랍니다 :>
 
베를린이여 안녕 창비세계문학 46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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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통일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삭막한 풍경이다. 2007년 5월의 베를린은 추웠다. 그 때 5유로를 주고 어느 백화점에서 산 스웨터를 아직도 입고 있다. 내가 베를린에 간 건 순전히 여행길에 만난 나그네에게 전해 들은 페르가몬 뮤지엄을 보기 위해서였는데, 낯설었지만 웅장했던 뮤지엄 기행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제국주의 시절 터키에 있는 타국의 신전을 통째로 뜯어온 약탈 행위에 대해서는 반대하지만 말이다. 나보다 수십 년 전에 베를린에서 이방인 생활을 했던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육성 기록인 <베를린이여 안녕>은 그런 점에서 더욱 개인적 감흥을 자극한다.

 

뉴욕타임즈에 실린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 생활에 대한 기사를 살펴보니, 정확하게 그가 베를린에 머물기 시작한 것은 그가 25세였던 1929년이었다고 한다. 영국 출신의 이방인 게이 작가는 조국에서 환영받을 수 없는 존재였기(동성애 금지법, 1967년 폐지) 때문에, 온갖 형태의 자유연애가 판을 치던 바이마르 시절 베를린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가 살던 놀렌도르프 슈트라세는 이제 슬럼화된 지역이라고 하는데, 대신 베를린 밤문화의 중심지라고 한다. 아마 그 시절에 외국인은 경찰서에 체류등록을 해야 했던 모양이다. 경찰서에 외국인 등록을 하러 갔을 때, 자신이 그 지역의 유일한 영국인이라는 사실에 기뻐했다고 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1939년에 발표한 <베를린이여 안녕>은 모두 6편의 중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곧 독자들이 익숙하게 될 이름인 슈뢰더 부인의 하숙집에 사는 다양한 인물군이 차례로 등장한다. 나치를 지지하는 요들가수 마이어 양, ‘직업여성’ 코스트 양, 인근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는 바비가 바로 그들이다. 1930년대 베를린의 소시민들을 대표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구성이다. 우리의 이시부 씨는 베를린의 부유한 부르주아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생활비를 번다. 소설의 화자 이시부 씨는 자존심이 상해 영어공부보다 계속해서 걸려오는 전화와 잡담 그리고 약속에 정신이 팔려 있던 제자 히피 베른슈타인 양에게 받은 교습비 5마르크를 공중으로 날려 버렸다가 허겁지겁 찾으러 간다. 절망과 가난에 빠진 이방인에게 무슨 선택의 여지가 있겠는가. 자유가 차고 넘치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시대로 급속하게 우경화하던 시절의 베를린에서 정치 대화는 종교 이야기 만큼이나 비현실적이었노라는 그의 고백이 당대 베를린 시민들이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대변해 준다.

 

이제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인 샐리 볼스가 등장할 차례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한 때 함께 살았던(절대 애인은 아니었다) 진 로스(Jean Ross)라는 실제 인물을 소설화한 인물로 같은 영국 출신의 19살난 형편없는 실력의 나이트클럽 가수다. 정말 훗날 뮤지컬 <캬바레>의 주인공이 될 정도로 다채로운 성격을 가진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가계에 대한 거짓말을 밥먹듯 하고, 젊은 피아니스트와 정분이 나질 않나, 백만장자와 사랑에 빠지는 막장드마라 같은 기획도 하고 노래와 춤 못하는 게 없는 그런 신여성의 선두주자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1966년에 뮤지컬로 만들어져서 브로드웨이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작년까지 숱한 리바이벌을 거듭해 왔다고 한다. 세상이 좋아져서 뉴욕의 브로드웨이까지 날아가지 않아도 컴퓨터 앞에 앉아서 유투브로 샐리 볼스 역을 맡은 엠마 스톤이 부른 <Don't Tell Mama>를 잠깐 감상해 보기도 했다. 역시 데카당스한 분위기의 다양한 문화 공간이었던 베를린의 분위기를 잠시 엿볼 수 있어 즐거운 경험이었다.

 

다음 에피소드는 휴양지 뤼겐 섬에서 피터 윌킨슨(영국인) 그리고 노동계급 출신의 오토 노바크와 함께 보낸 이야기다. 은근하게 게이 성향을 드러내는 피터는 날마다 댄스 파트너를 바꿔 놀러 다니는 오토를 질투한다.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자유를 만끽한다. 우리의 이시부 씨는 그런 상황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중재에 나서지 않고 객관적인 자세를 유지하면서, 누구든 도움과 조언을 요청할 때마다 응한다. 그런 성격이 실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모습인지도 궁금해졌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고 피터는 정신과의사를 찾지만 공산주의를 정신병으로 치부해 버리는 나치사상에 경도된 의사가 도움이 될 리 없다. 해수욕장에 나치의 상징인 하켄크로이츠 깃발이 들어서고, 다섯살배기 어린아이가 나치 찬양가를 부르는 장면으로 파시즘이 일상에 스며들고 있었노라고 작가는 생생하게 증언한다. 식당에서 만난 독일 청년들과 대화 중에 그들의 지도자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지난 전쟁에서 독가스 사용은 어떻게 된 거냐고 화자가 묻는다. 그랬더니 그들은 그건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라며 반박하는 장면에서 곧바로 홀로코스트의 유령이 떠올랐다. 그 엄청난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문제였구나.

 

노바크가 사람들과 란다우어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들이 가진 자산만큼이나 정말 대조적이다. 생활고에 찌든 밑바닥 삶을 노바크 집안에서 경험했다면, 베를린의 유명한 백화점을 소융한 유대인 란다우어 집안과의 교제는 또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이재와 사업에 그렇게 영민했던 란다우어들이 나치가 집권하면 당장에 그들에게 위협이 될 거라는 사실을 짐작조차 못했을까. 파시스트 세력이 그들이 가진 재산 뿐 아니라 목숨/존재까지도 요구하게 되리라는 예후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야말로 시대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이시부 씨는 결국 거대한 폭풍이 베를린을 뒤덮기 전에 정들었던 자신의 두 번째 고향을 떠날 수 있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오픈시티였던 격변기의 베를린에 사는 사람들은 매순간마다 정치적 선택을 요구받았다. 결국 파국으로 치닫게 된 선택으로 귀결되긴 했지만,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이중 이방인은 그런 삶의 양상들을 훌륭하게 소설화했다. 소설 <베를린이여 안녕>은 한 때 자신이 사랑하던 도시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과정을 지근거리에서 기록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아련한 소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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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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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빌 클린턴의 퍼스트레이디이자, 전 미국무부장관이었던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다.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리뷰에 앞서 웬 미국 대통령 타령이냐고? 전대미문의 지퍼게이트가 전 미국 나아가 전세계 토픽이 되던 시절을 바로 이 소설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여피 출신 교수 데이비드 케페시와 그의 제자 콘수엘라 카스티요의 ‘부적절한 관계’가 묘하게 지퍼게이트의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소설 <죽어가는 짐승>은 화자 데이비드 케페시-누가 봐도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라고 할만하다-가 8년 전에 자기의 연애상대였던 애제자 콘수엘라 카스티요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케페시는 학기 중에는 절대 부적절한 행동을 삼가고-지도교수와의 면담 시간에도 항상 문을 열어 놓는 풍습이 미국 대학에는 있더라- 오로지 학기가 다 끝난 뒤에 사적인 파티를 통해 본격적인 사냥에 나선다. 이번에 그의 타깃이 된 콘수엘라도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피아노 연주로 유혹을 시작한다. 지금은 일흔살이 됐지만, 그 시절에도 이미 60세를 넘긴 나이였던 케페시는 24세의 나이로 인생에서 최고 절정기에 달한 쿠바계 미인 콘수엘라의 엉덩짝과 젖가슴을 탐했다. 그런데 이 노교수의 부적절한 섹스 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56년 아내와 이혼한 이래, 줄곧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 사랑놀음을 계속해왔다.

 

뉴저지에서 걸출한 미학자이자 교수로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는 케페시는 자신이 가진 예술에 대한 권위를 이용해서 멈출 수 성적 충동과 일탈을 지속해왔다. 이제 42세가 된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가정을 파괴한 주범인 아버지를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도덕적 자격을 갖춘 여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달린다. 삶의 아이러니는 그런 케페시의 아들 케니도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비난하면서 역시 아버지가 물려준 삶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자신의 역할이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 카라마조프 같다는 진술이 그런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술에 대한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케페시와 케니의 갈등 문제는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젊디젊은 콘수엘라의 완벽한 여체를 소유하고 싶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노교수는 필연적 질투심과 사투를 벌인다. 가끔씩 벌어지는 일탈 외에는 삶의 완벽한 평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던 케페시의 삶은 가히 팜므 파탈이라고 할 수 있는 콘수엘라의 등장으로 엉망진창이 된다. 아직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케페시는 자신이 콘수엘라가 본격적인 연애로 가는 길에 일별한 빨간 신호등 정도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본능적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파괴적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나마 자신을 제어해 주던 친구 조지 오헌이 살아 있을 적에는 다행이었지만, 다섯달 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마저도 요원해졌다. 바로 그 순간, 콘수엘라로부터 기적적으로 연락이 온다.

 

8년 전 콘수엘라는 만났을 적에도 케페시는 또다른 연애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상대는 40대의 캐럴린 라이언스, 그녀 역시 대학시절 케페시의 상대였다. 필립 로스는 자유주의와 평등 그리고 성해방의 물결이 넘실대던 1960년대를 그리워하는 듯한 서술을 전개한다. 그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있나. 하긴 그 시대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는 그 전시대는 또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1930년대에 태어난 데이비드 케페시가 아니라면 그런 비교는 불가능할 것이다. 오로지 소설 속 화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립 로스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에 나오는 대로, 쾌락과 평정의 자유로운 결합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의 본질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다루는 케페시의 콘수엘라에 대한 강박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서술은 근래 읽어본 책 중에 최고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니 이렇게 야하면서도 품격이 있을 수가 있나 그래. 거장다운 실력이 느껴지는 서사가 압권이었다. 예술을 숭배하는 젊은 여성에게 예술비평의 고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매혹적이겠는가.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이라는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위안과 쾌락이 얼마나 달콤할 수 있는지 케페시/필립 로스는 도발적 실천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소설은 케페시 교수의 콘수엘라 유혹이라는 행동에서, 점점 더 화자 내부의 침잠하는 번뇌와 갈등하는 욕망에 대한 이성적 통제를 가능케 하는 사유로 전이한다. 개인적으로 <죽어가는 짐승>을 읽으면서 필립 로스가 독자에게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케페시가 과연 부도덕한 인물이냐고 도발적으로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존재와 본질의 문제가 아닌가.

 

지난달 독서모임에 이 책을 들고 가서 최근에 읽은 최고로 야한 책이고, <네메시스>에 비해 너무 재밌었노라고 소감을 피력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처음의 생각과 조금 달라졌다. 이래서 책을 다 읽어야 하나. 필립 로스의 열혈팬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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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조동섭 옮김 / 그책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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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을 읽었다. 시대적 배경은 1962년, 미국과 쿠바 사이의 미사일 위기가 한참 고조되던 크리스마스 즈음의 주인공 조지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공간은 서던 캘리포니아인가 보다. 겨울의 캘리포니아는 어떤 분위기일까. 주인공 조지는 올해 58세로(정확하게 1904년생인 크리스 아이셔우드와 동갑이다) 인근 주립대학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최근 동성 파트너인 짐이 고향 오하이오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죽었다.

 

아침잠에서 깬 조지는 일상의 조지가 되기 위한 의례적인 준비에 나선다. 한 때 보헤미안 유토피아라고 불렸던 자신의 거처에 대한 짤막한 설명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이웃의 스트렁크 부인은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해 잘 알고 있지만, 정중한 이웃이 그렇듯 내색은 하지 않는 모양이다. 동물을 사랑하던 짐이 죽고 나자, 조지는 짐의 애완동물들을 하나씩 처분한다. 추억 혹은 기억 지우기에 나섰다고나 할까. 소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조지의 심리를 정밀하게 추적한다. 지구 종말론적 미사일 위기 때문에 사람들은 생존을 위한 물건사재기에 나서고, 방공호 구축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자신이 확보한 물자와 가족이 들어가 살아남을 방공호를 지키기 위해 자동소총을 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거란 조지의 예언이 섬뜩하게 다가온다.

 

일상으로 복귀할 준비를 마친 조지는 미국식 자본주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캘리포니아의 고속도로를 타고 자신의 일터인 샌토마스 주립 대학교로 향한다. 한때 전 세계 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난 생산력을 자랑한 미국식 속도와 캘리포니아 미국인들의 삶을 규정해 버린 자동차라는 문명의 이기를 이 중년남자는 만끽한다. 그렇게 거의 기계적인 움직임으로 차를 운전해서 학교에 도착한 조지는 벌거벗다시피 하고 테니스를 치는 젊은이들에게 알듯말듯한 눈길을 보낸다. 개인적으로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쓴 이 소설 내용 중에 그의 신성한 일과인 대학생들을 상대로 한 올더스 헉슬리의 소설 <After Many a Summer(1939)>에 대한 강의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솔직담백한 조지의 감정에 대한 서술도 인상적이었지만, 교수와 학생 간의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찬 강의실 분위기에 대한 묘사는 마치 그 강의를 현장에서 듯고 있다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대학에서 배우는 강의가 돈 버는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인가라는 내용의 조지가 한 모놀로그는 반세기가 지난 지금 대한민국 대학에서 진행 중인 구조조정을 예언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사이비’(사이버가 아니다) 대학교육의 진실을 관통한다.

 

교수식당에서 미국식 패스트 식사와 동료 교수들과 짧은 대담을 마친 조지는 한 때 연적이자 지금은 병으로 죽어가고 있는 도리스를 방문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현장에서 그의 방문은 무채색처럼 단조롭고 무의미하게 다가온다. 체육관에 들러 십대소년 웹스터와 윗몸일으키기 경쟁을 하며 기분전환을 하기도 한다. 근육질의 남성성이야말로 그가 추구해야 하는 플라톤이 제시한 이상향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슈퍼마켓에 들렀다가 아침에 거절했던 같은 영국 출신의 이방인이자 싱글맘 샬럿의 초대를 다시 받아들인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패션디자이너 출신의 톰 포드가 2009년에 동명의 타이틀로 연출했다고 하는데, 과연 톰 포드가 샬럿의 집안과 그녀가 입고 있던 요란스러운 복장을 어떻게 영상화했는지 무척이나 궁금하다. 아침에는 거절했던 샬럿의 초대를 다시 받아들여 파트너를 상실한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이기적인 사악한 계산(vicious calculation)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오갈 데 없는 두 외로운 영혼의 의기투합으로 봐주어야 하나. 그렇게 인간의 관계란 복잡하기 짝이 없는 모양이다.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말이다.

 

샬럿과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현명하게 마무리한 조지는 한 잔 더 하러 인근 바에 들렀다 자신의 제자 케니 포터를 만나 누가 봐도 무모해 보이는 밤수영에 나선다. 내가 짧은 영화 트레일러에서 본 물 속에 잠긴 콜린 퍼스의 모습이 아마 이 장면을 형상화한 게 아닐까. 상황을 모르고 봤을 때는 약간 무섭기까지 했는데, 소설을 읽어 보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물에 흠뻑 젖은 케니를 자신의 집에 데려와, 그와 그의 애인 로이스 야마구치에게 사랑의 보금자리를 제안하며 스스로를 추잡한 늙은이라며 은근한 유혹을 이어간다. 도대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까.

 

소설 <싱글맨>의 전개는 놀랍다. 주인공 조지의 마지막 하루의 동선을 쫓아가는 동안, 독자들은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인도하는 대로 그의 일생을 더듬게 된다. 주인공이 가진 고민과 갈등 그리고 삶을 대하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정말 섬세한 부분들이 대가의 기교로 독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것이다. 문제는 번역이다. 누가 말한 대로 번역을 하랬더니, 소설을 썼냐 정도는 아니지만 다름이 아닌 틀림의 번역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때마침 원서를 구해 비교대조해 가며 읽었는데, 많은 부분이 틀렸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시제는 물론이고, 역자의 임의적인 해석이 의심되는 부분은 어김없이 원서와 틀렸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번역한 걸까, 알 수 없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소설 <싱글맨>이 가진 장점들은 조금도 빛을 잃지 않는다. 상실의 시대를 사는 개인이 가진 고민들, 타인과의 관계 설정, 내 삶과 감정에 충실한 기술 등은 정말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드는 그런 매력을 품고 있다. 12월이 되면 어떻게 한 해가 갔는지 모르게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음에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런 분주함 가운데 이런 걸작을 놓치지 않고 만나게 되어 반가울 따름이다. 이게 다 <베를린 이야기> 덕분이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지. 이제 영화 <싱글맨>을 감상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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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 창비세계문학 45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지음, 성은애 옮김 / 창비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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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독서모임을 앞두고 국내에 출간된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사실 지난달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잡다한 독서이력 때문에 미처 읽지 못하고 있다가 다시 에둘러 와서 다 읽었다. 사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책은 <베를린이여 안녕>으로 시작했는데 순서대로 읽으려던 나의 결심을 애당초 틀려버렸다. 솔직하게 말해서 베를린 연작 중에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보다 <베를린이여 안녕>이 훨씬 재밌다. 지금은 절판되서 구할 수도 없는 <싱글맨>에 빠져 있는 중이다. 그런데 마침 원서도 구해서 같이 비교해 가면서 읽고 있는데 번역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누구처럼 소설을 쓴 건 아니지만 말이다.

 

창비에서 나온 책이라 마음에 들지 않지만 어쩌겠나 그래. 다른 버전을 구할 수 없으니 창비에서 나온 책을 읽는 수밖에. 서설이 길었구나. <노리스 씨 기차를 갈아타다>는 제목 그대로 화자인 윌리엄 브래드쇼(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미들네임이기도 하다)가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에서 50대의 아서 노리스 씨를 만나게 되면서 겪게 되는 일종의 경험담이다. 연작으로 나온 <베를린이여 안녕>보다 훨씬 더 정치적 색채가 짙고, 군데군데 자신의 성적 취향을 암시하는 그런 복선들이 깔려 있다는 점에 변별점을 가진다.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가 독일을 선거로 독일을 석권하기 이전까지 1930년대 초반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자유분방함이 넘치는 그런 도시였다. 데카당스한 분위기였다고나 할까. 그런 분위기 속에 영국 출신의 이방인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분신은 윌리엄 브래드쇼는 독일 사람들에게 영어교습을 하며, 유창한 독일어를 구사하면서 그들 사이를 파고든다. 소설은 그런 윌리엄 브래드쇼가 문제적 인간 아서 노리스와 얽히게 되는 일단의 과정을 예리하게 짚어내고 있다. 어느 정도 미스터리한 구성도 눈에 띈다. 독자는 도대체 아서 노리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베를린과 파리를 오가며 무언가 거래를 하는 것 같은데, 소설의 서술자 빌리는 그게 밀수가 아닌가 짐작하지만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잘 나가던 아서 노리스가 빌리 브래드쇼가 사는 아파트로 이사오면서 이야기는 한층 복잡해진다. 계속해서 정체불명의 마고란 인물이 파리에서 암호 같은 전보를 아서 노리스에게 보내고, 베를린 사교계의 마당발 노리스 씨를 따라 많은 사람들을 소개 받고 심지어 나치 국가사회주의당에 대척점에 서 있던 공산당 활동에까지 브래드쇼는 원치 않게 개입하게 된다. 그렇게 알게 된 루드비히 바이어란 미지의 인물로부터 빌리 브래드쇼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해 듣게 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명백하게 자신을 형상화한 윌리엄 브래드쇼란 캐릭터를 창조해냈다. 소설 속에서 브래드쇼는 누가 봐도 이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성적소수자로 타인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미래의 소설가 지망생으로 지적 풍모를 가진 그런 남자로 그려진다. 그는 마치 소설 <수호전>에 나오는 급시우 송강처럼 어려운 상황에 빠진 친구들을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누구나 인정하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가 된 아서 노리스를 비롯해서, 나치가 득세하기 시작한 뒤 숙적 나치 돌격대원에게 쫓기는 오토를 성심껏,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상대를 배려하면서 최선을 다해 돕는다. 물론 때로는 베를린의 친구들과 불화를 경험하기도 하고, 냉소적인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객관적 자세를 대체로 유지한다. 한편 SM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항상 우물쭈물하는 노리스 씨가 주저하며 하지 못하는 말들을 정곡을 찌르는 특유의 화법으로 이끌어 나가기도 한다. 바로 그 점이야말로 어쩌면 독자들을 속 시원하게 만들어주려는 작가의 배려일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어느 작가의 작품세계를 알아보려면 적어도 3~5권의 책을 읽어봐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최근에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작품을 연달아 읽으면서 작가의 성향 혹은 작풍이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이 거주하는 하숙집 주인 슈뢰더 부인도 빼놓을 수 없는 멋진 캐릭터다. 간전기 시대에 제국에 패배를 안겨준 적국 출신의 이방인 크리스 아이셔우드를 이시부 씨라 부르며(아 헷갈린다 <베를린이여 안녕>에서 그녀가 그렇게 불렀던가), 친근하게 대해주는 수다스럽고 푸근한 하숙집 아줌마 같은 존재라고 해야 할까. 세입자들이 장기간 방을 비울 때는 서슴지 않고 그들의 방에 침입하는 고약한 습관도 있지만, 노리스 씨를 괴롭히는 그의 전직 비서 슈미트가 하숙집을 습격했을 때는 초대 받지 않은 이 침입자를 공격해서 감금하는 기지도 발휘한다. 우리의 이시부 씨들의 영향으로 선거에서 공산당에 투표하기도 하지만, 또 나치 시대에도 잘 적응해서 혹심한 전쟁을 무사히 빠져 나오기도 했다. 어쩌면 슈뢰더 부인이야말로 나치 치하의 엄혹한 시절, 전쟁과 기아를 버텨낸 베를린 시민의 상징 같은 존재일지도 모르겠다. 전쟁이 끝나고 이십년 만에 다시 만난 이시부 씨와 슈뢰더 부인의 해후는 정말 감동적인 에필로그였다. 어찌 됐든, 우리네 삶은 계속된다는 삶의 진실이야말로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하고 싶었던 말이 아닐까.

 

어쩌면 크리스 아이셔우드는 자유주의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나치 독재정권으로 이행기에 대한 기록은 은근한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유대인에 대한 본격적인 핍박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갈색셔츠(브래드쇼는 점증하는 나치에 대한 공포를 사방에서 갈색으로 포위된 상황에 비유하기도 한다)를 입은 청년들이 백주대낮에 반대파에 대한 테러를 자행하고 그것을 지켜보는 경찰들은 멀뚱하게 쳐다보고만 있었다는 증언이 낯설지 않게 다가온다. 어쩌면 그 당시만 하더라도, 베를린 시민들은 나치가 앞으로 저지르게 될 홀로코스트나 2차세계대전으로 독일이 입게 될 참화 그리고 뒤이은 분단에 대해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크리스 아이셔우드가 이방인 윌리엄 브래드쇼의 시선을 통해 베를린의 사회상을 들려주었다면, 베를린 통신원 신분의 헬렌 프랫은 보다 적극적인 목소리로 범죄에 가까운 나치의 실상을 서방세계에 전파했다. 대다수 온건한 독일 시민들은 사회주의 세력이 점증하는 나치의 부상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냉온탕을 오가는 선거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는 장면이 눈길을 끈다.

 

이방인으로 베를린에서 지내면서, 유창한 독일어 구사 능력 덕분에 각양각층의 사람들을 만난 체험은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베를린 이야기> 연작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이십대 청년의 가난, 정치적 증오 그리고 절망으로 가득했던 시절에 대한 진술은 그렇게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독자에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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