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평점 :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이어 여성 대통령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언론에서 호들갑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빌 클린턴의 퍼스트레이디이자, 전 미국무부장관이었던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다. 필립 로스의 <죽어가는 짐승> 리뷰에 앞서 웬 미국 대통령 타령이냐고? 전대미문의 지퍼게이트가 전 미국 나아가 전세계 토픽이 되던 시절을 바로 이 소설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 어쩌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여피 출신 교수 데이비드 케페시와 그의 제자 콘수엘라 카스티요의 ‘부적절한 관계’가 묘하게 지퍼게이트의 주인공들의 이야기와 겹치기 때문이다.
소설 <죽어가는 짐승>은 화자 데이비드 케페시-누가 봐도 필립 로스의 페르소나라고 할만하다-가 8년 전에 자기의 연애상대였던 애제자 콘수엘라 카스티요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케페시는 학기 중에는 절대 부적절한 행동을 삼가고-지도교수와의 면담 시간에도 항상 문을 열어 놓는 풍습이 미국 대학에는 있더라- 오로지 학기가 다 끝난 뒤에 사적인 파티를 통해 본격적인 사냥에 나선다. 이번에 그의 타깃이 된 콘수엘라도 벨라스케스의 그림과 피아노 연주로 유혹을 시작한다. 지금은 일흔살이 됐지만, 그 시절에도 이미 60세를 넘긴 나이였던 케페시는 24세의 나이로 인생에서 최고 절정기에 달한 쿠바계 미인 콘수엘라의 엉덩짝과 젖가슴을 탐했다. 그런데 이 노교수의 부적절한 섹스 행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1956년 아내와 이혼한 이래, 줄곧 자신이 가르치는 여학생들과 사랑놀음을 계속해왔다.
뉴저지에서 걸출한 미학자이자 교수로 라디오 방송에도 출연하는 케페시는 자신이 가진 예술에 대한 권위를 이용해서 멈출 수 성적 충동과 일탈을 지속해왔다. 이제 42세가 된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은 가정을 파괴한 주범인 아버지를 비난한다. 그리고 자신은 오로지 도덕적 자격을 갖춘 여자를 상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시달린다. 삶의 아이러니는 그런 케페시의 아들 케니도 간통을 저지르고 있다는 점이다. 비난하면서 역시 아버지가 물려준 삶의 궤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삶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걸까. 자신의 역할이 어쩌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 카라마조프 같다는 진술이 그런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서술에 대한 이야기가 뒤죽박죽이 되었다. 케페시와 케니의 갈등 문제는 소설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이야기인데 말이다. 젊디젊은 콘수엘라의 완벽한 여체를 소유하고 싶다는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에 사로잡힌 노교수는 필연적 질투심과 사투를 벌인다. 가끔씩 벌어지는 일탈 외에는 삶의 완벽한 평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던 케페시의 삶은 가히 팜므 파탈이라고 할 수 있는 콘수엘라의 등장으로 엉망진창이 된다. 아직 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케페시는 자신이 콘수엘라가 본격적인 연애로 가는 길에 일별한 빨간 신호등 정도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본능적 충동을 억제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말했던 것처럼, 자기파괴적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나마 자신을 제어해 주던 친구 조지 오헌이 살아 있을 적에는 다행이었지만, 다섯달 전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마저도 요원해졌다. 바로 그 순간, 콘수엘라로부터 기적적으로 연락이 온다.
8년 전 콘수엘라는 만났을 적에도 케페시는 또다른 연애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상대는 40대의 캐럴린 라이언스, 그녀 역시 대학시절 케페시의 상대였다. 필립 로스는 자유주의와 평등 그리고 성해방의 물결이 넘실대던 1960년대를 그리워하는 듯한 서술을 전개한다. 그 시대를 살아 보지 않았으니, 알 도리가 있나. 하긴 그 시대를 비교해 보기 위해서는 그 전시대는 또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1930년대에 태어난 데이비드 케페시가 아니라면 그런 비교는 불가능할 것이다. 오로지 소설 속 화자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필립 로스이기에 가능한 설정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에 나오는 대로, 쾌락과 평정의 자유로운 결합이야말로 그가 진정으로 추구하는 삶의 본질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다루는 케페시의 콘수엘라에 대한 강박과 에로티시즘에 대한 서술은 근래 읽어본 책 중에 최고라도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아니 이렇게 야하면서도 품격이 있을 수가 있나 그래. 거장다운 실력이 느껴지는 서사가 압권이었다. 예술을 숭배하는 젊은 여성에게 예술비평의 고수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매혹적이겠는가. 미술, 음악 그리고 문학이라는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위안과 쾌락이 얼마나 달콤할 수 있는지 케페시/필립 로스는 도발적 실천을 통해 독자에게 전달한다. 소설은 케페시 교수의 콘수엘라 유혹이라는 행동에서, 점점 더 화자 내부의 침잠하는 번뇌와 갈등하는 욕망에 대한 이성적 통제를 가능케 하는 사유로 전이한다. 개인적으로 <죽어가는 짐승>을 읽으면서 필립 로스가 독자에게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케페시가 과연 부도덕한 인물이냐고 도발적으로 묻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존재와 본질의 문제가 아닌가.
지난달 독서모임에 이 책을 들고 가서 최근에 읽은 최고로 야한 책이고, <네메시스>에 비해 너무 재밌었노라고 소감을 피력했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니 처음의 생각과 조금 달라졌다. 이래서 책을 다 읽어야 하나. 필립 로스의 열혈팬이 아니라고 하면서 그의 모든 작품을 읽고 중이다.